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85)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85)화(85/326)
“옹주 자가, 어찌하면 좋겠사옵니까.”
정금과 연창이 울상인 얼굴로 내게 고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음. 그러니까, 참봉(參奉:종9품) 하나가 의녀랑 바람났는데 심지어 둘 다 유부남, 유부녀라고?”
“그, 그렇사옵니다.”
두 사람의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가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둘 다 마음이 급해 찾아온 건 알겠지만 어찌 아직 나이 어린 옹주에게 그런 얘길 하냐는 거겠지.
두 사람 다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니어서 민망한지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 일이 밝혀지면 내의원이 발칵 뒤집힐 것이옵니다. 게다가 아직 대비마마의 상중이 아니옵니까.”
“잘들 한다, 진짜.”
의녀는 관비지만 궁녀는 아니니 남자를 만나 혼인을 하는 것도 물론 가능했다.
하지만 의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중 하나가 저렇게 외간 남자를 만나고 다니며 문란하게 생활한다! 이거인데 딱 저런 문제가 터지면 역시 품계를 받을 자격이 없다느니 하는 식으로 공격받을 것이 뻔했다.
‘아니 불륜은 둘이 하지. 여자 혼자 하나. 그럼 남자는 유부녀와 불륜하는 놈일지 어떻게 알고 품계를 내려?’
이 의녀가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순결 의식이 심한 동네에서 여인의 불륜, 간통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도 이루어진다.
아무리 싫어도 일단 남자랑 잘못 얽히면 그 여자는 그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이미 절개를 잃은 여자라는 꼬리표가 붙어 제대로 살 수가 없게 되니 고발은커녕 피해 사실을 밝힐 수도 없게 된다.
오히려 가해자에게 지속적인 협박을 당하게 되는 처지가 되어 원치 않는 관계를 이어 가게 되는 거다.
성범죄자는 사형인 시대에서도 이러니 원.
피해자를 제대로 보호해 주지 않는 세상에서는 도리어 범죄자들이 당당하게 활개를 치는 법이다.
어쨌든 일이 이리되면 차라리 선수를 치는 편이 나았다.
“뜻이 맞는 의녀들끼리 먼저 위에 고해서 선을 그어 버려.”
“예?”
“부정한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할 수 없다고 말이지. 그리고 이런 일이 발생해 손가락질받느니 의원들과 마주치지 않게 부서를 나눠 달라고.”
“그건, 하지만 어의들 중에는 알면서도 방관하거나 마찬가지로 의녀들을 희롱하는 경우도 종종 있사옵니다.”
“과연 소인들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겠사옵니까.”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땐 다른 방법을 쓰는 수밖에. 아, 그리고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중전마마께 먼저 고하거라.”
“예. 옹주 자가.”
“다만 그전에, 다른 증인을 만들자.”
“?”
나는 의녀들에게 불륜 커플이 밀회하는 시간, 장소를 알아내도록 하고 내 처소 궁녀들이 우연을 가장해 현장을 목격하도록 했다.
우리 처소 궁녀들은 나 때문에 내의원을 오가는 일이 많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결국 의녀들의 고발은 묵살되고,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은 불륜 커플의 일은 중궁전까지 흘러들어 가고, 증인으로 우리 처소 궁녀들도 잠시 성가신 일을 겪으며 일은 일파만파 커져서 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대비마마의 상중에 궁 안에서 일어난 일에 왕은 분개했으며, 어의들이 이 사실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더 분노했다.
나는 내 궁녀들이 얽혀 있다는 핑계도 있고, 진노한 왕을 좀 진정시킨다는 명목으로 찾아가 은근슬쩍 의견을 피력했다.
“이 기회에 물갈이를 하는 것은 어떻겠사옵니까.”
“삼의원(三醫院:전의원(典醫院), 혜민서(惠民署), 내의원(內醫院)을 총칭하는 말)을 말이냐.”
