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ss returns RAW novel - Chapter 121
119. 살아가는 이유
“군용 시뮬레이션이요?”
“사실, 가상현실은 여러 가지 산업 분야에서 폭넓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두드러진 것이 바로 군용이지요.”
“훈련을 한다는 겁니까?”
“훈련을 넘어 실전을 경험하게 하는 겁니다.”
“과연.”
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군대에는 광학화 장비라고 해서 여러 가지 장비를 착용시킨 후 실제 전투를 경험하게 했다. 하지만 역시 그건 여러 가지로 부실했다.
아무리 훈련을 한다고 해도 실전에는 미치지 못한다. 정말로 사람이 죽어 나가고 부상을 입는 그런 모습은 현실에서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상현실이라면 가능하다.
가상현실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
“군대 양성에는 제격이겠습니다.”
“실질적으로는 특수부대 훈련에 쓰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 세계에서 탐내겠는데요?”
“그렇죠.”
하성과 윤다희는 그렇게 확신하였다.
실제 전장을 경험할 수 있는 장비가 나온다면 단연 군대에서는 눈독을 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구매하려 할 것이다.
군대라면 다소 가격을 올려 받아도 될 것 같다.
“군대 납품이라.”
“일단 가서 체험해 보시겠습니까?”
“좋죠.”
하성은 가상현실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언젠가는 가상현실을 이용하여 영생도 가능한 날이 올 것이다. 아직 거기까지는 갈 길이 멀기는 했지만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회사에 도착했다.
이유필은 최근 1년 만에 폭삭 늙은 느낌이었다.
밤을 새우는 것은 기본이었고 아예 회사에서 생활을 하기도 했다.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부인이 있었다면 이혼을 당하지 않았을까 싶다.
몰골도 꽤나 꾀죄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은 빛나고 있었다.
“회장님! 나오셨습니까.”
“이 이사님. 도대체 집에는 언제 들어갈 겁니까?”
“하하하! 들어가 봤자 반기는 사람도 없는데 가서 뭐합니까.”
“하아. 결혼을 하세요. 돈도 많은 사람이.”
“저는 일과 결혼했습니다.”
이유필은 당당하게 그리 말했다.
일과 결혼을 했다는데 할 말이 없었다. 국가와 결혼을 했다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말을 인용한 건가.
이유필은 하성을 안내했다.
“이것이 국방용 캡슐입니다.”
국방색으로 칠해진 캡슐이었다.
군용이라고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일반용과는 다른가요?”
“그렇죠. 고통도 확실하게 느껴지고 무엇보다 현실감이 넘칩니다. 게임용은 어느 정도 고통도 경감시키고 현실감도 조정에 들어가기 마련이지만요.”
“대단하군요.”
“물론 시뮬레이션도 단계별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최대로 하여 제가 한 번 체험해 보도록 하죠.”
“최대치로 감도를 높이면 고통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총에 맞으면 진짜로 쇼크가 올 수도 있어요.”
“정신력이 강하면 상관없는 일이지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럼 해 보도록 하죠. 보자……. 서울 시내 전투가 있군요?”
“시가지 전투를 구현하였습니다. 북한군이 쳐들어왔다고 가정을 하고요.”
실제로 그리될 일은 거의 희박했지만 어디까지나 시뮬레이션이다.
“좋습니다. 가 보도록 하죠.”
“저도 갈게요.”
“윤 비서도요?”
“저는 소대의 부관으로 쓰도록 하세요.”
시뮬레이션 안에서 하성은 소대장으로 전투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 윤다희는 부관으로 있겠다는 것이었다.
딱히 안 될 이유도 없다.
“좋습니다. 함께 가죠.”
하성과 윤다희는 캡슐에 누웠다.
“고통이 심하시면 로그아웃하시면 됩니다.”
“그러죠.”
치이이익.
캡슐이 닫히고 전경이 확 바뀌었다.
쾅! 콰과과과광!
이곳은 서울 시내다.
건물들이 반파되어 있었고 시민들은 대피를 하고 있는 중이다.
하늘에서는 전투기들이 날아다녔고 저 멀리에서는 격렬하게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쾅!
파편이 떨어져서 머리에 쏟아졌다.
정말로 숨이 콱 막혔다. 그만큼이나 현실감을 중시하였던 것이다.
하성은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대장님! 강남역을 사수하라는 본부의 명령입니다!”
“응?”
눈앞에 윤다희가 서 있었다.
그녀는 무장을 하고 있었는데, 소대원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와아, 이거!”
