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87)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87)화(87/326)
“자네 왜 자꾸 오는가.”
“여길 와야 아기씨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것을요.”
내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 매향의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지난번에 봤을 때처럼 화려한 기생 차림이 아니라 비교적 평범한 차림을 하고 있었으나 못 알아볼 정도로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언제 노래를 불렀다고?”
“아기씨께서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셨다지요.”
“안 가르쳐 줬어.”
혼자 흥얼거린 게 퍼진 거지.
내 부정의 대답은 못 들은 척, 매향이 싱긋 웃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배우고 있답니다.”
“매향 언니! 언니도 노래할 거지?”
“글쎄 어찌할까. 언니 노래 듣고 싶어?”
“응!”
내가 모르는 사이에 자주 와서 아이들과도 친해졌는지 허물없이 다들 언니, 언니 부르며 따르고 있었다.
뭐지 이 소외감.
“매향 언니?”
그리고 방금 시영원에 도착한 기녀들 역시 매향과 아는 사이인지 우르르 몰려들었다.
“송화? 아니, 너희들이 여긴 어쩐 일이더냐.”
“언니야말로 요새 외출이 잦으시다 했더니 이런 곳에 계셨습니까? 오늘도 언니가 없다고 그 싸가지 없는 새ㄲ…… 양반들이 얼마나……!”
그놈들 욕하는 것 가지고 내 눈치는 보지 않아도 괜찮은데……. 아닌가, 역시 아이들 있는 데서 욕설은 좋지 않지?
애들이 모를 거 같지는 않지만.
그나저나 끗발 센 사람이 없으니 그놈들이 더 기가 살아서 어린애들만 괴롭혔구만.
매향은 그제야 마당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는 이들 중 상당수가 아는 얼굴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야 이곳에서 익숙한 풍경은 아닐 거다.
“근데 너희는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
“내가 본의 아니게 저이들 장사를 방해해서 대신 전두(纏頭)를 치러 주기로 했거든.”
“장사를? 아기씨께서요?”
“네. 아기씨께서 전두를 내줄 것이니 따라오라고 하셔서 무슨 생각이신가 했는데 이런 곳으로 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거참, 아주 신이 났구나.”
“그럼요! 오늘은 그냥 노래와 춤만 필요한 것이 아니옵니까. 그렇지요, 아기씨?”
“뭐 더 해 주고 싶으면 애들 좀 봐주든가…….”
내가 왔다고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아이들에게 힘없이 흔들리며 그리 말하자 송화는 농담이라 생각했는지 까르르 웃었다.
“그럼요! 노래에는 관심도 없고 치근덕거리기만 하는 작자들보다는 아이들이 훨씬 귀엽습니다!”
“으음.”
시끄러운 아이들 앞에서 노래하라면 싫어하지 않을까 조금 걱정이었는데 의외로 다들 싫은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이 노래고 춤이고 잘 모를 텐데 괜찮겠어? 시끄러울 수도 있는데.”
내 말에 송화와 매향이 배시시 웃었다.
“기녀들을 부르는 양반네들도 저희를 그저 예인으로 보고 부르는 경우가 어디 많겠습니까.”
“그런……가?”
듣고 보기 그렇네.
“언니! 매향 언니! 잠시 이리 와 주세요! 송화 너도!”
“예, 언니!”
“어휴, 나는 오늘 쉬러 왔는데.”
여기가 언제부터 님 휴양지가 되셨는지?
툴툴거리면서도 매향은 송화와 함께 기녀들에게로 향했다.
몇몇 기녀들은 매향에게 조언을 얻을 것이 있는지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뭔가 진지한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시영원의 어린아이들은 기녀들의 화려한 옷이 신기한지 여인들의 치맛자락을 따라다니며 까르르 웃고 있었다.
그래도 어릴 적부터 민 상궁이 엄하게 가르친 보람이 있는지 조금 자란 아이들 중에는 함부로 무례하게 구는 아이가 없었다.
물론 그런 거 모르는 어린아이들은 좋다고 무작정 따라다니다 형, 언니들에게 붙잡혀 빽빽 울어 댔고.
아이를 싫어하는 기녀들도 있는 것 같았는데 아이들 눈치가 귀신같아서 그런 여인들 근처에는 다가가지 않더라.
‘마침 기녀들이 매향이에게 붙어 있으니 나는 그사이에 민 상궁과 얘기를 좀 해야겠다.’
오늘 이렇게 갑작스럽게 놀자판을 만든 것에 대한 설명도 해야지.