“모두 바꾸는 것은 어렵겠지만 그간 근무 태도가 방만했던 이들을 정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물론 간통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죄이오나, 그들이 감히 내의원 내에서 그런 추잡한 행동을 해 왔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성한 일터에서 무슨 짓이야!
심지어 궁 안에서! 늬들은 목숨이 여러 개냐아!
……이렇게 말하면 뭔가 오해할 거 같은데, 둘이 얼싸안고 얼굴 들이미는 거 들킨 거다.
‘의국은 군기가 빡셀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렇지도 않은가 봐.’
듣자 하니 둘 다 나이나 경력이 적은 것도 아니고 나름 베테랑 의원과 의녀였다는데 정말…….
“어린 옹주의 귀에까지 들어갔다니 참으로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구나.”
저기요. 제가 안 자라서 그렇지 원래 슬슬 그런 거 들을 수 있는 나이예요.
심지어 알맹이는 정말 먹을 만큼 먹은 나이라고요.
아무튼, 내가 건의한 일로 이미 전국 단위로 의원들 명단이 올라오고, 의원들이고 의녀들이고 다들 바빠 죽어 가는데 저런 짓을 벌였다는 사실에 의국의 의원들과 의녀들이 가장 분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왕을 보좌하던 세자도 내 의견에 손을 들어주었다.
“전하. 이런 일이 생긴 것을 보니 역시 장기적으로 의녀들을 분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드옵니다.”
“궁에 여인이 많으니 의녀가 없을 수는 없다. 둘을 분리하고, 여인을 진맥할 때 외에는 의원들의 보조 역시 남자가 하는 것이 옳겠구나. 시아가 말했던 간호사(看護師)라는 직책을 새로 만드는 것도 좋을 듯싶다.”
“시아가 처음 말을 꺼냈을 때는 지나친 것이 아닐까 했는데 역시 필요할 듯하옵니다.”
설마 그런 일이 생기지는 않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꼭 일어나는 법이었다.
나는 설마 진짜 이 시기에 문제가 터지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왕과 세자에게 남의(男醫)와 여의(女醫)을 분리하기 위해서는 보조하는 직책 역시 성별에 따라 새로 나누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이전에 미리 언질해 둔 바가 있었다.
남녀가 함께 있으면 도덕이고 모럴이고 없이 사고 치는 한 쌍이 나올 가능성은 언제나 있었다.
현대에서야 ‘걔네가 이상한 겁니다!’ 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봐라, 역시 의녀들은 문란하다!’라는 소리가 나온다.
지금껏 함께 일을 했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수백 명의 의녀들은 무시되고, 정작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는 남자 의원들의 존재는 지워버리는, 너무나 비이성적(非理性的)인 소리지만 대대로 힘 있고 목소리가 커 왔던 사람 쪽이 이기는 거다.
범죄를 저지른 권력자들은 떵떵거리며 잘만 사는 법이니까.
솔직히 남녀문제가 일어나는 게 싫었으면 애초에 좀 분리해 놨으면 되는 일인데 왜 의녀를 분리하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왕과 세자는 역시 이번에 의국에서 일어난 파렴치한 일에 기함하고, 중전이 의녀를 외명부에 편입시켜 엄격하게 관리하는 것이 낫겠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중전은 트집 잡히고 싶지 않아 나서지 않았을 뿐이지 그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 일로 오히려 여의 양성에 대해선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어의 영감은 책임지고 물러나야 했지만.’
옹주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 죄는 피했는데, 불륜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책임자는 억울하지만 책임을 져야 했다.
사실 아마 알 사람은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는데 누군가가 추문을 일으키기 위해 일부러 발각시켰을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싶지만. 관리 감독을 못 한 건 사실이었다.
예전에 왕이 진노했을 때 내가 감싸 준 적이 있어 나한테도 일단 사직 인사를 하러 왔길래 고생했다고 돈과 카스텔라를 챙겨줬더니 감동한 얼굴이더라.