“저도 놀랐어요. 어쩔 건가요? 지시에 따를 건가요?”
“갑시다. 소대 이동한다!”
강남역을 사수하라고 하니 사수하면 된다.
강남역에 이르자 바리케이드가 보였다. 그곳에는 중대가 모여 있었는데, 전방을 주시한 채로 긴장한 모습이었다.
소대의 대원들이 모두 자리를 잡는다.
철컥.
하성은 소총의 조정 간을 반자동으로 두었다.
“옵니다!”
타당! 타다다다당!
북한군이 돌격하고 있었다.
죽음을 도외시한 채로 돌격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가공할 만하다.
타다다당!
“끄아아악!”
바로 옆의 상병의 목에서 피가 터졌고 그대로 쓰러졌다.
확 피비린내가 풍겼다.
현실에 기반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현실적일 줄은 몰랐다. 이 캡슐은 절대 일반인에게 유출되면 안 될 것 같다.
하성은 소총을 전방으로 향하게 하고 쏘았다.
타당! 타당!
북한군의 머리가 터져 나가며 쓰러졌다.
“수류탄 옵니다!”
“숙여!”
콰과과과광!
삐이.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수류탄이 들어오는 바람에 꽤 많은 소대원들이 죽었다.
“아아아아악!”
“살려 줘!”
다리가 잘린 자들도 있었고 죽기 직전의 군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전장이 아닐 수 없었다.
절망이 느껴졌다.
애애애애앵!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북한군의 전투기가 엄청난 양의 폭약을 강남역으로 투하하고 있었다.
“퇴각한다!”
하성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마치 이곳이 현실인 것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게 되는 것이다.
퇴각을 하라는 명령이 늦었다. 이미 폭약이 떨어져 터졌다.
콰과과과과광!
화르르르륵!
불길이 확 치솟았다.
몸에 불이 붙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산산조각이 나려 하였다. 이대로 두면 고통이 심각할 것이다.
“로그아웃!”
지이이이잉!
캡슐이 열렸다.
그곳에는 이유필을 비롯한 개발팀의 직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성은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회장님. 어떠십니까?”
이유필이 물어 왔지만, 하성은 곧바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까의 충격이 되살아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혀가 내둘러질 지경이었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현실적일 수가 있단 말인가.
“대, 대단합니다.”
하성은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 정도라면 아예 가상현실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하성도 가상현실의 상황에 빠져들었는데 일반인은 더욱 빠져들 것이었다.
윤다희도 캡슐을 빠져나왔다.
“대단해요! 정말 물건을 만들어 냈군요?”
윤다희도 혀를 내둘렀다.
가상현실을 구현한 것이 엊그제인데, 정말로 현실과 같은 세계를 창조하였다. 이건 산업혁명으로 이어질 만큼이나 대단한 업적이었다.
“회장님. 국방부 장관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장관께서요?”
“방금 시뮬레이션 체험을 끝내셨다고 합니다.”
장관이 하성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뮬레이션을 체험하였다면 당연히 도입을 하고 싶어 할 것이다. 오히려 도입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가죠.”
하성은 이유필과 함께 회의장으로 이동하였다.
아직까지 후유증이 있었다.
사람이 죽을 때의 느낌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트라우마까지 일으킬 수 있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훈련은 확실히 된다.
회의실에 이르자 그곳에는 TV에서 자주 보던 국방부 장관 지충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회장님. 지충석입니다.”
“임하성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
만나자마자 본론을 꺼내는 것을 보니 지충석의 충격도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의 입이 열렸다.
“귀사의 캡슐을 저희 군에 납품해 주셨으면 합니다.”
***
솔직히 그리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캡슐이 보급되면 한국군의 전투력은 상당히 늘어나게 될 것이다.
“얼마나 납품을 받았으면 하십니까?”
“일단 수백 대 정도는 필요합니다. 특수부대를 창설하려 합니다.”
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국방부에서 필요하다는데 납품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마 타국에서도 주문이 쏟아질 것으로 보였다.
“좋습니다. 납품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일단 국방부 장관의 의지가 대단했다. 어떻게 해서든 빠르게 납품을 받았으면 하였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계약이 되었다.
스스스슥.
그는 망설임 없이 사인했다.
계약서를 서로 교환하였고 이제 계약금만 입금이 되면 곧바로 생산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계약금은 오늘 안에 들어갑니다.”
“바로 생산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관과 계약을 끝냈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다.
이유필이 하성에게 말했다.
“회장님. 바깥에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자들이요?”
“이제 곧 있으면 게임이 출시됩니다. 가상현실을 바탕으로 구현하는 게임입니다.”
