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ss returns RAW novel - Chapter 14
13. 작곡가 안병태
편지를 읽고 난 하성은 곧바로 라이터에 불을 붙여 태워 버렸다.
곁에서 함께 밥을 먹고 있던 이유나가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편지의 내용이 별로였어?”
“그런 것이 아니야.”
“아까 걔를 보니까 예쁘던데…….”
이유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래도 뭔가 심경에 변화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오늘 치우를 만날 생각에 하성은 깊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치우를 만나게 되면 여러 가지 의문점이 풀리겠지.’
하성이 기대한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치우는 오랫동안 아버지의 정보단체로 활동을 해 왔었다. 임가 호위무사가문이기도 하였기에 임상옥 조사에 대한 비밀도 꽤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미령과 화룡상단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그밖에도 임가를 위협하는 흑막에 대한 이야기나, 따로 아버지가 하성에게 남긴 것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 생각이 들자 가슴이 조금은 후련해 졌다.
임가에 얽혀 있는 거대한 비밀과 마주한 후에 가슴이 갑갑했었던 차였다. 뭔가 얽혀 있는 것은 많았지만 속 시원하게 풀어 낼 수가 없었으니 골치가 아팠던 것이다.
하성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디에 가려고?”
“밥 먹었으니까 운동을 해야지.”
“운동을 한다고?”
“그래. 일진들을 불러들여 박살을 내 버려야지.”
“어제도 충분히…….”
“그 때는 그 때고.”
하성은 씩 미소를 지었다.
이유나는 하성이 진심으로 복수를 시작하려 한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아니, 하성에게는 복수보다 더 고차원적인 목표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대화고교 2학년 6반.
대화고교 일진이자 동대문구에서도 지역구 캡짱으로 인정하고 있는 싸움꾼이 바로 오문식이었다.
오문식은 작년도 킥복싱 챔피언이다. 학생부 챔피언이기는 하였지만 앞으로 동양 챔피언을 노리고 운동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최소한 서울에서는 적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임하성에게 무참하게 짓밟혔다. 어제는 턱에 맞아 한 방에 나가 떨어졌던 것이다.
치사한 일이었지만, 그는 다구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백기가 진지하게 임하성을 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놈은 일대일 대결로는 어떻게 안 돼. 어제는 네가 빠져서 당했지만 오늘은 아닐 거야.”
“병신들이, 몇 명인데 하나를 못 당하냐?”
“말도 마라. 괴물이라니까.”
“오늘 하교에 뒷방을 까자.”
“괜찮겠지?”
“씨발 좆밥이 힘이 좀 세졌다고 그 기질이 어디 가겠냐? 몇 대 쳐 맞기 시작하면 예전 기억이 되살아나겠지.”
그들이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였다.
드르륵!
교실 문이 열리고 강선진이 달려왔다.
“문식아! 그 새끼가 전부 옥상으로 모이란다!”
“뭐라고?”
“상황 좆같이 됐다니까.”
“이 새끼가 누굴 병다리 핫바지로 보나. 애들 전부 모이라고 해!”
찰칵
“후우.”
하성은 쿠바산 시가를 입에 물었다.
이전까지는 담배를 피우지 않던 그였지만, 조직을 이끌어 나가려면 몸에 좋지 않은 담배도 어쩔 수 없이 피울 때가 많았다.
대부분 조직원들이 담배를 태우는 것을 보면 하성도 담배를 태우는 것이 맞다. 웃긴 일이었지만, 조직이라는 특성이 하성을 그렇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옥상으로 일진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제 쳐 맞은 자리가 오늘은 가라앉았겠지?”
“임하성 이 새끼…….”
오문식의 얼굴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놈은 얼마 전에 불알이 깨졌고 어제는 턱을 맞고 한방에 나가 떨어졌다. 그만한 망신살도 없었던 것이다.
오문식이 뭐라고 생각을 하건 하성은 실전을 쌓기 위해 놈들을 부른 것이었다.
아직 하성의 실력은 전국구 스타에는 미치지 못했다. 대략 조직 간부와 전국구 스타의 중간 정도로, 앞으로 아수라장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력을 배양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대화고교 일진들은 그래도 운동을 하는 놈들이 꽤 있었다. 특히나 오문식과 강성진 등은 지역대회 혹은 전국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도 했다.
