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ss returns RAW novel - Chapter 71
69. 폭풍 속 하룻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속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다.
그 시작은 유서화의 가정사부터였다.
유서화가 편부 가정에서 자랐다는 건 알고 있었다. 유민성 회장의 평소 사생활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유서화의 어머니 이외에는 다른 부인을 두지 않았다. 남자로서 이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하성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회귀를 하기 전에 가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또래 친구들과 만나 가정사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유민성 회장은 정말 대단한 남자다.
유서화는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도 이야기를 했다.
“8살 무렵이었어요. 아직도 그때가 기억에 선명해요.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요,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길을 건너다가 차에 치일 뻔했거든요. 반대편에는 엄마가 마중을 나왔는데, 저 대신에 차에 치이고 저는 길로 밀려났죠.”
“으음.”
“그 사고로 어머니는 병원에 실려 가셨지만 다음 날 돌아가셨어요.”
“마음이 많이 아프셨겠습니다.”
“어디 영화에서나 나올 이야기죠. 저는 실제로 그 주인공이기도 하고요.”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하성 씨도 부모님이 돌아가셨죠?”
“그렇죠.”
도대체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부모님이 조직 항쟁에서 살해당했다고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살해는 살해였으니 거짓말을 할 수는 없을 거다.
“제 부모님은 괴한들에게 살해를 당했습니다.”
“……!”
“어머니가 먼저 살해되셨고 그 다음에 아버지가 살해되셨죠.”
“그런…….”
정확하게 말하면 아버지는 교통사고를 빙자하여 살해를 당하신 거다. 하지만 유서화에게는 거기까지 말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살해라는 말로도 상당히 충격일 테니까.
“설마 어머님이 살해당하는 모습을…….”
“봤죠.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아버지까지 그렇게 돌아가시고 한동안 자폐증을 앓아야 했으니까요.”
“이해해요.”
어머니가 살해당한 충격으로 자폐증이 왔다는 이야기는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아직까지도 생각하면 섬뜩한 일이었다.
“지금은 정신을 차렸지만, 그 당시를 기억해 보면…….”
“이해해요.”
갑자기 어머니 생각이 나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하성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조금 진정이 되는 느낌이다.
하성이 진정을 하는 동안, 유서화가 뒤에서 끌어안고 있었다.
술도 마셨고 감정도 꽤나 고조되어 있다.
‘여기서 이래도 되나?’
당연히 안 될 거다.
술을 마셨어도 정신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유서화를 밀어낼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다. 여기서 유서화를 밀어내면 헤어져야겠지.
하성은 유서화를 끌어안는다.
“안아 줘요.”
“…….”
정말 심각한 고민에 잠겼다.
여자를 안는 것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엄청난 책임이 뒤따랐다.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절대 그녀를 안을 수 없다.
‘유서화는 좋은 여자야.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녀와 하게 되겠지. 하지 않을 것이라면 모를까. 유서화는 앞뒤 재지 않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재고 있으니 남자로서 면목이 없는 일이다.’
하성은 그렇게 결심했다.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았지만, 결혼을 하자면 못 할 것도 없었다.
‘그럼 결혼까지 가는 거다.’
하성은 결심을 하고 유서화를 눕혔다.
설마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던지 유서화는 놀란 눈을 했다.
“괜찮겠어요?”
“당신을 만나고 사귀는 것도 제 의지였고 결혼을 하는 것도 제 의지입니다.”
“사랑해요.”
그날 밤, 하성은 유서화를 안았다.
아마 내일쯤이면 난리가 나지 않을까.
다음 날 아침.
하성은 다소 늦게 일어났는데, 주방 쪽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설마!’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그리고 분위기에 너무 휩쓸린 감이 있었다.
이불을 걷어 보았다.
피가 조금 묻어 있었는데, 아무래도 사고를 친 것 같다. 게다가 유서화는 처녀였다! 요즘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그야말로 이건 빼도 박도 못 하는 일이었다.
