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79)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79)화(79/326)
“아니, 뭐야…….”
몰라, 무서워.
저 사람이 여기 왜 있어?
내 반응이 묘했는지 지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는 사람입니까?”
“잘 모르는 사람이야…….”
아까 이름은 들었는데. 이름이랑 얼굴 안다고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설마 여기까지 쫓아올 줄이야?’
이건 설마…….
“스토커……?”
“네?”
시대에 맞지 않는 나의 중얼거림이 입 밖으로 새어 나간 것을 깨닫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 시대에는 스토커를 뭐라고 불러야 하지? 아니, 근데 진짜 나 따라온 건 아니겠지?’
내가 어지간히도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지아가 얼른 내 앞으로 나섰다.
“이런 곳에는 볼일이 없어 보이시는 분이신데. 시영원엔 어쩐 일이시오?”
“저기 계신 아기씨께 볼일이 있어 찾아뵈었답니다.”
나는 없는데.
하지만 괜히 소란 피우는 것도 싫었으므로 술렁이는 사람들을 제 할 일 하라고 돌려보내고 지아에게 차를 내오도록 했다.
“대체 왜 이렇게 난리야.”
“하지만 엄청 이쁜 언니야!”
“매향이라잖아요. 아기씨는 매향이를 모르세요?”
어린아이들은 그냥 예쁜 사람이 와서 좋은 것 같았고, 나이가 좀 있는 애들은 매향이 누군지 아는 모양이었다.
나는 할 일이 없어 끝까지 달라붙은 아이들을 나중에 맛있는 거 가져올 테니 나가서 놀라며 겨우 떼어 내고 매향과 나란히 앉았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 고생의 원인 제공자가 자네인 것 같은데. 어떻게 여기까지 쫓아왔지?”
“주변을 수소문해서 겨우겨우 따라왔으니 너무 경계하지 마시어요. 소인은 그저 아기씨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을 뿐이옵니다.”
“거 모른다니까 그러네.”
“아직 말씀도 올리지 않았사옵니다.”
“뭐든 나는 아는 것도 없고. 대답해 줄 수 있는 것도 없어.”
내가 필사적으로 거부하자 매향이 그림같이 웃으며 물었다.
“소녀가 기생이라서 그러하십니까?”
“그랬으면 이렇게 옆에 앉히고 차를 내오는 게 아니라 내쫓았겠지?”
“…….”
내 말이 뜻밖이었는지 잠시 매향이 침묵한 사이에 마침 지아가 차를 내왔다.
“시영원은 찾아온 사람을 내치진 않으나 자네가 여기의 몸을 의탁하러 온 것은 아닐 테지.”
“그러합니다.”
“그럼 온 김에 아이들과 놀아 주기라도 하게. 다들 저리 좋아하니 그냥 떠나면 울지도 몰라.”
“예. 그리합지요, 아기씨.”
너무 순순하니 그건 그것대로 좀 불안하군.
어쨌든 나는 오늘 시영원에 찾아온 용건부터 처리해야 했다.
내가 물러나니 눈치만 보고 있던 아이들이 우르르 매향의 주변을 둘러쌌다. 까다로운 사람일까 했는데 의외로 아이들과 대화하는 모습이 능숙했다.
‘연기인 건지, 성격인 건지 모르겠네.’
아이들 덕분에 매향과 단둘이 남지 않게 된 지아가 내게 와 속삭였다.
“아기씨는 매향이를 모르십니까?”
“누군데?”
“노래 잘하기로 유명한 기생이잖아요. 양반네들이 잔치에 매향이 부르겠다고 돈을 수레로 보내고 난리라던데.”
“그건 과장이겠지…….”
수레로 보낼 정도면 저화(楮貨:고려말 조선 초에 쓰였던 종이돈. 본래 조선 중기에 사라졌으나 여기서는 사용 중이라는 설정)로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진짜, 진짜 유명해요.”
“그래그래.”
나랑은 상관없지.
“아무튼 저 사람이 아이들과 놀아 줄 거 같으니 나는 우선은 일 얘기부터 해야겠다.”
