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81)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81)화(81/326)
툴툴거리면서도 세자는 오래지 않아 성 겸사복을 돌려보내 줬다.
못 나가게 한다고 내가 안 나갈 거라는 생각은 접은 바람직한 태도였다.
“옹주 자가아아. 뵙고 싶었사옵니다.”
“잘 지내고 있던 거 다 아는데 왜 엄살이야.”
심지어 가끔 잘 지내나 보러 가기도 했으니 그리 오랜만에 보는 것도 아니었다.
“세자 저하께서 소인을 얼마나 혹사시키시는지 모릅니다.”
“세자 저하 말씀으론 성 겸사복 적성에 맞는 것 같던데, 왜. 잘 지내는 걸 내가 괜히 부른 거 아냐?”
“어휴. 무슨 말씀이십니까. 커다랗고 시커멓고 말도 안 듣는 놈들 매일 보는 게 얼마나 고역인지 옹주 자가께선 모르실 겁니다. 그나마 요새는 잘 씻고 다니는지 전보다 덜 더러운 거라고들 하는데, 그래봤자 시커먼 놈들이 흙바닥을 구르는데 그 냄새가 어디 간답니다.”
으음. 다들 전보다 잘 씻고 다니는 건 아마 내 결벽증(좀 억울하지만) 때문에 궁중에서 전체적으로 더 위생을 신경 쓰게 되어서가 아닐까.
근데 그 흙바닥에 굴리는 장본인이 성 겸사복 아냐?
나의 떨떠름한 시선을 눈치챘는지 성 겸사복은 알아서 화제를 돌렸다.
“옹주 자가께서는 요즘도 몰래 밖에 나가신다고요.”
“궁 안이 좀 재미가 없지…….”
“그건 소인도 동감이옵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나와 성 겸사복을 보며 가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재미없다고 그리 자주 궐 밖 출입을 하시면 어찌하옵니까.”
“사가도 다 지었는데 안 내보내 주는걸.”
그 원인이 내가 자라질 않아 혼인을 할 수 없어서라는 걸 아는 이들은 언급을 피해 가기 위해 애를 썼다.
“나가시면 오히려 궁 안으로 돌아오고 싶어지지 않으시겠사옵니까.”
“글쎄, 내가 나갈 때 송비랑 가이도 함께 갈 테니 나는 딱히 외로울 거 같지도 않은데.”
“소인도 데려가셔야지요.”
가이가 흐뭇하게 웃는 가운데 본인을 빼놓지 말라며 성 겸사복이 얼른 말을 얹는다.
“그래그래. 아무튼 궁이 넓다는 거 외에는 그리 큰 장점이 없잖아. 같은 궁 안에 산다지만 다들 바빠서 자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자주 와서 찾아뵙는 거랑 큰 차이는 없을걸.”
“그것은…… 그렇사옵니다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가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도 오라버니가 좀 외로워하려나.”
“……세자 저하께서 많이 외로워하실 것이옵니다.”
이건 의외로 가이가 아닌 성윤의 말이었다.
“그래도 요새 주변에 사람도 많고 잘 지내는 것 같던데.”
“신하들과 옹주 자가가 어찌 같겠사옵니까. 늘 바쁘신 세자 저하께서 옹주 자가를 보러 갈 시간을 내려고 애쓰고 계십니다. 조금만 참아 주시옵소서.”
“으음.”
피차 인간 불신의 시기가 긴 처지이니 내가 세자에게 뭐라 할 처지는 아니지.
나야 누가 공격할 만한 위치가 아니니 속 편하게 지내지만 세자야 늘 긴장하고 사는 상황이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세자빈이라도 맞으면 좀 낫지 않을까.’
가장 유력한 인물은 역시 사라진 지화이려나.
여주가 돌아오면 세자도 안심할 수 있겠지.
“그럼 세자빈이 들어올 때까지는 궁에 남아 있도록 하지 뭐.”
“잘 생각하셨습니다.”
왜 다들 그렇게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어.
“내가 궐 밖에 안 나가겠다는 뜻은 아니라고.”
“그건 기대도 안 했습니다.”
다들 이제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내가 나가서 살고 싶다고 나갈 수나 있는 처지인감.’
미성년자한테 집을 사 주는 집안은 있어도, 미성년자를 독립시키는 집안이 어디 있겠어…….
여기 성년 기준이 꼭 나이로만 정해지는 게 아니라서 그렇지.
***
그렇게 반쯤 내 개인 경호원 같은 성윤이 복귀하고 얼마 후, 나는 시영원에 다시 가는 대신 성윤을 시켜 정해진 시간에 아이들을 청계천으로 나오게 했다.
