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undless Necromancer RAW novel - Chapter 17
016. 경쟁의 시련 (5)
이성훈에게 있어서 탑이라는 건 새로운 기회였다.
한때 유망주였지만, 지금의 이성훈은 날개 꺾인 새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남들이 현실을 볼 때, 이성훈은 늘 과거를 보았다.
높은 등급의 고유 특성으로 나중에는 A급 헌터도 노려볼 만했던 시절.
별 볼 것도 없는 이성훈의 인생 중 황금기가 있다면 그때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몇 개월 전의 이야기, 이성훈은 D급 헌터에서 성장이 정체됐다.
물론 D급이라고 해도 일반인 연봉의 몇 배를 받는 건 똑같지만…….
유망주라고 불리며 누리던 혜택들로 한껏 오만해져 있던 그에게 있어서는 청천벽력이었다.
마력 저항력이라는 희귀한 고유 특성과 근접 전투 특화의 시너지는 뛰어났다.
다만, 그걸 꺾을 정도로 처참했던 이성훈 본연의 전투 능력이 그를 나락으로 빠뜨렸을 뿐.
그러던 어느 날, 한밤에 나타난 홀로그램이 그를 시련의 탑으로 초대했다.
「시련의 탑이 당신을 적합자로 판단했습니다.」
「난이도를 선택해 주십시오.」
모든 이들의 능력을 초기화시키며 시련에 들게 한다는 것.
일단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능력을 꺾었다는 게 제일 마음에 들었지만, 무엇보다도 시련의 보상이 달갑게 느껴졌다.
딱 각성 초기의 능력, 그리고 시련의 탑이 주는 보상들을 합한다면?
그래, 꺾였던 날개는 되찾을 수 있고, 전보다 더 성장할 수 있다.
심지어 5층, 아니, 8층만 간다면 지구로 완전하게 귀환할 수도 있단다.
제일 힘든 난이도를 고른 만큼, 시련은 고되었지만 그만큼 성장도 가팔랐다.
4층의 시련이 경쟁이 주제라고 했을 때도 그는 자신이 제일 강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
도대체 뭘까, 이 상황은.
이성훈은 눈앞에 있는 사내를 바라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두려움, 열등감, 분노, 수치심 등등, 온갖 감정이 팽배해진다.
‘씨팔, 고작 헌터 지망생 주제에……!’
하지만 내면에서 솟구치는 불길과 다르게 이성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당연했다.
고블린 둘도 상대하기 힘들었던 그와 다르게 이 사내는 고블린을 여덟이나 해치웠다.
그것도 후방에 있는 이하연의 보조 마법은 조금도 받지 않고서.
순수한 신체 능력과 기술로 이 괴물들을 전부 압도해 낸 것이다.
완전무장한 고블린은 최소 E급에서 최대 D급으로 쳐 줄 수 있는 예외적인 존재였다.
그래서 이성훈도 고전했고, 사투 끝에 두 마리를 끝장낼 수 있었다.
하지만 사내는 그 네 배나 되는 수를 해치웠고, 현실을 부정하던 이성훈에게 가볍게 말했다.
만약 실력도 되지 않는데 나댄다면 죽이고 시련을 진행하겠다고.
그러나 그런 폭언에도 이성훈은 입을 열 수조차 없었다.
“그럼, 남은 시간만큼은 잘 협력해 봅시다.”
고작 헌터 지망생이라며 입을 열기에는, 본 게 너무 많았으니까.
***
이성훈은 머저리지만 말귀를 못 알아먹지는 않았다.
더 뻔뻔하게 굴면 굴수록 어떤 식으로든 이성훈만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
그렇다고 해서 옆에 있는 이하연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도 그럴 게 이하연은 그 누구의 편도 아니니까.
‘아까도 중재하는 식으로 말했던 걸 보면, 뻔하지.’
실제로도 이하연은 뒤로 슬쩍 물러선 채 이성훈과 나를 번갈아서 바라보고 있었다.
즉, 어떻게 되든 간에 이하연은 이하연대로 따로 대응할 거라는 뜻.
그리고 그게 이성훈에게 유리한 쪽으로 굴러가지 않으리란 건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
이성훈은 더 구질구질하게 굴지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닫은 채 표정을 굳히며 뒤로 물러설 뿐.
‘뭐, 사실상 반박할 내용이 없겠지.’
처음부터 시비를 건 것도 그였고 시련에서 안일함을 보인 것도 그였다.
서로 합심해서 경쟁에 임해도 모자랄 판에 헛짓거리나 하려고 했던 것도 그랬다.
그러니 반박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거다.
물론 자의식이 강한 헌터이기에 힘으로 날뛸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다만.
그러한 생각은 기우였다는 듯 이성훈은 순순히 물러섰다.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아서 다행이네.’
시간제한이 있는 시련, 더 분쟁을 일으켜서 좋을 게 없다.
하물며 목숨을 걸고 수행해야 하는 시련이라면 더 그렇고.
