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undless Necromancer RAW novel - Chapter 118
116. 대학살 (4)
피의 해일.
흡사 대재앙을 생각나게 하는 그 파도를 보며 재빨리 사고를 회전시킨다.
‘피의 파도는 흡혈 백작이 혈조술로 생성한 거겠지.’
흡혈귀들이 내게 학살당하며 말했던 정보들을 취합해 보면 저것은 혈조술로 생성된 재해였다.
기껏해야 화살 몇 개랑 무기 몇 개를 나열하던 흡혈귀의 역량과는 차원이 다르다지만…….
새빨간 선혈로 이루어진 파도는 흡혈귀 고유 능력으로 추정되는 혈조술의 산물이었다.
‘운이 좋네.’
혈천마검에 세 번만 새길 수 있는 스킬의 각인을 바로 채울 수 있을 듯했다.
다만, 문제라고 한다면 흡혈 백작의 무력인데 그 부분이 사실은 좀 기대되었다.
피의 해일에서 느껴지는 사이한 마력의 수준만 해도 도쿄에서 만났던 남궁혁이랑 비슷하고.
심지어 혈조술이라는 희귀한 능력까지도 다룬다는 점에서 상당히 강력한 적이 될 터였다.
만약에 내가 두 번의 시련을 거치지 않은 상태였다면 흡혈 백작과의 전투에 사활을 걸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두 번의 계층 상승을 이루며 현재 나는 상당한 실력자가 되었다.
스킬 의존에 관한 집착이 옅어졌고 순수 기량 자체도 비교가 불허될 정도로 올라간 상황.
심지어 새로운 권능들까지 추가로 습득한 상태인지라 두려움 대신에 기대감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수준의 적을 이길 수 있으면 남궁혁에게서도 이길 수 있어.’
흡혈 백작을 이긴다면 그건 곧 도쿄에서 싸웠던 남궁혁을 넘어섰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종의 도전 정신이 생기며 온몸에 활력을 돋구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지만…….
“……대, 대마법? 설마 흡혈 백작은 대마법까지 다룰 수 있었던 건가?”
“……그럴 리 있겠소? 저건 그냥 종족 특성일 것이오. 다만, 대마법이 연상될 정도로 흡혈 백작의 종족 특성이 강력할 뿐이겠지.”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겁니까? 이대로 있으면 저희 다 죽는 건 시간문제일 거 같은 느낌인데요.”
그런 나와는 다르게 뒤에 있는 팀원들은 제각각 심각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에 나는 아직도 활성화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육감 스킬을 통해서 직감했다.
‘이대로 두면 이 세 명은 진짜로 죽겠는데……?’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미치모토 사치오.
데이비드 테일러.
두 명은 내가 탑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소식을 접했던 네임드 중의 네임드였고.
데이비드 테일러마저도 시계탑 소속의 대마법사일진대 실력이 높지 않은 듯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과할 정도로 이들의 수준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벌써 내가 이렇게까지 성장했나…….’
한때 동경했던 헌터들의 수준을 추월했음에 묘한 감정을 느끼는 것도 잠시였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 세 명을 이대로 두면 죽는 건 안 봐도 뻔한 상황이었고.
이내 나는 점점 몸집을 부풀리며 다가오는 피의 해일을 힐끗 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 자리를 피해서 성직자를 찾아서 데려오십시오.”
“……예? 성직자라니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졌─.”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들이 있으면 제가 곤란해집니다.”
“…….”
당황하는 미치모토 사치오의 말을 끊고 나는 담담하게 직설했다.
셋 다 여기에 있어 봤자 내가 지켜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어쩔 수 없었다.
개인 임무라도 수행시키게 해 놓고 혼자서 흡혈 백작을 상대하는 게 베스트였다.
그리고.
‘흡혈 백작의 사령을 흡수하려면 혼자 사냥해야 해.’
내가 혼자 흡혈 백작을 상대해야 놈의 사령도 그대로 흡수할 수 있었다.
타인의 기여도가 많아지면 사령을 흡수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 노릇이니.
물론 어떻게 해서든 나한테 도움을 주겠다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생각 외로 세 명의 도전자는 짧게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내 지시를 따랐다.
“알겠습니다. 한성윤 씨의 지시를 따라서 성직자들과 접선해 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미치모토 사치오가 그림자에 녹아들 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고.
