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undless Necromancer RAW novel - Chapter 422
420. 선택의 장 (2)
순식간에 사고가 정지하며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
그야, 저 시야에 비친 어느 낡아빠진 회색 예복을 입은 남성은, 지난날 본 적이 있는 한 상위 신격의 생김새를 완벽하게 빼닮았으니까.
‘……이게, 무슨.’
증명의 신.
고작해야 시련의 탑 10층 초반대 따위를 오르는 데조차도 필사의 각오를 내걸어야 했을 필멸자 시절에, 처음으로 본 상위 신격이자, 나에게 적잖은 은혜를 베풀어 준 존재였다.
하물며, 이 우주에 새겨진 인과율에 제재당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터인데도, 시련의 탑이 이쪽을 감정 없는 도구로 종속시키기 위해서 수작질을 부리려 한다는 것까지 알려줬지 않은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자다.
‘……가짜가, 아니야.’
그렇기에, 확신했다.
‘……신성이든, 아니면 마력이든, 시련의 탑이 만들어 낸 모조품으로 치부하기에는, 지나치게 완벽한 수준이야.’
사실상 저 거울처럼 맑은 눈빛을 가진 남성이 가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신성과 마나, 그리고 생명으로서 갖춘 기본적인 영격의 골조까지, 세세한 요소 하나하나조차도 가짜가 아닌 진짜에 한없이 가까운 모양새.
이쯤이면 그를 시련의 탑에 의해 어설프게 조형되었을 뿐인 결함투성이의 모조품 따위로 치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나, 물어볼 게 있습니다.”
즉, 저 시야 너머로 보이는 회색 예복의 남성이 시련에 ‘강림’이나 ‘화신’ 같은 계열의 고위 권능을 쓴 증명의 신일 가능성이 클 터.
“……어째서 당신이 이곳에 있는 겁니까?”
그에 나는 혼돈에 휩싸인 감정을 겨우 억누른 채 증명의 신에게 그리 물음을 건네었으나 기대와는 다른 대답만이 돌아왔다.
「증명의 신이 당신에게 눈을 찌푸리며 의아함을 내비칩니다.」
[ 허. 처음 보는 상대의 물음에 곧이곧대로 대답해 주는 버릇은 없다네. 어쩌면, 그대처럼 적일지 모르는 상대에게는 더더욱 말이야. ]증명의 신은 내가 건넨 물음 따위에는 대답해 줄 생각이 없다는 듯 날 선 반응을 내보인 채 눈매를 좁혔다.
[ 단, 그대가 마치 어딘가에서 한 번 나를 본 적이 있다는 듯이 말하는 이유는, 흥미가 제법 붙으려는 참이네. ]“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으시다는 겁니까?”
[ -시간 끌기, 아니면 신성이나, 신화를 발동시킬 어떤 조건을 준비하는 건가? 더 이상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다면 전투 의사로 받아들이겠네. 10초 주지. ]“…….”
싸늘했다.
흡사, 이쪽의 발언들이 저 증명의 신에게 있어선 하나같이 신성의 공능이나, 아니면 신화의 발동을 위해서 시간을 끄는 수작질처럼 보이는 모양.
몇 마디 대화를 나누지도 않긴 했으나 이렇게까지 날 선 반응이 돌아오는 걸 보니 상위 신격이나, 정식 신격들이 쓰는 ‘강림’이나 ‘화신’ 같은 능력을 써서 나타난 게 아니라는 것쯤은 확실하게 알 듯했다.
‘그렇구나…….’
그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
‘이제는 해답이 나오네.’
다름이 아니라-.
‘가짜는 아니지만, 진짜도 아니구나.’
사실상 저 회색 예복을 입은 증명의 신은 내가 아는 증명의 신과는 달리, 진짜와 무엇 하나 다른 점 하나 없는, 진짜에 터무니없이 가까운 가짜라는 것이다.
‘아니. 사실은, 이 증명의 신이 진짜와는 차이점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 그리 크지는 않아도 내가 아는 증명의 신과는 다른 점이 몇 가지 있어.’