애들 가르칠 의사가 필요하긴 한데 안 좋게 잘린 사람에게 그 얘기 꺼내는 것도 좀 그래서 그냥 보내 줬다.
능력 부족도 아니고 자기 의방 차려서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사람한테 소개할 재취업 알선 자리로는 아무래도 너무 소박했다.
판사 출신 변호사에게 동네 학원 강사 자리 소개하는 수준 같아서 좀.
‘아, 피곤하다.’
이놈의 궁 안은 하여간 뭔 일 하나 터지면 명분에 싸움에 성가셔 죽겠다.
독립. 절대로, 반드시, 기필코 독립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지화가 나타나서 내 병을 고쳐 주거나 세자빈이 되어 주거나 하지 않는 이상은 요원한 일 같았다.
그래서 그냥 할 수 있는 일만 하기로 했다.
***
사실 의원 양성에 관한 것도 어지간한 일들은 다 가이와 민 상궁에게 맡겨 두었지만 이래저래 내가 직접 확인해야 할 것들도 적지 않았다.
안 그래도 학당을 만들려던 게 의원 양성이랑 겹치면서 좀 넓은 부지를 장만해 두는 게 좋겠다는 민 상궁의 의견에 따라 땅도 볼 겸 오랜만에 가이와 함께 외출하기로 했다.
이건 내가 하는 사업에 관련된 일이기도 해서 왕에게 외출 허락도 받았다.
“아직 아바마마께서 지어 주신 사가에 한 번도 못 가 봤으니 가 보고 가이에게 관리도 맡길 생각이옵니다.”
“그래. 기껏 지었는데 주인이 한 번도 보질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지. 가마를 내어 줄 터이니 타고 가거라.”
“어찌 소녀가 가마를 타고 위세를 부리겠사옵니까. 적아를 타고 가볍게 다녀올 생각이옵니다. 나간 김에 시영원에도 들러 보고 오겠사옵니다.”
기사 딸린 왕실 전용 고급 탈것을 타고 요란하게 다녀오라는 말에, 나는 기겁해서 자가용 타고 조용히 다녀오겠다고 선언했다.
“……조심해서 다녀오거라. 기왕이면 성 겸사복도 데리고 가고.”
왜 다들 나에게 성 겸사복을 못 붙여 줘서 안달인지 모르겠지만, 호위로 데려가면 안심된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간은 그놈의 간통 사건으로 궁 안이 소란스러워 조용히 처소에서만 지내느라 외출을 거의 못 했기에 외유는 오랜만이었다.
참고로 둘 다 당연히 파직당했지만 당연히 의녀 쪽이 더 사정이 안 좋다. 그냥 관비(官婢) 신분으로 돌아간 셈이니까.
듣자 하니 처음 꼬신 것도 의원 쪽이던데 남의 처지는 생각하지도 않고 저지르는 걸 봐선 역시 사랑도 뭣도 아니었다.
‘그 둘의 이름은…… 안 좋은 의미로 역사서에 길이길이 기억되겠지…….’
내가 그간 처소에서 얌전히 지내면서 나 대신 바빠진 사람은 가이였다.
다만 최근에 특히 가이가 바빴던 것은 내가 가이랑 놀다가 또 쓸데없는 아이디어를 발설한 탓이었다.
예전에 어디서 봤는지는 기억 안 나는데, 조선 후기에 첫 번째 주막에서 결제하고 영수증 들고 가면 이후에 가는 다른 주막에서 그 영수증에 남은 금액대로 정산해 주는, 무거운 현금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주막의 시스템이 있었다고 들었다.
어느 날 그게 떠올라서 가이에게 말해 줬더니, 얼마 후 한양에서 다른 지방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주막들을 연계해서 내가 말한 시스템을 구축하며 조금씩 프랜차이즈 산업을 넓히기 시작했다.
지방이다 보니 지금까지와는 달리 인력 제공과 식자재 납품보다는 주로 레시피 계약이 되지 않을까 했는데, 가이는 그냥 그 지역에 밭을 사서 식자재를 납품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서 한동안 또 바빴다.
