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undless Necromancer RAW novel - Chapter 31
030. 계층 난입 (3)
순식간에 몸을 조여 오는 압박감에 천천히 검을 들었다.
통합 시련도 아니고 개인마다 다른 시련에 다른 사람이 난입하다니.
솔직히 말도 안 된다며 분노를 표출하고 싶었지만…….
“왜 말이 없나, 미개인.”
“…….”
시스템상에서 5층 시련의 목표로 수정한 게 이놈이니 그럴 수도 없었다.
‘살아남을 방법을 모색해야 해.’
단 1%라 하더라도 생존할 확률이 있다면 포기할 마음은 없다.
나는 투지를 불태우며 눈앞에 있는 기사의 모습을 살폈다.
전신을 감싸는 검은 갑옷에 어울리지 않게 새하얀 세검, 벌써 상성이 안 좋다.
‘단검보다 리치가 긴 세검도 그렇고, 몸을 감싸는 갑옷도 그렇고.’
모든 요소가 내 패배를 예견하듯 견고함을 뽐낸다.
결국, 개인적인 기량으로 승부를 볼 수밖에 없다는 건데.
‘그러기에도 힘들겠지.’
늑대 소굴을 지나오며 보았던 전투의 흔적만으로도 실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적어도 내 수준으로는 이 기사를 죽이기 힘들다.
그렇다면 변수를 창출하는 정도는 해야 했다.
최대한 틈을 보이지 않게 하며 조심스럽게 적에게 물음을 건넸다.
“난입이라는 건 듣지도 못했는데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겁니까.”
“과연, 미개인답게 ‘계층 난입’의 개념도 모르는 건가. 큭.”
놈은 뜬금없이 나를 비웃더니 갑옷이 들썩거릴 정도로 웃어 댔다.
‘뭐지, 이 미친놈은…….’
학창 시절의 흑역사를 모아 놓은 듯한 대사에 주춤거릴 뻔했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래, 적어도 적은 나를 미개하다고 여기고 있다.
‘그럼 그걸 이용해야지.’
“계층 난입, 그게 뭔지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미개인이라 그런지, 머리도 텅텅 빈 모양이군.”
“…….”
“역으로 물어보자면, 그런 것에 답해 줄 거 같나?”
사춘기를 맞이한 것 같은 언동과는 별개로 생각은 있는 듯했다.
역시나 이런 뻔한 질문에는 걸려 주지 않는 모양인 것 같…….
“하지만 뭐, 상관은 없겠군. 곧 죽을 놈이니.”
아니, 걸려 주기는 한다.
‘……안 알려 줄 것처럼 굴더니 쉽게도 말하네.’
그만큼 나를 깔보고 있다는 방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8층부터 확장되는 시스템 중에 ‘계층 난입’이라는 게 있다. 상점에서 난입권을 구매하면 타인의 시련에 간섭할 수 있지.”
그리 말한 기사는 이어서 말을 덧붙였다.
“물론 이 하위 차원의 허접한 놈들은 8층도 못 간 모양이지만 말이야.”
“……그 말은 곧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그럼 내가 어디에서 왔다고 생각하는 거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답한 나는 이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최대한 검은 기사가 했던 말들을 의식하면서.
“진실의 눈.”
「스킬 ‘진실의 눈’이 활성화됩니다.」
「해당 인물의 말은 모두 진실입니다.」
보란 듯 스킬마저도 적이 진실을 말했노라고 표기한다.
진짜 시련의 탑 시스템이 말했듯 ‘다른 차원’에서 온 모양.
‘복잡하네, 젠장.’
애초부터 ‘던전’과 ‘시련의 탑’이 있는 이상, 못 믿을 것도 아니지만…….
‘스케일이 생각보다 더 크잖아, 이건…….’
그때였다.
“조금 불쾌한 짓을 하는군. 감히 이 몸의 언동을 판단하려 들다니.”
방금 ‘진실의 눈’을 발동시킨 게 짜증이 났는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검은 기사.
그 말에 나는 빙긋 웃음을 짓고는 짧게 대꾸했다.
“어쩌라고.”
뽑아낼 정보는 다 뽑아냈고 놈이 내게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도 확인했다.