단지, 저 증명의 신은 신성의 격이라거나, 아니면 신성력의 총량 같은 게 이쪽이 아는 증명의 신에 비해 낮은 축에 속할 뿐.
‘아마도 저 증명의 신은 어떤 과거 속 그의 모습일 가능성이 크겠지.’
한마디로 말해서 저 증명의 신은 시련의 탑, 그리고 레메게톤의 공능이 어떤 오래된 과거의 기록을 토대로 하여 불러온 모습이라는 뜻이었다.
‘설마, 시련의 탑이 정식 신격 이상의 존재들을 재현해 내는 데 성공할 줄이야…….’
어쩌다 보니 시련의 탑, 그리고 선택의 장에 더하여 레메게톤의 공능이 섞이는 우연이 겹친 끝에, 기존의 한계를 넘어선 비틀린 결과물이 나온 듯했다.
‘고대 신격 중 하나인 마신이 가진 성유물인 만큼이나 규격 외의 성능을 발휘했다는 거네.’
뭐, 실질적으로는 시련의 탑한테도 예상 밖의 사태일 터이니, 이에 대해 생각하는 건 크게 의미가 없을 터.
“하나 더, 물어볼 게 있습니다.”
[ ……이 이상으로 시간을 끌거나, 수상한 행동을 보일 시에는 적대 의사의 표출로 알아듣겠다고 했을 터. 현 시간부로 그대를 적대 진영 소속의 신격으로 간주하여 배제하겠─. ]“-아까부터 저를 언제든지 죽여버릴 수 있다는 것처럼 말하는 게 이해되지 않아서 말입니다.”
[ ……? ]“그렇잖습니까?”
이제 새로운 시련의 클리어에 전념할 순간이 왔다.
“아마도 아까부터 저를 죽이겠다느니, 아니면 배제하겠다느니 하는 걸 보니 자신감이 넘치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쿠구구구구구구구구-!
설득과 교섭, 그리고 중재에 통달한 깊은 지성의 현대인답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어, 서로의 오해를 풀어볼 타이밍이었다.
「초월과 죽음의 신이 한 상위 신격을 바라보며 싱긋 미소 짓습니다.」
[ ─저, 감당하실 수 있습니까? ]그것도 아주 확실히.
***
살짝 양심에 가책을 느끼긴 했다.
본디 시련의 탑을 오르며 이쪽은 증명의 신에게서 여러 가지의 혜택을 받아왔을 터.
설령, 저 회색 도포를 입은 남성이 한없이 진짜에 가까운 가짜라는 걸 알고 있다고 한들, 강제적으로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게 그리 달갑진 않다.
쿠구구구구구구구구구-.
단…….
「증명의 신이 당신이 선보인 신성의 격에 경악합니다.」
[ 이렇게까지 신성의 격이 드높다니……!! ]여태까지 시련의 탑을 오르며 단 한 번도 상대방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적이 없는 설득법이다 보니 효과 하나만은 제대로 드러났다.
[ 설마, 이건……!! ]내가 가진 신성 중 극히 일부만을 드러낸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이게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증명의 신은 확실히 깨달은 듯했다.
[ 고대 신격인 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증명의 신이 눈을 부릅뜬 채 경악성을 내뱉는 걸 본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줬다.
「초월과 죽음의 신이 상대방의 판단에 흡족함을 내비칩니다.」
[ 정답입니다. ]그에 나는 찬란한 신성의 힘을 거두어들인 채 피식- 가벼이 웃음을 지은 채 말했다.
“이쯤에서 아까 했던 질문 다시 해드리죠.”
한없이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말이다.
“저, 감당하실 수 있습니까?”
[ ……. ]“그래서, 대답은?”
[ ……. ]한데…….
「증명의 신이 당신이 가진 힘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는 허탈하게 웃습니다.」
[ 어리석은 발언이었음을 인정하지. ]갑자기 증명의 신은 한동안 침묵한 채 있다가 대뜸 그렇게 대꾸하고는 체념에 가까운 감정을 빛내며 말했다.
[ ……그러니까, 이쯤 하지. ]“?”