“제목은요?”
“대륙전기입니다.”
아마 하성이 일전에 체험을 했었던 게임을 바탕으로 출시가 될 예정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기자회견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들은 회견장으로 이동하였다.
기자회견장에는 수많은 기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가득하였다. 가상현실이 실제로 구현이 되면 뇌를 디지털화하여 영생을 하는 것도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영원히 살고자 하는 마음.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곧 죽을 사람에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말한다면 전 재산을 주고서라도 다시 한 번 삶을 살 것이다.
그것이 설령 가상현실이라고 해도 말이다. 게다가 지금 나오고 있는 가상현실은 너무 현실적이었다.
촤륵! 촤르르르륵!
기자들이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거기에 여러 가지 질문을 쏟아 낸다.
“회장님! 이번에 가상현실 게임이 출시되는 것인가요?”
“바이오 분야와도 연관이 있나요?”
“회장님!”
하성은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무엇을 궁금해하는지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저희 신화게임에서는 대륙전기라는 게임을 출시하기로 하였습니다. 출시일은 두 달 후입니다.”
“바이오 분야와의 연관성은요?”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기술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영생이 가능한 것인지 묻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기술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가능한 기술인가요?”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하성은 그리 말했다.
이유필은 언젠가는 인간의 영생이 가능할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지금의 기술을 이용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인간의 뇌를 데이터화한다는 것은 아직 머나먼 이야기였다.
한 30년 이상 연구를 해 보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정도면 충분히 답을 준 것 같았다.
“이것으로 회견을 마칩니다.”
“회장님!”
수많은 기자들이 질문을 쏟아 내었다. 하지만 하성은 그 질문들에 답을 하지 않았다.
회장실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진땀이 났다.
아까의 충격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그건 윤다희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회장님. 냉차입니다.”
“윤 비서도 한 잔 마셔요.”
“그러죠.”
그들은 소파에 늘어졌다.
냉차를 한 사발 들이켜자 훨씬 나아진 느낌이었다.
윤다희는 아까 느꼈던 것을 이야기했다.
“정말 죽는 것 같은 느낌이더라고요.”
“저도 그랬습니다.”
“약간은 조절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건 국방부에서 알아서 할 문제죠. 회사 측에서는 클라이언트의 요구대로 조절을 해 주면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은 국방부에서 책임진다. 하지만 이것으로 확실한 사실은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특수부대를 창설한다고 한다.
“그건 그렇고.”
하성은 아까 기자들이 했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영생에 관련된 문제 말인데요.”
“영생이라.”
윤다희 역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영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민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윤리적인 문제도 동반될 수 있었다.
“가능한 일인가요?”
하성이 그녀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바쁜 하성보다는 윤다희가 이유필과 대화를 많이 나누어 보았다. 게다가 현재 신화그룹에서는 바이오 분야에 많이 투자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알고 있을 것이다.
“향후 10년 안에 가능합니다.”
“10년이라!”
조금 빠른 감이 있었다. 그렇다면 인류는 10년 안에 영생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건 극비지만요.”
“그래요. 극비로 다루어야겠습니다.”
하성은 아직 영생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기로 하였다.
민감한 사안이었고 사람들은 가상현실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저녁 무렵이 되었다.
하성은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생명윤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과연 인간이 영생을 할 수 있다면 윤리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생명의 존엄성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성은 어떤 결론도 내릴 수가 없었다.
식탁에 앉아서도 영생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유서화는 하성의 그런 고민을 눈치챘다.
“고민이 많아 보여요.”
“실은 가상현실이 완성되어서요.”
“같이 했었죠.”
“게임 세상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구축하는 데 성공을 했다는 것이죠. 하지만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라면……?”
“영생에 대한 것입니다. 앞으로 10년 정도면 영생이 가능한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영생!”
유서화도 놀라고 말았다.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영생을 갈망했었다.
진시황의 불로초를 시작으로 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위하여 노력했다. 하지만 그건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하지만 가상현실이 구현되고 그 안에서도 충분히 인간이 살아갈 수 있음이 입증됨에 따라서 영생이라는 화제가 도마 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유서화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실로 생각지도 못하였던 문제네요.”
“그렇죠.”
“만약 우리들이 죽을 때가 된다면 어떨까요? 그대로 죽는 것이 아름다울까요, 영생을 이어 나가는 것이 좋을까요?”
“저는 무조건 서화 씨와 영원히 살 겁니다.”
“윤리는요?”
“윤리보다는 서화 씨와 우리 아이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죠.”
