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82)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82)화(82/326)
그리고 소리를 지르는 사내에게 성지 역시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약재를 정해진 분량만큼만 달여서 먹어야 한다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소.”
“네, 네년이 준 대로 먹였다!”
“준 대로만 먹였다면 저런 증상이 나올 리가 없어! 두 배로 달여 먹인 게 아닌가?”
“아, 아니…….”
성지의 말에 사내는 잠시 머뭇거렸다.
“게다가 지금 온몸이 붉어진 걸 보면 혹시…… 그 약을 아이한테만 먹인 게 아니라 직접 먹은 건가?”
“아니, 약에 뭐가 들었을 줄 알고 애를 먹여? 좋은 약재를 넣었다며! 당연히 내가 먹고 확인을 해야지!”
“건강한 사람이 먹는 약이 아니오. 그게 무슨 보약인 줄 아는가?”
“이, 이 새파랗게 젊은 게 어디서 어른한테 큰 소리야? 의원 데려와! 의원! 애를 저 모양으로 만든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냐!”
“아이는 위중하니 지금 보아 주겠지만 다시는 이곳을 찾지 마시오.”
“뭐가 어째??”
“…….”
그동안 평화롭게 지내 온 시간이 길었던 탓일까. 한동안 보지 못한, 그림으로 그린 듯한 진상의 모습에 고구마를 백 개쯤 삼킨 듯한 답답함과 현기증이 밀려들었다.
나는 말없이 성 겸사복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소리 지르고 있는 사내를 가리켰고, 짜증과 피곤이 섞인 내 얼굴을 본 성 겸사복은 말없이 진상 보호자를 의원에게서 격리시켜 주었다.
“당신 뭐야!!”
“아기씨께서 심기가 불편하시다 하니 조용한 데서 얘기 좀 합니다.”
성 겸사복이 남자를 끌고 조용히 문밖으로 사라지자 성지도 진이 빠지는지 한숨과 함께 마당에 있던 평상에 힘없이 걸터앉았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지가 진땀을 흘리는 것을 본 아영이와 지아가 거침없이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물을 가지고 나와 성지에게 내밀었다.
“성지 언니. 물 좀 마셔.”
“고마워.”
성지가 앉아 있는 평상에는 열이 올라 숨을 헐떡이는 소년이 있었다. 아마 아까 그 남자의 아들인 모양이었다.
“이 아이는 괜찮은 건가?”
“다행히 늦기 전에 데려왔는데 치료할 틈을 안 줘서…….”
그렇게 말하며 성지는 정신을 다잡는 듯 고개를 휘휘 젓더니 몸을 일으켰다. 안에 들어가 약재를 찾아와 아이들에게 달이는 걸 맡기고는, 손을 몇 번 주무르고 침통을 꺼내 아이의 몸에 침을 꽂았다.
약을 달이며 부채질을 하던 아이들이 그걸 보며 히이익, 하며 몸서리를 쳤다.
‘침 꽂는 거 보면 좀 그렇긴 하지.’
얼마 후 아이의 열이 좀 가라앉은 것을 확인한 성지가 겨우 숨을 돌리며 어깨에 힘을 뺐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어색한 듯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영원 아기씨이시지요?”
“으음.”
내가 모르는 사이에 또 내 새로운 호칭이 정착되어 있었군.
시영원에서는 그냥 아기씨로 통하고 있었는데 시영원 밖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불리는 건가.
“아이들이 볼 때마다 아기씨 얘기를 얼마나 하는지 모릅니다.”
“무슨 얘기를?”
내가 아이들을 힐끔 쳐다보다 다들 내 시선을 피하며 갑자기 약탕기에 집중했다.
“좋은 얘기들뿐이지요. 맛있는 걸 줬다. 예쁜 옷을 주셨다. 착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마지막 건 왜?
“그리고 아이들에게 글도 가르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예전에 무례한 말씀을 드렸는데 잊어주세요.”
“?”
내가 뭔 얘길 했더라.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내가 기억 못 하는 눈치인 걸 알아챈 여인이 후후 웃었다.
“그런데 이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아.”
아까 그 아저씨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넋을 놓고 있었네.
“실은 시영원에서 의원이 될 아이들을 가르칠 생각인데 아이들에게 의술을 가르쳐 줄 사람을 찾고 있거든.”
