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93)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93)화(93/326)
지난 몇 년간, 나는 이제 나의 일상이 좀 편해질 거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해 왔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내 크나큰 오산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는 얼굴이 흐릿하게 기억나는 전생의 내 친구가 말하길.
오빠라는 족속들은 전생에 여동생과 원수를 진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
물론 오빠가 없는 나는 남동생이야말로 진정한 원수라고 주장하였고, 마찬가지로 남자 형제가 있는 친구들이 하나둘 참전해 오빠가 더 쓸모없다, 아니다 남동생이 더 쓸모없다로 부질없는 논쟁을 벌였다.
동생은 그래도 좀 귀엽지 않으냐, 그건 신생아 때 끝났다.
오빠는 그래도 용돈을 주지 않느냐, 그건 대체 어디 신화 속의 생물이냐, 구전 설화냐. 내 용돈 안 뺏어 가면 다행이다 등등.
서로 본인이 겪은 슬픈 증거 사례를 하나둘 나열하며 그렇게 남자 형제란 오빠든 동생이든 인생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상처뿐인 결론을 얻은 후, 그냥 사이좋게 치킨이나 먹으러 가기로 했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럭저럭 좋은 추억이었다…….
그때 그 치킨집 정말 맛있었는데.
떠올리니 갑자기 치킨이 먹고 싶어져서 그렇지.
염지한 닭고기를 밀가루옷 입히고, 빵가루까지 묻혀서 한번 튀길까?
아무튼 이렇게 다시 태어나서 생각해 봐도 그 친구의 그때 그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왜 이건 날 불러…….”
“네 감각이 믿을 만하다.”
이제 대비마마가 승하(昇遐)하신 지 5년이나 지났다.
탈상은 벌써 했고 이제 연회도 열 수 있었다.
그리고 올해 스물두 살인 세자는 궁중 진연을 열고 있었다. 그것도 제법 자주.
이렇게만 말하면 무슨 흥청망청의 재래냐고 하겠지만 그런 거 아니다.
왕실의 연회는 왕권을 강화하는 도구이기도 하니까.
아니 왜죠, 싶긴 한데.
조선 같은 유교 국가에서 예악(禮樂)을 바로잡고 왕을 중심으로 연회를 베푸는 것은 왕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었다.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사용했던 방법이기도 했다.
게다가 일개 양반가에서는 할 수 없는 규모의 연회는 아무래도 일개 양반과 왕가 사이에 선을 그어 주니, 왕실의 권위를 세우게 되는 법이었다.
사실 지금 왕권이 약하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은데, 세자가 아직 미혼이라는 게 유일한 공격거리였다.
탈상도 했겠다. 그럼 이런 상황에서 세자빈을 들이는 게 우선일 텐데 세자는 세자빈을 들이는 대신 왕권 강화를 택했다.
아니, 세자빈 들이고 세손 보는 게 더 권력 안정에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하지만 세자는 세자빈을 들이는 데에 무척 신중한 입장이었다.
물론 지금 세자의 위치를 위협할 만한 다른 대군이나 왕자도 없고, 세자의 정통성도 충분하며, 학식이 뛰어나다는 것 역시 모두 인정하는 바였다. 게다가 그간 세자로서 국정을 보좌해 온 경력이 쌓이고 있으니 이제 세자는 명실상부한 다음 대의 권력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이전과는 달리 세자빈 자리는 노리는 자들도 있을 법했다.
어떻게 아직까지 혼인 안 한 처녀가 있겠냐 싶겠지만 3년상이라는 게 재수 없이 겹치다 보면 어떻게 밀리고 밀리는 경우가 드물게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와 바뀐 그런 분위기가 오히려 세자의 인간 불신을 부채질하는 듯했다.
‘이제 와서 다들 세자빈 간택을 주청하면서 자기 딸을 세자빈 자리에 밀어 넣으려고 하니 탐탁지 않을 만도 하지.’
힘들 때는 다들 나 몰라라 하다가 이제 와서 친한 척하면 누가 좋아해.
싫어하는 티는 못 내더라도 가까이에 두고 싶지는 않은 법이었다.
그러니 그냥 찍소리 못하게 본인 권력부터 다져 놓고 세자빈을 뽑든 말든 하겠다는 생각인 거 같았다.