“후후후.”
유서화는 낮게 웃었다.
이렇게 말을 하니 내심 기분은 좋은 것 같았다.
하성은 그리 생각을 했는데, 아마 다른 사람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보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나쁜 일일까.
유서화가 말했다.
“하성 씨도 저와 함께 살아가고 싶다고 했잖아요. 아마도 그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그렇겠죠?”
“확실히 그렇죠.”
하성은 유서화와의 대화에서 답을 얻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리 생각을 한다면 개발을 하는 것이 맞았다.
일명 영생 프로젝트를 실행할 때가 왔다.
과학기술은 극한으로 발달하였고 인류는 삶에 대한 욕구를 이어 나갈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종교계에서는 많은 반대를 할 것이다.
“종교계에서는 어찌 생각할까요?”
“종교계에서는 영생이 죽음 이후에 있다고 가르치죠. 그러니 반대를 할 거예요.”
“하지만 일반인들은요?”
“가상현실 세계가 천국이라고 치면 되죠. 언젠가 시간이 흐르게 되면 육체를 갈아타면서 살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군요.”
“그럴지도요.”
그날 밤에 하성은 유서화와 함께 영화를 보았다.
영화의 내용은 지금 슬슬 시작하려 하고 있는 영생에 대해 다룬 것이었다.
인간이 태어날 때 목 뒤에 기억저장소가 심어지고 그것이 파괴되지 않는 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영화에서는 죽음을 죽음으로 보지 않았고 저장소가 파괴되어야 완전한 죽음으로 보았다.
그 안에서는 종교적인 갈등도 있었고 윤리에 대한 문제도 지적되었다.
인간의 존재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영화가 끝나고 난 후에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이 흐른 후에 유서화가 말했다.
“저런 미래가 우리에게 온다는 뜻이네요.”
“그렇죠.”
“만약 저런 미래가 오게 된다면 당신과 함께 영원히 살겠어요.”
“그렇다면 저와 당신을 위하여 일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당신과 영원히 살아갈 수 있도록요.”
유서화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 나갔다.
#에필로그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오늘은 세계 일통이 이루어지는 날이었다.
실질적으로는 일주일 전쯤에 일본의 모든 조직들이 항복하면서 전쟁이 막을 내렸다.
원래는 몇 주일 정도면 지하세계의 세계 일통이 가능할 것으로 보았으나 그렇지 않았다.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는 끈질기게 반항하는 자들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치우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오늘 컨벤션센터에 치우의 모든 간부들이 모이게 된다. 전 세계에서 모이기에 수백 명이 넘는 인원이었다.
하성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유서화가 넥타이를 정돈해 주었다.
“드디어 오늘이 왔네요.”
“전 세계 모든 조직이 제 손에 들어왔습니다.”
“기뻐요.”
유서화의 말은 앞으로 하성의 손에 피가 묻을 날이 없을 거라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다.
세계가 일통되었으니 어떤 위험도 없어졌다.
유서화는 만삭이다.
예정일을 일주일 정도 남겨 두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아이라는 존재는 일주일 정도 일찍 태어날 수 있는지라 조심해야 한다.
“혹시라도 배가 아프면 연락을 해요. 바깥에 대원들이 대기하고 있으니까요.”
“알겠어요.”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이러다가 덜컥 배가 아파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빠가 된다니.’
이렇게까지 배가 나오자 하성은 아빠가 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최소한 부모가 된다는 것만큼은 공평한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럼 다녀올게요.”
“그래도 조심하세요.”
“걱정 마세요.”
하성은 집을 나섰다.
서울컨벤션센터로 향하는 길이다.
리무진 안에는 주작이 타고 있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가 무슨 고생을 했다고.”
“지금까지 많은 고생을 하셨죠.”
주작의 말에 무턱대고 겸손만 떨고 있기도 뭐했다.
그녀의 말대로 하성 역시 많은 일들을 겪어 왔다. 세계 일통이 거저 되는 일은 결코 아니었다.
그래도 그 공은 간부들에게 더 있었다.
“주작을 비롯한 간부들이 고생을 하였죠.”
“절대 그렇지 않아요. 모든 것은 주인님의 공로입니다.”
“후후.”
사대천왕들은 언제라도 그리 말할 것이다.
이제는 제갈천도 제법 치우에 녹아들어 있었다. 다행히도 제갈천의 실력 상승은 오래전부터 멈추었다.
하성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30분 정도를 달려 컨벤션센터 대회의장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수백에 이르는 간부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이들이었다.