‘내 인생은 끝났다.’
하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공인이다. 유서화도 마찬가지였고 결혼을 하면 다른 여자는 만나지 못한다. 그렇다고 업소를 갈 수 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결국 하성은 유서화와 평생을 함께해야만 한다.
사귀겠다고 마음을 먹고 약혼을 했을 때부터 이 정도는 생각을 했어야 한다. 결혼을 전제로 하고 있었고 더욱이 유서화는 처녀였다. 이렇게 일을 쳐 놓고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유민성은 하성을 때려죽이려 할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먼저 결혼을 질러야 한다.
아무래도 여자 쪽에서보다는 남자 쪽에서 결혼을 이야기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기도 했다.
이 한 방으로 하성의 연애사는 끝난 것이라 볼 수 있었다.
“후우.”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결혼을 처음 하는 것도 아니었다.
전생에서는 수많은 여자들을 만나 즐기기도 했고 결국에는 정략결혼을 했었지만, 그런 경험이 있기에 억울하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게다가 유서화는 처음이 아니었던가.
‘나도 이번 생에서는 처음이었지.’
하성은 표정 관리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
여기서 표정이 뒤틀리면 예민한 여자는 단번에 남자의 심리를 꿰뚫어 본다.
앞으로 원만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도 관리를 잘해야 했다. 사고를 쳐 놓고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는 남자들을 보면 말년이 썩 좋지가 않았다. 결혼을 하고서도 끊임없이 바가지를 긁힌다.
하성은 경험적으로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지금도 사고였다.
괜히 좋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가는 결혼 생활이 아작 날 수도 있었다.
끼이익.
문을 열고 나가 본다.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화 씨!”
“잘 잤어요?”
“오늘 따라 사랑스럽네요?”
“에이, 왜 그러세요?”
‘여자 친구였다면 모를까, 마누라가 될 사람이라면 지금부터라도 잘해야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지.’
하성은 유서화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앉으세요. 제가 솜씨를 발휘해 봤어요.”
“네.”
그녀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고 있었다.
아마 유서화는 지금 인생이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남자가 결혼을 무덤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하성은 된장국을 맛보았다.
후루룩!
“어떤가요?”
“음?”
생각보다 뛰어나다.
아직 유서화도 나이가 어려 요리는 잘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집에서 먹는 밥보다 맛있다.
반찬도 마찬가지였다.
“와아! 대단하네요.”
“헤헤, 신부 수업을 받았거든요.”
“아, 그랬죠.”
“요리는 기본에 뜨개질과 바느질, 청소까지. 못 하는 일이 없어요. 사실, 이만한 신붓감도 없죠.”
“그러게요.”
유서화도 직감했을 거다.
하성은 최대한 한숨을 쉬지 않도록 노력했다.
지금은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보이도록 해야 했다. 말년에 고생을 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특히나 사업이 얽혀 버리면 유서화와의 이혼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혼을 하는 순간 회사가 휘청거릴 것이었다.
하성은 섬을 나가기 전에 프러포즈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왕 해야 될 일이라면 여기서 적극적이 되는 편이 낫다.
그는 항상 어머니의 반지를 목에 걸고 다녔다. 누군가에게 반드시 줘야 한다면 그건 평생을 함께할 와이프였다.
‘나도 속물이 다 되었군.’
결국 결혼 생활을 앞으로 편하게 하기 위해 약을 치는 것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유서화는 씻으러 들어갔다.
하성은 엄청난 속도로 씻고 나서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이곳 펜션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정말 없는 것 빼고는 다 있었다. 그렇다면 유서화가 나오기 전에 프러포즈를 준비해야 한다.
어른들에게 말을 하기 전에 선수를 치는 편이 낫다.
