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undless Necromancer RAW novel - Chapter 264
262. 지구 (5)
본래 나는 이하연에게 간단한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도 지구에서는 그녀가 나의 파트너와도 다를 바가 없으니.
적어도 탑을 오르거나 지구로 돌아오면 그녀에게 연락 정도는 하고 다니겠다고.
하지만 여태까지 나는 그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정말로 야속하게 느껴질 정도로.
─저한테는 약속한 것과는 다르게 말없이 탑을 오르시고, 제대로 된 연락 한 번도 하지 않으셨는데…….
갑자기 목덜미가 차갑게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
─탑에는 저렇게 친밀한 지인분이 있으셨나 보네요?
이하연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속삭인 말들이 뇌리에 맴돌았다.
‘어…….’
그리고 동시에 생글생글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를 보니 입이 꾹 닫혔다.
……이렇게 됐을 때는 뭐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
솔직히 말해서 대충 얼버무리고 싶지만, 이하연에게 맺혀진 감정 탓에 그럴 수도 없었다.
왜인진 몰라도 그녀는 불안 혹은 초조와도 같은 감정을 그려 내고 있었으니까.
그에 나는 잠깐 사이에 머리를 굴리고는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말했다.
“어쩌다 보니 알게 된 사이입니다. 예. 그리고 연락을 드리지 못한 것은─.”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셨을 거예요. 그렇고 말고요. 그러니 거목 미궁에서 나오셨을 때도, 제게 말씀 하나 안 주신 거잖아요……?”
마치 물 흐르듯 이어지는 반격이라고 해야 할까.
바로 이어진 그녀의 대답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때도 솔직히 그녀에게 몇 마디 정도는 해 주고 탑을 오를 수도 있었으니까.
그것도 지구 차원에 올 때마다 온갖 귀찮은 잡무를 도맡아주는 파트너라면 더더욱 그렇다.
‘……단지, 그럴 시간마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미뤘을 뿐이지.’
그에 이내 내가 또 다른 변명을 하려고 하는 순간.
“이해해요. 성윤 씨에게는 달리 중요한 게 있을 테니까요. 그저, 조금 섭섭했을 뿐이에요.”
어느새 이하연은 볼을 긁적이며 진심이 아니었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니 일단은 자리에 앉도록 하자고요.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분들도 많은 것 같으니.”
마치 전부 짓궂은 장난이었다는 느낌.
“아, 예…….”
그 천연덕스러운 몸짓을 보며 나는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녀의 손짓에 따라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오랜만이에요……! 당신! 거목 미궁 이후로는 처음 보네요?”
……어째서 그녀가 안내해 준 자리가 하필 이런 곳일까?
어느새 나는 이하연 그리고 캐서린 베넷의 중간 자리에 끼듯이 앉게 되었다.
캐서린 베넷이 히히 밝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지만, 거기에 답해 줄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럴 만도 했다.
“거기에 앉은 여성분은 또 누구인 건가요?”
캐서린 베넷이 눈웃음을 단숨에 풀고는 그렇게 물음을 건넸으니까.
물론 입가는 아직도 호선을 그리고 있긴 한데…….
저것을 이전과 같은 해맑은 웃음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흡사 처음 보는 사람을 경계하는 개가 꼬리를 뻣뻣하게 흔들 듯이.
그녀도 경계심에 물든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 경계심이 깃든 물음에 이하연이 고개를 돌리고는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캐서린 베넷 씨. 저는 백은 길드의 새로운 길드장이 된 이하연이예요.”
그리고…….
“17층 기준 랭킹 9위의, 상위권 도전자이기도 하고요.”
다음 순간.
“아마도 성윤 씨의 모든 보조 활동은 제가 맡을 것 같은데…….”
그녀는 내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더니 캐서린 베넷에게 짙은 미소를 지어 줬다.
“최대한 캐서린 베넷 씨와는 절대 귀찮게 얽히지 않도록, 제가 성윤 씨를 잘 서포트하도록 할게요.”
……왜인지 모르게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
어딘지는 몰라도 서늘함이 느껴지는 자기소개.
“호오……. 이거, 왜인지 모르게 재밌는 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그러게요. 흠. 회의 시간도 좀 많이 남았는데, 지루하진 않겠군요.”