지아에게 말한 대로 일단은 그 아는 의원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생각해 보면 예전에 아이들 따라 한번 가 본 적이 있긴 한데 그게 대체 언제 적 일이야.’
사실 그날은 아이들을 따라 여기저기 돌아다녔던 탓에 그때의 기억으로 정확히 어느 한 집을 찾는 건 무리가 있었다.
그 아이들에게도 이제는 좀 오래된 기억이 아닐까 싶지만 그렇다 해도 한양 지리는 당연히 저 아이들이 나보다 더 잘 알았다.
‘놀러 다니지 못하게 막아 놓은 것도 아니니까 잊어버리진 않았을 거 같지.’
그 의원 아가씨와는 그 후로도 계속 교류가 있는 것 같았고.
아마 길 안내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오랜만이니 맛있는 거나 싸 가자.’
그렇게 생각하며 송비가 구워 준 카스텔라를 들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하지만 약속 장소에 나타난 아이들은 뜻밖에도 히죽 웃으며 내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뭔데?”
“보세요.”
“……지도?”
“아이들이랑 그린 거예요.”
“오.”
예전부터 시영원 방문을 했을 때 아이들에게 가끔 지나가는 말로 도성 지도를 만들고 싶다며 몇 번 말하긴 했는데.
‘정말 지도를 그려 올 줄이야.’
바로 그 예전에, 아이들을 시켜 만들려고 했던 지도였다.
청계천 어느 다리 앞에는 뭐가 있고, 골목 앞에 보이는 집에는 누가 살고 가족이 몇 명이고 무슨 나무가 있고 강아지와 고양이를 키우고 있고, 그렇게 미주알고주알 적혀 있는 지도는 초등학생이 자기 집 주변을 그린 동네 약도에 가까웠지만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
사실 내가 의도한 것도 이거였고.
나는 약도에서 아이들이 적어 놓은 ‘밥 잘 주던 언니네 집’의 위치를 확인하며 천천히 걸었다.
내가 걷기 시작하자 아이들도 기대에 찬 얼굴로 따라 걸었다.
지도에서 아이들이 유난히 강조해 놓은 집들은 티가 났으므로 하나하나 짚어 주었다.
“하하. 강아지 그림도 있네. 누가 그린 거야?”
“요즘 애들 중에 제영 언니에게 그림 배우는 애들도 있어요.”
“호오.”
제영이 누구냐 하면 예전에 그림 그릴 줄 안다고 용감하게 손을 들었던 처자의 이름이다.
제영을 포함해서 몇 명이 내 요망에 따라 시영원 내에서 사람들이 지내는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고 있었다.
물론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문자와 바느질, 요리 같은 것들도 배우고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럼 그림도 배우자! 하면서 서로 시간을 정해 조금씩 배우고 있다는 훈훈한 이야기였다.
종이를 낭비할 순 없으니 처음에는 나뭇가지로 바닥에 그림 그리는 걸로 시작한단다.
의외로 내가 의도하지 않은 부분까지 충실하게 초등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일기도 쓰게 하고 있지.’
양반 여인에, 걸인 출신 아이들에, 노비들까지.
시영원에는 어쩌다 보니 다양한 과거를 지닌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언문을 익힌 이들에게 공책을 한 권씩 선물했다.
본인이 살아온 일들이라든가 이것저것 기록으로 남겨 두고 나중에 회상해 보라고 좋은 말을 해 줬더니 다들 입틀막하고 감동한 얼굴이라 조금 찔렸지만…….
‘조선 시대 서민 생활사 사료 남기고 싶었어…….’
나도 사실 내용이 좀 궁금하긴 했지만 남의 프라이버시인 데다, 나나 민 상궁 같은 사람들이 보겠다고 하면 쓸데없는 찬양 글 같은 걸로 종이를 낭비할 거 같아서 절대로 내용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신신당부를 했다.
뭐어. 그래 봤자 몇백 년 지나면 프라이버시고 뭐고 없고 다 그냥 기록 취급하겠지만.
그래도 일단 민 상궁은 뭔가 이것저것 참견하고 있다고 들었다.
아무래도 신분제에 왕정 시대니까 쓰면 안 되는 내용 같은 것은 철저하게 가르치고 있다고.
하긴 안 그래도 역적으로 몰려 몰락한 사람들이 많은데 괜히 트집잡힐 내용이라도 썼다가 걸리면 앞날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 교육을 민 상궁에게 맡길 때 남녀를 가리지 말고 똑같이 가르치라고 했더니 남자애들도 많이 조신해졌다던데.’
