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64)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64)화(64/326)
민 상궁이 지내는 초가집 안으로 들어서니 민 상궁은 궁벽한 살림이 민망한 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 모습을 보니 나도 좀 미안했고.
사실 나도 내 생모를 모시던 사람들이니 내가 데려올까 하는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이미 궁녀들이 많아서 괜히 더 늘리기는 좀 그랬지.’
부리는 사람이 많다는 건 그 사람의 권위를 나타내기도 해서 궁 안에서 지내는 몇 안 되는 왕족 중 하나인 나에게 배속된 궁녀는 적지 않은 편이었다.
게다가 이미 이쪽 체계가 잡혀 있는 상태에서 괜히 사람을 새로 들이면 역시 다른 사람들이 힘들 것 같아 그만뒀다.
생각시라면 모를까 엇비슷하거나 더 높은 서열이 새로 들어오면 원래 있던 사람이 고달파지는 법이었다.
지금 내 처소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건 가이와 송비였지만 두 사람은 아직 상궁이 아니었기에 민 상궁이 들어오면 굴러들어 온 돌에 의해 아랫사람이 되는 셈이었다.
사실 나에게도 유모상궁과 보모상궁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어린 시절부터 사건·사고가 많다 보니 심각한 인간 불신 증세를 보여 사람을 새로 붙이는 걸 꺼려 한 탓에 나를 모시는 상궁이 부재한 상태였다.
덕분에 두 사람이 실질적으로 상궁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원래는 내가 옹주 책봉을 받으며 상궁이 새로 배속되었어야 했는데 내가 사경을 헤매고 있기도 했고, 깨어나고도 한동안은 여전히 병약해서 다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생모를 잃고, 독까지 먹고, 병약해져 있는 아이에게 괜히 낯선 사람을 배치해서 좋을 게 없겠다 싶어 대충 넘어간 것 같았다.
그 이후로도 내가 측근으로 새로 사람을 들이는 건 내키지 않아 하니 다들 존중해 주었다.
다른 옹주나 공주가 있었다면 말이 나왔을지도 모르지만 나 하나뿐이라 그리 문제 될 것도 없었고.
가이와 송비는 덕분에 승진이 빠른 편이긴 한데 다른 궁녀들과의 형평성 문제도 있고 해서 내가 하가할 때에 맞춰 상궁으로 올려 주겠다고 중전이 약속한 바가 있었다.
‘내가 하가를 늦게 할수록 두 사람의 승진도 늦어지긴 하겠지만.’
좀 미안하군.
궁녀들 중에서도 지밀은 비교적 소득이 높은 편이고 재테크를 하는 상궁들도 종종 있다고 들었지만 숙의를 모시던 민 상궁은 갑작스럽게 너무 일찍 은퇴한 셈이라 따로 집을 마련하지 못했다고 들었다.
덕분에 나는 민 상궁을 만나기 위해 은퇴한 궁녀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일부러 찾아와야 했다. 절에 들어가는 궁녀도 많다던데 불교 신자가 아니라 그런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는 몰랐다.
나는 적당히 근황 토크를 하고 슬슬 본론에 들어갔다.
“사람이 필요해서 찾아온 거니 너무 어려워할 거 없네.”
“소인이 필요하시다니 어인 말씀이신지 모르겠사옵니다.”
“아마 민 상궁이라면 어느 정도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네만……. 궁에서 하는 일은 아니지만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네. 물론 위험한 일은 아니지만, 싫다면 거절해도 괜찮고.”
내 말에 민 상궁도 신중히 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직 잘 모르겠사옵니다. 혹 옹주 자가께서 얼마 전 걸인 아이들을 위해 만드셨다는 거처에 관련된 일을 이르시는 것이옵나이까.”
음. 소문도 들었나 보네. 역시 지밀 출신답게 눈치가 빠르다.
“맞아. 그냥 먹여 주고 재워 주면 그걸로 끝이지 않은가. 난 제대로 된 교육을 시키고 싶거든.”
“하오나 옹주 자가. 그들은 비천한 신분이며 성정도 비루하기 짝이 없는 아이들이 아니옵나이까.”
“흐음. 확실히 지밀은 신분이 좋은 편이라고들 하지만, 궁녀들도 관비 출신이 많지 않은가? 하지만 다들 궁에서 문제없이 일하고 있는 건 그들이 어릴 적부터 궁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지. 아니 그러한가?”
“그것은…….”
민 상궁이 애매한 태도를 보이자 나는 조금 세게 나가 보기로 했다.
“아니면 민 상궁은 혹시 윤 숙의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아, 아니옵니다. 옹주 자가. 소인이 어찌 감히 그런 망령된 생각을 품었겠사옵니까.”
민 상궁은 화들짝 놀라 부정했다.
내 생모였던 윤 숙의는 생과방 출신이었다.
‘노동이 고된 부서들은 신분이 그리 좋지 않다고 들었지.’
마찬가지로 생과방 출신인 송비는 낙하산으로 지밀에 배속된 탓에 배울 것이 많아 고생한 모양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주변의 비아냥거림도 심했을 거 같지만 내가 왕의 총애를 받는 편이니 괜찮았으려나?