이성훈도 시간을 낭비하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 이내 물러서기로 한 것이다.
물론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면야 나섰을지도 모르겠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이 정도로 격차를 보여 줬는데 더 다투려 할 리는 없다.
팀의 불화를 조장하던 이성훈마저도 물러선 상황이니 더 망설일 것도 없어졌다.
주도권을 잡았으면 활용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 이제 제가 괴수를 처리할 테니, 이성훈 씨는 그냥 이하연 헌터님을 지켜 주시죠.”
그 말에 가만히 있던 이성훈이 입술을 꽉 깨물고는 입을 열었다.
“……알겠다. 그 외에 해야 하는 일은?”
최후의 자존심이라도 되는 건지 반말을 고수했지만, 뭐, 크게 상관은 없다.
어차피 이 4층만 지나면 만날 일도 없을 테니.
“없습니다. 그것만 해 주시면 되니 크게 긴장할 필요도 없고요. 이하연 헌터님은…….”
“그냥 저도 편하게 불러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하연 씨는 전과 똑같이 길의 안내 및 후방에서 보조만 해 주시면 됩니다.”
“아, 네. 그럼 다시 탐색을 재개할게요.”
음, 예상하지 못한 효과로 이하연도 덩달아서 긴장한 기색이다.
아마도 이성훈에게 죽일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협박을 했기 때문이겠지.
물론 실제로 하지는 않았으니 그나마 아직은 협조적인 거겠지만.
적어도 전보다 더 경계심이 늘어난 건 확실했다.
‘이렇게 강압적으로 굴 생각은 아니었는데.’
뒷맛이 좀 씁쓸하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내가 한 일에 대해서 후회감은 전혀 없었다.
만약 나서지 않고 꾹 참고 있었다면 더 상황이 안 좋아졌을지도 모르니까.
이성훈의 오만함은 차치하더라도 고블린조차 제대로 못 해치우는 진행 속도는 문제가 있었다.
다른 경쟁자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들도 이렇게 약하진 않을 터였다.
괜히 불리한 상황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기에 별로 후회도 없었다.
그때 허공을 응시하며 손가락을 꾸물거리던 이하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방금 탐색 능력을 펼쳐 봤는데, 보스는 도시 안쪽에 있는 거 같아요.”
“……벌써 보스가 있는 지점이 어디인지 알아낸 겁니까?”
“그런 거 같아요. 고블린 킹은 성채 도시의 중심부에 있어요. 다른 보스들도 도시 내부고요.”
“혹시, 고블린 킹을 잡으러 가는 과정에서 다른 보스를 노리는 도전자들과 이동 경로가 겹칠 수도 있습니까?”
“음, 보스끼리의 위치는 서로 좀 크게 떨어져 있어서 그렇게까지는 겹치지 않을 거예요.”
그 말은 곧 다른 도전자를 마주치면 그게 곧 경쟁자라는 뜻이다.
시련의 탑은 늘 직관적인 형태로 시련과 보상을 내주었고,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눈에 보이는 괴수는 다 죽이고, 마주치는 도전자도 다 죽이라는 거겠네.’
이것보다 더 간단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명쾌하다.
다만, 그 직관적인 시련의 내용이 살인을 명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다른 도전자들의 위치는 알 수 없겠습니까?”
“고유 특성이 아직은 미약해서 다른 도전자들의 위치는 못 찾아요. 마력도 부족하고요.”
“그럼 마주치지 않고 고블린 킹을 사냥하는 건 불가능하겠군요.”
“네, 적어도 제 능력으로는…… 힘들 것 같아요.”
결국, 살인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니 이하연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성훈은 그렇게까지 긴장하지는 않았고 그저 좀 곤란하게 됐다는 눈치였다.
평범한 반응은 아니었다.
탑에 들어오기 전에 무슨 일을 했던 건지는 몰라도, 이성훈은 살인 경험이 있을지도 몰랐다.
헌터 중에서는 던전 내부에서 서로 죽이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하니까.
그저 법이 지켜 줄 수 없는 곳이기에 처벌받지 않을 뿐.
추측대로라면 이성훈은 조금 경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혹시라도 뒤통수를 칠 수도 있으니.’
반면, 이하연은 나를 배신할 가능성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근접 전투 능력이 거의 없는 마법사고, 이성훈은 못미덥다는 걸 확인한 상태.
적어도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배신할 리는 없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해 가던 차였다.
「성채 도시 내부의 괴수들이 준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시련 목표를 처치하십시오.」
더 기다려 주지 않겠다는 듯 시스템 메시지가 움직이기를 재촉했다.
슬슬 결의를 다졌던 것처럼 제대로 시련을 수행할 때가 온 것이다.
“…….”
되도록 살인은 하고 싶지 않지만, 그건 그저 희망하는 바일 뿐.
각오했던 것처럼 직접 이 손으로 사람을 죽여야 할 수도 있다.
