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80)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80)화(80/326)
“왜 그렇게까지 그 여인을 피하십니까?”
내가 자꾸 피해 다니는 게 이상했는지 궁에 돌아와 다시 궁녀의 복식을 한 소이가 처소로 돌아가기 위해 내 옷매무새를 확인하며 물었다.
저작권 때문이라는 말을 할 수도 없는지라 나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으음. 눈을 너무 번뜩이며 쫓아오니 나도 모르게. 소이도 별로 맘에 안 들어 하는 것 같네.”
“그야 너무 얽히지 않으시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그런가. 어차피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아무튼 나는 소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마.”
“무엇을 말씀이시옵니까?”
갑자기 들려온 귀에 익은 목소리에 나도 소이도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언제 돌아왔는지 사업차 출장(?)을 갔던 가이가 처소 앞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와아, 다녀왔어?”
“대충 어리광으로 넘어갈 생각 마시고요. 오늘은 어딜 다녀오신 것이옵니까?”
“시영원 갔다 왔어. 아, 가이. 보러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어?”
“괜찮은 땅이 있어서 계약하고 왔사옵니다.”
“오.”
“그럼 거기도 온실을 짓는 것입니까?”
나와 가이의 대화에 소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응. 지금 온실이 있는 지역과 반대 방향에 새로 사기도 했어.”
“장사가 정말 잘되니 다행이옵니다.”
“음. 할 수 있으면 다른 지역으로 좀 넓히고 싶은데 말이지.”
“예. 겨울에도 신선한 채소를 먹고 싶은 건 누구나 마찬가지이니까요.”
“그렇지. 한양에만 사람이 사는 게 아니니까.”
판로를 확장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한양과 다른 지방은 소비 가능한 인구수의 차이가 커서 선뜻 사업을 확장하기는 어려웠다. 특히 비싼 값에 채소를 사고 싶어 하는 부유층이 있고 기본적인 인구가 많은 지역을 찾아야 하니까.
채소는 신선함이 생명이니 당연히 그 주변 땅에서 농사를 지어야 하므로 고려해야 할 일이 많았다.
‘현대라면 도로도 깔려 있고 냉동 시설도 있으니까 멀어도 상관없지만 여기선 사실 생산한 채소를 운송하기엔 산 하나 넘는 것도 힘드니까…….’
게다가 지역에 따라선 산길에서 호랑이도 나온다.
비교적 경제가 활성화되어 있는 도성 근처만이라도 좀 도로를 정비하면 좋을 텐데 꼭 이런저런 이유로 반대를 하니.
어쨌든 가이는 적성을 살려 사업을 키우고 있었다. 무리하는 게 아닌가 걱정했지만 본인도 꽤 즐거워 보이니 다행이었다.
‘시영원에 있는 전직 체탐인들과 함께 다니니 신변 걱정은 안 해도 되고.’
아무리 생각해도 성 겸사복은 넝쿨째 굴러들어 온 복덩어리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도 은퇴한 체탐인들이 종종 시영원에 합류한다나.
아이들이 많은 환경이라 피폐해졌던 심신을 달래기에 좋다고 주장하는데 정말 좋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시영원 아이들 중에서도 재능이 있는 아이들에게는 무예를 가르쳐 주고 있다고.
그 아이들도 나중에 호위로 고용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방으로 돌아와 가이에게서 사업 현황을 들으며 히죽히죽 웃었다.
“이대로면 가이 곧 부자되겠는데.”
“소인이 아니라 옹주 자가께서 부자이시지 않사옵니까.”
“이건 가이 명의인걸 뭐. 나는 의료 사업을 해 볼까 하고.”
내 말에 가이가 빙그레 웃었다.
“아기씨께서 여의를 원하신다는 말씀은 이미 전해 들었사옵니다.”
“어, 그래?”
내가 원한다는 게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다만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가이는 어떻게 생각해?”
“소인 같은 궁녀들에게는 아무래도 의녀들에게 진맥 받는 것이 편하지요. 하지만 품계가 생긴다고 하면 지금처럼 편히 대하지는 못할 터이니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지만 옹주 자가를 진맥하는 능력 있는 여의(女醫)를 원하신다고 하시면 감히 어찌 따르지 않겠사옵니까.”