반항하는 자들은 모조리 숙청해 버렸다.
즉, 치우에 대항하는 조직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성이 상석에 앉았다.
제갈천을 비롯한 사대천왕들이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쿵!
“주인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쿵쿵!
“충성을 맹세합니다!”
그 뒤를 이어 신규로 편입된 모든 조직원들이 무릎을 꿇었다.
수백 명이라면 일개 조직의 인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건 조직원의 숫자가 아니라 전 세계를 다스리던 보스들의 숫자였다.
하성은 이제야 세계를 일통하였음을 실감했다.
오늘은 회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무려 수백 명의 조직원들이 참여를 하는 회식이었다.
하지만 하성은 회식에 참여할 수 없었다.
윤다희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회장님! 사모님이 병원에 계십니다!
“뭐라고!”
-출산이 임박했습니다.
하성은 곧바로 병원으로 이동하였다.
출산이 임박하였으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병원에 도착하여 곧바로 분만실 앞으로 이동하였다. 그곳에는 이미 윤다희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윤 비서님!”
“지금 분만 중에 있어요.”
“들어가면 안 되나요?”
“이미 늦었어요.”
남편이 분만실에 들어가는 경우는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리하기에는 늦었다고 한다.
예정일이 일주일이나 남아 있었지만 출산이 앞당겨졌다. 그렇다고 미숙아가 태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는 일주일 일찍, 혹은 늦게 태어나기도 하였으니까.
“좀 앉으세요.”
“그게 잘 안 되는군요.”
모든 아버지들이 그럴까.
아마 출산을 한 번이나 두 번 정도 경험한 아버지들이라면 긴장이 덜할 것이다. 하지만 하성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멀었나.”
“길게는 몇 시간이 걸리기도 해요.”
“빠르면 20분도 걸리지 않는다던데.”
“그건 드문 경우이기는 한데.”
어리면 어릴수록 아이를 잘 낳는다.
하지만 하성은 혹시나 아내가 난산이 아닐까, 고생을 하지 않을까 별의별 생각들을 다 했다.
“후우.”
“너무 긴장하시는 것 같네요.”
요즘 들어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긴장하지 않는 하성이었다.
가히 절대자의 풍모를 보여 주고 있는 그였지만 역시 이런 일에 면역이 없었기에 상당한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분만실 안에서 비명과 함께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가 나왔다.
“후우. 딸입니다.”
“그렇군요.”
이미 딸인지 알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아이는 씻은 모습으로 유서화의 옆에 놓여 있었다.
“고생하셨어요!”
“죄송해요.”
“뭘요?”
“아들을 낳았어야 하는데…….”
하성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들을 낳든 딸을 낳든 잘 기르면 되는 것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너무 가부장적으로 교육을 받았다.
“저는 상관없어요. 그저 당신이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이죠. 딸도 잘 키우면 회사를 물려줄 수 있어요.”
“그래도요.”
“정 그러면 또 낳으면 되죠.”
“그건 그렇죠?”
유서화는 이 순간에도 또 아이를 낳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최소한 해산을 하는 그 순간에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유서화는 그리 말하지 않았다.
“고생 많이 했어요.”
하성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드디어 하성도 아빠가 되었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고 한다.
아직도 첫째를 출산하였던 때가 떠오르고는 한다.
10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그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아빠! 식사하세요!”
큰딸 예슬이가 말했다.
하성은 문득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래.”
첫째 아이가 임예슬, 둘째는 임태하다.
예슬이가 올해 10살, 태하가 8살이다.
이로써 하성 역시 서른이 되었다.
오늘은 둘째 아이가 학교에 입학을 하는 날이었다.
“세월 빠르네.”
하성은 그렇게 말하며 식탁에 앉았다.
유서화는 변한 것이 없었다.
아이들은 엄하게 훈육되었고 그 때문에 예의가 발랐다.
현모양처의 표상이었고 언제나 가정을 생각한다. 종종 이야기했던 회사에 대한 관심도 끊어 버렸다.
바깥일은 오직 남편이 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었다.
그들의 호칭에도 변화가 있었다.
“여보. 오늘 입학식에 오실 수 있나요?”
“당연히 가야죠. 이날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신화그룹은 세계 1위의 대기업이 되어 있었다. 바쁘게 보내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지만, 하성은 여유로운 삶을 즐기고 있었다.
내키지 않으면 회사에 나가지 않는 날도 허다했다.
오늘은 회사에서 중요한 업무만 처리하고 아들의 입학식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집을 나선다.
그들은 이사를 했다.
