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As The Daughter of a Lowly Concubine RAW novel - Chapter (97)
말단 후궁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97)화(97/326)
“그런데 어쩐 일이냐.”
“아. 세자저하께 부탁드릴 것이 있어 왔사옵니다.”
“네가 나에게 부탁이라니 드문 일이구나.”
세자는 오늘도 피곤해 보였으므로 나도 빨리 본론으로 들어갔다.
“시영원에 어린 남자아이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다고 들었다.”
“그런데 교육을 맡고 있는 것은 궁녀들이옵니다.”
“그래서?”
“엄격하게 가르치는 건 좋은데 성교육이 여성 위주라…….”
“커흠!”
규장각 안 여기저기서 민망한 듯 기침 소리가 흘러나왔다.
“제대로 된 성교육을 시켜 줄 사람이 필요하옵니다. 남편이 기방 같은 데도 가지 않고, 첩도 없는, 금슬 좋은 부부가 있으면 좋겠는데 조건이 너무 어려울까요?”
“아니 그…… 어찌 생각하시오들.”
“크흠. 흠.”
세자의 말에도 다들 헛기침을 하며 다들 대담을 고심하는 듯했다.
젊은 선비들 중에는 반박하는 이도 있었다.
“옹주 자가께서는 어찌 그런 사내가 드물 것이라 생각하시옵니까.”
“아직 젊은 선비들이 어찌 벌써 색을 탐하겠사옵니까.”
“하지만 예전에 유생들이 백주 대낮에 길 한복판에서 기녀들을 희롱하며 괴롭히는 것을 보았습니다.”
“!”
다들 얼굴에 경악이 흘렀다.
어떤 미친놈이 어린애가 보고 있는 앞에서 그런 흉한 짓을 했냐악!! 싶은 얼굴이다.
“내가 말리려 했더니 나를 겁박하려 했습니다. 그런 선비들이 많다면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옹주 자가, 소인들을 어찌 그런 불량한 자들과 비교하십니까. 섭섭하옵니다.”
“하지만 다들 명문가 자제들이라고 떵떵거리던데.”
“커흠. 크흠.”
명문가 출신의 몇몇이 헛기침 소리를 내며 나를 외면했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실드를 치지 말라고요.
“뭐 도덕 교육도 많이 했으니 알아서 잘 살 거라 생각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 아닙니까. 공부를 많이 했다는 유생들도 그러는데 혹시라도 어디서 못된 짓이라도 하고 다니면 제 체면이 뭐가 되겠습니까.”
“음. 그건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던 세자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네가 만든 학당에도 이미 아이들을 가르치는 유생이 있지 않더냐?”
“아직 미혼입니다.”
“저런…… 그런데 그 선비는 어쩌다 그곳에서 선생 노릇을 하게 된 것이냐?”
“어라, 말씀드리지 않았사옵니까? 예전에 시영원에 가는 길에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해 혜민서로 데려다주었는데, 열사병과 굶주림으로 쓰러진 것이라 하여 치료를 받게 했습니다. 그리고 깨어난 후 물어보니 고향에서 상경했는데 신세 지려 했던 친척 댁이 이사를 했는지 보이지 않고 수중에 돈은 없어 길을 헤맸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거둔 것이냐?”
“대화를 해 보니 학식이 쓸 만하여.”
“……네가 학식이 쓸 만하다고 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더냐?”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을 만큼은 눈치가 있는 것이지요.”
참고로 그 유생이 내가 혜민서에 패악을 부리게 된 계기였다. 당시에 열사병 환자가 많아서 약재 재고가 부족했다고 하더라고.
“알았다. 그 일은 내가 좀 알아보마.”
“부탁드립니다. 세자저하.”
애들이 슬슬 나이가 있으니까 사고 칠 걱정도 해야 하고 바쁘네.
하지만 민 상궁에게만 맡겨 두면 다들 무작정 혼인을 꺼리게 될 것 같단 말이지.
청춘남녀란 꼭 눈이 맞는 사람들이 나오는 법이니, 어설프게 막아 두는 것보다는 차라리 제대로 가르쳐 두는 편이 나았다.