겨우 어제 하룻밤을 보냈을 뿐이었지만, 하성의 머리는 비상하게 회전하였다. 아무래도 한 번 인생을 살아 보았다는 것이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보자.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여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지은 것인지는 몰라도 꽃부터 시작해서 촛불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시간이 좀 많았다면 다른 방식으로 프러포즈를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일단 주변에 꽃부터 뿌려 놓는다. 그리고 초를 몇 개 켜고 음악도 틀어 놓은 후에 꽃 가운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제 유서화를 안을 때부터 이 정도 각오는 했어야 한다.
달칵.
유서화가 씻고 나왔는데, 하성이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어머!”
그녀는 깜짝 놀랐다.
원래 프러포즈는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이 기본이다.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을 때 해야만 상대방이 놀랄 것이고 감동도 밀려오는 법이 아닐까.
설마 그녀는 하성이 프러포즈를 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마 한참 동안 하성이 재려 한다고 여겼겠지.
하지만 아니다.
해야 할 때는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하성의 신조였다.
지금까지야 재고 있었지만, 일이 벌어진 이상은 밀고 나간다.
“서화 씨, 저와 결혼해 주세요!”
***
“가, 갑자기 왜…….”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기회가 오지 않았을 뿐이죠.”
하성은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어쩌면, 파혼할지도 모른다고 여기며 살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진심인 것처럼 보이게 해야 한다.
그녀는 입을 막고 있었다.
여자들이 눈물을 흘리려 하는 전조 증상이다.
“좋아하는 감정이 사랑으로 변했습니다. 그룹과는 상관없이 결혼만큼은 제 스스로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부디 저와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 주세요.”
다른 말은 필요 없을 것 같다.
잔잔하게 음악이 깔려 있었고 급조했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이벤트가 아닐까 싶다.
무인도에서 프러포즈를 받는다면 두고두고 회자가 되지 않을까.
유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감사합니다!”
“제가 고맙죠.”
하성은 유서화를 안아 들었다.
“꺄악!”
“나가는 대로 날 잡도록 하죠.”
“그, 그렇게 빨리요?”
“어차피 할 것이라면 망설일 필요 없잖아요?”
유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하성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결혼을 하고자 결심을 굳혔을 것이다.
“아이도 만들어 볼까요?”
“몰라요!”
아무래도 오늘은 조금 늦게 무인도를 나갈 것 같았다.
위이이잉!
하성과 유서화는 무인도에서 나가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가능하면 오늘 안에 모든 것을 해치워 버려야 한다. 물론 결혼식 날짜는 어른들이 잡지 않을까 싶었다.
‘이렇게 된 이상은 빠르게 해결을 하는 수밖에 없어.’
기왕 할 결혼, 좋은 인상을 심어 주면 좋다.
유서화가 하성의 손을 잡는다.
“정말 괜찮겠어요?”
“뭐가요?”
“갑자기 결혼을 추진하시니까요.”
“결정하기까지 오래 걸린 거지, 결정을 한 이상은 머뭇거리지 않아요. 남자로서 당연하다고 생각이 되는데요.”
“그, 그렇죠.”
아마 유서화도 하성의 이런 저돌적인 모습은 보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이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어른들을 위해서도, 유서화를 위해서도, 하성 본인을 위해서도 말이다.
배가 인천 부두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임태식과 유민성이 함께 나와 있었다. 하성이 전화를 해서 부둣가로 나와 주었으면 하고 요청을 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일이라고 하니 어른들로서는 나오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거다.
“사위, 왔는가?”
“왔느냐.”
그들의 얼굴은 싱글벙글이었다.
유민성의 얼굴에는 주먹이라도 한 대 날려 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패륜이 되겠지.
하성은 그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털썩.
“어엇!”
“왜 그러느냐?”
게다가 유서화까지 무릎을 꿇는다.
“저희의 결혼을 허락해 주십시오!”
“……!”
어른들은 눈을 부릅떴다.
예상 밖의 결과일 것이다.