서울 외곽의 한적한 곳에 주택을 지었다. 그리 크지는 않은 주택이었다. 굳이 메이드와 집사를 둘 필요가 없다는 유서화의 의견 때문이었다.
집 앞에는 리무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달칵.
문을 열고 윤다희가 나왔다.
그녀는 구조본부장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동시에 비서실장의 직위도 유지하고 있었다.
다소 나이가 든 얼굴이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이유필 이사와 마찬가지로 일과 결혼을 했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나오셨군요.”
“윤 비서.”
“왜 그러시죠?”
하성은 그녀에게 결혼은 언제 할 거냐고 물으려 하다가 말았다. 괜히 그렇게 말을 해서 속을 긁었다가는 며칠 동안 잔소리를 들어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험험. 아닙니다. 오늘 제가 아들 입학식에 가야 합니다. 가능하면 중요한 일만 처리를 하고 가려 합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군요. 태하가 8살인가요?”
“네.”
“하지만 오늘은 반드시 회사에 오셔야 해요. 가능하면 오전이라도 계셔야 해요.”
“2시간 후에는 가야 하는데.”
“선대 회장님을 만나셔야죠.”
“……!”
하성은 눈을 부릅떴다.
2년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하지만 돌아가시는 즉시 시신은 냉동 보관했다. 추후에 인간의 뇌를 데이터로 만드는 작업이 완료된다면 가상현실에서 부활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영생을 위한 첫 번째 목표는 할아버지의 부활이었다.
물론 현실 세계에서 할아버지는 부활하지 못한다. 그건 현재의 기술로는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상현실에서는 가능했다.
“드디어 그리되었군요.”
“오랜 연구가 결실을 보는 날이지요.”
가슴이 뛰었다.
10년 전, 하성은 인류의 영생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그 시기를 수십 년 후라고 발표를 했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10년 안에 가능하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빨리 가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리무진은 빠르게 서울 시내를 가로질렀다.
회사에 도착하였다.
이유필이 하성을 맞았는데, 그의 얼굴에서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 이사님!”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이유필의 얼굴은 상당히 상기되어 있었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드디어 인간의 뇌를 데이터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건 산업혁명이나 다름이 없었다.
현실과 다른 세상이 열린다.
이제 정말로 죽음을 맞는 사람은 없어질 것이다. 사고사를 당해서 뇌 자체가 빨리 죽어 버리거나 데이터화를 거절하지 않는 이상 인간은 충분히 영생을 누릴 수가 있었다. 다만 가상세계를 구축하는 작업과 AI 작업은 이루어져야 한다.
가상의 세계에서 충분히 사람이 채워지기 전까지는 NPC들도 함께해야 하는 것이다.
“드디어 선대 회장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데이터화가 끝났나요?”
“끝났습니다.”
실로 어마어마한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하성은 캡슐에 누웠다.
“선대 회장님께 안부 전해 주십시오.”
“그리하겠습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뛰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과 함께 주변의 전경이 바뀌었다.
***
가상의 세계는 이전보다 더욱 발달해 있었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호텔이었다. 스위트룸에는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할아버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하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나는 죽은 것이 아니었느냐?”
할아버지는 쓰러지기 직전까지의 기억을 가지고 계셨다.
이것만 보아도 뇌를 데이터화하는 작업은 성공을 한 것이었다.
“이곳은 가상세계입니다.”
“가상세계라. 영생을 추구하려는 목적으로 가상세계와 바이오 분야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었지. 성공한 것이냐?”
“예.”
“하지만 나는 죽은 지 꽤 시간이 지난 것으로 생각된다만.”
“육체를 얼렸습니다.”
“저온 보관하였다는 뜻이로구나.”
“예. 그것이 뇌세포를 보존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허허허허.”
할아버지는 허탈하게 웃으셨다.
드디어 영생을 하는 길이 열렸다. 할아버지는 인류 최초의 영생자가 될 것이다. 하성이 죽은 순간에도 함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뵙게 되어 좋군요.”
“허나 나는 영생을 바라지 않는단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순리대로 살아야 한다. 죽을 때가 되면 죽는 것이 당연한 이치니라.”
“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추구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영생을 원할 거라고 볼 수는 없지.”
할아버지는 술을 한 잔 마셨다.
하성 역시 할아버지와 함께 술을 마셨다.
“이곳에서는 젊게 살아가실 수 있습니다. 여행을 다 하지 못하셨으니 세계를 여행할 수도 있고, 원하신다면 판타지나 무협세계를 체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됐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일축했다.
사실은 조금 당황스럽다.