“지시대로 하지. 남한테 짐짝이 되는 건 오랜만이라 기분이 영 찝찝하긴 한데 어쩔 수 없지.”
이어서 안드레이 또한 묘하다는 듯 그렇게 말하곤 바로 도시 내로 재빨리 움직였다.
“미리 말했던 대로 지시를 거스를 생각은 없소. 성직자들을 모아서 올 테니 기다리시오.”
이내 데이비드 테일러까지 은신 상태에 돌입하며 사라지는 걸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세 명의 도전자는 나름대로 상황 판단 능력이 빠르게 작동했다.
걱정했던 것들은 완전히 사라진 상황이었다.
그러니…….
“드디어 본격적으로 싸울 수 있겠네.”
이제는 성장의 결과물을 확실히 알아볼 시간이었다.
***
셀 네이르는 진조(真祖)의 흡혈귀였다.
한낱 인간에서 흡혈귀로 변이한 존재가 아니라 태생부터 완전한 흡혈귀였고.
칼리안의 차원에서 그는 흡혈귀 중에서도 꽤 높은 지위라는 백작의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셀 네이르는 흡혈 백작이 된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힘을 원했다.
그것도 먹이 사슬의 꼭대기에 있는 흡혈왕이 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그래서였다.
본래는 신을 믿지 않았던 셀 네이르가 전투의 신을 신봉하기 시작한 것은.
셀 네이르는 흡혈귀로 변이한 권속들의 신앙까지 바쳐서 종족 특성을 권능으로 강화시켰다.
전투의 신은 그를 신봉하는 자들이 전투를 벌일 때마다 더 많은 은혜를 베푸는 신이었고.
그 성향을 이용해서 셀 네이르는 인간들의 도시를 무차별하게 파괴해서 점점 강해졌다.
태생부터 강력했던 혈조술은 이제 강물을 이루는 피를 모두 지배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심지어 혈조술의 격이 높아지며 셀 네이르는 불사에 가까운 재생력까지 습득해 냈다.
「전투의 신이 셀 네이르를 예비 사도로 지정합니다.」
두 자릿수에 가깝게 인간의 도시를 파괴하다 보니 어느새 셀 네이르는 예비 사도가 되었다.
그는 이제 한낱 흡혈 백작이 아니라 보다 상위의 작위를 노려 볼 수 있는 강자였고.
이번 도시를 완벽히 점령하여 전투의 신에게 진짜 사도로 인정받은 후.
칼리안 차원에서 내로라하는 흡혈귀를 제치고 백작보다 상위에 있는 작위를 습득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셀 네이르의 예정은 한순간에 뒤틀렸다.
도시를 점령하고 있었던 권속에 가까운 흡혈귀들이 궤멸당하듯 살해당한 것이다.
아니, 살해당했다는 수준이 아니라 학살당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고.
그러한 학살을 감행한 주체가 한낱 인간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셀 네이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그대로 피의 해일을 일으켰다.
‘감히 하찮은 인간 주제에 내게 반항하다니……!’
콰아아아아아……!
셀 네이르가 일으킨 피의 해일은 그가 기거하던 첨탑을 무너뜨리며 도시를 뒤덮기 시작했다.
도시에 있던 인간을 죽이며 거리 곳곳에 낭자한 선혈이 피의 해일로 모여들며 몸집을 부풀렸다.
전투의 신이 아끼는 예비 사도가 된 셀 네이르의 혈조술은 재앙에 가까운 위세를 품고 있었다.
셀 네이르는 점점 커지는 선혈의 파도에 미친 것처럼 웃어대며 소리쳤다.
“하하하! 버러지 같은 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날뛰었구나! 이대로 다 죽어서 내게 사죄해라!”
마치 땅을 기는 개미를 짓밟듯 와그작 부서지는 도시의 건물들을 보니 쾌락이 들끓는다.
셀 네이르는 넘쳐흐르는 쾌락을 참지 않고 혈조술로 방출하며 성문까지 진격했다.
흡사 파도를 타듯 피의 해일에 올라선 채 있는 셀 네이르의 눈에는 광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피의 해일은 셀 네이르의 의지대로 도시를 다 뒤덮을 수 없었다.
“……!?”
촤아아아아아아……!
