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89)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89)화(89/326)
뜻밖의 말을 듣게 된 장소는 중궁전이었다.
“시영원에서 기녀를 불러다 놀았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어찌 된 일이냐.”
“일부러 그리한 것도 아니었고, 우연히 그리된 일이었사옵니다. 굳이 말하자면 일하는 이들을 위한 위로회였지요. 그런데 무슨 소문이 이렇게 빠르옵니까?”
갑자기 불려와 세자에게 뜻밖의 말을 들은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듣기로 지금 이 자리는 원래 종친들이 중전에게 문안 인사를 겸해 딸의 혼사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라고 들었는데, 왜 이 이야기가 나와서 내가 불려왔는지. 솔직히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한강으로 나들이 가는 줄 알았던 기녀들이 시영원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따라간 사람들이 담장 너머로 구경했다고 소문이 파다하더구나. 혹 네가 지시한 일이더냐?”
“물론입니다. 소녀가 그들을 데려갔으니까요.”
“네가?”
세자 역시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내가 직접 기녀들을 데리고 갔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는지 다들 표정이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세자라면 몰라도 나는 아직 어린 데다 여자아이였다. 추문까지는 가지 않을 테니 어설프게 숨기느니 차라리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나았다.
세자 역시 그리 생각했는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말을 이었다.
“네가 그런 것에 관심이 있었는지는 몰랐구나.”
“딱히 관심이 있다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 사실 잘 모르니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도 알지 못하옵니다.”
내 말에 중전이 끼어들었다.
“옹주가 어리고 몸이 약해 제대로 궁중 진연을 본 일이 없을 테니 신기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무슨 실수를 했건 간에 ‘애가 몸도 약하고 아직 어려서 그래!’라는 실드의 뜻이 담겨 있었다. 세자도 나를 추궁할 생각은 없었는지 적당히 훈계의 말을 했다.
“그래, 호기심이 생길 수는 있겠지만. 할마마마의 상중이니 괜한 말이 나오지 않도록 자중하는 것이 좋겠구나.”
“심려를 끼쳐 송구하옵니다. 소녀도 본래 그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날은 우연히 기녀들과 마주쳐서, 소녀 때문에 금전적 피해를 보게 된 듯하여 보상할 겸하여 데려간 것입니다. 소녀가 기녀들이 어디 있는지 어찌 알고 부르겠사옵니까.”
내 말이 일리가 있다 여겨졌는지 중전과 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런 일에 관해서는 자연히 팔이 안으로 굽어 줄 사람들이었으니 핑계도 덧붙이기로 했다.
“시영원에 있는 사람들은 아이들도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옹주인 소녀를 믿고 모여 몇 년간 열심히 살아온 이들이온데 소녀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집과, 약간의 곡식과 옷 등의 소소한 도움뿐이지 않사옵니까. 게다가 아이들도 다들 소녀의 지시로 공부와 노동을 함께하고 있고, 그런 아이들을 가르치는 이들 역시 고될 터인데 가끔은 그렇게 풀어 주는 날도 있으면 좋을 것이라 생각했사옵니다.”
“하여간 여전히 말은 청산유수로구나.”
“어린 옹주가 여전히 속이 깊으니 가끔은 칭찬도 해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세자.”
중전이 자애롭게 웃으며 나를 감싸자 세자가 가볍게 툴툴거렸다.
“어마마마께서는 시아에게 너무 무르십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세자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군요.”
모자가 그렇게 하하호호하는데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옹주 자가께서 이리 영명하시어 중전마마와 세자저하를 기쁘게 하시니 저희들도 그저 기쁠 따름이옵니다.”
말은 잘한다.
지금 저렇게 너스레를 떨고 있는 종친 영천군이 내 얘기를 꺼낸 장본인이었다.
그 옆에 있는 형인 화천군이 동생에게 눈치를 주고 있었으나 당사자는 뻔뻔한 얼굴이었다.
종친들이 왜 중궁전에 모여 있냐면 화천군의 여식인 송안의 혼사 얘기를 하는 자리라 그렇다.
혼기가 차서 혼담이 오가는 집안이 있는데 아무래도 대비 상중이다 보니 왕실 눈치가 보이는 듯하여 아예 중전이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고.
화천군과 영천군은 그래도 제법 가까운 종친 중 하나였다.
종친이 너무 많아서 잘 기억도 못 하지만 그래도 8촌 내의 왕족들은 그럭저럭 문안을 오는 편이라 얼굴과 군호 정도는 외우고 있었다.