할아버지도 인간이기에 분명히 이곳에서 살아갈 것이라고, 그리고 종종 하성이나 사람들을 만나길 원할 거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가족들을 만나는 것을 반기셨다. 이곳에서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걸 바라지 않았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굳이 천명을 어기고 싶지 않구나. 나는 충분히 살았다. 네 나이 때에는 모르겠지만, 80살이 넘으면 영생에 대한 생각이 사라진다.”
“모두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모두 그렇지는 않겠지.”
“저는 할아버지가 제 곁에 계셨으면 합니다.”
“하성아.”
“예, 할아버지.”
“이만 되었다. 나는 너를 만난 것으로 만족한다. 영원한 죽음을 맞았으면 하는구나. 그것은 죽음이 아닌 안식이다.”
“그건…….”
당황스러운 일이다.
과연 영원한 죽음을 안식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걸까.
하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에 제가 올 때까지만이라도 생각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허허허! 아예 오지 않으려는 건 아니고?”
“아닙니다. 그때까지도 마음이 바뀌지 않으신다면 영원한 안식을 드리겠습니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안식을 하겠노라.”
으드드득!
하성은 이를 악물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그리 슬프지는 않았다. 어차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꼭 그리하셔야겠습니까.”
“…….”
몇 번이나 설득하려 하였지만, 할아버지는 요지부동이다.
하성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식을 드리겠습니다.”
“고맙구나.”
할아버지는 그렇게 웃으셨다.
이것으로 된 걸까.
할아버지는 안식을 원하셨고 하성은 그리하겠다고 말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하성이 여기서 손을 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만 가겠습니다.”
“그래. 가거라.”
“앞으로 1시간 후에 데이터를 삭제하겠습니다.”
“허허허! 고맙구나.”
하성은 로그아웃했다.
지이이잉.
캡슐을 나왔다.
이곳에서는 윤다희와 이유필이 하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1시간 후에 할아버지의 데이터를 삭제합니다.”
“뭐라고요!”
“할아버지는 안식을 원하셨습니다. 몇 번이나 설득을 했지만, 되지 않더군요. 결국 안식을 드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후우. 그러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판단을 내리실 것이라고는.”
안타까워하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하성은 몸을 돌렸다.
“삭제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아이 입학식에 가 봐야 해서요.”
“알겠습니다.”
차마 하성의 손으로 할아버지의 데이터를 삭제할 수는 없었다.
데이터가 삭제된다면 그건 영원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목숨을 끊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옥상에 잠시 올라왔다.
갑자기 담배가 피우고 싶었지만, 차마 진짜 담배를 피우지 못하였고 전자담배를 사다가 피웠다.
“후욱.”
“여기 계셨군요.”
“윤 비서님.”
“유감입니다.”
“아닙니다. 저도 어느 정도는 이리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항상 윤리에 대해 강조를 하셨죠.”
“그분의 뜻이니 지켜 드려야지요.”
“저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삶의 욕구가 대단한 동물이 아니었던가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요.”
하성은 몸을 돌렸다.
할아버지에 대한 생각은 여기서 그만하기로 하였다.
그건 본인이 선택한 길이다. 하성이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손자였고 할아버지의 뜻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씁쓸한 일이었지만, 오늘은 그런 기색을 지우기로 하였다.
아들의 입학식이었고 기쁜 낯으로 학교에 가야 하는 것이다.
학교 앞에는 웬 기자들이 떼로 몰려 있었다.
혹시 하성 때문인가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쪽으로 몰려왔다.
‘역시나.’
“회장님! 영생 프로젝트가 완성 단계라는데, 사실인가요?”
“이번 프로젝트로 선대 회장님께서 살아나셨다던데 맞나요?”
“흐음.”
하성은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들의 말이 맞았다. 영생 프로젝트는 완성되었고 할아버지도 되살아났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죽음을 택하셨다.
이 이야기를 전하면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이 일 것이다.
최소한 오늘만큼은 일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고 싶었다.
“오늘은 아들의 입학식입니다. 가능하다면 일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지만 회장님!”
“다음에. 다음에 회견을 열겠습니다.”
하성은 입학식장에 도착했다.
아내가 딸과 함께 그곳에 있었다.
강당 안에서는 입학식 준비가 한창이다.
꼬맹이들이 식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출산율이 갈수록 떨어져 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꽤 많은 아이들이 입학을 한다.
“오셨어요?”
“드디어 태하도 입학을 하는군요.”
“후후. 저도 믿기지가 않네요.”
세월은 유수와 같다.