“의술을 말씀이십니까?”
나는 신분에 관계없이 재주가 있고 자원하는 아이들에게 의술을 가르칠 생각이라고 적당히 내 계획을 설명했다.
성지는 내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려운가? 혹시 어렵다면 실력과 인성이 믿을 만한 다른 의원이나 의녀를 소개시켜 주면 그것도 좋지.’
눈앞의 여인은 아직 젊으니 교육보다는 현장에 있어야 할 거 같기도 하고.
“아기씨께서 보통 분이 아니시라는 말씀은 들었지만, 그런 깊은 생각을 품고 계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여인은 자세를 바로 하고 자기소개를 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린 적이 없었지요. 저는 허성지라고 합니다.”
성지는 어릴 적 부모님을 잃고 숙부에게 맡겨졌는데, 지금 이 집의 주인이기도 한 숙부는 예전에 내의원 어의였다고 했다.
‘왜 내의원을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전혀 모르는 걸 봐서는 꽤 오래전에 그만둔 모양이네.’
뭐 거기도 지금 여러모로 몰려 있는 것도 있고, 내부든 외부든 권력 다툼에 치일 수밖에 없는 곳이니 여러 가지 있었겠지.
“아마 숙부님께서도 들으신다면 관심을 보이실 듯합니다.”
성지의 숙부는 나름 검증된 실력이라 지금도 높으신 분들 댁으로 왕진을 가곤 해서 생활에 불편이 없단다.
특히 양반가 여인들을 진맥할 땐 성지가 함께하고 있어서, 사족(士族) 부인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소문이 퍼진 덕에 찾는 사람이 많다고.
‘심지어 부인병에 특화되어 있다니 딱 내가 찾던 인재상인데?’
성지의 말에 의하면 숙부도 내의원에 있을 적에 심지어 중전마마와 후궁들을 진맥했었다고 한다.
그럼 진짜 능력은 보장된 인재였다.
덕분에 딱히 다른 환자를 받지 않고 이렇게 대충 사는데도 그럭저럭 근근이 먹고 산다고 한다.
다만 성지는 기껏 익힌 의술을 낭비하는 게 아까워서 아까처럼 가난한 이들을 돌보곤 하는데, 숙부는 탐탁지 않아 하지만 일단 말리지는 않고 가끔씩 조언은 해 주는 정도라고 한다.
‘하긴, 돈이 안 되지.’
돈도 안 되는데 아까 같은 일까지 생기면 단둘뿐인 이 집에서는 꽤 버거울 듯했다.
지금도 약재 정리하고 말리고 달이고 성지 혼자 바빠 보였고.
“하지만 늘 언니만 일하고 있지 않아?”
“자리를 자주 비우시거든. 술을 좋아하시기도 하고.”
“으음.”
술 좋아하는 의원은 좀 그런데.
내가 못마땅해하는 게 느껴졌는지 성지가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술을 좋아하지만 한 잔만 마셔도 취해서 잠드시는 분이라 많이 드시지는 않아요. 술도 금방 깨시고요. 환자를 볼 때 취해서 갈 정도로 경우가 없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지금은 출타 중이시니 제가 나중에 돌아오시면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아마 싫어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환자 보는 걸 싫어하시는 게 아닌가?”
“그런 것이라면 어찌 아직 의원 노릇을 하시겠습니까. 하지만 환자를 보는 것보다는 가르치는 쪽이 더 적성에 맞으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점점 자신감이 없어지는 목소리를 듣고 있던 아영이가 넉살 좋게 성지의 무릎에 매달려 물었다.
“성지 언니도 언니 숙부한테서 배운 거야?”
“그럼! 숙부님이 가르쳐 주셨지.”
“강제로 가르친 거야?”
“아니, 내가 배우겠다고 했단다.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의술뿐이었으니까 필사적이었지. 다행히 적성에도 맞고 재능도 있었던 것 같지만. 아영이도 배워 볼래?”
“하지만 어렵다며.”
“그야 어렵지. 하지만 보람 있는 일이거든.”
“하지만 성지 언니 숙부는 하기 싫어하는 거 같은데.”
“아하하.”
아영이의 말이 뼈를 때렸는지 성지는 어물어물 말을 흐렸다.
“왕진 가면 성지 언니가 고친다면서? 그럼 성지 언니가 아저씨보다 더 잘 고치는 거 아냐?”