“일 얘기요?”
“응. 지금 시영원에 있는 애들 중에 뭐 급한 일 하는 사람은 없지?”
“예.”
“그럼 일단 천자문 떼고, 중급 과정 공부 중인 애들 불러와 봐.”
나는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따가운 시선을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민 상궁에게는 미리 서면으로 전달해 두었으니 아마 이미 말해 두었을지도 모르겠네.’
일단 국가 정책이나 복잡한 이야기는 제쳐 두고 그럭저럭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불러 놓고 물었다. 노비든 걸인이든 상관없이.
“실은 의원들을 양성할까 하고 있거든. 혹시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의술에 관심 있는 사람 있을까?”
“소인들이 말씀이시옵니까?”
일하다 말고 소집되어 온 이들은 내 말에 의아해하면서도 관심을 보였다.
“시영원 내에도 물론 의원이 있으면 좋겠지만 나는 민간에도 여성 의원이 많이 필요하다고 보거든. 그러니까 배우겠다는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물론 꼭 여인들에 한정한 얘기는 아니야.”
내가 받은 노비들 중에는 아직 어린 남자아이들도 여럿 있었고, 그 아이들은 본래 양반이었는데 다른 아이들에게 성적이 뒤지는 걸 못 견뎌 하는 엄마들의 은근한 등쌀 때문인지 공부를 썩 잘했으니까.
그 아이들이야 당연히 과거 길은 막혔지만 의원으로 키울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을 듯했다.
마음이 복잡한지 웅성거리는 노비들과 달리 양인 아이들은 거침없이 질문을 던졌다.
“의원이 되는 거 어렵지 않나요?”
“당연히 어렵지. 외워야 할 것도 많고, 배워야 할 것도 많고, 시험도 여러 번 치러야 해. 하지만 사람 생명을 다루는 일인데 어려워야 맞지 않겠어?”
“…….”
무겁게 말했더니 다들 입을 다문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할 일은 아니긴 하지.
과연 의원이 되고 싶어 할까 하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아이들은 지난 몇 년간 다들 기본적으로 공부를 해 왔고, 자신이 똑똑하다는 걸 어느 정도 아는 아이들이었다.
신분적, 성별적인 차별로 자신의 능력을 썩히고 그저 나무꾼이나 일개 노비로 끝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거란 뜻이었다.
“대신 의원이 되면 앞으로 먹고살 걱정은 없지. 게다가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했는데 그걸 살릴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지? 성별과 신분을 떠나 능력만 있다면 제힘으로 명성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해.”
“저어, 하지만 소인들이 의원이 되는 것이 가능할는지요.”
아무래도 노비가 되기 이전부터 글을 배운 양반 출신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배움이 빨랐다.
하지만 그런 만큼 이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더욱 소극적인 자세였다.
물론 나도 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너희들이 의원이 된다면 옹주 자가가 세운 의원에서 일을 하는 형태가 될 거야. 그러니 너희들 신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 당연히 봉급은 챙겨 줄 거고, 나중에 자금을 모아 독립하겠다면 그건 너희들 자유야.”
“!”
옹주 타이틀이 참 쓸 만하지.
위세 높은 주인이 있으면 감히 그 노비를 핍박하지 못할 테니까.
지난 몇 년이 그 사실을 피부로 느껴 온 이들은 나, 그러니까 옹주가 자신들을 보호해 줄 거라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눈빛을 바꾸고 달려들 듯 외쳤다.
“하겠습니다! 하게 해 주세요!!”
“소인도 배우고 싶습니다!”
“저도요!”
그리고 몇몇 아이들은 분위기에 휩쓸려 손을 들었다.
‘어차피 도중에 나가떨어지는 애들이 많을 거 같으니.’
예나 지금이나, 한의학이나 양의학이나 의술은 외워야 할 것도 실습해야 할 것도 많았다.
개인적인 기준으로는 비위도 강해야 할 거 같고.
“음. 의욕들이 넘쳐서 다행이네. 일단은 기초 학력부터 다질 거야. 인성교육도.”