진정한 의미로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서 벌벌 떨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슬슬 안쪽으로 파고드는 게 낫겠군요.”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은 마찬가지고 죽이지 않으면 죽는 게 현실이기에.
다만, 그전에 해야 하는 일은 빼놓지 않았다.
“그럼 다시 진형을 갖추고 들어가도록 하……?”
문득 말을 이어 나가던 이하연이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만도 했다.
얻을 것도 없는 고블린의 시체로 다가가는 내 모습은 확실히 이상하게 느껴질 테니.
“음, 한성윤 씨, 마석을 채취하시려는 거면, 탑의 괴수들한테서는 얻을 수 없을 거예요.”
곤란하다는 듯한 말투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내뱉는 이하연.
알고 있던 사실은 아니었지만 나도 마석을 채취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는 이상, 마석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시련을 치렀다면 보상을 얻듯 나는 싸움이 끝나면 얻어야 할 게 있었다.
“아, 잠깐만요. 해야 하는 게 있어서.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고블린 레인저의 사령을 모두 흡수합니다.」
「현재 보유한 사령의 수 – 8/15」
「숙련도가 11% 상승합니다.」
고블린이 차고 있던 단검을 챙기는 척, 놈들의 사령을 모조리 흡수했다.
이성훈이 처리한 고블린은 흡수할 수 없는 것인지 표식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뭐, 남이 죽인 괴수의 혼도 흡수할 수 있으면 그게 이상한 거겠지.’
워낙에 효율이 좋은 특성인지라 그냥 그러려니 하며 넘겼다.
보유한 사령 목록에서 고블린 레인저의 혼을 다 체크해서 바로 흡수를 시도했다.
그리고 짧은 기다림 끝에 바라고 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고블린 레인저가 보유하고 있던 스킬 중 한 가지를 흡수합니다.」
「보유한 사령을 모두 사용하여 영구적으로 능력치를 상승시킵니다.」
「근력이 3 상승했습니다.」
「민첩이 4 상승했습니다.」
「체력이 2 상승했습니다.」
「내구가 7 상승했습니다.」
‘스킬 흡수, 예상대로 흡수하는 숫자가 많아지니 제대로 작동하네.’
같은 고블린 레인저들을 일제히 흡수한 탓인지 신체 능력이 올라가며 스킬이 한 가지 습득됐다.
「스킬 ‘레인저의 소양(F)’를 습득합니다.」
레인저의 소양이라, 확 느낌이 오는 스킬은 아니지만…….
등급은 낮아도 스킬인 이상, 유용할 수밖에 없을 거다.
그리고 그 추측은 이어서 설명창을 열은 순간, 현실이 되었다.
『스킬 – 레인저의 소양(F)』
『숙련도 – 0%』
『효과 – 전체적인 시야각이 넓어지고, 다른 이의 접근을 알아차리기 쉬워집니다.』
간단하다면 간단한 효과겠지만, 이것만으로도 꽤 쓸 만했다.
다른 이의 접근을 알아차리기 쉬워진다는 게 뭔지는 몰라도 시야각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시야각이 넓어진다는 게 이런 느낌인 건가?’
눈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이 뚜렷하게 보이며 시야의 초점이 한 곳에만 치우쳐지지 않는다.
설명 그대로 전체적인 시야각이 확 늘어난 느낌이랄까…….
적어도 적응이 어렵다거나 그런 부류는 아니라서 다행이다.
고블린이 차고 있던 예비용 단검을 챙기고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이하연에게 다가갔다.
“자, 받으시죠. 고블린이 차고 있던 거라 질은 안 좋아도, 투척용 단검은 될 겁니다.”
그제야 이하연도 어째서 내가 고블린의 시체를 탐색했는지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아……. 감사하긴 한데 저보다 한성윤 씨가 쓰는 게 더 나을 거예요. 저 투척에는 그다지 자신이 없거든요.”
“아뇨, 저도 투척은 못 합니다. 필요도 없고. 하지만 이하연 씨는 이성훈 씨와 같이 있으면서 싸워야 하잖습니까.”
요컨대 그냥 가지고 있다가 몸을 지키는 용도로 소비하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말하니 이하연도 더 거부하지는 않았다.
“……감사합니다, 요긴하게 쓰도록 할게요.”
“뭘요, 어차피 제 것도 아닌데.”
물론 내가 해치웠으니 내 소유물은 맞겠다만, 지금은 이렇게 둘러대는 게 낫다.
후방에서 지원해 주는 포지션의 마법사는 귀중했다.
만약에 허무하게 죽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상황이 꼬일 테니 이렇게 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전에 나를 도와주려고 이런저런 말을 해 줬던 것도 있고.
투척용 단검이야 필요하면 상점창에서 사 뒀던 것으로 대체하면 될 뿐.
그렇게 정비를 마친 후, 나는 진형을 잡으며 지시를 내렸다.
“자, 그러면 다시 움직이도록 하죠.”
전투 보상도 확실하게 얻었으니, 이제는 시련을 진행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