‘아이고, 좀 쉬고 싶다.’
하지만 오늘은 종친 부인들이 오는 날이라 중궁전으로 가야 했다.
그런 모임에서 좀 빠지면 좋겠지만, 빠지면 빠지는 대로 안 좋은 소문이 나니 귀찮아도 꼬박꼬박 가야 했다.
‘중전 면을 좀 세워 드려야지. 그래도 일단 딸……이니까.’
피차 기댈 곳이 별로 없는 처지 아닌가.
***
종친 부인들과의 다과 시간이 끝난 후 겨우 내 처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늘은 부인들에게 줄 간식을 만들었기에 송비가 중궁전까지 함께했다. 중궁전에 함께 간다고 해도 송비는 밖에서 내가 나오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이니 뭐 좋을 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송비가 만드는 빵들은 늘 맛있었으므로 오늘도 모두 송비의 솜씨를 칭찬했기에 나도 당연히 그 칭찬의 말들을 송비에게 전했다.
“소인의 부족한 솜씨로 옹주 자가께서 기뻐하시니 소인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하옵니다.”
“늘 고생하는데 뭔가 원하는 건 없어?”
“요즘 옹주 자가께서 늘 바쁘시니 옹주 자가의 건강이 걱정일 뿐이옵니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그렇지, 다음에는 송비도 함께 나가자. 내 사택에 가 본 적은 있지?”
“예. 넓고 아름다운 궁가(宮家)를 보니 전하께옵서 옹주 자가를 얼마나 아끼시는지 알 듯하였습니다.”
“송비도 거기서 같이 살 거야.”
“후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송비와 훈훈한 시간을 보내며 돌아가는데 뜻밖의 인물들을 만났다.
딱히 반가운 얼굴들은 아니었다.
“파평부원군과 영천군, 흥화군 숙부가 아니십니까.”
세 사람은 나를 보고 공손히 인사를 했다.
나보다 항렬은 위였지만 신분상으로는 내가 더 위였으므로 서로 정중하게 인사를 해야 했다.
“옹주 자가가 아니십니까.”
“그간 격조했습니다. 그간 무고하셨는지요.”
“저희들은 전하를 뵙고 돌아가는 길이었사옵니다.”
파평부원군은 죽은 성원 세자의 외숙이었다.
썩 뛰어난 면은 없지만 특별히 나쁜 짓을 한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왕도 세자도 죽은 성원 세자를 생각해서 그럭저럭 잘 대해 주고 있었지만 어째 사람이 그리 정이 가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영천군은 뭐…… 일전에 화천군의 딸 송안의 혼사 때 본 적이 있는데 그때 묘하게 자기 조카 걱정보다 상대 집안을 감싼다 했더니 나중에 들으니 그 혼사를 주선한 사람이 영천군이었다고 했지.
덕분에 형인 화천군과의 사이도 조금 어색해졌다는데 눈치를 보면 나를 원망하는 모양이었다.
원래 중매는 잘 되면 술이 석 잔, 잘못되면 뺌이 석 대라는데 조카 중신을 서는데 잘 알아보지도 않고 소개를 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닌지.
마지막으로 흥화군은 나와 묘하게 인연이 있는 사이였다.
나와 직접적인 교류는 딱히 없었지만 내 생모인 윤 소의의 장례 때 생긴 인연이었다.
보통 후궁들이라면 친정집에 빈소를 차리고 상을 치르게 되는데 윤 소의는 천애 고아 신세라 친정집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곳에 빈소를 마련해야 했는데 먼저 나서서 자신의 집에 빈소를 차리겠다고 한 사람이 바로 흥화군이었다.
고작 궁녀 출신 후궁의 장례이니 다들 내켜 하는 이가 없었는데 유일하게 먼저 나서 준 종친이었다. 덕분에 내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던 동안 대신 상을 치러 주었으니 나에게는 무척 고마운 사람이었다.
‘아마 내가 이대로 결혼도 못 하고 후손도 없이 일찍 죽게 된다면 흥화군의 자손들 중 하나를 내 호적상 양자로 삼아 내 제사를 지내게 될 거 같지.’