그들은 그저 하성과 유서화가 진도가 빨리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었지, 이렇게 당장 결혼을 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는 못 했다.
물론 최종 목적이 결혼이기는 했다.
“결혼을…… 한다고?”
“안 되겠습니까?”
“이 사람아! 그걸 말이라고 하나! 당연히 되지!”
“당장 허락한다!”
그들은 얼씨구나 좋다고 부둥켜안았다.
‘저 모습을 보니 조금 찝찝해지는데. 내가 완전히 말려 버린 것 같잖아.’
일행은 근처 레스토랑으로 이동했다.
무인도에서 나올 때 조금 늦장을 부리는 바람에 점심시간이 되었고 오늘의 일정은 식사 후에 시작할 예정이다.
인천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앉은 일행은 풀코스로 요리를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유민성 회장은 하성에게 요리들을 몰아 주었다.
“많이 드시게, 사위!”
“예, 아버님.”
“아버님이 뭔가? 장인이라고 하게.”
하성은 순간 고민했다.
장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아직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이번 무인도에서 낚인 느낌이 상당히 강했지만, 그다지 싫은 것도 아니었다. 장인이 될 사람이 사위를 이렇게 챙겼으니 말이다.
“예, 장인어른!”
“하하하하! 자네에게 장인이라는 말을 듣는 날이 오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로군.”
“근시일 내에 정식으로 찾아뵙고 결혼 승낙을 받으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랬던가?”
“그럼요.”
별로 그럴 예정은 없었지만, 이렇게 해서 상대방의 기분이 좋아진다면 얼마든지 그리 말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내 잔을 받아 줄 텐가?”
“영광입니다.”
“내가 영광이지, 이 사람아.”
유민성 회장의 얼굴이 활짝 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표정이라고 할까.
이렇게 되었으니 하성이 먼저 결혼식 날짜에 대해 말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엎질러진 물이라면 주워 담을 생각은 말아야 한다.
“결혼식 날짜 말입니다만.”
“그게 남아 있었군.”
“여러분들만 괜찮다면 빨리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돈어르신은 어떻습니까?”
유민성이 임태식을 바라보았다.
임태식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아직 하성이 미성년자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손주의 나이 때문에 말이네.”
“사회적인 시선 때문입니까?”
“그래, 우리는 그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공인이라네. 아무리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단 말이지. 하성이 녀석이 성인이 되는 즉시 하는 것이 어떠한가?”
“1월 1일에 말이로군요?”
“그렇다네.”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반년 정도야 여유를 두고 하는 부부들이 많지요. 네 생각은 어떠냐?”
유민성은 유서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어르신들의 말씀에 따르겠어요.”
“임 서방 자네는?”
“저도 어르신들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허허허! 그렇다면 자네가 성인이 되는 1월 1일에 결혼식을 하는 것으로 하지. 사돈 어르신?”
“그리하세.”
이것으로 하성의 결혼식 날짜가 정해졌다.
아마 많은 유부남들이 관짝에 왜 그리 일찍 들어가냐고 말들을 하겠지.
전생에서도 결혼식 전에 안부 전화를 하면 무덤으로 들어가는 날이 언제냐고, 관짝은 준비가 되었냐고 농담으로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말이 기억났다.
아무래도 많은 남자들이 결혼을 무덤으로 생각하였으니 그런 농담도 하고 그랬을 것이다.
‘1월 1일이라.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하성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간다면 어른들은 당장이라도 식을 치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리하지는 않았다.
“자자, 축배를 듭시다!”
사람들의 잔이 채워진다.
유서화는 어제 과음을 해서인지 무알콜 샴페인으로 대체했다.
챙!
“집안의 화합을 위하여!”
“위하여!”
서울로 돌아가는 길이다.
임태식과 유민성은 따로 차를 타고 들어갔다.