그 자식들까지 생각하면 너무 많아서 혼란스럽지만.
아무튼 혼사에 관해서는 이미 상대 집안과 어느 정도 이야기가 다 끝난 상태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와서 넌지시 ‘어느 집안 아들 누구가 괜찮다고 하던데에 우리 집 여식이 마침 혼기도 차고 나이도 맞고 아무튼 그렇습니다아. 아니 뭐어, 그렇다고요.’ 하면서 눈치를 보며 허락을 구하는 자리였다.
혹시라도 그 집안에 대해 뭐 아는 게 있다면 은근슬쩍 얘기도 좀 나눠 보고, 별 하자가 없는 거 같으면 높으신 분이 두 집안의 혼사를 맺으면 어떻겠냐 이런 식으로 좋게 넘어가는 그런 자리.
아마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적당히 스몰 토크를 하다가 내 이야기가 나와서 바로 불려와 해명 타임을 가진 셈이었다.
기왕 이렇게 왔는데 굳이 처소로 돌아가는 것도 어쩐지 기분 나쁘다고 어필하는 것처럼 보일 거 같고, 일단은 친척 어른들이 와 있는데 먼저 일어날 순 없어서 결국 나까지 꼼짝없이 여기 앉아 있어야 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자네는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옹주 자가께 사죄드리게.”
“아,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형님.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옹주 자가.”
보다 못한 화천군이 시영원에 대한 소문을 말했던 동생 영천군에게 핀잔을 주었기에 나도 일단은 그냥 적당히 웃어넘기기로 했다.
사실 영천군은 예전에 대비에게 찬합에 대해 말해 분란을 일으켰던 장본인이기도 했으니 일부러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할머니 상중인데 기녀 불러다 놀았다고 하면 내가 뭐가 되냐.’
살아생전에도 좀 다툼이 있었긴 하지만 진짜로 패륜 손녀가 될 뻔했다.
그 사실을 잘 아는지 아버지를 따라 오랜만에 왕실에 온 그 자식들도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었다.
특히 화천군의 딸인 송안은 자주 보지는 못해 잘 아는 사이라고는 못하지만 얌전하고 조용한 인상이었는데 내가 들어올 때부터 얼굴까지 붉히며 민망해하고 있었다.
종친 아이들이라고 해도 그냥 그 나이대 애들하고 별로 다를 건 없어서 아이들끼리 모이면 꽤 깨발랄하게 노는 편인데 저 아이는 그중에서도 가장 말수도 적고 얌전한 아이였다.
‘좀 좋은 집으로 시집가야 할 텐데.’
사람이 너무 순하면 주변에서 걱정이었다.
적당히 근황 토크가 끝나고 이야기는 슬슬 본론으로 들어갔다.
“중추부동지사를 역임하였던 김주보 대감의 손자 말입니까.”
“아직 과거를 보지 않아 관직에는 진출하지 않았으나 문재(文才)가 있는 인재라고 들었습니다.”
하하호호 사윗감의 신상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얌전히 내 앞으로 나온 약과나 먹고 식혜나 마시고 있던 나는 문득 귀에 들려온 익숙한 이름과 관직명에 마시고 있던 식혜를 뿜을 뻔했다.
“쿨럭.”
“이런, 왜 그러느냐?”
옆에 있던 세자가 한심하다는 듯 나를 보며 조용히 혀를 차는 것이 보였다.
그거 아니다, 이놈아.
“중전마마.”
“무슨 일이오. 옹주.”
“혹시 송안 언니와 혼담이 오가는 가문에 대해 여쭈어도 될는지요.”
내가 당돌하게 어른들 대화에 끼어들자 세자가 당황해 물었다.
“어찌 그러느냐.”
“혹시 소녀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사옵니다.”
“옹주가 어디서…….”
거기까지 말한 중전은 내가 외간 남자와 마주쳤을 몇 안 되는 가능성을 떠올린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사태를 잘 알 리가 없는 종친들이 다시 한번 상대 남자의 신상을 읊어 주었다.
“중추부동지사였던 김주보 대감의 손자로, 이조정랑의 둘째 아들이라 하옵니다.”
“옹주 자가께서 혹 무언가 아시는 바가 있으시옵니까.”
“……들어 본 적이 있사온데. 그것이…….”
나는 힐끔 중전마마의 눈치를 살폈다.
중전도 의아한 듯 내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오. 옹주.”
“옹주 자가. 괜찮으니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딸의 혼사가 걸려 있는 일이라 화천군이 더 적극적으로 물었다.
“실은…….”