대군, 왕자, 공주, 옹주는 불천위(不遷位)라 해서 보통 4대 조상까지만 지내는 제사와 상관없이 기일마다 제사를 지내게 되어 있으니 이미 수영 옹주라 봉작을 받은 이상 누군가가 나중에 내 제사를 지내 줘야 했다.
사실 세자가 자손을 여럿 본다면 그중 하나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데, 내 봉사손(奉祀孫:제사를 지내줄 자손) 이전에 아직 세손조차 태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안 그래도 영유아 사망률도 높고.’
물론 왕이 지정해 줄 수도 있지만 내가 좀 오래 산다면 내 의사에 따르게 될 것이 분명했고, 어느 쪽이든 기왕 종친 중에 하나를 양자로 들인다면 나와 인연이 있는 흥화군의 자손 중에 택할 것이 자명했기에 일부 종친들은 배알이 꼴려 하는 듯했다.
내 제사를 받든다는 건 곧 내 재산을 물려받는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왕에게 받은 재산도 적지 않은 데다 내가 사업으로 불린 재산까지 있다는 건 다들 익히 알고 있었다.
“옹주 자가께서도 혼인도 못 하시고 이리 지내시는 것이 고통스러우시겠지만 잘 이겨 내시길 바랍니다. 저희가 가족이 아닙니까. 힘든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도움을 요청하셔도 되옵니다.”
“허허. 옹주 자가께선 도성 안에 손꼽히는 부호(富豪)이시고, 주상전하와 세자저하께서 계시온데 무슨 근심이 있겠사옵니까, 물론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지내시는 것이 불편하시겠지만 이 또한 하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영천군과 파평부원군이 나를 앞에 두고 주거니 받거니 기나긴 막말을 늘어놓았다.
아니 나랑 대체 언제 얼마나 본 사이라고 이런 소릴 하는 거야. 시비 거는 건가?
“말씀하신 대로 주상 전하와 세자저하께 과분한 총애를 받고 있으니 무슨 근심이 있겠습니까? 받은 것이 많으니 그저 굶주리는 백성이라도 없도록 노력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주상전하와 세자저하를 위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근자에 도성 근처에도 배를 곯는 아이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혼자서는 여력이 부족할지도 모르겠다 싶어 걱정이었는데 이리 도와주시겠다고 먼저 나서 주시니 마음이 든든하기 그지없습니다.”
도와준댔으니까 도움 좀 받아 보자. 그래서 님들 쌀 몇 석이나 기부 가능하시죠?
아까 분명 도와준다고 말했다?
내가 가능한 한 기특하고 갸륵한 표정을 지으며 기대에 차서 묻자 나를 까던 기세는 어디 가고 둘 다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에라, 이 인간들아.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흥화군만이 여유롭게 인사를 건넸다.
“허허. 역시 옹주 자가께서는 자애로우십니다. 옹주 자가께서 사재(私財)를 풀어 배를 곯는 백성들을 그리 챙기시니 나라의 홍복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부원군, 영천군.”
“크흠.”
흥화군이 웃으며 마무리를 해 주자 두 사람도 서둘러 물러났다.
“그럼 바쁘실 터이니 저희들은 이만 물러가옵니다.”
“예. 살펴 가시지요.”
거참 뭐 하는 인간들이야.
흥화군은 죄가 없지만 그렇게 본의 아니게 스트레스 지수를 채워 버린 나는 처소에 돌아와서도 불쾌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했다.
“부원군께서 어찌 옹주 자가께 말을 그리 함부로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허. 입조심 하거라.”
“하지만 이는 옹주 자가를 무시하는 처사이옵니다. 부원군이라 하나 과거도 통과하지 못하고 부원군이라는 호칭만 가지고 있는 자가 아니옵니까.”
능력이 없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 깔 거리가 아니지만, 사람이 개념까지 없어야 곤란했다.
부원군이라고는 하나 세자가 어디까지 대우만 해 줄 뿐 그들이 도움이 될 거라 여기지는 않았으므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종친들이라고 다 저런 것은 아니다만.”