그러고 보니 왠지 최근에는 베이킹 반죽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지밀 소속 궁녀들은 다른 곳보다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아깝지 않은가? 언제 궁에서 다시 불러 줄지 모르는데 이곳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까운 일이지.”
“…….”
“민 상궁이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생각해 봐 주게. 아, 물론 무급으로 사람을 부리려는 건 아닐세.”
“!”
그 순간 민 상궁의 눈이 빛났다.
아니. 설마 내가 무급으로 부려 먹을 줄 알았던 거야?
하긴, 궁에도 무급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지…….
높으신 분들은 아랫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일하는 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고.
나는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이건 민 상궁에게만 권하는 건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나는 주변에 있는 익숙한 얼굴의 숙의 처소 나인들을 바라보았다.
대표로 민 상궁에게 말하는 형식이 되긴 했지만 지금 우리 말을 듣고 있는 나인들에게도 같은 제안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아마 그들은 젊으니 더욱 새로운 일에 목말라 있을지도 몰랐다.
지밀 궁녀쯤 되면 꽤 고급 인력인데 이들을 걸인 아이들 교육과 보육에 쓴다는 게 좀 아깝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글쎄, 가만히 놔두면 정말 썩히게 되는걸.
“아마 궁에서 생각시들 가르치는 것보다는 훨씬 고생스러울 테고, 생각보다 해야 할 잡일도 많겠지.”
“옹주 자가.”
“하지만 역시 민 상궁이 있어 주면 내가 마음이 놓일 거야. 사람을 가르치고 단속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거든. 알겠지만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고.”
다만 아마 거처는 그곳으로 옮겨야 할 거다. 내가 꽤 넓은 부지를 구해 놔서 큰 문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보다는 살기 좋지 않을까.’
나는 아직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명백하게 흔들리고 있는 민 상궁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주며 속삭였다.
“그리고 사람이 많은 곳이니 아까같이 못된 놈들이 함부로 굴지 못할 테고.”
“!”
나는 숙의 처소 나인들을 포함해 정치적으로 문제가 없을 만한, 나름 검증된 궁녀들에게만 넌지시 새로운 일자리에 대해 찔러 주고 조용히 그곳을 떠났다. 누가 어디 소속이었는지 궁녀들끼리 피차 훤히 아는지라 그런 점은 편했다.
돌아오는 길에 가이가 물었다.
“민 상궁 마마님이 옹주 자가의 뜻을 따를까요?”
“안 따르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아마 할 거야.”
나는 아까 본 장면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들이 진 빚을 대신 갚아 주느라 울면서 휴학하고 알바를 뛰는 선배나 친구들을 전생에도 몇 번인가 봤는데 여기서도 봐야 하다니.
한번 돈을 뜯어 가기 시작하면 그 뒤로는 계속 이어지고 나중에는 당연해진다. 그런데 혈육이라 연을 끊을 수도 없다.
주변에서는 돈 대신 갚아 줄 것도 아니면서 천륜을 저버렸다는 욕들은 어찌나 그렇게 잘하는지. 그렇게 안타까우면 돈이라도 주면서 말하지.
그나마 궁 안에 있으면 만날 일은 없으니 어느 정도 안위가 보장되었을 텐데 퇴궁해서는 아마 막막했을 테지.
‘차라리 절에 들어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지만…… 남의 개인사를 그렇게까지는 참견할 수 없긴 해도 그 편이 안전하겠는데. 강남 봉은사나, 은퇴한 궁녀들이 많이 가는 곳이 있지 않았을까. 아, 아니다. 거기까지 찾아와 행패 부렸으려나?’
조선 시대 도성 근처의 절이나 암자는 그런 곳이 많다. 숭유억불에서 살아남은 절들은 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이다. 물론 그런 절들이 딱히 조선 시대에 지내기 좋았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민 상궁이 따라오면 절에 들어간 다른 궁녀들에게도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겸사겸사 바깥 구경도 할 수 있으면 좋고.
그리고 데려온 궁녀들을 보호하고 감독하는 게 내 역할이 될 거다.
처음 걸인 아이들을 교육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오른 게 은퇴한 궁녀들이었다.
나이가 차서 나가는 궁녀들이야 모아 둔 돈도 있고 친지들이 있으면 집으로 돌아가 그럭저럭 편한 노후를 보내겠지만 피치 못하게 일찍 은퇴한 궁녀들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실업자가 되어 새로운 삶을 살아야 했다.
그렇게 밖에서 자리 잡았는데 궁에서 불러서 또 들어가기도 하고, 재수 없으면 다시 나오기도 하고. 고용불안정 무슨 일이야.
‘그렇다고 결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가정을 꾸릴 수도 없고.’
승은을 입은 궁녀들의 신세가 딱히 좋은 건 아니지만, 아이가 있는 후궁의 신세는 그래도 좀 나았다.