그런 무예자들과의 수련이라면 하성에게도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하성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다 덤벼.”
“미친 새끼! 쳐라!”
퍽퍽퍽퍽!
오문식은 구타를 당하면서도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잘 이해를 하지 못했다.
숫자에 장사가 없다는 건 오문식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 자리에 세계 정상급 챔피언이 오지 않는 이상은 버틸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상식이 타파된 것이다.
불과 5분도 되지 않는 사이에 모든 학생들이 쓰러져 버렸다. 그러고 나서는 오문식을 향한 구타가 시작된 것이었다.
한참이나 그를 두들겨 패던 임하성은 구타를 멈추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사람이 바뀌어도 이렇게 바뀔 수가…….’
그야말로 방학 기간 내에 사람이 180도로 바뀌어 버렸다.
인간이 이만큼이나 순식간에 바뀌는 것이 가능할까 싶었다.
평소에 돈 걱정은 하지 않고 살았던 오문식이다. 인출 기계처럼 임하성에게서는 돈이 무궁무진하게 나왔기 때문이다.
그간 무지하게 괴롭히기도 하였고 그 덕분에 편한 생활을 했었다. 헌데 방학이 끝난 후에 인간이 바뀌어 왔다.
전설의 소림사나 무협지에 나오는 무예를 수련하지 않는 이상 이렇게 순식간에 강해질 수는 없었다.
“이 새끼야. 불을 붙여야지.”
“조까.”
임하성은 그에게 불을 붙이라 말했고 당연히 오문식은 거절했다.
이런 놈에게 굴복할 수는 없다!
임하성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더니 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다른 학교에도 실력자들이 있을 것 아니야? 걔네들 다 불러서 내일 싸우도록 하자. 오늘은 바쁘니까.”
“뭐라고? 미쳤구나. 열 명을 상대하는 것하고 백 명을 상대하는 것이 같다고 생각하냐?”
“지면 할 수 없고.”
“하하하하! 이거 완전히 개 또라이네.”
오문식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는 서대문구의 캡짱이었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백 명을 모으는 것도 가능했다. 헌데 지금 임하성은 그 백 명을 상대하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오문식으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내일 학교 마치고 백 명을 모아 주마.”
“그래, 고맙다.”
임하성은 정말로 고맙다는 듯이 오문식의 어깨를 두드렸다. 임하성의 표정에는 어떤 사심도 들어 있지 않았다. 오직 백 명과 싸우게 되었다는 것에 정말로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미친놈인가?’
오문식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고교 폭력계 역사상 백대일로 맞짱을 뜬 사례는 없었다. 백 명을 모으면 그 안에 어중이떠중이도 있기 마련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백대일로 맞짱을 떴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일진들 사이에서는 전설이 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버텼을 때의 이야기지, 시작하자마자 꼬꾸라지면 그냥 미친놈으로 생각될 뿐이었다.
하성은 수돗가에서 피를 닦고 있었다.
몇 군데 멍이 들기는 해도 피가 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이 피는 모두 일진들의 것이었다.
촤아아아아!
시원하게 세수까지 하자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곁에서는 이유나가 걱정스럽게 하성을 바라보았다.
“배, 백 명이라니! 그러다가 죽으면 어떻게 해?”
“죽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정말로 백 명과 싸울 거야?”
“수련을 쌓기 위한 과정일 뿐이야.”
하성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지금 당장이야 위험해 보일 수도 있었지만,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하성은 성장하게 될 것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항쟁을 겪어야 할지 모른다. 지금 당장이야 잠잠하겠지만, 본격적으로 일심과 신사동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하성은 아수라장을 걸어야 한다.
그런 수라장의 한복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 전생에서 하성이 죽은 것도 모두 실력이 부족해서였다.
하성은 피를 다 닦아내고는 이유나와 함께 교무실을 찾아간다.
오늘부터 하성은 공식적으로 조기취업을 인정해 달라고 요구할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학교와 회사의 제약이 없어진다.