물론 내가 보기에는 여주인공을 만나기 전까지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올바른 남주의 무의식인 거 같긴 한데, 로맨스물 자아를 내려놓고 역사 좋아하는 사극 마니아 겸 현직 옹주의 솔직한 감상으로는 세자가 저 나이 먹도록 세자빈을 안 들이는 거 너무 어이없고 그냥 골치가 아프다…….
진심이냐……?
그래, 뭐 네가 괜히 남주겠니. 엑스트라인 난 모르는 일이다. 주인공들이 알아서 하겠지.
사실 왕도 뭐라고 안 하는데 내가 너무 뭐라고 하긴 좀 그런가 싶기도 하고.
그런데 대체 왜…….
“왜 나한테 자꾸 일을 시켜? 왜?!”
언젠가부터 종종 규장각에 붙잡혀 일을 하기 시작한 나의 비통한 외침이 허무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나의 이 원통함을 알아주는 이는 이곳에 없었다.
“하하하. 하지만 옹주 자가께서 연회 구성 능력이 뛰어나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옵니다.”
“이번에 생각하신 작은 수로를 만들어 등불을 띄운다는 발상도 훌륭하셨사옵니다.”
젊은 나이로 과거에 급제해서 승승장구하다가 세자의 눈에 들어 규장각에서 구르게 된 젊은 각신들은 본인들의 일이 줄어든다면 까짓거 옹주가 일 좀 하는 게 뭐가 어떻냐는 파격적인 마인드의 소유자들이었다.
“부정해 주면 안 됩니까.”
“어찌 사실을 부정하겠사옵니까!”
당신 원래 예조 관원이었잖아! 부정해야지!
간식 갖다주러 왔다가 생각나는 대로 몇 마디씩 거들었던 것이 이런 노동을 부르다니 역시 입은 화(禍)의 근원이었다.
하지만 세자는 제 신하들의 충심 아닌 충심이 기꺼운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렇지.”
“으앙, 부정해 줘!”
“아이고. 우리 시아가 졸린가 보구나. 오라비가 업어 줄까?”
“아, 필요 없다고!”
캬악!!
사석도 아닌데 우리가 둘 다 말이 짧아져 있는 걸 보면 확실히 지금 제정신들은 아니었다.
수면 부족으로 지친 나는 세자에게 가장 타격감 있는 공격을 넣었다.
“그렇게 아기랑 놀고 싶으면 조카 좀 만들어!”
조카! 조카를 보자!
“하하핫, 아기가 자꾸 아기를 보고 싶어 하는구나. 슬슬 가이가 옹주를 그만 부려 먹으라며 데리러 올 테니 오늘은 가서 자야지?”
그리고 이제 세자의 회피력은 만렙이었다. 다년간 세자 자리에서 구르더니 듣기 싫은 말은 적당히 흘려버리는 능력만 좋아졌다.
“아, 왜 혼인을 안 해!”
“하하하. 시아는 왜 이리 오라비를 빨리 혼인을 못 시켜서 안달인지 모르겠구나. 시집 안 가고 오라버니와 살고 싶다는 여동생도 있다는데.”
“뭐, 누가 그런 이상한 소릴 해? 그건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나올 수 없는 소린데?? 소설 안 읽는다더니 뭐 이상한 거 봤어?”
아니면 그거 혼처가 너무 거지 같아서 그냥 결혼 안 하고 집에서 살고 싶다는 뜻 아냐?
마침 식순을 살피던 젊은 문관 하나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요새 그런 소설이 유행한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있사옵니다만…….”
너, 그런 거 보니?
그 말에 숨겨진 의미를 깨달은 세자가 진저리를 치며 다급하며 변명했다.
“아니, 나는 그저 무영군에게 들은 얘기를 했을 뿐이다.”
“무영군이면…… 송안 언니네 오라비가 그런 얘기를?”
무영군은 화천군의 아들로 송안 언니의 오라비였다. 누이동생과 혼인할 예정이던 예비 매제가 기방 들어가는 걸 보고 멱살을 잡았던 일로 유명해진 인물이었다.
평소 행실이 조용하고 온화하다는 평판이 있던 사람이 한 일이다 보니, 그놈이 그냥 기방에 들어간 정도가 아니라 뭔가 하면 안 될 말이라도 했던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본인은 그냥 자기가 화가 나서 실수를 했다고 한동안 자숙에 들어갔다고 하지만.’