뭐 종친들이니 우연히 만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멀쩡한 사람도 많은데 하필이면 종친들 중에서 저렇게 비호감인 인간들을 만나다니.
다들 내가 자라지 않는 것을 걱정하면서도 내색하지 않는 편인데 저리 대놓고 비꼬는 놈은 드물었다.
“내일은 기분 전환이나 할 겸 나가 볼까.”
“그리하시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기분이 나빴는지 평소라면 뭘 또 나가냐고 잔소리를 했을 소이도 얌전했다.
‘마침 종친 부인들에게서 재밌는 얘기도 들었으니 사저에 들렀다가 거기도 가 봐야지.’
***
다음 날, 전날 약속했던 대로 오랜만에 송비와 함께 출궁했다.
목적지는 내 사가였다.
그리고 오늘은 성 겸사복도 함께였다.
‘은퇴하면 종신 고용해 주기로 했는데 내가 하가를 못해 잠정 보류되었으니 좀 미안하군.’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내 사가에서 살겠냐고 했더니 지금 살고 있는 곳이 겸사복 생활하기에는 편하다고 사양했다.
진짜 은퇴하면 올 생각인가.
다들 내 사가를 본 적은 있지만 주인 없는 집을 돌아다녔을 리도 없으므로 데리고 집 안 여기저기를 구경시켜주었다.
물론 내 컬렉션도.
“아이고, 소인이 보지 못한 사이 옹주 자가의 수집품이 더 늘어난 것 같사옵니다.”
“아아. 선물 받은 거라 그래.”
내 취향이 소문났는지 선물 받은 것들은 대부분 내 심미안을 통과하는 것들이라 사저에 이렇게 진열되어 있었다.
“옹주 자가. 옹주 자가께서 아니 계시는 동안 골동품을 취급한다는 자들이 몇몇 찾아왔었습니다.”
“골동품?”
“예, 고려 시대 것은 물론 신라, 백제 유물도 일부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으음. 어때 보였어? 사기꾼 같지는 않고?”
“소인이 무엇을 알겠습니까마는 행색이 궁핍해 보이는 자들은 없었사옵니다.”
“흐음.”
지금 대화하고 있는 영선은 예전에 왕이 나에게 반강제로 떠넘긴 노비들 중 하나로, 노비들의 특기 적성을 찾을 때 거의 모든 분야에 손을 들었던 인재였다.
그날 이후 재주가 많은 듯하여 이것저것 대화를 하다 보니 예술품에도 조예가 있어서 시영원이 아닌 내 사저로 데려와 내 수집품들을 관리하도록 하고 있었다. 물론 혼자 가족과 떨어지면 쓸쓸한 터이니 가족들도 함께 사저에서 지낼 수 있게 했다.
‘재주가 많은 사람인데 아깝지.’
노비가 되지 않았어도 양반가 여식이 이런 지식이 뛰어나다고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었을까 싶지만.
평소에는 말수가 적고 표현도 적은 사람이지만, 내 컬렉션을 보며 대화를 나눌 때면 눈을 반짝이며 이런저런 설명을 막힘없이 줄줄 늘어놓곤 했다. 특히 고려청자를 좋아해서 나와 취향이 제법 비슷한 사람이었다.
덕분에 지금 유물을 관리하는 일은 본인도 꽤 좋아하는지 은근히 만족스러운 얼굴이라 나도 보고 있으면 즐거웠다. 이런 관리적임자를 만나다니 정말 운이 좋았다.
그런 영선의 반응이 약간 기대에 차 있는 듯했기에 나도 조금 기대가 되었다.
게다가 영선이 말한 골동품상 중 하나는 어제 종친 부인들 중 하나가 말해 준 곳이기도 했다.
골동품 판매상들 중에서는 VIP고객에게만 따로 은밀한 가게를 소개시켜 주는 곳이 있어 수집벽이 있는 이들이 그곳에 모이기도 한다고 했었지.
“좋아. 그럼 오늘은 거기를 찾아가 보지.”
오늘은 기분 전환을 하러 온 거였으니 마침 딱 알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