하성이 다니는 학교는 인문계였고 곧 있으면 고삼이다. 매일 같이 야간자율학습이 이어졌고 밤 10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야자를 뺀다고 해도 학교로 돌아가면 퇴근시간이었기에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조율해야 한다.
최소한 오후에는 회사에 나가야만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했다.
드르륵
다행히 담임은 수업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정길태가 하성과 이유나를 바라본다.
“할 말이 있냐?”
“선생님. 조기취업을 하고 싶습니다.”
“조기취업이라고?”
정길태는 눈살을 찌푸렸다.
3학년 직업반 학생도 아니고 2학년생이 조기취업이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날이었다.
정길태는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된다.”
“뉴스 못 보셨어요?”
“뉴스? 무슨 뉴스?”
“어제 부로 저는 취업을 했거든요. 이유나도 마찬가지고요.”
“하하하! 장난이 심하구나. 네가 무슨 조기취업을 했다고.”
윤길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기야, 윤길태가 하성을 무시하는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학교 왕따라서 관심학생으로 등록되어 있기는 했지만 취업이 신문에 날 정도는 아니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성은 주변에 신문이 있는지 살폈다.
그래도 그는 대한민국 10대 기업이라고 불리는 신화그룹의 후계자였다. 게다가 신화 엔터테인먼트는 신화그룹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으니 아마 신문에도 대서특필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성은 경제신문을 들었다.
1면까지는 아니었고 중간 정도에 하성이 신화엔터테인먼트의 사장으로 취임했다는 기사가 꽤나 자세하게 쓰여 있었다.
“여기 있는데요.”
윤길태는 신문을 읽어 내려간다.
“신화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인 임하성에게 친족계열분리…….”
윤길태는 신문의 인물과 하성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신화그룹 후계자!”
***
윤길태의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말로만 듣던 재벌가 후계자가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신화그룹을 모르는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없었다. 특히나 통신가입자 셋 중 하나가 신화통신을 이용하였으니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거기에 최근 신화에너지는 전국에 주유소를 세웠다. 이 역시 운전자 중 3할이 신화에너지를 이용한다는 것이었으니 신화그룹의 이름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 신화그룹의 후계자가 자신의 반 학생이라는 것에 윤길태는 경악했다.
웅성 웅성
교무실에서 수업준비를 하던 선생들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성은 이유나 역시 소개한다.
“유나는 저희 신화 엔터테인먼트에서 데뷔를 하게 되었고요. 지금은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죠. 곧 있으면 음반도 발표가 될 거예요.”
“하하하…….”
윤길태는 할 말을 잃어 버렸다.
하지만 그는 규정을 들먹였다.
“험험. 놀라운 일이구나. 그래도 학교 규정이…….”
“윗선으로 올라가서 처리를 하면 선생님의 신상에도 별로 좋지 않으실 건데요.”
“협박하는 거냐!?”
“협박이 아니라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뿐이에요. 듣기로는 신화재단에서 내려오는 후원금이 상당한 것으로 아는데……. 뭐 이 부분은 교장선생님께 말씀을 드려야겠네요.”
하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길태가 그를 붙잡았다.
“교장선생님께는 내가 말을 하겠다.”
“그럼 오늘은 돌아가도 되나요?”
“물론이다. 일단 조퇴 처리를 하마.”
하성은 인사를 하고 교실로 돌아온다.
그야말로 폭풍과 같은 하루가 아닐 수 없었다.
이유나는 엄청난 추진력을 가지고 있는 하성에게 혀를 내 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 회사에 가자. 출근해야지.”
이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하성에게 끌려 다니고 있었지만, 그것이 싫지만은 않은 이유나였다.
하성은 회사에 도착하여 여러 가지 업무보고를 받고 있었다.
이유나는 연습을 하기 위하여 돌아갔고 하성은 윤다희가 전담으로 하여 지금까지 있었던 이야기를 간략하게 풀었다.
“데뷔일이 결정되었습니다.”
“벌써 데뷔일이 결정되었다고요?”
“현재 회사의 자금사정은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에요. 이유나에게 투자할 수 있는 자금은 한정되어 있고 시간이 길어질수록 재정은 나빠질 뿐이죠. 최대한으로 잡을 수 있는 시간이 2개월입니다.”