아무리 시영원 사람들이 내가 하는 일에 군말 없이 따른다지만 역시 실무자를 무시하고 진행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물론 민 상궁은 내 말에 별 불만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찌 된 연유인지 알겠사옵니다. 하루 쉰다고 하여도 다들 별일 없을 터이니 너무 걱정하실 것 없사옵니다.”
“그럼 다행이고.”
“하지만 오늘 밖으로 나간 아이들은 아쉬워하겠군요.”
“앗.”
그러고 보니 지금은 지아도 시영원에 없었다.
다음에 날을 새로 잡아서 한 번 더 불러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민 상궁이 신기한 듯 물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기녀들을 이렇게까지 배려해 주시옵니까?”
“기녀들도 사람인데 그런 망종들에게 희롱당하며 사는 것이 좋겠어?”
“옹주 자가께서는 참 속이 깊은 분이십니다.”
전 그냥 성희롱범이 싫은 것뿐인데요.
“민 상궁도 나가서 오랜만에 가무를 보며 조금 쉬도록 해. 일거리를 자꾸 가져오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예. 옹주 자가 덕분에 소인이 오랜만에 이런 구경도 다 해 보옵니다.”
민 상궁도 궁에 있을 때는 궁중 진연(進宴)도 본 적이 있을 텐데 아무래도 궁 밖을 나와서는 그런 구경을 할 일이 없었겠지.
음. 여유가 없는 건 그냥 내 탓인 거 같기도 하고.
나가보니 격식 없이 노래도 하고 춤을 추고 놀고 있다. 뭐 아직 준비가 덜 되어서 그렇겠지만 안 그래도 악기 연주하는 애들도 있다 보니 완전히 놀자판이다.
아무래도 신분상으로도 그다지 거리낄 게 없다 보니 다들 편안한 분위기였다.
게다가 가서 먹으려고 음식도 준비해 왔던지라 그것도 펼쳐 놓고 있었다.
아이들은 평소에 본 적 없는 음식을 먹어 보고 싶어서 다들 난리였다.
“조용히! 음식을 조금씩 나눠 줄 테니 손대지 말거라!”
다만 그 난리 법석을 보다 못한 민 상궁이 호통을 치자 우르르 몰려들었던 아이들이 와르르 물러났다.
아무래도 교육을 책임지는 입장이다 보니 가르치는 아이들이 사람들 앞에서 지나치게 흐트러져 있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 모양이었다.
하긴 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걸. 벌써 몇 년이나 지나 다들 조금 내려놓은 거 같지만.
반면에 체탐인 출신 사람들은 기녀와 악공들이 오니 신기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다.
‘내가 너무 일만 시켰구나…….’
가끔 제대로 문화생활도 하면서 힐링하게 해 줄걸. 저 사람들이 돈만 많지 기녀도 신기해할 정도로 순진하게 살아온 사람들인데.
악덕 고용주가 된 기분이었다.
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내가 가끔씩 나오다 보니 이 사람들 근무 체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정확히 모르니.’
나중에 민 상궁에게 물어봐야지.
원래 스타트업은 처음 몇 년간은 체계고 뭐고 없는 거다.
내가 딴생각을 하는 사이 본격적으로 자리가 정리되고 기녀들의 가무가 시작되었다.
그저 마음대로 춤추고 노래하는 것만 알던 아이들은 다들 넋을 놓고 쳐다보기 시작했다.
“와아아!!”
추파 던지는 사람도 없고, 열렬히 환호해 주는 관객들의 태도가 싫지 않은지 기녀들도 악공들도 다들 즐거워 보인다.
물론 제일 신난 건 애들이고.
‘안 그래도 공부하기 싫어하는 애들이 많은데 자기들도 배우겠다고 할까 봐 걱정이네,’
예인이 대성할 수 있는 시대면 모를까 이 시대에는 기녀고 광대고 악공이고 주변의 대우가 괜찮은 수준으로 올라가는 건 매우 어렵다.
게다가 그런 쪽은 이미 그쪽대로 체계가 잡혀 있기도 하고.
“어떠십니까, 아기씨. 마음에 드십니까?”
“응.”
당연히 동료 기녀들과 함께할 줄 알았던 매향이 내 옆에서 함께 가무를 감상하며 묻기에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도 궁중 진연을 본 적이 있지 않겠냐 싶겠지만, 실은 내가 태어나고 워낙에 이런저런 일이 많았어서……. 어릴 때는 워낙에 내가 좀 병약했던 데다가 너무 어려서 못 봤고, 좀 커서는 궁 안이 화기애애하게 진연이나 할 수 있는 분위기였던 적이 많지 않았다.