역사 속 조선 시대라면 절에 들어가는 경우도 많은 것 같지만 여기서는 조선 초기와 유사하게 자식에게 몸을 의탁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지금은 궁궐 안에 정업원(淨業院)이라고 왕이 승하한 후 남은 후궁들이 머무는 절이 있는데, 내가 아는 역사에서는 유생들이 그조차 못 봐주겠다고 난리를 쳐서 결국 없어졌다.
‘유생들 성격 더러워.’
어쩌다 인간들이 그렇게 극단적으로 갔을까.
숭유억불의 시작은 고려 시대 불교의 폐단으로 시작된 건데 나중에 가선 유생들인지 유학자들인지 하는 놈들의 행패도 만만찮게 심했단 말이지.
단순히 불교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이 정체되어 있으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불교를 배척하면서 이용하기는 또 알뜰하게 부려 먹지 않았나.
다행히 이쪽 세계관에서는 극단적으로 가기보다는 좀 더 유화적으로 나간 듯했다.
유학이든 성리학이든 원래 외부에서 새로운 것을 들여오면 좋은 것을 취하고 나쁜 것을 개선해야 하는 법인데 권력을 쥔 놈들이 저들 좋을 대로만 그걸 고집하니 망하는 거다.
애초에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고 하면서 왜 땅에서 산담. 재주껏 하늘에서 살든가.
성리학 원리주의자인 송시열도 여자들에게도 글을 가르쳐 학문을 배우게 해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심지어는 여사관(女史官)으로 등용하자고 했고, 북방에선 여군(女軍)를 양성하자고도 했을 정도였고.
물론 여사관은 내궁에 남자 관리는 못 들어가니 여사관에게 들어가서 기록하게 하자는 뜻이라 왕실의 사생활 침해가 너무 심해져서 왕이 칠색 팔색할 일이었고, 송시열은 병자호란 때 사람이라 총포가 사용된 때 기준의 생각일 수도 있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손자(孫子)도 궁녀들에게 군사교육을 시킨 적이 있지 않았나. 명령 안 듣는다고 총애받는 후궁을 군법으로 처형해 버려서 왕이 때려치웠던 거 같지만.
‘어라, 나 지금 뭔가 좀 좋은 생각이 난 거 같은데.’
음, 어쨌든 자세한 건 나중에 생각하고, 우선은 아이들이나 좀 만나야겠다.
듣기로는 아이들은 잘 지내고 있었고, 내가 내린 지침도 잘 지키고 있다고 했다.
‘산에서 장작이랑 나물도 구해 오고 있고.’
성원 세자의 일도 그렇고 홍 숙원이 저지른 일 때문에 왕실에서는 호랑이에 대해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편이었다. 덕분에 도성과 경기도 일대에서는 주기적으로 호랑이 사냥이 이루어지고 있어 비교적 안심이었다.
동대문 밖까지 갔다가 다시 걸인 아이들의 거처로 가는 동안 생각보다 시간이 흘렀기 때문인가 조금 출출해진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차피 이런 건 가장 높은 사람이 먼저 말해야 했다.
“슬슬 배도 고프니 뭐라도 좀 먹고 갈까?”
“그리하시지요.”
내 말에 가이도 성 겸사복도 이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과는 다른 곳이었으나 이번에도 제법 규모가 있어 보이는 주막을 골라 들어섰다.
궁 안에서는 할 수 없는 사람 구경을 위해서랄까.
‘보부상 같은 사람도 있고 의외로 서리나 하급 관리 같은 사람도 있네.’
하긴 이런 데서 소문이 퍼지는 거지.
보통은 아랫동네 누구누구가 바람이 났다느니, 어느 집에서 재산 싸움이 있었다느니 하는 얘기였는데 당연히 듣고 있으면 흥미진진했다.
‘라디오 사연 듣는 기분인데.’
물론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당사자의 프라이버시는 전혀 존중되지 않고 있었지만.
“저 아저씨는 아는 것도 많네.”
“아, 아기씨. 저런 저속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시면 아니 됩니다.”
한창 사랑과 전쟁에나 나올 법한 막장 드라마를 청취하고 있으니 가이만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음, 하긴 나는 지금…… 아직 여덟 살이었지.
나는 가이의 정신 건강을 위해 못 들은 척하고 눈앞의 음식에 집중했다. 이 집 국밥 잘하네.
“정말인가?!”
“그거 사실이야?”
“그렇다니까!”
옆에서 또 새로운 뉴스가 들어왔는지 요란스러워진 걸 보고 곁눈질하자 가이가 작게 한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속사정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늘 조용한 궐 안에서만 살다 번잡한 곳으로 나오니 정신이 없을 만도 했다.
“아기씨는 소문에 관심도 많으십니다.”
“집에서는 저런 다채로운 소식을 들을 수 없는걸.”
물론 어느 대감댁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더라 하는 소문은 그럭저럭 들려오지만.
자극적인 소재는 아무래도 궁녀들의 양심에 따라 검열되어 내 귀에 들어온다.
“사약(賜藥)이라니!”
하지만 방금 들려온 뜻밖의 단어에는 나도, 가이도, 성 겸사복도 동시에 고개가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