“11월에는 데뷔를 해야 한다는 뜻이로군요.”
“맞아요.”
하성은 한숨을 내 쉬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이유나에게 올인하는 전략을 취한다면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했는데, 어마어마한 돈이 깨진다.
회사에서는 이유나의 데뷔일정을 잡고 언제 쯤 가요프로그램에 출현을 하며, 광고는 어찌 해야 할지 기획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음악을 만들어야 하고 음반을 제작해야 한다. 다행히 음반제작기술은 신화 엔터테인먼트에서 가지고 있었으므로 걱정할 필요는 없었지만, 밀리언셀러가 탄생할 것을 가정하고 공CD들을 구해 놓아야 했기에 물량의 확보도 지금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 것이다.
“산 넘어 산이네요.”
“그리고 안병태 씨와 연락이 되었어요.”
“그런가요??”
하성은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 쉴 수 있었다.
여기서 작곡까지 엎어지면 그야말로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야 할 것이었다. 어찌어찌 이유나에게 어울리는 곡은 구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히트로 이어지느냐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하성으로써는 최대한 상황을 전생과 비슷하게 이끌어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안병태 씨를 만나 보도록 하죠.”
“바로 약속 잡을게요.”
안병태는 자신이 쓴 곡을 제나 기획에 가져와 프로듀스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10년 전, [사랑은 그리움을 남기고]라는 곡을 써서 히트시킨 전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뒤로는 쓰는 곡마다 고배를 마셨고 어느 순간부터는 가수들이 안병태의 곡이라면 기피를 하는 현상까지 일어났다.
곡을 히트시켰던 당시에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수익이 줄어들고 이제는 근근이 먹고 살아가는 것이 다였다.
한 때에는 도박에도 빠져 그나마 있던 집까지 날렸다. 정신을 차린지 2년이 되었지만 역시나 작곡의 진입장벽은 높았다.
제나 기획의 프로듀서 안상태가 사무실로 돌아온다.
“상태야!”
“형님. 이번에는 어렵겠습니다.”
“인마, 이거 정말 좋은 곡이라고!”
“후우. 형님. 이제 다른 업으로 전환을 하시죠? 기량도 예전 같지 않고, 무엇보다 가수들이 형님 곡이라면 기피를 해요.”
“그래도 우리는 사촌…….”
“그 때문에 형님의 곡을 검토해 준 겁니다. 저희 말고 검토해 주는 곳이 있기라도 한가요?”
“끄응.”
“죄송합니다, 형님. 우리가 친척이기는 하지만 저도 먹고는 살아야죠.”
“크윽.”
안병태는 신음을 삼켰다.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대로라면 그의 가족들은 길거리에 나 앉아야 할 판이었다. 노숙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IMF가 끝난 지 몇 년 지나지도 않았고 경기가 회복되어가고 있다지만 경제가 개판이라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는 일이었다.
노가다를 뛴다고 해도 평생 작곡이나 하며 살았던 그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다.
“돌아가십시오.”
안상태는 축객령을 내렸다.
안병태는 너털너털 회사를 나와 걸을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갑자기 한 남녀가 그 앞을 가로 막는다.
더욱이 그 중 하나는 교복을 입기까지 했다.
“혹시 안 선생님 되세요?”
“그렇다만.”
“시간 좀 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후우. 이제는 어린 애들까지……. 나는 도 같은 거 안 믿는다.”
“그게 아니에요.”
교복을 입은 학생이 명함을 내밀었다.
신화 엔터테인먼트 사장 임하성
“……!”
안병태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하지만 그의 놀람은 사라졌다. 이런 학생이 그 유명한 신화 엔터테인먼트 사장이라니. 그것은 장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단 하성은 안병태와 만나는 것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안병태는 하성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애야, 그만 가라. 그리고 당신! 어른이면 어른답게 행동하쇼. 가뜩이나 정신도 사나운데.”
“안 선생님.”
“하아. 그러게, 사장님. 정장으로 갈아입고 오자고 했잖아요.”
“험험. 안 선생님. 저 여기 사장 맞아요.”
“썩 꺼져라!”
“내가 신화그룹 후계자라니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믿…….”
