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70)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70)화(70/326)
이번에 시영원에 들어온 노비들 중에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직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어린 아가들도 있었고, 조금 머리가 굵어 세상 돌아가는 걸 대충 파악한 아이들도 있었다.
지금이야 기가 죽어 있을 테니 당장은 조용하겠지만, 원래 양반이었던 아이들과 거리에서 살던 아이들이었다. 안 그래도 애들은 잘 싸우는데 성장 환경이 다른 아이들이니 같은 공간에서 지내다 보면 싸우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민 상궁과도 했었고.
그런데 이건 예상 못 했다.
“아니, 어찌 주인 있는 노비를 이리 핍박하십니까?”
“뭐? 이놈들이 지금 어디서 감히 양반에게 대드는 것이냐?”
“아무리 양반 나으리가 대단하셔도 죄 없는 양민을 핍박하실 수는 없습죠.”
“맞아요!”
장작을 끌어안고 움찔움찔 떨며 몸을 움츠리고 있는 남자아이 주변을 오늘 내가 이름을 지어 준 시영원 아이들이 감싸듯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적당히 대갓집 도련님 같은 차림새의 남자아이가 여럿 있었고.
“옹주 자가님께서 괴롭히는 사람이 있거든 말씀하시라고 하셨거든요? 우리는 양인이니까 양반님이라도 우리를 함부로 대하시면 안 되신다고 하셨거든요?”
“게다가 이 아이는 무려! 옹주 자가의! 노비인데! 모르십니까? 어찌 옹주 자가의 노비를 함부로 상하게 하려는 것입니까? 혹 옹주 자가께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것이 아닙니까?”
“뭐, 그게 무슨 망발이냐!”
안 그래도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우다다 말을 쏟아 내니 기세가 한풀 꺾였던 도령이 옹주 자가라는 말에는 움찔 몸이 굳는 것이 보였다.
‘아이들이 그새 호가호위(狐假虎威)를 익혔구나…….’
뭐 나쁜 일에 쓰는 것도 아니고 저런 방어적 이유라면 괜찮겠지.
게다가 그간의 교육이 효과를 본 것인지 예전에 비해 말하는 것이 능숙해져 있어서 솔직히 조금 감동했다.
물론 아직 공부한 기간이 짧아서 말을 좀 이상하게 하고 있는 아이도 있었지만 어설픈 존대가 반말보단 나을 테니 저 정도면 무난했다.
“내 저 아이와 교분이 있는 사이라 인사를 하려 했을 뿐인데 어찌 이리 소란들인 것이냐.”
“이 아이 얼굴을 때리셨지 않습니까. 소인이 견문이 짧아서 그런지 그러한 인사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습니다.”
“맞아. 찰싹찰싹 찰지게 때렸어.”
“넌 좀 가만있어.”
꼬맹이…… 아영이가 옆에서 촐싹거리다 언니·오빠들에게 붙잡혀 뒤로 끌려갔다.
“이리 대하신다면 소인들도 옹주 자가께 노비들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을 올릴 수밖에 없사옵니다.”
“이것들이 감히 옹주 자가의 위세를 믿고 양반을 능멸하려 하는구나!”
“저 구중궁궐에 계신 옹주 자가께서 너희 같은 천것들을 돌봐 주실 거라 믿는 것이냐!”
구중궁궐 말고 지금 바로 여기 있긴 한데.
상황이 안 좋아지면 옆의 성 겸사복이나 가이를 보내서 말려야겠다, 하고 있는데 잠깐 눈을 뗀 사이 언니·오빠들 손에서 탈출한 아영이가 어느새 다시 앞으로 나와 폴짝거리고 있었다.
“당연하지!”
“갓난…… 아영아. 존댓말을 써야지.”
트집 잡힐까 봐 다른 아이들이 붙잡으려고 손을 뻗자 이리저리 도망 다니며 외쳤다.
“옹주님은 좋은 분이랬어!”
아영이가 상황 파악 못 하고 까르르 웃으며 끌려가는데 어린아이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맞아. 옹주 자가께선 자비롭고 관대한 분이시라 아이들이 굶으면 안 된다고 밥도 주셨어!”
“우리 겨울에는 추울 거라고 옷 해 입으라고 돈도 주셨어!”
“글 가르쳐 주고 억울하면 편지도 쓰라고 했어!”
아이들의 말에 실랑이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그냥 적당히 적선이나 베푸는 줄 알았는데.”
“걸인 아이들을 데려다 먹이고 입히는 것도 모자라 글까지 가르치시다니.”
“궁에서 일하는 친구가 그러는데 원래 궁인들에게도 그렇게 잘해 주시는 분이시라네.”
“총명하고 세심해서 웃전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계시다며.”
들키지 않고 적당한 거리에서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얼굴을 가리고 신음을 흘렸다.
“끄응.”
“아기씨. 왜 부끄러워하십니까.”
성 겸사복이 농을 걸기에 째려봐 줬더니 낄낄 웃는다.
“노비라고, 걸인이라고 양반한테 부당하게 맞는 건 옳지 않댔어!”
“맞아!”