이 말을 전한 마우리가 시선을 맞추지 못하던 걸 보면 무서웠나 보더라.
‘대체 얼마나 엄격하게 가르치고 있길래……?’
설마 그 유명한 쥐부리글려를 시영원에서 실행하고 있는 건……?
시영원 오픈(?) 초반에 남자아이들 가르치는 건 생각보다 힘들다는 얘기를 한 거 같아서 그냥 맡기긴 했는데…… 괜찮겠지?
‘하긴 사실 시영원에는 애들이 말 안 듣고 반항해도 제압할 사람이 많은걸.’
민 상궁과 궁녀들에게는 일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체탐인 출신들이 있다는 걸 미리 전해 뒀다.
그래야 서로서로 존중하고 조심할 거 같아서.
그런 생각을 하며 지도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청계천을 지나쳐 위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처음 아이들의 짓궂은 눈빛을 봐선 내가 지도를 읽을 줄 모르지 않을까 기대한 모양이었는데, 나는 구중궁궐에서 자란 옹주일 뿐만 아니라 12년의 기초 교육을 마스터하고 대학까지 진학한 한국인이었다.
이 정도 귀여운 약도를 못 읽을까.
게다가 이렇게 공들여서 세세하게 만들어 놓고선 못 찾길 바란다니 귀엽기도 하지.
“흠. 이 길이 맞나?”
“맞아요!”
예의상 한 번씩 물어봐 주면 아이들이 좋아서 폴짝폴짝 뛰니 놀아 주는 맛이 났다.
아이들에게 들으니 청계천 주변에 중인(中人)들이 많이 산다고 한다.
의관이나 역관 같은, 말하자면 돈 많은 전문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
‘음…… 약간 한강뷰 아파트단지? 같은 느낌인가? 청계천뷰?’
이 시대 집들은 넓은 마당을 가진 단층 주택이니 그렇게까지 풍경이 보일 거 같지는 않지만.
북촌서촌 이런 데는 궁이랑 가깝기도 하니 양반들이 많이 사는 부촌 느낌이고.
덕분에 아이들이 청계천 주변을 잘 안다고 했다. 아무래도 부잣집으로 구걸을 다니니까. 양반집보단 좀 문턱이 낮기도 하니 초심자용 코스랄까?
“여기서…… 나뭇가지에 매듭이 달려 있는 집까지 가서 오른쪽…….”
“아니 어떻게 그렇게 잘 찾아요?”
“글쎄에. 지도를 잘 그려 놔서~?”
“에헤헤헤.”
아영이가 좋다고 까르르 웃는 걸 보고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더니 주변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곧 내가 양반댁 아기씨로 보였는지 적당히 알아서 수긍하고 지나가는 눈치였다.
‘역시 내가 더 작으니 기분이 좀 이상하군.’
내가 더 연상인데 어려 보이는 것도 이상하고.
어차피 전생의 나이까지 생각하면 그런 걸 따지는 게 이상한 거 같기도 하고.
또 정작 신분 때문에 지금의 나보다 몇 살 많은 애들을 언니라고 부르지 않아도 되니 좋은데 좋지 않은 것 같고.
‘에잉. 복잡해.’
혀를 차며 지도를 확인하니 어느새 목적지가 코앞이었다.
“이제 다 온 것 같…….”
“아기씨!”
성 겸사복의 목소리와 함께 갑자기 몸이 번쩍 들리며 시야가 옆으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그리고 동시에 여인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꺄악!”
“으엑?”
분명 방금 전까지 보고 있던 풍경과 같은 풍경일 텐데 고개를 숙이니 어느새 성윤의 손이 쓰러질 뻔한 여인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다치신 데는 없으십…… 아기씨?”
그리고 걱정할 틈도 없이 비틀거리며 몸을 바로 세운 여인, 허성지는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를 하다 나를 보고 잠시 움찔 놀란 얼굴을 했다.
“오랜만에 뵙는데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송구합니다. 다음에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안부를 한번 묻고는 이를 악물고 바로 돌아섰다.
그곳에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은 얼굴만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부위가 다 붉어 보였으니까.
그리고 그 사내가 아마 방금 잘 걷고 있던 내 위로 성지가 쓰러질 뻔한 원인 제공자인 모양이었다.
“내 자식 살려 내! 내 자식 살려 내라고!! 너 때문에 내 자식이 죽게 생겼잖아! 어떻게 책임질 거야?!”
이건 또 무슨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