응…… 말하자면 그것도 다 내 죄였다…….
그래도 가이는 나름 보람차 보였다. 뜻밖의 적성을 찾았달까?
돈 불리는 재미에 빠진 가이는 궁 안에 있을 때보다 활기가 넘쳤다.
그러니 궁 안에 가둬 두기보다는 사가의 관리를 맡긴다는 명목으로 자유롭게 드나들게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사저도 볼 겸, 땅도 볼 겸 함께 나왔고.
‘그런데 가이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면 이제 나는 놀아도 되는 거 아닌가?’
원래 윗사람이 놀아도 부하들이 열심히 일해서 재물을 불려 주는 법 아니겠는가.
나는 천재 경영자가 아닌, 학생으로 살다 죽은 전생의 기억이 있을 뿐인 평범한 금수저였다.
아무튼 허락도 받았겠다, 그렇게 나는 계획했던 대로 사저를 찾았다.
“이곳이 옹주 자가의 사저이옵니다.”
“와아.”
나, 이렇게 큰 집도 있는데 더 뭐 안 해도 되는 거겠지?
하나뿐인 옹주의 사저답게 내 상상을 초월하게 부지도 넓고, 건물도 크고, 아름답게 지어져 있었다. 심지어 내 취미 생활을 감안했는지 2층으로 지어진 건물들도 있었다.
‘와, 여기다 도자기 진열해 놓고, 저기는 책 모아 놓고, 저쪽 건물은…….’
돈도 많이 벌었으니 애들 잘 키우고, 의사도 만들고, 나는 취미 생활도 하고 그래야지.
아무리 생각해도 요새 취미 생활도 독서 외에는 너무 등한시한 거 같다.
사가를 도자기와 유물로 채워야지.
그렇게 나름 꿈과 희망에 차서 사저를 나와 룰루랄라 즐겁게 시영원으로 가던 도중이었다.
“오. 기녀다.”
“……아기씨.”
물론 내가 기녀를 처음 보는 건 아니다. 나름 안면 있는 기생도 한 명 있지 않은가.
하지만 백전노장 같은 아우라가 풍기는 매향이와는 달리 눈앞에 있는 이들 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듯한 기생들도 많았다.
또 어딘가 산천에서 연회라도 할 생각인지 기생들 여럿이 악기를 들고 가고 있었는데, 전모(氈帽)를 쓴 이들 사이에서 몇몇 젊은 기생들은 아직 어색한지 치맛자락을 잡고 쭈뼛쭈뼛 걷고 있었다.
‘어쩌면 시영원에 있는 관비들과 비슷한 시기에 기녀가 된 아이들일지도.’
사람 인생이 갈리는 데 운이 크게 작용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내가 저들을 불쌍하게 생각한다고 다 면천시켜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궁녀나 의녀 면천시키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데 기녀들을 면천시키겠다고 하면 어얼마나 난리를 칠지 머리가 아팠다.
관기(官妓)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도 중국에서 오는 사신단을 대접해야 한다고 참 구구절절 말은 많지만, 어쨌든 가장 잘 이용해 먹는 것은 정작 사신단보다도 사신단을 대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 사람들이었다.
그런 놈들이 유학자라고 하는 걸 보면 교육으로 인한 교화의 가능성에 회의가 들었다. 하긴 가르치는 놈들도 똑같은 놈들인데 어쩌랴.
예쁜 옷을 입고 웃고 있는데도 어딘가 눈이 죽어 있는 기생들을 보니 좋았던 기분이 조금 답답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 아름답지 않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그만두시어요.”
“뭐 이리 비싸게 굴어. 기녀 주제에.”
그럭저럭 유생 티가 나는 도령 하나가 기가 죽어 걷고 있던 기생 하나를 희롱하기 시작했다.
‘와, 새파랗게 젊은 놈이 공부는 안 하고.’
네가 이러고 다니는 거 너희 부모님은 아시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