적어도 당장 더 정보를 줄 것 같은 분위기도 아니고.
즉, 더 비위를 맞춰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뭐, 뭐? 감히 미개인 주제에……!”
검은 기사가 격분하여 부들거렸지만 그건 오히려 빈틈을 자아냈다.
말을 하는 와중에 몸을 내던지며 잽싸게 검을 내찔렀다.
후우웅, 캉!
“그딴 게 통할 거라 여겼나?”
그러나 곧 검은 기사는 투구 사이로 안광을 불길하게 빛내며 검을 받아쳤다.
‘……빈틈이었던 거 같은데, 놀랍네.’
순식간에 감정을 추스르고 검을 맞받아치는 실력은 인정해야 한다.
꼼수 같은 것으로 손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캉!
이어서 한 번 더 검을 휘두르고 이내 뒤로 물러섰다.
짧은 격돌, 그 안에서 알아낸 게 있다.
‘기사 놈도 능력치는 나보다 높지 않네.’
둘 다 한 손으로 검을 휘둘렀음에도 힘은 내가 좀 더 우위를 차지했다.
짧게나마 검은 기사의 몸이 밀려났었으니 확실했다.
그러나 방심할 수는 없다.
5층 시련의 목표인 괴수를 죽이고도 지친 기색이 조금도 없다.
그만큼 숙련된 강자라는 것은 분명했다.
‘능력치보다는 스킬적인 부분에서 위험할 수도 있어.’
그럼 나도 최대한 스킬들을 활용해서라도 호각을 이뤄야 한다.
당장 쓸 수 있는 스킬들을 떠올리며 자세를 다잡는다.
현재 보유한 스킬들 사이에서 제일 쓸 만한 건 ‘순간 가속’이다.
‘전투 속행은 한계에 몰렸을 때 발동되고, 물리 저항이나 고속 재생은 패시브야.’
그 외에도 잡다한 스킬이 있지만, 그것들도 패시브 형태의 스킬.
그럼 내가 응용할 수 있는 건 ‘순간 가속’밖에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나는 민첩성이 높으니 그걸로 승부를 봐야 해.’
그러지 못한다면 적이 숨겨 둔 한 수에 당하고 말 터다.
그때 눈앞에 있는 기사가 검게 칠해진 갑옷을 덜그럭거리더니 이내 혀를 찼다.
“쯧, 고작 5층이라 그런가, 능력치 제한이 심하군.”
아까부터 생각한 건데 저런 행동들은 뭘 의미하는 걸까 싶다.
쓸데없이 중얼거리는 말도 그렇고, 전투 중에 보복성 언행을 하는 것도 그렇고.
전부 이해할 수 없는 비효율적인 행동뿐이다.
‘자기 과시인가?’
어처구니없게도 지금 검은 기사는 날 상대로 자신을 과시하고 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얼마나 얕보였는지 도저히 알 수 없을 정도다.
물론 ‘능력치 제한’이라며 속이는 것일 수도 있겠다만…….
지금껏 하는 행동을 보면 그럴 가능성은 없을 거 같았다.
“이제부터는 봐주지 않으마, 미개인.”
문득 그렇게 말한 검은 기사는 검을 꽉 잡으며 자세를 취했다.
절도 있는 움직임, 스킬의 발동일 수도 있기에 긴장했다.
쿵.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곧 검은 기사가 발을 내뻗는 동시에 세검도 내찔러진다.
절대로 닿지 않을 거리에서 내뻗는 공격.
그게 뭘 의미하는지 나는 3층의 시련에서 한 번 겪어 본 적이 있다.
쿠후웅!
육중한 소리를 내며 검의 끝자락이 순식간에 늘어난다.
그 순간 나도 몸을 비틀었고 세검은 아슬아슬하게 옆구리를 스쳤다.
촤아악.
“큽.”
화끈거리는 통증에 신음이 새어 나왔다.
「스킬 ‘고속 재생’이 활성화됩니다.」
스킬 등급이 올라서인지 곧바로 베인 흔적이 사라졌지만, 통증이 아릿하게 남는다.
‘괜히 자신만만했던 게 아니었어.’