몸집을 부풀린 선혈의 파도가 점점 그 크기를 줄여 가는 것을 눈치챘다.
셀 네이르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른 이에게 지배 영역이 침범당한 것이다.
그에 셀 네이르가 당황하며 사태를 파악하려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앙─!
꿰뚫렸다.
권능의 영역까지 발전한 혈조술로 구성된 피의 해일이 간단히 관통당한 것이다.
그리고 피의 해일을 관통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참격이었다.
그것도 붉은 번개를 머금은, 살상에 특화된 형태의.
퍼어엉!
“크아악!”
셀 네이르는 미처 참격에 대응하지 못한 탓에 그대로 왼팔을 내어 줬다.
참격의 형상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담긴 건 고작 참격이 아니었다.
유사 폭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참격에 왼팔이 통째로 날아간 상황.
셀 네이르는 어깻죽지를 붙잡으며 충혈된 눈으로 분개하여 외쳤다.
“끄으으! 감히이……! 감히 내게에……!! 용서하지 않는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통증에 셀 네이르의 눈에 살의가 담겼다.
하지만 살의가 들끓는 건 잠시에 불과했다.
혈조술로 형성한 피의 해일이 점점 제 몸집을 줄이고 있었고 그는 선택해야 했다.
혈액 지배 영역이 늘어나면 그만큼 피를 뭉칠 수 있는 밀도는 한없이 낮아진다.
물론 셀 네이르의 혈조술은 그러한 단점을 어느 정도 극복했다지만…….
‘큭……! 피의 형상을 유지할 수 없어진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지배 영역 간섭에 그의 혈조술도 서서히 흔들리고 있었다.
결국, 셀 네이르는 그대로 혈조술의 크기를 줄여서 스스로 피의 해일을 해제했다.
하지만 간단히 해제한 건 아니었다.
콰아아아아아앙!
거의 성문 근방을 깔아뭉개듯 피의 해일을 아래로 내리깔며 혈조술을 해제했고.
이내 굉음이 일어나는 동시에 그의 예상대로 막대한 선혈이 아래로 흘렀다.
그에 셀 네이르는 피로 만든 발판에 선 채 폭소했다.
“하하핫! 어리석은 놈! 진조도 아닌 놈이 이만한 혈액을 다 간섭할 수 있을 줄 알았나!”
하지만 셀 네이르의 웃음은 그렇게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게 무슨?”
피의 해일에 내리 찍힌 성문 근방의 건물들은 다 멀쩡했기 때문이다.
마치 타격은 받지 않았다는 듯 멀쩡한 광경에 셀 네이르는 당황했다.
그럼 방금 들었던 굉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터져 나왔다는 것인가?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키이잉─.
불길하게 울려대는 소음에 셀 네이르의 눈이 아래를 향했고.
이내 그는 피의 기운이 흐르며 밝게 빛나는 붉은 검을 볼 수 있었다.
「충전 완료.」
「스킬 ‘반격의 방패’가 누적된 피해량을 반사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온몸에서 붉은 증기를 뿜어내는 한 인간 남성이 두 손으로 쥔 빛나는 검은…….
셀 네이르가 복잡한 사고 단계를 거치지 않아도 단숨에 위험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에 셀 네이르는 기겁하듯 몸을 떨며 재빠르게 도시에 있는 핏물을 끌어와서 몸을 감쌌다.
“이런 미친……!”
저렇게 과열된 검은 셀 네이르의 짧지 않은 삶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예전에 한 번이나마 이와 비슷한 사례를 들어본 적은 존재했다.
성검을 손에 넣은 용사가 흡혈귀를 멸종시키기 직전까지 갔다는.
생각해보면 고리타분하고 또 고전적이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실제로도 그저 흡혈귀를 겁주기 위해서 있는 거짓된 이야기라 생각했지만…….
이어서 인간 남성의 손에 들린 붉게 빛나는 검이 뿜어내는 광선을 보니 생각이 달라진다.
옛날에 들었던 이야기와는 다르게 성스럽지도 않고 오히려 꺼림칙할 정도로 붉었지만.
분명히 인간 남성의 손에 들린 검이 내는 빛은 그를 멸하기 위해서 있는 광채였다.
“아.”
용사는, 그리고, 성검은…….
“실존했던 이야기였나…….”
한성윤의 광검(光劍)이 셀 네이르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