“그건 아니지만 진맥은 내가 한단다. 남녀가 유별하니 남자 의원들이 진맥하는 걸 싫어하시거든. 으음. 하지만 여인들 진맥하는 것은 내가 더 잘 본다고도 할 수 있겠지?”
“그럼 아기씨 언니도 진맥해 줄 수 있어?”
아기씨 언니는 또 뭐니, 아영아…….
나를 지목하는 아영이의 말에 마당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아마 저쪽도 나를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내가 자라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챘을 테지. 아이들이 말했을 수도 있고.
“제가, 아기씨를 진맥하여 보아도 되겠습니까?”
“그래.”
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지금까지 존재감이 없던 소이가 당황해 나를 막았다.
“아기씨!”
“괜찮아. 뭐 약을 먹는 것도 아니고 진맥 좀 하겠다는데. 그것도 같은 여인이고. 안 그래?”
“하오나…….”
가이는 깐깐하지만 소이는 무르지.
내가 하겠다고 하면 소이는 끝까지 막지 못했다. 뭐 대단한 걸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성지는 나의 건강 상태에 대해 이것저것 물으며 내가 내민 손목의 맥을 짚었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을 침묵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은 알겠사오나, 다른 증상이 전혀 없으시니 어찌 치료를 해야 할지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진맥한 사람들 중에 방법을 알았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자책할 거 없어. 나도 불편하지 않으니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
주변에선 다들 그게 어떻게 신경이 안 쓰여요! 하는 얼굴이었지만 이게 그런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물론 어린아이 몸에서 자라진 않아 불편한 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나는 돈도 많고 시중들어 줄 사람도 많으니 생활에 불편은 없지 않은가.
게다가 고칠 방법을 알고 있고, 고쳐 줄 수 있는 사람이 언젠가 나타날 거라는 보장도 있는 셈이고.
심지어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니니 세상에 하고많은 희귀 난치병 환자들에 비하면 상당히 좋은 조건들이었다.
“그런 거 너무 일일이 신경 쓰고 살면 건강에 안 좋아.”
“정신적인 고통이 실제 몸의 통증을 일으키기도 하는 법이니 그 말씀이 옳으십니다.”
아이들도 의원의 말이라 신뢰가 가는지 그런가?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심리적으로 안정까지 찾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우리 집이 워낙에 좀 심리적으로 안정하기엔 썩 좋은 환경이 아니라…….
독립도 못 하고.
‘에잉.’
아무튼 나는 기왕 이렇게 된 거 여성 전문 의료원에 대한 의견을 전했고. 성지는 무척 기꺼워했다.
“말씀하신 대로 옹주 자가께서 돌봐 주시는 의방이 생긴다면 여인들도 의원들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아동들과 여성 위주의 병원으로 할까 하고. 너무 여러 분야를 망라하는 것보다는 역시 전문성이 있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옹주 자가께서는 그래서 의원들과 의녀들을 모으실 생각이신 겁니까?”
“응. 그런 의미겠지.”
시영원 아기씨는 대외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옹주 자가의 대리인이었으므로 나는 적당히 대답했다.
“훌륭하십니다.”
“글쎄…….”
다들 내가 굉장히 큰 포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사실 이것도 다 내가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 시대에는 치명적인 전염병이 많았고, 치료 기술은 미비했다.
‘괜히 대체 역사물에서 종두법이 국룰인 게 아니라고!’
이 시대에서 천연두라도 걸렸다간 세자와 지화가 어찌 되는지 보기 전에 내가 먼저 세상을 하직하게 되는 수가 있었다.
‘어디 천연두 걸렸다는 소 생겼다 그러면 뭔 짓을 해서라도 가 봐야 하나.’
세자? 걔는 주인공이니 천연두 같은 거 안 걸리지 않을까.
‘걸려도 살아남을 거 같지…….’
물론 걸리면 여러 가지 의미로 큰일이지만.
안 그래도 한번 죽을 뻔한 엑스트라 출신인 내가 먼저 살아야지.
“그러고 보니 저도 약재를 구하러 약재상에 갔다가 옹주 자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습니다.”
내 얘기를?
내가 관심을 보이자 성지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옹주 자가 덕분에 내의원 의녀들이 술렁이고 있다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