이거 말 안 하면 나중에 혼인하고 분명 속을 썩일 텐데.
‘그리고 말을 한 게 알려지면 괜히 원망을 살 거 같고.’
어느 쪽이든 원망을 살지도 모르는 결말이라면 죄 없는 쪽이 피해 가야 하지 않겠나.
“소녀가 얼마 전 사가를 보고 싶어 아바마마께 허락을 받고 잠시 나갔다 왔다는 사실은 중전마마께옵서도 아실 것이옵니다.”
“알고 있소. 옹주.”
“그때 나온 김에 과자를 가져다주고 싶어 궁인들과 함께 몰래 시영원에 다녀온 일이 있사옵니다.”
“그날 환궁이 늦어 시영원에 들렀다 왔다는 이야기는 소자도 들었사옵니다. 어마마마.”
세자가 은근슬쩍 나를 감쌌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런데, 그날이 시영원에 기녀를 부른 날이 아니더냐.”
맞다. 내가 왕의 허락까지 받고 궁 밖으로 나갔던 날.
“예, 그날 소녀가 시영원으로 가는 도중 기녀들과 함께 뱃놀이를 하러 가는 유생 무리를 보았사옵니다. 그들은, 아뢰옵기 망측한 일이오나 대낮에 길 한복판에서 싫어하는 기생을 희롱하고 있었사옵니다.”
“반가의 자손이 어찌 그런 짓이나 하고 다닌단 말이더냐.”
세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야기가 여기까지 오면, 내가 왜 이 이야기를 꺼냈는지 모를 수가 없을 터.
방 안에는 침묵이 깔리고 여기저기서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여기서 얘기를 멈출 수는 없지.
“기녀는 두려운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그만두라고 떨고 있었는데 유생들은 그것이 재미있는지 깔깔거리며 즐거워하고 있었사옵니다. 보다 못한 소녀가 어찌 백주대로에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이냐고 말리며 다가가자 어린 것이 어른들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하였사온데…….”
여기서 나도 겁먹은 듯 살짝 떨어 줘야지.
“그래도 울고 있는 기녀가 불쌍하여 끝끝내 막아섰더니 제 조부와 아버지의 관직명을 이르며 어찌 감히 제 앞을 막아서느냐고 하였습니다. 소녀가 옹주임을 밝힐 수는 없어 가만히 있었더니 무슨 뜻인지 모를 말을 하며 화를 내었사옵니다.”
“그자가 감히 너를 위협하였더냐?”
세자의 기세가 험악해지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성 겸사복이 함께 있어 그만두라 말려 주었고, 주변에 있던 이들도 어린아이에게 그리하지 말라며 말려 주어 물러났사옵니다.”
“감히 이 조선 땅에서 누가 옹주를 위협한다는 말이냐.”
“옹주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는데 어찌 알겠사옵니까.”
“하지만 이런 어린아이를 위협하는 자를 어찌 선비라 할 수 있겠느냐.”
그야 그렇지.
잠시 화를 삭이던 세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혹 네가 기녀들을 불러 잔치를 열었다는 것이 이 일과 관련이 있는 것이냐?”
“소녀 때문에 흥이 깨졌다며 유생들이 뱃놀이를 그만두겠다고 모두 가버리니 기생과 하인들 모두 황망한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짓까지 했단 말이냐.”
혼담이 오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기녀 데리고 놀러 가는 것도 모자라 대낮에 기녀를 희롱이나 하고, 말리는 어린아이를 위협하고, 거기에 진상질까지 했다는 말에 방금 전까지 사윗감을 칭찬하던 이들의 얼굴이 흐려졌다.
“다들 실망한 얼굴이기에 소녀의 책임도 있으니 대신 전두를 주겠노라고 기녀들을 달래 시영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된 일이었군.”
“다행히 모두들 즐겁게 놀 수 있었다고 기뻐하였지요.”
흐뭇한 얼굴로 웃던 나는 곧 눈을 내리깔고 겁먹은 척 얼굴을 숙였다.
“하지만 사실 소녀는 그날 일을 떠올리면 무서워서…… 궁 안에서 곱게만 자란 소녀에게 그리 윽박지르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어찌 상상이나 했겠사옵니까. 설마 유생들이 다들 그렇게 다들 어린아이를 못살게 구는 사람만 있지는 않겠지요?”
“크흠. 그런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까부터 불안하였는데, 설마 송안 언니가 혼인할 사람이 그때 그 유생이옵니까?”
순진함을 가장한 나의 질문에, 방 안은 침묵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