이제 이들은 결혼 날짜까지 앞두고 있었으니 알콩달콩 함께 다니라는 배려였다. 아예 동거 이야기까지 나왔지만, 그건 하성의 손에서 묻었다. 아무리 결혼식 날짜를 받아 두었어도 사람들 시선이 있었기에 동거는 안 된다.
“꿈만 같아요.”
“그런가요?”
“하성 씨가 이렇게 프러포즈를 하고 결혼식 날짜까지 받았으니까요. 이제 예식장을 예약해야겠네요?”
“아마도 그렇겠죠.”
“잘할게요.”
“제가 할 말입니다.”
하성은 쓰게 웃었다.
어떻게 보면 유서화가 하성을 쫓아다닌 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먼저 좋아했든 결혼을 하고 나면 무의미해진다.
물론 살면서 약간의 영향은 있을 수 있겠지만 여자란 남자 하기 나름이 아니던가.
사랑하는 여자가 집안도 빵빵했고 성격도 좋았고 아름다웠다. 이만하면 하성과 비교를 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
“결혼하고 나면 하성 씨 비서로 들어가도 될까요?”
“비서로요?”
“네, 일을 돕고 싶어서요.”
“그보다는 구조본이나 부회장직, 혹은 이사직에 앉는 것이 어떤가요?”
“저는 당신의 그림자로 살고 싶거든요.”
유서화는 회사 일에 별로 욕심이 없었다. 그냥 집에서 살림을 하라고 하면 그리할 여자였다.
“그건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죠.”
“네.”
차량은 하성의 학교 앞에 멈춰 섰다.
폭풍과 같은 하루였지만 그들은 담백하게 헤어지기로 한다.
하성은 학교로 돌아가 마음을 추스르려 했다.
‘수아가 잔소리를 하지 않으려나?’
수아에게도 이야기를 하고 말이다.
마음을 추스른다는 것은 하성도 나름대로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 빠르게 추진했지만, 마음까지 완전히 다져진 것은 아니었다.
하성 역시 결혼이 남자의 무덤이라는 말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럼 연락할게요.”
“아! 그리고요.”
“달리 할 말이라도?”
하성이 내리려는데 유서화가 그를 잡았다.
“디자인이 완성되었다고 연락이 왔어요.”
***
“디자인이 완성되었다고요?”
“월드컵에 사용할 티셔츠 말이에요.”
“아아.”
하성은 이제 이해를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갑자기 면역 세포로 만든 백신이 언론에 터지는 바람에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지만 유서화와 함께 회사를 운영하는 CSS도 분명히 신경을 써야 했다.
잘만 키우면 CSS도 상당한 이익을 회사에 안겨 줄 수 있을 것이다.
“학교에 잠깐 들러서 1교시만 수업을 받고 회사로 가도록 할게요.”
“그럼 CSS에 가 있을게요.”
“먼저 미팅을 하고 있어도 되고요.”
“그래도 회사 대표가 있어야죠.”
“뭘 그래요? 부부가 되면 재산도 합치게 되는 건데요.”
“그건 그러네요.”
그들은 한 번 결혼을 하면 이혼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원래 유민성 회장은 고아 출신이었고 임태식은 자식이 하나밖에 없었다. 여기에 하성이 장손이었으니 양쪽 회사가 합쳐진 거대한 기업 집단은 결국 그의 아들이나 딸이 물려받게 될 것이었다.
이건 전무후무한 기업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과 같았다.
‘신화파가 무너지지만 않는다면.’
이번 대결에서 이기면 모르겠지만, 지면 신화파가 사분오열될 것이다. 그때를 대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럼 수업 잘 받고 오세요.”
“네!”
하성은 잠깐 학교에 들르기로 했다.
교실로 들어오자 그레이스와 유나가 아는 척을 했다.
지금은 수업 시간이기에 대놓고 인사를 하지 못하였지만, 그녀들의 얼굴에서는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유나도 그렇고 그레이스도 그렇고 그녀들은 하성에게 관심이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할 수는 없었다.