‘세자빈, 세자, 내 생모, 경언군, 대비……. 그렇게 줄줄이 갔으니까. 생각해 보니 좀 너무하는군.’
심지어 지금도 아직 상중이기까지 하니. 솔직히 인간적으로 3년상은 좀 너무한 듯.
“아는 사이지?”
“예, 소인이 가르친 아이들도 있지요. 저기, 아기씨께서 구해 주신 송화도 그러하답니다.”
“아직 좀 앳되어 보이는데.”
“그래도 기녀인 것을요.”
누가 봐도 송화보다 어린 내가 송화를 보고 어리다고 하니 조금 모양새가 웃기긴 하지만 입장상으로 봐도 내가 송화를 걱정하는 게 맞긴 했다.
“그리 이상한 놈들이 많으면 다들 어찌해?”
“재주껏 피해야지 힘없는 소인들이 어찌하겠습니까? 매일매일, 오늘 송화가 아기씨를 만난 것처럼 운이 좋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목소리에 가볍지 않은 감정이 담기니 내가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저 아이는 운이 좋지 않습니까. 누가 그런 상황에서 아기씨처럼 나서 주신답니까. 공자 왈 맹자 왈 바른 소리를 읊는 선비님들이 바로 우리를 희롱하는 사람들인 것을요. 양반가 마나님들은 저희를 질색하시지만 이런 일에 어찌 나서시겠습니까.”
“음…….”
그건 그나마 내가 남다른 신분의 소유자이기 때문이지. 이 시대는 하여간 신분이 깡패야.
내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자 매향이 민망한 듯 웃었다.
마침 송화의 노래가 끝나고 모두가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아기씨 앞에서 감히 양반을 욕보이려 함은 아니었습니다. 사죄와, 감사의 뜻으로 부족하지만 소인도 한 소절 불러 보겠습니다.”
“매향이는 비싼 몸이라며.”
“그러니 아기씨께서 전두를 아까워하지는 않으실 것 아니옵니까.”
“나 곧 탈탈 털리겠는데.”
대체 얼마나 받으려고.
내가 약한 소리를 하자 매향이 푸후후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예정되어 있던 순서는 아니었는지 기녀들이 술렁거리는 가운데 아이들은 뜻밖의 등장에 다들 신이 나서 우와와 소리를 질렀다.
자주 찾아온다며 노래는 안 불러 주나. 반응이 열렬하네.
곧 매향이 노래를 시작했다.
부채 하나를 들고, 장구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데 역시 다들 감탄하는 이유를 알 만했다.
‘아직 이 시대 음악은 잘 모르지만 잘 부르는 건 누가 들어도 잘 부르는 거지.’
명창의 목소리는 한 소절만 들어도 다른걸.
감탄과 함께 노래가 끝나고, 다시 한번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시영원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빠지지 않고 모였으니 시끄러울 만도 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소리가 멀리서도 들려왔다. 소리가 난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담장 밖에도 사람이 몰려와 있었다.
‘아, 양반가 잔치보다는 훨씬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구경거리겠구나.’
우아하게 고개를 숙여 박수에 답한 매향이 이어서 뒤쪽에 있던 시영원 아이들에게 손짓을 하는가 싶더니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악기를 가지고 나왔다.
곧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오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거참.”
내가 부르던 노래를, 아이들을 통해 어떻게 완성했는지 이젠 가사를 멋대로 붙여서 부르고 있다.
역시 명창이 되려면 보통 집념으론 불가능하겠지. 이 정도면 내가 졌다고 패배를 인정해야 할 거 같았지만 내 저작권이 아니니 그럴 수도 없고.
하지만 저 익숙하고 그리운 멜로디를 듣는 게 사실 싫지만은 않았다.
‘역시 혼자만 아는 건 좀 서럽구나.’
내가 아는 것들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건 조금 외로운 일이었다.
그러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부르는 내 전생의 노래는 반갑기도 했다.
‘저작권만 아니라면 말이지.’
하지만 이제 이 노래 저작권 지켜 주는 거 이미 늦은 거 같지…….
담장 밖에서 듣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곧 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다니지 않을까.
이제 이 노래는 공공재입니다…….
그나마 가사의 저작권이라도 지켜진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노래를 부르는 매향이 내게 한쪽 눈을 찡긋거린다.
하지 마라, 정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