세검의 길이가 불시에 줄어드는 걸 보며 눈매를 좁혔다.
확실히 시스템에서 그렇게 고평가한 이유를 알겠다.
저게 가지고 있는 스킬의 일부라면 상대하는 건 매우 까다로울 것이다.
“잘 피해라, 미개인.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짓뭉개질 테니.”
검은 기사는 이 상황이 즐겁다는 듯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다시 자세를 취했다.
“…….”
운동장에 있는 개미를 자근자근 밟아서 천천히 죽이듯.
검은 기사는 딱 그 정도의 감정으로 날 대하고 있었다.
‘미친 새끼.’
고작 남의 시련에 와서 한다는 짓이 저딴 짓일 줄이야.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지만 지금 상황에서 분노는 쓸모없다.
침착하게,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수를 생각해야 하…….
후우웅!
하지만 생각을 이어 나가기도 전에 다시 세검이 쇄도한다.
이번에는 스치지도 않고 발을 옮겨서 피했지만 검은 기사는 의기양양했다.
“호, 날렵하군. 5층 도전자치고는 재밌어.”
그러나 나는 그 말에 어떠한 대꾸도 할 수 없었다.
호흡을 고르며 전투에 임하기도 급급한 상황.
결국, 어느 정도는 더 능력을 끌어내야만 한다.
‘순간 가속은 최후의 수단으로 아껴두겠지만, 이건 쓸 수 있지.’
헌터 마켓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암살자의 망토를 팔지 않은 게 아니다.
「암살자의 망토(D) 전용 효과가 활성화됩니다.」
「이동 속도 +15%」
「남은 지속 시간 – 00:00:59」
바로 지금 같은 순간을 위해서 남겨 둔 것일 뿐.
쿠우웅.
발을 내뻗는 동시에 검은 기사와의 간격이 바로 좁혀진다.
물론 그조차도 예상했다는 듯 검은 기사는 여유롭게 굴었다.
“간격을 좁힌다……, 그러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나?”
순식간에 검은 기사의 손에 들린 세검이 휘둘러지며 쇄도한다.
휘이익!
분명히 근력이나 민첩은 내가 우위였는데 비정상적일 정도로 공격 속도가 빠르다.
그런 부류의 버프가 있는 스킬을 쓴 것인지 눈으로 따라가기도 급급할 정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반응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다.
카아앙!
왼팔을 들어서 부착된 방패로 막는 찰나 세검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덧씌워진다.
칼날에서 피어오르는 기운은 적어도 절대로 평범한 스킬이 아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우우웅……!
그리고 동시에 부착된 방패가 쩍- 하고 갈라지며 팔에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팔목의 살갗이 반쯤 베였을 즈음 곧바로 팔을 내빼며 몸을 뒤로 움직였다.
쾅.
발길질까지 해 가며 급하게 물러서니 검은 기사가 이죽거렸다.
“저런. 차라리 팔이 잘렸다면 덜 거추장스러웠을 텐데.”
그 말을 무시하며 나는 최대한 오른팔로 왼팔을 억누르며 숨을 골랐다.
극심한 고통에 당장에라도 소리를 내지르고 싶었지만 이내 고통이 확 줄어들었다.
「스킬 ‘고통 내성’이 활성화된 상태입니다.」
「사용자에게 가해지는 모든 종류의 고통이 15% 감소합니다.」
「스킬 ‘전투 속행’이 활성화된 상태입니다.」
「사용자에게 가해지는 모든 종류의 움직임 제약이 약화합니다.」
이어서 발동된 두 개의 스킬 덕분에 순식간에 냉정함이 돌아왔다.
그래, 이럴수록 침착해야 한다.
꾹 팔의 단면을 붙이니 고속 재생 스킬에 의해서 조금씩 팔이 붙기 시작한다.
스킬의 등급이 오르며 ‘치명상’에 대한 판정의 범위가 넓어진 것일까?
잘 모르겠지만 상처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침착함이 서서히 돌아온다.
“하하, 꽤 재밌는 기술들을 가지고 있군.”
검은 기사가 비웃음을 보내는 사이에 사고 회전이 팽팽해졌다.
