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71)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71)화(71/326)
사재기.
혹은 매점매석(買占賣惜).
특정 물건을 대량, 혹은 독점 구매해 두고 수요가 폭등해 값이 올랐을 때 매각하는 행위를 말한다.
‘시장을 교란하는 나쁜 짓이지.’
그리고 상공업을 천시한 덕분에 경제 발달이 더뎌 시장 규모가 작은 조선에서는 꽤 파급력이 있는 행위였다.
그리고 그 말인즉.
손쉽게 큰돈을 버는 수단이기도 했다.
“옹주 자가. 소인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방금 ‘사재기’라 말씀하신 것이 맞사옵니까?”
“응.”
“그런, 말은 대체 어디에서 배우셨사옵니까.”
“지난번에 주막에서 들었는데. 사재기로 큰돈을 번 부자가 있다고.”
“!”
이건 사실이다.
여기 경제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는데 덕분에 떠올랐다.
대한민국 수험생들의 필독서인 허생전.
‘허생이 매점매석한 게 제사상에 올리는 과일과 양반들이 주로 소비하는 말총이었지. 일반 백성들의 생활에는 가능한 한 타격이 없는 사치품으로.’
매점매석 같은 행위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사치품에 한정한다면 별로 양심에도 안 걸리는 방법이었다.
박지원 선생님의 저서, 제가 검증해 보겠습니다.
근데 사재기는 나쁜 거랍니다. 여러분.
‘여기 아직 체계가 엉망이네. 사재기도 제대로 안 막고.’
역시 조선 후기쯤이랑 비슷한 수준인가.
조선 시대에 비상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 아닌데 부자가 되는 방법은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1. 중국이나 일본과 중개 무역을 한다.
2. 매점매석을 한다.
중개 무역은 주로 역관(譯官)이거나, 역관에게 줄을 댄 사람이 가능하다.
허생전에서 허생에게 돈을 빌려주는 한양 최고 거부 변 씨도 실제 그 시대 역관(*변승업)을 모델로 했다던가.
물론 그런 재주가 없다면 목숨을 걸고 국가에서 금지하는 밀무역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극에도 은근히 자주 나오지.’
주로 신분의 벽으로 고생하는 주인공이 인생 역전을 꿈꾸며 밀무역을 하는데, 대체로 밀거래 현장에서 관군에게 쫓기며 액션 신으로 볼거리를 제공하며 해당 인물의 절실함과 과감함, 유능함 등을 강조한다.
아무래도 사극에서 주인공 인생이 너무 쉬우면 재미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런 건 고난과 역경 정도는 이겨 낼 수 있을 정도로 유능함의 끝을 달리는 주인공이나 주인공의 멘토들이 하는 거고.
본디 사라졌어야 할 엑스트라의 삶을 타고난 나는 그냥 쉬운 인생을 살기로 했다.
모처럼 좋은 신분을 타고났는데 왜 그런 힘든 일을 하겠는가.
유능한 부하를 시켜야지.
“옹주 자가, 소인에게 너무하시옵니다.”
“미안. 근데 가이 말고 내가 누굴 믿고 이런 일을 맡기겠어.”
“하오나 만약 실패하기라도 하면 소인이 이 큰돈을 어찌…….”
“그럼 내 잘못이니 허리띠 졸라매야지, 뭐.”
미안해하며 을 떠넘기자 가이는 한숨을 쉬면서도 싫다고는 안 했다.
그렇게 나는 내 측근이자 재산관리자이기도 한 가이에게, 거금과 함께 일에 관한 전권을 떠넘겼다. 사치 품목이라 아무래도 기본 금액이 좀 크게 들더라.
가이 말대로 너무하는 거 아니냐 싶겠지만 사실 가이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원작에서도 영빈의 신임을 얻어 측근으로 붙어 있던 가이는 영빈의 재산을 몰래 관리하고 불리는 역할을 했거든.
그리고 주인공에게 은연중에 영빈의 검은돈 흐름을 유출해 영빈과 경언군을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었지.
‘그런 검증된 능력자가 심지어 내 측근이기까지 한데 다른 사람을 찾을 이유가 있나.’
물론 그때와는 환경도 사정도 다르긴 하지만 왠지 가이는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얼마 뒤, 가이는 정말 시키는 대로 사람을 써서 돈을 불려 왔다.
물론 혼자 간 건 아니고, 성 겸사복이나 시영원에 있는 한 덩치 하는 아저씨들을 동행시켰다.
사실 사재기가 정말 소설처럼 쉽게 되려나 싶긴 했는데.
되네.
“옹주 자가의 말씀대로 말총을 독점 구매했더니 정말, 단기간에 큰돈을 벌었사옵니다.”
눈을 번뜩이는 가이를 진정시키고, 다른 품목으로 한 번 더 돈을 벌어 오는 것으로 사재기는 거기서 손을 털기로 했다.