하성은 아들이 벌써 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가끔 돌이켜 보면 세월의 흐름이 정말 빨라서 신기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특히나 나이가 들면 들수록 세월이 흐르는 속도는 빨라졌다.
“세월이란.”
“후후. 세월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앞으로 영원히 함께하게 될 텐데요.”
“그건 그렇지요.”
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월의 흐름에 감상에 젖어드는 건 인간이 죽는다는 가정이 전제되어 있다. 영원히 산다면 감상에 젖을 이유가 있을까.
“아이들도 언젠가는 영원히 함께하게 되겠군요.”
“손자는 물론이고 몇 대에 걸쳐서 인사를 하러 오겠네요.”
“우리가 시조가 되는 거죠.”
그런 날은 분명히 올 것이다.
언젠가는 가상현실에서 벗어나 현실에서의 삶을 살지도 모른다. 그리고 기술이 더욱 발전한다면 행성을 여행하게 될 날이 올 수도 있었다.
물론 먼 미래의 이야기다.
곧 입학식이 시작되었다.
하성은 아들이 입학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딸이 입학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입학식 끝나고는 점심을 먹어야 할 텐데.”
“피자 먹을까요?”
“피자를요?”
유서화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항상 좋은 것만 먹이려고 애썼다. 인스턴트에 기름 덩어리인 피자를 아이들에게 먹이려 하니 내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하성은 웃으며 말했다.
“의학도 발전하고 있고 어차피 영원히 살아갈 텐데 현실에서 피자도 못 먹으면 아이들 심정이 어떻겠어요?”
“오늘만이에요.”
하성은 어렵사리 그녀의 허락을 얻어 낼 수 있었다.
피자가게에 도착했다.
아이들은 정말 좋아했다.
“와아! 정말 피자 먹는 거예여!”
“오늘만.”
“아빠, 고마워요!”
아이들은 연신 하성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유서화가 아이들에게 피자를 사 주는 일은 좀처럼 없다. 여기에는 필시 하성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사실을 아이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은 지당한 것이었다.
“그래. 많이 먹어라.”
“적당히 먹어야 해.”
유서화는 아이들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이들은 하성의 옆에 앉아 있었다. 그래야 피자를 많이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자가 나오자 아이들은 빠르게 접시를 비워 나간다.
“천천히 먹어라.”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잖아요?”
“한 달에 한 번은 아빠가 가게에 데려오마.”
“정말이죠?”
“그럼! 정말이지.”
유서화는 찌릿, 하성을 바라보았지만 대놓고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이들 교육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아니더라도 남편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은 최대한 자제를 하는 그녀였다.
저녁이 되었다.
유서화는 아이들을 재웠다.
하성은 신문을 읽고 있었다. 하지만 신문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까 하성은 이유필에게 연락을 받았다. 할아버지의 데이터를 모두 삭제하였다는 전화였다.
“후우.”
“무슨 걱정 있으세요?”
아이들을 모두 재운 유서화는 하성의 곁에 앉았다.
이건 걱정이 아니라 안타까움이었다.
“할아버지의 일입니다.”
“가상현실에서 살아난 것이 아니었나요?”
“그걸 거부하셨습니다.”
“거부를 하셨다니…….”
“안식을 찾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안식이라.”
유서화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로서도 상당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왜 그러셨을까요?”
“글쎄요. 지치신 것일 수도 있고요.”
“저는 외로움 때문이라고 봐요.”
“외로움 때문이라고요?”
전혀 새로운 생각이었다.
가상현실 세계에서는 어떤 인물이라도 될 수 있었다. 현실에서는 못 했던 일들을 하며 세월을 보낼 수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건 축복이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저주일 수도 있었다.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없잖아요.”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할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영생을 누리셨을지도 모르죠.”
“……!”
듣고 보니 유서화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동물이다. 특히나 외로움에 몸서리를 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었다.
그 때문에 배우자라는 존재가 중요하다.
배우자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평균 수명에서도 확연한 차이가 난다.
또한 배우자가 먼저 죽으면 몇 년 후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사람도 많았다. 이것은 외로움 때문일 것이다.
“그 넓은 세상에서 함께 즐길 사람이 없다면.”
“맞습니다. 당신 말이 맞아요.”
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자가 생존해 있지 않았기에, 혼자서는 영생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이제야 할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보내 드려요. 마음속에서도요.”
“네.”
하성은 바깥으로 눈을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서화가 하성을 끌어안았다.
“우리들은 영원히 함께하도록 해요.”
그녀의 따듯한 마음이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일생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것.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