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undless Necromancer RAW novel - Chapter 141
139. 강림 (4)
눈을 뜨자 보인 것은 끝을 짐작하기도 힘든 어둠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부감이 든다든지 무섭다든지 하지는 않았다.
마치 온몸이 미지근한 물에 잠긴 듯 둔하고 오히려 푸근할 지경이었다.
“…….”
잠시 어둠을 응시하고 있자니 서서히 사고력이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그렇구나. 나는……, 이미 죽었어.’
현실에서의 나는 한 번 죽은 채 부활 대기 상태에 돌입했다.
아마도 이것은 심상 세계 혹은 주마등처럼 짧게 지나가는 구간일 것이다.
어쩌면 잉걸불을 삼키는 밤의 장막이 일으킨 현상일지도 모르고.
무엇이 되었든지 이 자리에서 더 머무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깨어나자.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싸우자.’
아직 나는 쓸 수 있는 것을 다 쓰지 않았다.
신화도 발동하지 않았고, 스킬들도 여럿 보존하고 있으며, 권능들도 쓰지 못한 게 많았다.
아직은 완전히 패배하지 않은 것이다.
‘희박하지만, 이길 수 있는 확률도 존재해.’
하지만 심상에서 더 시간을 보내다가는 어찌 될지 모른다.
최대한 빠르게 정신을 되찾고 전투에 돌입해야 한다.
‘어차피 이곳은 내 심상이야. 집중하면 의식을 되찾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11층 시련에서 직접 심상을 깨우친 적도 있었기에 더 그러했다.
이내 투지를 불태우며 정신을 집중하니 검은 공간에 한 자루의 검이 나타났다.
저것은 일종의 스위치였다.
11층에서 한 번 본 적이 있는 심상 세계의 일부로서 검을 잡는다면 나는 정신을 차리고 현실로 복귀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은 건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된 잡기의 일종이다.
정신을 집중하니 바로 된다는 게 조금 신기하기야 했지만, 그 이상의 가치는 느껴지지 않았다.
‘……바로 나가자마자 반격의 방패로 몸을 보호하고, 를 활성화하고, 천천히 기회를 노리자.’
그에 바로 나는 전투 전략을 생각하며 검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동하려고 했었다.
[ 후후, 설마 혼자 자리를 벗어나려 할 줄이야. 성격이 급한 아이로구나. ]등 뒤에서 갑작스럽게 물컹거리는 감촉이 느껴지기 전까지는.
‘이건 또 무슨……!’
어느새 상체를 누군가 뒤에서 끌어안고 있다는 걸 알아챈 나는 바로 손길을 뿌리쳤다.
소름이 돋았다.
심상에서라고는 해도 나는 감각을 늘 날카롭게 벼려 두고 있었다.
이것은 여러 스킬을 통해서 강화된 감각을 유지하다 보니 생긴 버릇이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니…….
순식간에 긴장감이 곳곳을 누비며 뇌를 빠르게 회전시켰다.
‘누구지? 전투의 신? 아니, 그것도 아니면 증명의 신인가? 대체 무슨…….’
대체 누구길래 내 심상 세계에 접근했으며 무엇을 위해서 이곳에 있는지.
하지만 사고를 가속하면서까지 생각한 것보다 더 빠르게 상대방의 말이 이어졌다.
[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아이야, 나는 너의 적이 아니란다. ]그리고.
“……당신은.”
손길을 뿌리친 채 고개를 돌린 나는 상대방의 모습을 눈동자에 담을 수 있었다.
검은 로브를 깊이 눌러써서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여실히 드러나는 몸의 굴곡이나 나긋하게 울려 퍼지는 음성을 통해서 여성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도저히 상대방이 누구인지는 현재 주어진 정보로는 유추하기 어려웠다.
“당신은, 누구지?”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어서 물어보니 여성에게서 즉각 대답이 돌아왔다.
[ 비록 이 상황이 재현되었다고는 한들, 나를 위해서 성전을 치렀는데, 몰라보니 섭섭하구나. ]“……설마 당신은 어둠의 신입니까?”
[ 후후, 정답이란다. 생각보다 빠르게 정답을 찾았구나. 옳지, 옳지. 참으로 영리해. ]“……제게 손을 대지 마십시오.”