“저건 또 뭐야……? 염병. 살다 보니 별걸 다 보게 되는군. ……부러운 자식 같으니.”
회의장 내의 눈길 중 몇몇이 이쪽으로 쏠렸다.
마치 남의 집에서 일어난 화재를 불구경하듯 지켜보는 듯한 시선.
하지만 갑자기 쏠리게 된 시선 중에서는 불구경이 아니라 자기 집에 난 불로 인식하는 이도 있었다.
“그것참…….”
바로…….
“재미있는 소리네요?”
캐서린 베넷이 그랬다.
그녀는 붉은 머리카락을 살짝 떨리는 손짓으로 빙빙 꼬고는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눈으로는 조금도 웃지 않으면서.
그대로 캐서린 베넷의 파란 눈이 가늘게 떠지며 말이 이어졌다.
“설마 탐색형 도전자로 유명한 분을 이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이건 대체 뭔 소리인 걸까.
‘탐색형 도전자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니…….’
뭔지도 모를 소리가 당연한 것처럼 오가니 궁금증이 일었다.
그럴 만도 했다.
갑자기 팀장직을 맡고 있던 이하연이 백은 길드의 길드장이 됐다는 소리도 의문이 드는데…….
몇 달도 되지 않는 시간 내에 그녀가 유명해졌다는 말을 들으니 괴리감이 느껴졌다.
‘이하연이 그 정도로 도전자로서 훌륭했나……?’
물론 현재 그녀의 체내에서 느껴지는 마력을 보면 대충 납득할 순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짧은 시간 내에 일어난 변화를 한 번에 수용하기란 어려웠다.
그것도 생각하지 못했던 지인의 성장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이질감은 이내 어딘가로 괴리되듯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가요?”
그도 그럴 것이…….
“저야말로 캐서린 베넷 씨를 이곳에서 보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어느새 이하연의 얼굴빛이 한층 더 차갑게 변화한 탓이다.
“아, 그것도 이렇게 철없는 강아지처럼 행동하시는 모습을 볼 줄은 상상도 못 했고요.”
마치 칭찬하는 것 같은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표정.
그렇기에 바로 눈치챘다.
저것이 사실은 살기를 숨긴 검과도 같은 고도의 돌려 까기라는 것을 말이다.
어째서 저렇게 갑자기 돌려 까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중재 정도는 해야 하겠…….’
그에 이내 둘 사이에 있는 내가 중재를 하려고 한 순간.
“철없는 강아지, 라고요……?”
갑자기 왼쪽에서 서늘하기 짝이 없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느새 캐서린 베넷의 눈동자는 감정 없이 검게 죽은 빛만이 머물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싸늘한.
하지만 그것도 잠시에 불과했다.
그녀는 이를 꽉 문 채로 이쪽을 힐끗 보더니 이내 가소롭다는 듯 웃음소리를 흘렸다.
“흣…….”
그것은…….
“아―, 그러고 보니, 저랑 성윤이 어떤 동료 관계인지 모르신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여태까지 몇 번 들어본 적이 있는 종류의 웃음소리.
“정말이지…….”
다름이 아니라…….
“가엾게도.”
승자들이 자주 패배자에게 날려주는 조소였다.
***
캐서린 베넷이 조용히 조소를 흘리자 반응이 나왔다.
다름이 아니라 이하연이 간신히 유지하던 입가의 호선이 일그러진 것이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그걸 본 캐서린 베넷은 내게 가까이 붙으며 부드럽게 미소를 짓더니 순진무구하게 말했다.
“어, 음……. 그러고 보니 말이죠. 성윤에게서, 이하연 도전자님에 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기분 탓인 거겠죠?”
그것도 아주 밝고 환한 목소리로 말이다.
“성윤이랑 친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서포트는 적당히 해 주셔도 괜찮아요.”
여태까지 대충 뭉뚱그리는 호칭으로 불렀던 것과는 다르게 성윤이라고 이름으로 부르다니…….
거리감을 대뜸 좁히려고 하는 것 같다마는.
그 점을 어째서 그런지 대놓고 물어보기에는 왜인지 모르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현재 좌우로 앉은 이 둘의 감정은 초조와 불안, 그리고 적대심이 뒤섞이듯 짙어지고 있었으니까.
흡사 질투라도 하는 듯이.
“……친하지 않은 것 같다니요? 그건 또 무슨 소리이시죠?”