사실 기초는 이미 어느 정도 다져 놨다고 볼 수 있지만.
기본 커리큘럼이야 혜민서에서 의녀들 교육시키는 거 따라가면 되겠지만 제대로 교육시켜 줄 사람도 필요한데.
나는 아까 지아와 말하다 만 그 ‘의원 언니’를 떠올렸다.
“지아야. 잠깐만 이리 와 봐.”
“네?”
의술을 배우는 걸 고민하고 있는지 심각한 얼굴이던 지아를 부르자 당황한 듯 허둥지둥 다가왔다.
“전에 그 의원 아가씨 이름이 뭐였지? 허성지랬나?”
“예 맞습니다. 갑자기 그 아가씨는 왜 찾으십니까?”
“아이들을 가르칠 의원이나 의녀가 필요한데 그 사람은 어떨까 하고.”
노비나 걸인이었던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하면 코웃음 치며 무시할 사람들이 많으니 일단 가르치는 사람의 심성이 중요했다.
“음. 사실 저희도 제대로 아는 게 없는걸요.”
“너희도?”
“예.”
“시영원에도 종종 드나들었다며. 너무 아는 게 없는 거 아냐?”
“애들 아픈 거 얘기나 하지 개인적인 얘기는 별로 한 적이 없거든요.”
나와는 의외로 마주친 적이 별로 없었지만 아이들과는 친할 줄 알았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숙부와 함께 지낸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그 집이 친척 숙부 집이래요. 그 숙부가 의원인 거 같더라고요.”
“그 정도면 알 만큼 아는 거 같은데.”
“그 집 숟가락 개수 정도는 알아야 잘 안다고 할 수 있죠.”
“으음.”
그……런 건가?
‘나는 이 아이들의 적성을 알아보지 못한 게 아닐까.’
정보 수집의 적성을 알아서 뭐 할 건데 싶지만.
아무튼 이전부터 아이들을 신경 써 주던 걸 보면 좋은 사람인 건 알겠는데 말이지.
게다가 듣기로는 의술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으음. 아이들 롤모델이 되어 줄 수 있지 않을까. 가르쳐 줄 사람도 아이들에게 익숙한 사람이면 아무래도 피차 편할 테고. 인성도 믿을 만하고.’
나중에 한번 찾아가 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마당으로 나갔다.
‘아까부터 소리가 안 들린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다르네.’
마당에선 아이들의 낭랑한 목소리 사이로 군계일학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같은 노래 다른 느낌?
옆에 있던 지아도 비슷한 감상이었는지 멍하니 넋을 놓고 바라보다 민망한 듯 웃으며 어색하게 말했다.
“잘 부르네요. 확실히.”
“그러게.”
명창이라더니 다르긴 달랐다.
‘귀가 시원하네, 아주.’
하지만 지금 부르고 있는 노래가 아무래도 내가 무단 유포한 노래 같아서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시영원에는 특히 내가 무방비하게 퍼트린 노래들이 아이들 사이에 퍼져 있어서 애들이 민요나 창보다 이쪽이 익숙해진 게 아닌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그런 이유로 매향과 그다지 마주하고 싶지는 않아서 소이를 불러 다른 방향으로 빠져나가기로 했다.
적아 위에 올라탄 나를 배웅하는 지아가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런 건 아니고 좀 귀찮아서. 참, 그래서 그 의원댁 아가씨를 한번 찾아가 보려고 하는데.”
“찾아오시면 안내해 드릴게요.”
“너 공부도 해야지. 그러고 보니 의술에는 관심 없어?”
“잘 모르겠어요.”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진로 선택이 신중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 아직 선택지는 많으니까 조급해하지 말…….”
“아기씨?!”
“빨리 가자!”
나를 발견한 매향이의 목소리에 나는 소이를 보챘다.
내가 왜 그러는지 아는 소이는 얼른 내 뒷자리에 올라타 적아를 재촉했다.
“나 간다!”
“아기씨!!”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 무서웠어.’
지은 죄도 없는데 왜 이렇게 무섭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