아이들의 목소리가 우렁차다.
“옹주 자가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니.”
“우리 같은 사람들을 사람 취급도 안 하는 양반님네들이 대부분인데 역시 왕족은 뭐가 달라도 다른가 봐.”
거기에 비례해 모여드는 사람들도 늘어나며 이상하게 나에 대한 얘기로 다들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음…….’
그렇게 나의 평판은 돌이킬 수 없이 좋아지고 있었다.
“우리가 언제 너희들을 괴롭혔다는 것이냐. 흥. 역시 천것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구나. 가자.”
덕분인지 아직 어린 도련님들도 어색한 목소리로 분위기를 수습하며 물러났다.
“우리도 그만 가 보자.”
“예, 아기씨.”
무슨 일이라도 나는 거 아닌가 싶어 지켜보고 있었지만 시비를 걸던 아이들이 스스로 물러났으니 더 이상 악화되지는 않을 거 같고. 시영원까지 와서 행패를 부리면 정말 내 귀에 들어올 것이 뻔하니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이러는 걸 보니 잘 지낼까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나.’
설마 아이들이 양반에게 맞는 노비 아이를 감쌀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다들 잘 돌아가나 지켜보는데 아이들 중 하나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당황한 듯 아이들을 먼저 돌려보내고 나를 향해 달려왔다.
내가 유일하게 아직까지 이름을 모르는 꼬마 대장이었다.
“아, 저기! 잠시만……요.”
“무슨 일이냐?”
“혹시…… 방금 우리, 저희, 아니 소인들이 옹주 자가께 누가 되는 언동을 한 것은 아닙니까?”
방금 전까지 양반 도령들 상대로 잘만 말해 놓고 정작 내 앞에서는 어쩔 줄 몰라 눈동자를 굴린다.
이 태도는 혹시,
‘음. 내가 옹주라는 거 알아챘나?’
아까 노비들이 대하는 거나, 민 상궁의 태도를 보고 눈치챘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 내 표정을 읽은 듯 아이가 확신에 찬 얼굴로 소리죽여 물었다.
“옹주 자가, 시지요?”
“으음.”
그렇게 다이렉트로 물어보니 그냥 웃을 수밖에.
“신경 쓰지 마. 정말 내가 한 말이잖아?”
저 아이들은 아마 그저 ‘아기씨’가 한 말과 ‘옹주 자가’가 한 말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그리고 밖에서 그렇게 부르면 곤란하니까 그냥 아기씨나 아가씨라고 불러.”
“……네. 그, 아, 아기씨.”
“응.”
“저, 저도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되…… 됩니까?”
“뭘?”
“이름이요.”
이 아이도 이름을 받고 싶었던 걸까. 그럼 아까 진작 말하지.
“아, 아기씨의 이름……을 물어봐도 됩니까?”
“나?”
이건. 신선한걸?
뒤에서 가이가 도끼눈을 뜨고 있는 것 같지만.
아이가 아직 함자(銜字)니 성함(姓銜)이니 하는 말을 모르는 정도는 관대하게 넘어가 줬으면 좋겠는데.
“시아.”
“시아……요?”
“응. 그래. 그리고 수영 옹주라고도 불리지.”
“??”
아이에게 작호를 설명하는 건 내 역할이 아니겠지.
나중에 민 상궁이 가르칠 거 같긴 하지만.
똑똑한 아이는 내가 가르쳐 준 이름과 작호를 곱씹다가 뭔가 떠오른 것이 있는 듯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럼 혹시 시영원이란 명칭은…….”
“하하. 아마 내 이름과 작호에서 한 글자씩 딴 거겠지.”
“그럼, 제 이름에도 한 글자 넣어주시면 안 됩니까?”
“나랑 비슷하게?”
“……예.”
“좋아. 그럼……. 슬기로울 지(智)자를 써서 지아라고 하자. ‘아’ 자는 옹주 자가와 똑같은 한자로 해달라고 하고. 돌아가서 나인들에게 말하면 그렇게 써 줄 거야,”
“지아.”
내가 지어 준 이름을 따라 하는 아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기씨.”
“괜찮아. 똑똑한 애야.”
감사하다고 꾸벅 인사를 하고 시영원으로 돌아가는 지아에게 손을 흔들어 주는 나에게 가이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거기 노비들도 눈치채지 않았겠어? 가이와 민 상궁이 나에게 너무 깍듯하다고.”
“귀하신 분이 이런 곳에 계신다는 것이 알려져 좋을 것이 없습니다.”
“으음.”
하긴 왕실의 위엄이 깎인다고 싫어하려나.
“게다가 걸인들도 모자라 노비들에게까지 글을 가르치는 것은 곧 소문이 날 것이옵니다.”
“시영원의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데 원래 노비였던 사람들만 글을 모르면 소외감 느껴지잖아.”
직업적성 분류할 때는 딱히 눈에 띄지 않았지만 주인이 역적으로 처형당한 집안 노비들도 있었다. 그들은 아마 대부분 글을 모를 거다.