그리고 민망한 오해를 피한 세자의 화살은 만만한 신하들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자네들은 어찌 옹주의 편만 드는 것 같군?”
세자는 제 충실한 측근들을 돌아보았으나 다들 일하는 척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 일만은 저희들도 옹주 자가의 편인지라 그리할 수는 없사옵니다.”
“내가 헛살았구나…….”
요즘 보면 본인 신하들이 나랑 헛소리를 주고받는 것을 즐기는 거 같단 말이지.
왜 아주 예민하고 까칠하게 자랄 거 같던 세자가 이렇게 자랐을까. 물론 지금도 례에민하고 까칠하기 이를 데 없는 성격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자기 바운더리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좀 유했다.
애가 저렇게 된 것에는 지나친 업무 과중이 한몫을 했을 거 같은데.
그 업무 과중 중에 본인이 자초한 진연 개최가 있어서 그렇지.
그렇게 함께 굴러서인가, 세자의 측근이 된 젊은 관료들은 세자가 하는 일이라면 대부분 휑한 눈으로 따라오곤 했다.
내가 여기 같이 있는 것도 사실 이상한 풍경이지만 누구 하나 이를 트집 잡을 정신도 없어 보였다.
본래라면 과년한(!) 옹주가 이렇게 젊은 신하들과 마주치는 것은 옳지 않았지만 내 외관상 나이가 어려 혼인하기도 어려운 처지이다 보니 다들 내가 사람 만나는 것에 빡빡하게 굴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탈출도 못 하고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내보내 줘! 나 출궁할 거야!
“자. 가기 전에 일단 이번 연회에 출연할 기생들 순서부터 확인해 주고. 이번에 신곡도 넣는다며.”
“으으으.”
블랙, 블랙 기업……!
이런 건 백성들의 생활을 왕에게 전한다는 의미도 있다 보니 민간 가요도 마지막에 들어간다.
이거 내가 넣은 절차 아니고 원래 있던 거다…….
왕이 구중궁궐에만 있으니 아무래도 백성의 생활을 알 일이 없는 법이라 이런 식의 제도는 꼭 들어가 있더라. 의미가 있는지는 몰라도.
이번 진연에 올라오는 이들 중에는 매향이도 있었다.
무슨 노래 부를지 미리 들어 봤는데 이미 현대 가요풍이더라.
시영원에서 내가 부르던 노래 몇 곡을 알아내더니 혼자서 비슷한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냥…… 너무 잘 만들었더라고.
‘노래 가사에 시영원에서 놀이기구를 타고 싶다는 내용이 있다는 거만 빼면 불만은 없는데.’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유행가가 세태를 반영하는 법이었다.
게다가 시영원은 옹주가 만든 것이니 진연에서 불러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안타깝게도.
***
그리고 얼마 후 진연에서 매향이가 부르는 노래를 들은 왕은 그 가사에서 피식 웃기까지 했다. 내가 놀이기구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던 탓이랄까.
듣자 하니 요새 내가 만든 놀이기구가 동네 랜드마크처럼 여겨진다는 소문도 있더라.
아니, 그야 그냥 보면 특이한 조형물이긴 한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참고로 그 놀이기구들은 매달 전문가가 점검하며 안전을 살피고 사람들을 태우고 있다.
그리고 세자의 부탁으로 도성 안에도 회전목마 하나 만들어 놨는데 이건 좀 겉보기에도 화려하게 돈 들여서 해놨다.
지나다니는 사람들 보라고 만든 거 같지만 사실은 그쪽이 아니라 다른 쪽이 목적이었다.
외국에서 온 사신들이 입조할 때 보라고 만들었단다.
‘뭘…… 자랑하려는 거지.’
어쨌든 연회가 무사히 끝났으니 이제 한동안은 다시 연회라고 할 만한 일이 없었다.
‘이제 쉴 수 있겠지. 뒤처리까지는 내 몫이 아니고.’
하지만 다음 날, 어째서인지 나는 중궁전에 있었다.
“의국에 관한 일은 아무래도 옹주가 잘 알지 않습니까. 옹주도 이제 열여섯이니 나를 도와 여의들을 관리하는 일을 맡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내 두 귀를 의심했다.
네? 아니, 나의 워라밸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