지금 시대에도 이미 도고(都庫:매점매석으로 부를 쌓던 상인이나 상인조직)가 있는 걸 보면 다들 알아도 초기 자본금 문제나, 기존 도고들 때문에 시장 진입을 못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돈도 있고. 체탐인 출신의 경호 인력도 있으니까.
사실 권력도 좀 있고.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니 이 정도로 해 두자고.”
“예. 옹주 자가.”
사실 알아보니 사재기에 대한 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제대로 적용을 안 하는 거지. 단속을 해야 하는데 하질 않으니 법이 의미가 없었다.
‘음. 백성들에게 타격이 있을까 싶어 사치품으로 했는데 양반들에게 타격이 가면 오히려 단속을 시작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너무 과한 건 좋지 않겠다 싶어 적당히 빠졌는데 얼마 후 뜻밖에 세자에게서도 말총 값 오른 얘기가 나오더라.
“근래에 말총 값이 올라서 난리라고 하더구나.”
“많이 올랐어?”
“처음에 물건이 없어 조금 오르는 것 같더니 지금은 몇 배는 넘게 올랐다는 모양이더구나.”
우린 그렇게 과하게 안 했는데?
나는 괜히 찔려서 좀 더 캐물었다.
“물량이 줄었어?”
“풍랑 때문에 제주도에서 오는 물량이 부족한 모양이야. 그것만은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나 때문은 아니었군. 나는 내심 안도하며 말을 돌렸다.
“그래? 말총이 망건(網巾) 만드는 데 쓰는 거지?”
“그렇단다.”
“흠. 말총이 말의 꼬리잖아. 그럼 말의 꼬리를 자르는 거야?”
“글쎄, 그렇지 않겠느냐.”
의외로 말들이 자기 꼬리 잘려도 가만히 있나 보다.
“생각해 보면 망건이나 갓은…… 사치품이지.”
“사대부들의 필수품 아니더냐.”
“관자(貫子:망건에 단 작은 고리. 신분에 따라 금, 옥 등으로 만들었다.)도 사치품이고.”
“왜 갑자기 나에게 시비인 게냐.”
세자는 본인의 관자놀이에 잘 붙어 있는 옥관자를 만지작거리며 툴툴거렸다.
그거야 내가 사재기했던 것 중 하나가 관자의 재료인 옥이었으니까?
“나보고 도자기 수집한다고 뭐라고 했던 게 생각나서.”
“그야 도자기는…… 사용하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그리고 도자기 말고도 무슨 골동품도 모으고 있지 않더냐.”
“골동품이 뭐가 어때서. 중요한 거거든?”
네가 사료(史料)의 중요성을 알아? 내가 잘 보관해서 후대에 남겨 줄 거거든??
도끼눈을 뜨고 흘겨보자 세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그래. 알겠다. 어린아이가 취미가 특이하기도 하지.”
“취미가 없는 세자 저하보다는 낫지.”
“내가 왜 취미가 없느냐?”
“응. 공부가 취미인 타고난 세자 저하시지.”
“오라비를 책상물림 취급하는 게냐.”
“응응. 문무겸비한 국본(國本:나라의 근본, 세자를 뜻한다.)이시지. 풍속소설 한번 읽어 본 적 없는 무(無)재미한 사람이야.”
“너는 참 가끔 이상한 말을 쓰는구나.”
노잼인간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보니.
“아, 그런데 골동품이나 도자기들 말인데 요즘에는 모은다기보다는 내가 좋아한다고 소문났는지 선물로 들어오는걸.”
요즘에는 시영원 운영하고 사업 확장하느라 다른 데 돈 쓸 정신이 없어서 취미 생활은 좀 소홀히 하고 있었는데 자꾸 물건이 들어온다.
“근데 내가 받아도 되는 건가.”
“아직 어리니 종친들이 보내는 것은 크게 신경 쓰지 말라고 하고 싶다만…….”
세자는 나와 마찬가지로 애매한 얼굴로 말을 흐렸다.
일단은 친척 어른들이라고는 하나 1년에 얼굴 몇 번 볼까 싶은 종친들이 아직 어린 옹주의 환심을 사려는 이유야 뻔했다.
냉정한 왕과 빈틈을 보이지 않는 중전, 그런 두 사람의 자식인 만큼 다른 이에게 속내를 보이질 않는 세자. 심지어 독살 사건 이후로 다들 처소 궁인들까지 철통 방어를 하고 있으니 좀 비집고 들어갈 구석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게 어릴 때 좀 챙길 것이지. 위에 세자와 경언군이 있다고 어리고 병약한 데다 어미의 집안도 한미한 경원군에게 친근하게 대한 종친이 그리 많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아무래도 아직 어리고 좀 만만한 데다, 왕과 세자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내 환심을 사 두고 싶은 것이다. 그래야 나중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나중에 사가로 나가면 더할 거 같네.’