“으음.”
말은 저렇게 하지만 결론은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야 신분제 꼭대기에 위치하는 나와는 역시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궁녀들도 본인들의 신분을 더 높일 수 있다면 당연히 찬성하지 않을까.
‘내로남불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이 시대에선 쓸 수 없는 말이니 답답하군.
***
그리고 얼마 후 세자에게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관리들과 유생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다.”
“그렇습니까?”
“여의에게 품계를 주는 문제에 대해서도 네 말대로 외명부의 품계를 내린다면 뭐라 하기 어렵다는 듯하더구나.”
내외명부는 중전의 영역이었다. 외명부에서 여자 의원들에게 품계를 내리는 것이 법도에 없는 일이나 새로 만들겠다는데 어쩌겠는가.
천한 관비들에게 어찌 품계를 내리겠냐고 한다면 지금 궁 안에 있는 궁녀들을 부정하는 말이었다.
“그 외에는 의녀들이 품행이 단정하지 못한데 어찌 품계를 내리냐는 말이 나왔었지.”
“그래서 여인들 위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둘을 분리하자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 남자인 의원과 함께 일을 하는 데다 남자 환자들과 대면하고 몸에 손을 대는 것을 부정하게 보는 시선이 많으니 아예 분리시켜 분란의 여지를 없애자고 했더니 아무 말을 못 하더구나.”
대신들 흉을 보며 단 음식을 먹는 이 시간은 세자의 스트레스 해소 타임이었다.
오랜만에 둘이 맛있는 것을 먹으며 깔깔거리는 게 나쁘진 않았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그렇지.
‘사실 얘가 이렇게 동생이랑 놀 나이가 아닌데.’
세자빈이 없어도 슬슬 여자한테 관심을 보여야 할 나이인데 궁녀들에게도 전혀 관심이 없는 건 조금 걱정이었다.
인간적으로, 슬슬 첫사랑도 겪고 그래야 할 나이였다.
‘지화가 첫사랑이어서 아직 미련이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 짧은 만남이었고.’
물론 사랑에 시간이 뭐가 중요하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벌써 몇 년 전 일인데 좀 중요하지 않나?
‘괜히 구설 만드는 걸 경계하느라 여자한테 관심을 끊은 거라면 좀 불쌍하지.’
내 시선에 그런 감정이 묻어났는지 즐겁게 얘기하던 세자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왜 그러느냐?”
“아니야. 자, 빵이나 더 먹어.”
내가 식빵이란 이름을 붙이고 은근슬쩍 빵 종류의 간식들을 빵이라고 불러 버릇했더니 이제 그냥 빵이란 명칭이 반쯤 정식으로 정착해 버렸다.
무슨 뜻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겐 그냥 ‘빵빵해서 빵이야.’라고 뻔뻔하게 주장했는데 내 나이가 나이이다 보니 다들 흐뭇한 얼굴로 웃으며 믿어 줬다.
좀 찔리는데.
“여의 양성에 대해서는 대비마마의 일도 있고, 네가 얽혀 있는 일이다 보니 반대하는 사람은 있어도 그리 강경하게 나오지는 못했다. 예전에도 흔하지는 않지만 내의녀 중에 의술이 뛰어난 이가 어의들보다 신임받았던 적이 있었으니 능력이 부족하다고만 할 수는 없겠지.”
게다가 독살 미수로 자라지 않는 왕의 딸이 자신의 건강을 돌볼 이들을 제대로 된 품계가 있는 전문 인력으로, 그것도 남자는 불편하니 동성(同姓)인 여자들로 채우자고 하는데 반대하기에는 명분이 애매한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내의원에서 내 이상을 전혀 몰랐다는 사실 때문에 어의들의 능력을 의심하는 눈초리들이 제법 있다고.
물론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현실적으로 예산 때문에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지.”
“지금도 의녀 양성하고 있는 건 똑같은데.”
품계 주고 봉급 주는 게 그렇게 싫어서.
“하지만 정식 의원이 되고 10년 지나면 돈을 내고 본인과 그 자식을 면천할 수 있도록 하자고 했더니 난리가 나서 그 전까지 나온 얘기는 슬쩍 넘어갔지.”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
“여의에 대한 얘기는 제도부터 정비하고 면천은 나중에 다시 논의하기로.”