어둠의 신이 마치 기특하다는 듯 뻗은 손길을 나는 유유히 물러서며 회피했다.
심상 세계라 한들 이곳 또한 하나의 전장이다.
‘이 자리에서 죽으면 정신이 붕괴할지도 모르지.’
심지어 신들은 어째서인지 몰라도 내게 상당히 적대적이었다.
굳이 의도를 알 수 없는 짓에 어울려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 ……그래,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구나. 하지만 곧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적이 아니라는 것을. ]어둠의 신은 그리 말하며 키득키득 웃더니 이내 뒤로 천천히 물러서기 시작했다.
[ 이제 탑이 귀찮게 구니 가 보마. 아이야, 부디 힘을 빌려준 만큼 나를 즐겁게 해 주렴. ]이내 그녀의 모습이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게 될 즈음에 속삭임이 울려 퍼졌다.
[ 눈을 뜬 순간부터, 너를 둘러싼 모든 것이 바뀔 거란다. ]그 말에 무어라 말하기도 이전에 완전히 어둠의 신이 종적을 감췄음을 깨달았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었는지, 그리고, 어째서 내게 나타났는지 궁금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당장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현실의 나는 싸늘한 시체로 뒹굴고 있을 터다.
‘……이러고 있을 시간은 없어.’
나는 어둠의 신에게서 관심을 끈 채 바로 심상 세계에 나타난 검을 붙잡았다.
그리고.
「부활하였습니다.」
눈을 뜨자마자 나는 온몸을 둘러싼 어둠을 보며 깨달았다.
「사도화(使徒化)에 성공했습니다.」
「사신의 자질이 크게 꿈틀거리며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이제부터 심장에 깃든 신성이 죽음의 성질을 품습니다.」
「도전자 한성윤에게 새겨진 모든 신의 흔적이 완전히 제거됩니다.」
어째서 어둠의 신이 나를 보며 눈을 뜨면 모든 것이 바뀔 거라 했는지를.
「도전자 한성윤이 사도화의 유지 시간 동안 유사 신격으로 인정됩니다.」
「신성의 키워드에 따른 일시적인 권능 행사가 가능해집니다.」
「신성의 키워드는 , , 입니다.」
머릿속에 불을 지른 것 같은 쾌감을 끝으로 다시 시야가 암전되었다.
***
제르한 네비아는 천사라 불리는 쌍익족(雙翼族)의 타고난 전사였다.
그는 전신교의 예비 사도가 되기까지 한 번도 전투에서 지친 적이 없었고.
패배 같은 것은 생각해 본 적조차도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수많은 사제와의 격전을 치르며 예비 사도로 발탁될 때까지도 그는 진다는 것을 그리고 힘들다는 것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제르한도 나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크, 크하아……. 욱, 우우욱. 끄, 끄허억. 비, 빌어먹을. 수, 숨이…….
제르한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심장 부근을 움켜쥐었다.
전투의 신에게 부여받은 신성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날뛰며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정식 사도도 아닌 예비 사도에게 무리하게 을 시전하며 생기게 된 문제였다.
‘과, 과연……. 이게 바로 전투의 신께서 지닌 힘인가…….’
전투의 신이 제르한 네비아의 몸에 강림한 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마저도 전력을 다하지 않은 채 제르한이 죽기 직전까지 한 번의 섬광을 쏘았을 뿐이다.
그런데 고작 벌레를 치우듯 쏜 공격의 여파로 제르한의 몸은 완전히 걸레짝이 되었다.
다른 예비 사도였다면 이 자리에서 심장이 터져서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가 살아서 버티고 있는 것은 순전히 타고난 전사의 신체가 버텨 준 덕분이다.
‘……하지만 이걸로 신의 은총도 받았고, 신성력도 이전보다 강해졌다.’
제르한은 상공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애쓰는 와중에 의 후유증을 만끽했다.
본래는 심장이 터져서 죽었을 것을 버텨 낸 보람이라는 듯 그는 강대한 힘을 쟁취해 냈다.
쓸 수 있는 권능의 숫자는 미친 듯이 불어났으며, 신성력도 이제는 정식 사도와 비견될 정도까지 강화되었다…….