지금이야 종친들이나 겨우 나와 만날 수 있지만 사가는 아무나 찾아올 수 있으니까.
그리고 종친들이 갑자기 이러는 원인은 또 따로 있는데, 그동안 종친들이 가장 신경 쓰던 사람 때문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이야기도 자연히 그쪽으로 흘러갔다.
“그래. 대비마마께 드릴 연란고는 준비가 다 되었느냐.”
“응. 요새 날이 추우니까 그냥 놔둬도 금방 식더라고. 식빵 부침은 송비가 하고 있으니 이제 나가면 맞을 거 같아.”
참고로 식빵 부침은 프렌치토스트를 말하는 거다.
지금 세자는 나와 함께 대비에게 문안을 가기 위해 잠시 기다리던 중이었다.
나는 본래 한동안 대비전 출입을 금지당한 몸이었으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경언군이 사약을 받았다는 소식을 알게 된 대비마마께서 결국 앓아누웠으니까.’
의식을 잃었다는 말에 다들 큰일이 나는 것이 아닌가 싶어 걱정했으나, 다행히 대비는 오래지 않아 눈을 떴다.
당시 내가 찾아가면 역효과가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으나 손녀 된 도리로 그런 상황에서 찾아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푸딩, 아니 연란고를 준비해 세자와 함께 대비전을 찾았었다. 오랜만에 내치지 않고 안에 들인다 했더니 뜻밖에도, 대비는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울더라.
‘옹주, 이제 주상에게 남은 건 세자와 옹주뿐입니다. 주상의 곁을 지켜 주세요. 이 늙은이는 이제…….’
‘할마마마?!’
대비는 그렇게 분위기를 잡아 모두를 긴장하게 했으나, 그냥 그대로 다시 잠이 드셨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충격으로 인해 많이 쇠약해지신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 후로는 문안도 잘 받아 주셨으나 나는 괜히 자극하지 않으려고 가능한 한 세자와 동행했다.
“오오, 세자와 옹주가 오셨습니까.”
“할마마마.”
“할마마마.”
얼마 후 의식을 찾은 대비는 대화도 가능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힘겨워했기에 유동식 식사를 선호했다.
이건 좋지 않은 신호였으므로 모두 근심했다. 게다가 식성도 예전 같지 않으시고.
그런데 가끔 내가 문안 인사를 보낼 때 만들어 보냈던 음식들을 드시고 싶어 하셔서 이렇게 종종 만들어 찾아뵙고 있었다.
“할마마마. 소손(小孫)이 불민하여 한동안 할마마마를 찾지 못하였사옵니다.”
“어인 말씀이십니까. 국본이 바쁜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을요. 오늘은 옹주와 함께 오셨습니까.”
“예, 할마마마. 옹주가 할마마마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 왔사오니 꼭 드셔야 하옵니다.”
“옹주가 가져오는 음식들은 달고 부드러워 먹기가 좋습니다.”
“어의 영감도 말하지 않았사옵니까. 잘 드셔야 기력을 회복하셔서 털고 일어나실 거라고요.”
“세자…….”
“할마마마께서 드시고 싶으신 것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말씀하시옵소서. 소자가 꼭 구해다 드리겠사옵니다.”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의 조손 옆에서 나는 조용히 다른 생각을 했다.
‘구해 오는 건 네가 아니잖아.’
다 아랫사람들이지.
저렇게 자기가 하는 거 아니라고 공수표를 남발해서야 쓰겠는가.
‘물론 일국의 세자가 어디 효자 설화처럼 한겨울에 산딸기 따러 산에 들어갈 순 없지만.’
그래도 여긴 궁이라 겨울에도 신선하고 좋은 식재료를 쓰니 환자에게도 좋을 터였다.
과일류까지는 무리겠지만 겨울에도 말린 채소가 아닌 신선한 채소를 쓰는데, 그건 온실 재배를 하기 때문이다.
온실 재배는 조선 세종 때부터 있었다는데 어쩐지 역사적으로는 실전(失傳)되었다.
그나마 현대에 발견된 어느 고서(*2001년 발견된 산가요록(山家要錄))에 관련 내용이 있어 원리와 형태는 밝혀졌다고 들었지만.
좋은 기술이 실전된 건 아무래도 자연의 순리에 어긋난다며 유학자들이 좋아하지 않은 탓이 크지 않을까. 어쨌든, 여기에서는 아직 온실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론 왕실 내에서만 소비되는 형태로.
‘다른 사람들도 겨울에 신선한 채소를 먹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제철 음식이 좋다지만 한겨울에 말리거나 절인 나물, 채소만 먹고 사는 건 괴롭지 않을까.
고기를 많이 먹을 수 있는 환경도 아니고.
‘……해 볼까? 온실 재배?’
허락을 받아야 할까. 아니면 막 질러 볼까.
대비 앞이라 얌전히 눈을 깔고 있던 나는 곧 적당한 핑곗거리를 찾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