“…….”
아마도 저쪽에서는 이미 자기가 살해당하리라는 터무니없는 결론을 지은 것 같은데…….
“그럴 생각 따위는 없습니다.”
그에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딱히 당신을 살해하고 싶은 생각이 있는 게 아니니까요.”
[ 그게, 무슨- ]“단지, 저는 당신에게 이곳이 어디이며 뭘 하는 곳인지나 물어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 허? ]“이해하셨습니까?”
[ ……. ]그리고.
[ ……설마, 그대쯤 되는 위대하기 그지없는 힘을 갖춘 고대 신격이, 이곳이 어디인지조차도 모르고 왔을 줄이야. ]그것이 사실이라는 걸 알아챈 증명의 신이 황당함에 물든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 ……도대체 어떻게 그대 같은 존재가 신성 결계를 뚫고서 여기에 왔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온 게 아니란 건 확실히 알겠군. ]그에 나는 한결 답답함이 풀린다는 듯 고개를 가벼이 끄덕이고는 말했다.
“뭐, 제가 이곳에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다 보니 설명을 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본디 시련의 탑에서 새로운 시련에 들어설 때는 해당 시련의 스테이지에 대해 상황을 파악하는 게 우선일 터.
“대체 이곳이 어디이며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주신다면, 제게 저지른 아까의 무례는 더 이상 어느 것 하나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다.”
어쩌다 보니 마주친 이 증명의 신에게서 이 36층 시련의 스테이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세세하게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 ……흠.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군. 설명해주지. ]증명의 신은 한결 긴장이 풀린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 십여 년 전쯤부터 이 행성에서는 신들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네. ]“신들의 전쟁?”
[ 흔히들 볼 수 있는 정식 신격이나, 상위 신격들끼리의 힘겨루기 같은 게 아니라, 고대 신격 중 대부분이 참전해 있는 우주의 대전쟁이라고 해야겠지. ]“…….”
[ 신들의 전쟁은 이 행성에서 질서 진영, 그리고 혼돈 진영으로 나누어진 두 진영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서로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누구 하나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이지. ]“어느 한 쪽이 승리할 때까지는 저 신성 결계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겁니까?”
[ 그럴 수밖에 없네. 그야, 저 신성 결계는 고대 신격이 셋이나 모여 만들어 낸 거대한 방벽이니 말이야. 하물며, 이 행성에서는 어둠의 신이나, 마신조차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다 보니 빠져나갈 길 따위는 없는 셈이지. ]“…….”
흥미로웠다.
‘어둠의 신, 그리고 마신까지 여기에 있다고?’
그럴 만도 했다.
본디 시련의 탑을 빼고는 이 우주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존재들이 어둠의 신과 마신, 그리고 용신이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이 36층 시련의 스테이지에서는 먼 옛날부터 존재해 온 고대 신격들이 참전하여 싸우는 모습까지 볼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어딘가에 용신도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렇기에, 궁금했다.
“시련의 탑은 이 신들의 전쟁에 딱히 간섭하지 않는 겁니까?”
사실상 이 우주에서 가장 초월자에 가까운 시련의 탑은 신들의 전쟁까지 일어난 시기에 무엇을 하고 있었을지 말이다.
“시련의 탑이 만들어 낸 인과율의 시스템이 이걸 묵인할 것 같지는 않은데 말입니다.”
최소한 시련의 탑이 이 고대 신격 중 대부분이 얽혔다고 하는 신들의 전쟁에서 가만히 있었을 리는 없었다.
[ 시련의 탑이라고? ]한데…….
[ 음……. ]어째서일까.
[ 하나같이 다 처음 듣는 이야기들뿐이라서 어디부터 물어봐야 하나 싶다마는……. ]왜인지 모르게 증명의 신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침음만을 흘렸다.
[ 우선은 가장 중요해 보이는 부분들부터 물어보도록 하겠네. ]다름이 아니라-.
[ 대체 시련의 탑이라거나, 인과율이라는 게, 뭐지? ]……흡사, 이 우주에 시련의 탑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