어느새 고통에서 벗어난 제르한은 짐짓 오만한 얼굴로 지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제 하늘 아래에서 가장 강한 자는 내가 될 것이다.”
신을 제외한 가장 강한 자는 자신이 될 것이라고.
그리고.
「전투의 신이 예비 사도 제르한에게 개소리하지 말고 빨리 전투를 준비하라 합니다!」
그 말을 끝내자마자 제르한은 시야의 한구석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볼 수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다급한 메시지에 제르한이 피식 웃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학살자라 불린 인간도 처리했으니 이제 암신교는 별것 아닙…….
그 순간이었다.
쿠구궁─!
갑자기 지상에서 굉음이 울리더니 공기 중의 마력이 미친 듯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의 후유증으로 한껏 강화된 제르한마저도 긴장해야 할 정도의 이변이었다.
그에 제르한은 기겁하며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뭣……. 이, 이게 대체 무슨…….
지상은 어느새 가늠할 수 없는 짙은 어둠에 휩싸여져 있었다.
해가 지며 생긴 황혼의 어스름함마저 집어삼키는 어둠의 너울거림을 보며 제르한이 소리쳤다.
―아, 암신교의 신도 이 자리에 강림한다고? 말도 안 돼! 이 자리에 사도는 없을 터인데!
하지만 그러는 것도 잠시였다.
지상을 집어삼키듯 부풀려졌던 어둠은 한 지점을 중심으로 축소되며 사그라들었고.
이내 어둠이 점처럼 줄어든 자리에는 검은 기운을 휘감은 인영(人影)이 존재했다.
[ ─. ]마치 보는 것만으로도 목숨이 끊어질 것 같은 불길함의 결정체였다.
제르한은 간신히 신성력을 운용하여 그 불길함을 떨쳐 내고 검은 기운을 직시했다.
‘젠장……. 무엇이냐. 저것은. 어째서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냐…….’
아무리 검은 기운을 통찰하여 본질을 보려 해도 시야가 흐릿해지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이내 제르한은 깨달았다.
저것은 확실히 대단한 존재긴 해도 신격은 아니었다.
만약에 신격이 깃들었다면 저렇게 뜸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현세에 신격이 현현하는 것이다.
신의 힘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죽는 것을 바라지 않는 한 오래 쓰는 것도 불가능하다.
―……어둠의 신이 아니라면 상관없다. 이제 나를 막을 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제르한은 손바닥을 펼쳐서 붉게 빛나는 성스러운 장창(長槍)을 생성했다.
본래라면 펼칠 수 없었을 신의 기술을 구현하자 두려움이 싹 가셨다.
―신의 위엄에 도전한 대가는 똑똑히 치르게 해 주마.
제르한은 그대로 살기가 흐르는 안광을 번뜩이며 투창했다.
신의 권능으로 생성된 장창은 귀를 찢을 것 같은 파공음을 일으키며 지상으로 돌진했다.
그 순간까지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인영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결국, 겉만 번지르르한 볼 것 없는 허접한 존재였구나.’
제르한은 승리를 확신하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저 검은 인영은 정체를 알 것도 없이 이대로 창에 꿰뚫린 채 죽을 것이다.
그것은 이제 뒤집을 수 없는 정해진 결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 ……삼켜라. ]상황이 단숨에 달라지기 시작했다.
검은 인영이 입을 열자마자 벼락처럼 내리꽂히려 한 성창이 그 자리에서 정지했다.
곳곳에서 모여든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기운에 속박당한 채로.
그러더니 검은 기운은 마치 포식이라도 하듯 성창을 집어삼켰다.
새롭게 습득한 신의 권능이 어처구니없이 소멸한 것이다.
그 광경을 본 제르한이 멍청하게 소리를 내었다.
―……어? 어, 어어?
그리고.
[ ……아, 너는─. ]끝을 모를 어둠을 휘감은 존재가 제르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 ……그래, 이제야 기억이 나네. 너는, 내 적이었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굳이 제르한이 그 말을 이해할 필요성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한 말은 제르한에게 전달하려 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명령이었으니까.
[ 죽어. ]서걱─!
제르한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며 화려하게 피 분수를 내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