이미 의녀로 오랫동안 일해 온 이들에게까지 소급 적용할 것인가의 문제도 있었으므로 아마 이 일은 쉽게 결정이 나지는 않을 듯했다.
‘게다가 지금까지 궁녀들도 잘 면천해 주지 않았으니까.’
어차피 결혼도 못 하고 거의 평생 궁에서 지내는 처지인데 면천 좀 해 주면 어때서.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음. 예산 문제는 혜민서나 활인서 말고 아예 소액이라도 돈을 받고 치료해 주는 시설을 따로 만드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네가 의원을 만들 생각이라면서 그리 해도 괜찮겠느냐.”
“위치만 안 겹치면 괜찮지 않겠어?”
내가 뭐 그걸로 부자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아, 그리고 가르치는 비용이 문제라면 내가 학당……을 만들어서 같이 가르치는 방법도 있겠네.”
“네가 키우는 의원들과 함께 가르치겠다는 뜻이냐?”
“응. 관비들이야 원래 하던 방식을 그대로 따라가면 되겠지만 그 외의 천민들이나 양인들은 그렇게 가르칠 수 있지 않을까.”
“네 부담이 크지 않겠느냐.”
“이미 시영원에서 다 받아 주고 있는데 이제 와서?”
세자가 그건 그렇다는 얼굴을 했다.
“형편이 된다면 적더라도 돈을 받을 거고. 아니면 일이라도 하게 해야지. 그렇게 일정 기간 가르쳐 보고 어렵겠다 싶으면 포기하게 하고. 적성이 맞는 아이는 장학금을 주는 방법도 있고.”
“장학금?”
“음.”
이 동네에는 아직 없는 말이었던가.
천민들은 의술을 익힌다고 해도 제대로 의원 노릇을 하기 어려울 테니 혜민서나 내 병원에서 일을 하게 될 거다.
‘면천을 바라는 이들은 힘들어도 어떻게든 하겠지.’
면천이 힘들기는 하지만, 이미 면천을 받기 위해 군인으로 지원한 사람들도 제법 있으니 이것도 가능할지도.
“어느 쪽이든 의원으로 키우려면 시간이 걸리고. 그 사이에 명의라도 찾아서 의원으로 부려…… 모셔야지.”
“방금 진심이 나온 것 같다만.”
“잘못 들으신 겁니다. 오라버니.”
“한데 어떤 의원이 명의인지 어찌 알아내려 하느냐?”
나는 내 손목을 흔들며 히죽 웃었다.
“나를 진맥해 보라 그러면 되지 않을까?”
“……설마 직접 갈 생각이더냐?”
“글쎄, 어찌할까요.”
“아니, 어딜 돌아다니려는 것이냐. 이리…… 연약한 아이가.”
말해 놓고도 세자는 말을 잘못 꺼냈다는 듯 시선을 피하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작다고 하자니 자라지 않는 내 마음을 상하게 할 거 같고, 그런데 또 연약하다는 말은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나한테 너무 안 어울리니.
떫은 표정을 애써 지우려 하는 세자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웃었다.
“동생이 그리 걱정되면 성 겸사복이나 돌려주든가.”
“군기 잡는 실력이 일품인 유능한 교관이 먹을 것에 빠져 능력을 썩히고 있으니 참으로 아깝구나.”
그건 혹시 성윤이 사람을 잘 굴린다는 뜻일까.
“유능하긴 하지. 나도 성 겸사복에게 활쏘기를 배웠으니.”
“어린애한테 활이라니.”
“성 겸사복이 그러는데 북방 유목민족들은 7살이면 이미 말 위에서 활을 쏜대.”
“그렇게 어린아이 때부터 마상 궁술을 가르치다니…… 우리도 가르쳐야 할까?”
저기요. 두 문장의의 흐름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잠시 병사들의 조기 교육에 대한 고민에 빠진 세자는 그리 오래 앉아 있지 못하고 또 일하러 가야 했다.
‘하여간 바쁜 인생이야.’
대신에 나는 인생을 낭비해야지.
근데 나 요즘 식생활 외에는 너무 낭비 안 하고 살고 있지 않나? 낭비를 좀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