‘그녀들에게도 설명을 해야 하기는 할 텐데.’
아무래도 여동생을 만나면 수아가 그녀들에게 전부 전달을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실망스러운 얼굴을 하겠지.
그래도 해야만 하는 일이다.
유서화와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주변 정리는 깔끔하게 해야 한다. 잘못하면 구설수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수업이 시작되었지만, 역시나 집중은 할 수 없었다.
그보다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결혼에 대한 문제와 회사에 대한 문제, 치우와의 대결로 머릿속이 가득 차 버리는 느낌이었다.
딩동댕동!
생각을 하는 동안 한 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문이 열리고 수아가 교실로 들어왔다.
“오빠! 여행은 어땠어?”
유나와 그레이스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하성은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았어.”
“오늘 집에 안 들어왔던데, 혹시 서화 언니랑 잤어?”
그녀들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진다.
하성은 여기서 정리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정리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환이 될 수도 있었다.
“그보다 할 말이 있어.”
“어떤 할 말?”
“내가 서화 씨하고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것 알지?”
“그럼. 알지.”
“결혼식 날짜가 잡혔어.”
“……!”
수아는 물론이고 그레이스와 유나, 같은 반 학생들까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야말로 이건 세기의 중대 발표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아직 언론에 공개된 것은 아니었으니 여기서 처음 터진 것이었다.
수아는 잠시 놀랐다가 수긍했다.
“축하해!”
“저, 정말이야?”
유나가 먼저 하성에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으으으.”
유나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나가 버렸다.
하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유나는 정리가 된 것 같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문제였다.
“아, 그래? 언제 결혼을 하는데?”
“1월 1일에.”
“그럼 한참이나 남았네!”
“뭐, 그런 셈이지.”
결혼식 날짜가 한참이나 남아 있었기에 그레이스는 그 전에 하성을 빼앗을 전략을 구상하는지도 몰랐다.
아니나 다를까, 그레이스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나.”
“뭐라고?”
“아직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미성년자잖아? 그럼 마음이 바뀔 수도 있는 거지.”
“이건 그리 쉬운 문제가…….”
“내가 더 분발해야겠네!”
“으으.”
하성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레이스는 서구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약혼을 했다가 파혼하는 일은 왕왕 있는 일이다. 사실, 식장에 들어가서 결혼하고 나서도 혼인 신고를 하지 않고 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다가 서로 맞지 않으면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간다고 한다.
그런 일도 많았으니 혼인 신고서에 사인을 하기 전까지는 결혼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세상이 도래했다.
그레이스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너는 설마 내가 좋은 거냐?”
“몰랐어?”
앞으로 학교생활이 상당히 힘들어질 것 같았다.
유나는 유나대로 울었고 그레이스는 강력한 골키퍼가 있으니 더 전의에 불타오른다고 말했다.
유나가 하성을 좋아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아직 회사조차 받지 못했을 무렵부터 유나와 하성은 함께했다. 데뷔부터 시작해서 콘서트까지 하성이 직접 서포트를 해 주기도 했다. 그 때문에 유나가 하성을 좋아하는 건 이해할 수 있었는데, 도대체 그레이스는 무엇 때문에 그런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생각해 봤자 머리만 복잡해진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하성은 곧장 학교에서 나왔다. 가뜩이나 생각해야 할 일도 많은데 여난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교문 앞에는 차량이 도착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백호가 어떤 일로 오셨나요?”
“가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죠.”
달칵.
하성은 차에 올라탄다.
서울 시내를 가로지르며 백호가 하성을 찾아온 이유를 말한다.
“주작이 서울에 올라온다고 합니다.”
“서울에는 왜요?”
“치우의 본가는 인천이지만 서울에 지사가 있거든요. 오히려 서울의 연무장이 더 크니 이곳에서 수련을 하겠다는 뜻이겠죠.”