“게다가 새삼스럽지만, 그들에게 글을 가르쳐서 어찌하실 생각이시옵니까. 양인 사내라면 과거를 보든 역관이 되든 해 보겠으나 대부분 여인과 노비들이 아니옵니까.”
“일단 글을 알아 두면 사는 게 편해지잖아. 사기당할 위험성도 조금은 낮아질 테고. 음, 글을 배우는 것만으로는 효과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안 배우는 것보다야 낫겠지?”
어느 동네나 사기꾼은 교묘하니까 장담할 수가 없네.
“게다가 아는 게 많아지면 아무래도 생각의 폭이 넓어지기도 하고…….”
물론 똑똑하면 똑똑할수록 그만큼 신분의 벽도 성별의 벽도 느끼겠지만.
역시 생각할수록 답답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쓸모야 뭐, 없으면 만들어 봐야지.”
“네?”
“관직이야 궁녀들을 제외한 여인들이 더 들어올 곳이 없지만, 그 외에 문자를 아는 여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 것 같아?”
“……의녀가 되거나, 필사를 하거나, 상단에서 일을 하는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기녀를 제외한 가이의 대답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음. 더 찾으면 또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내 생각도 그래.”
좀 더 확대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솔직히 이게 내 맘대로 될지 모르겠고.
‘저 아이들 중에서도 좀 더 야심……이라고 하면 이상한가? 아무튼 제 능력을 발휘하고 싶어 할 아이들은 아직 적지 않을까.’
당연히 안 될 거라는 생각을 떨쳐 내게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하고 싶지 않은데 강요하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먹고사는 데 그런 거 일일이 따질 정도로 처지가 좋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지만.
뭔가 잡힐 듯 말 듯 한 생각을 이어가며 나는 걸음을 옮겼다.
***
“아까 돌아오면서 하던 이야기 말인데.”
“예. 옹주 자가.”
“일단 돈을 좀 벌어야 할 거 같아.”
“예?”
궁으로 다시 몰래 돌아와 외출 증거를 감추고 내 이부자리를 봐주던 가이에게, 나는 양심 없는 말을 던졌다.
총명하고 눈치가 빠르다고 웃전들에게 칭찬을 듣고 다니는 가이에게도 내 말이 무슨 맥락인지 알아채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돈을 버신다니 어인 말씀이신지요.”
“시영원의 운영을 장기적으로 생각하면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땅에서 얻는 소득에만 기대는 건 조금 어려울 거 같거든.”
“그렇사옵니까.”
“응. 날이 추워지면 지금 안 들어오고 거리에서 버티고 있는 사람도 결국 들어올 수밖에 없을 거야.”
안 그래도 아이들이 잘 먹고 잘 입고 돌아다니는 것을 본 옛 동료(?)들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못 이기는 척 들어오는 경우가 지금도 제법 있다고 들었다. 아마 겨울이 되면 얼어 죽기 전에 들어오거나, 얼어 죽은 사람을 보고 들어오거나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물론 활인서(活人署:병자와 빈민구휼을 위한 기관)가 있다지만 그곳에는 이미 사람이 많았고, 시영원의 환경이 더 좋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재물이 더 필요할 거란 말씀은 지당하오나 어찌 돈을 벌어야 하겠사옵니까?”
“음. 일단 자수나 바느질 실력이 좋은 노비들은 그쪽으로 돌려서 고정적인 수익을 내도록 할 거야. 아마 아이들 중에서 손재주가 있는 아이들은 일찍 금전적으로 독립이 가능하겠지.”
이 시대에 자수, 삯바느질, 빨래 등은 여인들이 가계를 꾸려 가는 주요 일자리였다.
‘평생 책만 파는 조선 시대 공시생들을 여자들이 바느질로 먹여 살리지.’
그러니 이 시대에 양반 남성들은 혼인이 필수일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돈이 없고, 본인이 경제 활동을 하지 않고 책만 보고 있어도 부인이 여인의 도리대로 알아서 돈을 벌어 가계를 꾸리고, 집안일을 돌보고, 당연히 아이도 낳고 키우고, 시부모에게 효도도 해 주니까.
‘여자들은 정말 본인 인생이 없는 셈이지.’
그나마 그렇게 해서 남편이나 자식이 입신양명해 부인의 덕을 알아주면 그나마 다행인데.
과거 합격자가 어디 그렇게 많겠는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혹은 기껏 남편이 과거 급제했는데 뒷바라지해 주던 부인이 일찍 세상을 뜨기도 했다.
그리고 새 장가를 든 남편은 어린 새 부인을 보며 죽은 부인이 더 현명하고 살림을 잘했다고 한탄한다.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릴 한담. 양심이 없나. 경력직(과부)은 안 뽑을 거면서 경력직 같이 일 잘하는 신입(처녀)을 원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않겠사옵니까.”
“응. 맞아. 그래서 일단은 내가 가진 재물을 자본으로 돈을 좀 불려 볼까 하고.”
“돈을 불린다니 혹 생각해 두신 방도라도 있으신지요.”
나는 조금 뜸 들이다 조용히 답했다.
“음. 사재기?”
“예?”
오늘은 드물게도 두 번이나 가이의 멍청한 표정을 보는구나.
“사재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