그들은 마침 버스 가판대를 지나고 있었는데, 1면 구석에 하성의 얼굴이 뜬 것을 안병태가 발견했다.
하성의 기사는 2면이었지만 1면에는 뒷면에 지재될 내용들을 미리 알리는 형태로 작게 기사가 떠 있었다.
안병태는 그대로 신문을 집어 들었다.
촤악!
2면에는 신화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내용이 대서특필 되어 있었다.
신화그룹의 후계자가 계열분리를 받았다는 것, 엔터테인먼트가 갖는 상징성과 그룹 후계자라는 상징성 때문에 신문에서는 중요하게 다루고 있었다.
안병태는 갑자기 하성의 손을 덥썩 잡았다.
“아이고, 사장님! 저 좀 살려 주십시오!”
“하하하! 일단 함께 가도록 해요.”
“어디로 말인가요?”
“커피솝이라도요.”
“아무렴요. 당연히 그래야죠.”
하성은 안병태와 함께 근처 커피숍으로 향한다.
안병태는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
후줄근한 차림에 거대한 안경을 쓰고 있는 남자. 여기에 머리칼은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는데, 상당히 고생을 하고 있는 티가 났다.
이런 안병태였지만 앞으로 1년 후에 이유나를 데뷔시키고 작곡계의 일약 스타로 떠오른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전까지 안병태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도 기획사를 다녀왔다가 퇴짜를 맞고 온 것 같았다.
하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선생님께서 작곡하신 ‘사랑은 그리움을 남기고’는 감명 깊었습니다. 비록 제가 어릴 적이었지만요.”
“좋게 봐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이번에 저희 신화 기획에서 신인가수를 데뷔시키려고 하거든요. 선생님께서 힘을 보태 주세요.”
“아무렴요.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래서……, 선생님을 저희 회사의 직원으로 계약하고 싶습니다만.”
“직원으로요?”
“예. 후학의 양성과 작곡 등 자유롭게 하시면 됩니다.”
“험험. 연봉은 얼마나…….”
“5천부터 시작하고 성과급은 따로 지급하도록 하죠. 어떤가요?”
“……!”
안병태는 눈을 부릅떴다.
2000년 초반만 해도 연봉 5천이라면 고액으로 들어갔다. 실로 어마어마한 연봉에 성과급까지 따로 지급을 하겠다고 하니 안병태로써는 거절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하성은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고 있기는 했다.
‘선생님의 재능을 제가 사는 것이죠. 죄송하지만 10년 정도는 제 밑에서 일을 해 주셔야겠습니다.’
“그럼 10년 계약으로…….”
“험험. 저야 좋기는 하지만 어떻게 이런 후한 조건을…….”
촤르르륵!
안병태는 대충 계약조건을 훑어보았는데, 후생복리도 꽤나 철저했다. 지금은 실패자인 자신에게 왜 이런 조건을 주는지 알 수 없었다.
“진주는 알아보는 사람만이 제대로 쓸 수 있는 법이죠. 흙에 묻혀 있다고 해도 보석이 아닌 것은 아니니까요.”
“너무 과대평가를 해 주시는 군요.”
“그리고 저에게는 말을 편하게 하셔도 돼요.”
“그럴 수는 없죠. 회사의 사장님이신데요.”
“그럼 당장 계약을 해도 될까요?”
“아, 잠깐만요. 죄송합니다.”
“혹시 계약을 하지 않으시는 것은…….”
“그, 그럴 리가요! 제가 마누라 계좌번호를 몰라서 말입니다. 상의를 해보아야 하기도 하고……. 내일 아예 사인을 해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죠.”
하성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찌 되었건 오늘 하성은 안병태와 만났고 내일이면 계약을 하게 될 것이다.
안병태가 신화 기획에 있어 준다면 유나를 데뷔시키는 것을 넘어 다른 대 스타까지 배출할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하성은 약간의 걱정이 뇌리에 스치는 것을 느꼈다.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데?’
이 정도라면 바닥에 떨어진 떡을 주워 먹는 수준이었다. 안병태는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고 특별한 사단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내일 회사로 찾아올 것이었다.
헌데 자꾸만 하성의 육감은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