무슨 스킬을 썼던 것인지 몰라도 불그스름한 기운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잘 알겠다.
‘……절삭력 상승에 관련된 스킬이겠지.’
마력을 사용하여 검의 절삭력을 강화하는 기술일 것이다.
무기술 외에 그런 효과를 부여하는 스킬은 꽤 희귀하지만…….
그러한 부류의 스킬이 존재하기는 한다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저렇게 불그스름한 기운이 넘실거린다는 건 금시초문이지만.
‘어쨌든 지금 내 수준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스킬이야.’
한 번 막았던 결과가 바로 이 꼴이다.
비싸게 포인트를 주고 샀던 방패는 부서졌고 팔이 절단될 뻔했다.
‘……암살자의 망토를 써서 그나마 죽지 않았던 거겠지.’
만약에 좀 더 느렸다면 단번에 머리통이 날아갔을 것이다.
더 상대의 수를 읽으려 하다가는 이제 내가 죽는다.
‘결국, 답은 정해져 있던 건가.’
이제는 어느 정도 감각이 돌아온 왼팔을 움직이며 검은 기사를 노려보았다.
확실히, 가지고 있는 스킬들은 위협적이다.
어째서 본능적으로 위급함을 느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을 정도로.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기술적인 요소일 뿐.
‘능력치로 따진다면, 그건 내가 좀 더 강하겠지.’
그럼 이 미친 기사를 죽일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순식간에 판단을 마친 나는 재빠르게 손을 움직여서 네크로맨시를 발동했다.
「보유한 사령을 모두 사용하여 영구적으로 능력치를 상승시킵니다.」
「근력이 2 상승했습니다.」
「민첩이 3 상승했습니다.」
「체력이 3 상승했습니다.」
「마력이 5 상승했습니다.」
「내구가 7 상승했습니다.」
몸에 활력이 솟구치며 동시에 손실되었던 체력이 차오른다.
그 변화를 검은 기사도 인지했는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육체 강화인가, 재밌군.”
그래 봐야 이길 수 없을 거라는 듯 구는 검은 기사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암살자의 망토’에 있는 효과의 지속 시간을 확인하고는 이내 자세를 다잡았다.
왼팔도 어느 정도 회복됐고, 능력치는 전체적으로 상승했다.
‘자, 이걸로 할 수 있는 준비는 다 했고…….’
남은 건 이제 한 개였다.
“순간 가속.”
몸에서 마력이 빠져나가며 무게감이 줄어드는 듯한 감각이 전신을 장악한다.
이전에 쓰던 얄팍한 강화들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고양감.
그제야 검은 기사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움찔했다.
“고작 미개인이 무슨 스킬을 이렇게 많이…….”
그리 중얼거리는 검은 기사를 보며 나는 재빠르게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 찰나에 꾹 눌렀던 용수철이 튕기듯 몸이 폭발적으로 가속됐다.
방금 보여 줬던 움직임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해도 될 정도이기 때문일까.
“……빌어먹을 미개인이!”
검은 기사도 흠칫하며 아까와 같이 검에 새빨간 기운을 휘감았다.
동시에 무슨 스킬을 썼는지 좀 더 민첩해졌지만, 고작 그걸로는 나를 따라올 수 없었다.
암살자의 망토, 그리고 상승한 능력치에 순간 가속 스킬도 사용했으니 그럴 수밖에.
나는 검은 기사가 휘두르는 검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며 발을 내뻗었고.
꽈아앙!
순간, 발과 갑옷이 충돌하며 굉음이 쩌렁쩌렁 동굴을 울렸다.
“…….”
간신히 무릎을 굽힌 채 쓰러지지 않은 검은 기사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전과 다르게 여유로움이 사라졌으며 말수도 급격히 감소했다.
‘그렇다는 건, 저쪽도 어느 정도 위협을 느꼈다는 뜻이겠지.’
상대보다 더 높은 능력치를 기반으로 좀 더 기민한 몸놀림을 구사한다면…….
검은 기사가 쓰던 오러란 스킬에도 당하지는 않을 터다.
그렇게만 된다면…….
‘분명히 이길 수 있을 거야.’
드디어 좀 이 미친 시련의 답이 보이는 듯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