“주작대 전부가 오겠군요?”
“아마 그럴 겁니다.”
“그런데 그게 왜?”
하성의 말에는 주작이 서울에 올라오는 것과 자신이 무슨 상관이 있냐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백호가 말했다.
“주인님을 단련시키겠다는 의도겠지요.”
“아아.”
하성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태로 전쟁이 일어나면 하성의 목숨은 장담할 수 없었다.
대결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폭풍 전야의 고요함이 이어지겠지만, 그건 잠시뿐이다. 곧바로 전면전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하성의 실력을 배양해야 하는 것이다.
치우가 가지고 있는 하성의 정통성은 대단한 것이었다. 여기서 그가 죽어 버리면 치우는 그대로 무너질 수도 있었다.
주작은 예전부터 하성의 실력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지’의 단계를 흉내 낼 수 있었지만 이것만으로는 회에 즐비한 고수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주작은 하성이 최소한 ‘화’의 단계에 접어들기 바랐다.
치우의 4대 단주들이 대부분 ‘목’의 단계에 접어든 것을 보면 하성은 그 아래 경지를 밟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한 달 남짓 남은 시간 동안 그 단계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요?”
“올라가신다면 유례가 없는 일이지요. 물론 지금도 유례가 없기는 합니다.”
이 짧은 시간에 하성과 같은 무예를 갖게 된 사례는 존재하지 않았다. 실로 어마어마한 발전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저야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작에게 직접 무예를 전수받으면 빠르게 실력이 늘겠지요.”
“네, 그것이 모두가 바라는 일입니다.”
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 주작이 올라오기로 했다면 회사 일을 쪼개서라도 실력을 쌓아야 한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죽을 수는 없는 일이다.
어느덧 차량은 CSS 앞에 도착했다.
“주작이 찾아갈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고생하십시오.”
백호는 하성에게 인사를 하고는 차에 올라탔다.
CSS 앞에는 유서화가 나와 있었다.
“하성 씨!”
유서화는 달려와 하성에게 안겼다.
사람들은 눈에 이채를 보일 뿐,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이미 유서화와 하성이 약혼했다는 사실은 전 세계가 다 알고 있었다.
“회의는 잘 마무리되었나요?”
“그렇기는한데 하성 씨가 디자인을 봐 주세요.”
“제가요?”
“그래도 회사의 오너가 보고 결정을 해야 하잖아요?”
결국 유서화는 아직까지 티셔츠 디자인을 고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때문에 하성이 봐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니, 디자인을 못 골랐다기보다는 그저 하성과 함께 경영에 참여하고 싶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습니다. 올라가도록 하죠.”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에는 안소영을 비롯한 회사의 중역들이 모여 있었다.
디자인 팀의 팀장으로 안소영이 부임을 하였는데, 사람들은 별 불만이 없는 표정이었다. 안소영의 디자인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하성 역시 티셔츠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괜찮은데요?”
티셔츠는 두 가지 버전이다.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아기자기한 붉은 악마를 디자인한 캐릭터와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존재감 넘치는 악마가 형상화되어 있는 디자인이다.
사실, 붉은 악마는 98년 프랑스 월드컵 예선부터 쭉 활동을 해 왔었다. 그러니까 결성이 된 것은 97년이었다.
축구팬들이 인터넷을 통해 결정하였고 2002년에 들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의 4강 신화를 등에 업고서 말이다.
그들이 입는 티셔츠도 있기는 했는데, 이렇게 체계적이지는 않았다. 공식 티셔츠도 없는 상태였다.
붉은 악마의 회장과 만나서 공식 티셔츠로 지정받을 수만 있다면 실로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상당히 마음에 드네요. 바로 생산에 들어가도록 하죠.”
“뭐라고요?”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어떻게 판매해야 할지 구체적인 방안도 모색되지 않았는데 생산부터 한다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