“아니~, 뭐, 그렇잖아요~. 아직도 서로 그렇게 딱딱한 호칭으로 부르시고. 음. 착각이라면 죄송하지만요.”
“……착각이에요. 그리고, 애초에 서로 비즈니스로 얽혀있는데, 그렇게 가볍게 부를 수 있을 리 없잖아요?”
“그래요, 그래요. 성윤과는 그렇게 딱 비즈니스적인 관계일 뿐이니, 이하연 도전자님에 관해서도 따로 들은 게 없는 거겠죠.”
“그, 그럴 리는……. 성윤 씨의 보조를, 제가, 얼마나 잘했는데……. 그럴 리가 없어요.”
어느새 서로의 신경전에서 살짝 밀린 이하연이 불안하다는 듯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은 마치 애원하듯 간절함을 빛냈다.
그것도 아주 환하게.
“성윤 씨……. 그, 그렇죠……?”
마치 주인에게 버려지기 직전의 소형 동물 같은 눈빛.
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어야 했다.
그리고.
“……그저 시간이 없어서 서로 그런 대화를 나누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대꾸하니 이내 이하연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진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 따라서 캐서린 베넷은 초조한 듯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설마 자기 자신의 추측이 틀렸는지 의심하는 듯한 모습.
그걸 보고 있자니 문득 귓가로 흥미로운 기색을 띤 목소리가 웅웅 울려 퍼졌다.
바로…….
―호…….
담천우였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그는 현재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얄밉게 웃음을 흘려 댔다.
―네놈에겐 어울리지 않는 재미있는 일이 생겼구나?
‘……쓸데없이 말하지 마시고, 그냥 조용히 해 주시죠.’
―싫다. 오랜만에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 생겼는데. 이걸 어찌 그냥 지나치란 말이냐.
‘그럼 차라리 이 상황에서 효과적인 조언이라도 해 주시든지요.’
―끌끌……. 어리석은 것 같으니라고. 이럴 때는 그냥 조용히 하고 있으면 반은 가느니라.
‘…….’
한마디로 말해서 이대로 있으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내 나는 조용히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여태까지 살아오며 이러한 종류의 전개를 겪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차라리 탑을 오르는 게 더 쉽겠네.’
설마 지구에 오자마자 왜인지 모를 신경전을 봐야 할 줄이야.
서로 초면인 것 같은데 어째서 질투 같은 감정을 품는지도 이해할 수 없긴 한데…….
그렇다고 이쪽에서 중재하는 것도 어려웠다.
현재 둘이 서로에게 왜인지 모를 질투심을 품은 원인은 내게 존재하는 것 같으니까.
뭣보다 이 둘에게는 연락할 수 있음에도 1분 1초를 아낀 탓에 연락하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다.
‘사실, 이런저런 약속을 모조리 어긴 게 크긴 하지.’
원래라면 쓴소리를 몇 번이고 들었어도 이상하지 않았겠지.
그렇기에 나도 할 말이 없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나에게 이것저것 맞춰 준 게 많으므로.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있는 것보다는 중재하는 게 낫겠지.’
이내 서로에게 질투심을 드러내며 신경전을 벌이는 것을 멈추려 한 순간.
“이제는 완전 신파극이 따로 없구만?”
기적과도 같은 변수가 나타났다.
“랭킹 1등의 도전자라고 하길래 대체 어떤 새낀지 면상이나 한번 보려고 했는데…….”
다름이 아니라…….
“직접 보니 랭킹 6위인 이 몸보다도 높은 랭킹인 게 이해되지 않을 정도구만.”
갑자기 회의실 내에 있는 도전자 중 하나가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전이라면 더없이 하찮았을 도발이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하찮다든지 귀찮다든지 하는 느낌은 아니다.
그럴 만도 했다.
“버러지 같은 놈이 꼴에 사내놈이랍시고 목에 힘주고 다니긴.”
힘으로는 도저히 대처할 수 없는 현재 상황과는 다르게도…….
「업적 ‘치정 회피’를 달성했습니다.」
「민첩이 3 상승합니다.」
“그것참…….”
여태까지 질릴 정도로 겪어 본 이 시비는 힘으로 대처할 수 있으니까.
“재밌는 말을 하네요.”
그것도 아주 간단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