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undless Necromancer RAW novel - Chapter 97
095. 증명 (1)
「11층 시련을 시작합니다.」
「남은 시간 – 7일」
「시련 돌파 조건 – 남은 시간 안에 일곱 번째 관문까지 돌파할 것」
「시련 실패 조건 – 도전자의 죽음 혹은 남은 시간의 종료」
「시련 돌파 보상 – 낡아빠진 증명의 거울(S-)」
「시련 실패 페널티 – 사망」
“…….”
시련이 시작되는 동시에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주변을 살폈다.
현재 아무것도 없는 정사각형 형태의 넓은 방에 있었다.
흡사 대기실과도 닮은 형태의 공간이었는데 다른 점은 대기실은 늘 혼자만 있었는데 여기에는 다른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수도복을 입은 퇴폐미가 느껴지는 중년의 사제였다.
‘사람이 있다니…….’
분명히 시련의 탑은 메시지를 통해서 통합 시련이 아니라고 내게 알려주었다.
설마 또 이계의 도전자가 나타난 것일까 생각하며 내가 온몸에 마력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증명의 신전에 온 것을 환영한다.”
중년의 사제가 갑자기 늘어지듯 말을 꺼냈다.
“증명의 신전……?”
“그대는 이제부터 증명의 신께서 주도하는 시련을 거칠 것이며 이는 그대가 죽기 전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다.”
“…….”
“불만은 없겠지. 그대는 스스로 여기까지 들어왔으니. 한낱 모험가 주제에 신의 시련을 받겠다고 했으니 그 결과도 온전히 감당해야 할 것이다.”
“아…….”
아무래도 이 11층 스테이지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존재하는 모양새였다.
한 모험가가 주제도 모르고 신의 시련을 받겠답시고 증명의 신전에 들어섰고.
그 탓에 여기에서 일곱 관문을 돌파하며 신의 시련을 깨야 한다는 것.
그게 바로 내가 처한 상황이었다.
‘무림이나 지구는 아니고 다른 차원의 이야기겠지.’
칼리안이니 아레스니 여러모로 신기한 판타지 세계도 존재하는 모양이니 그럴 것이다.
무슨 스토리인지는 대충 알았으니 이제 이해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대는 아레스의 일곱 주신이 주도하는 시련의 법칙도 모르는가?”
“…….”
“모험가라고 해서 다 무지렁이는 아니겠지만……. 그대는 무지렁이가 맞는 거 같군.”
“……그렇군요.”
중년의 사제는 황당하다는 듯 내게 비아냥거렸지만…….
그의 당혹감과는 별개로 나는 아레스 출신의 도전자도 아니고 실제로 이 비하인드 스토리가 엮인 신전에 온 모험가도 아니다.
그러니 당연히 질문하는 것에 망설임이 존재할 리 없었다.
‘그나저나 여기가 아레스 차원이구나.’
한창 탑을 오르고 있을 무렵에 마주쳤던 이계의 도전자가 떠올랐다.
5층에서 나타나서 나를 반쯤 죽음까지 몰아갔던 그 빌어먹을 검은 기사가 머릿속을 지나쳤다.
아레스의 도전자는 대부분 기사도를 중시하고 통일 국가로 구성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그 특징과는 별개로 현재 나는 기사랑은 하나도 관련이 없는 시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설명해 주겠네.”
이것저것 생각하는 사이에 중년 사제의 설명이 시작됐다.
“증명의 신전에서 진행되는 시련은 간단하다네.”
나는 바로 잡생각을 집어치운 뒤 중년 사제의 말에 정신을 집중했다.
“육체의 증명, 신념의 증명, 정신의 증명.”
“…….”
“처음은 육체의 증명으로 시작해서 최후에는 가장 어려운 정신의 증명까지 가게 되는 것이지.”
“그렇군요.”
“관문의 돌파는 간단하네. 시련의 방마다 고위 사제가 있을 테니 그들을 설득하든 죽이든 아무렇게나 해서 다음 방으로 넘어가게.”
“그래서야 시련이 되지 않을 텐데요.”
그저 내가 마음대로 다음 방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될 뿐이라는 거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래서야 아무것도 되지 않고 시련의 돌파조차도 되지 않나 싶었지만.
“신의 뜻을 어찌 자네 같은 무지렁이가 알겠는가?”
“…….”
“증명은 말 그대로 증명이라네. 그대가 선택하는 길은 제각각 증명이라는 뜻이지.”
“한마디로 말해서 뭘 어떻게 해서 관문을 돌파하든 상관이 없다는 거군요.”
“뭐, 그렇게 되겠지. 그러니 이제 잡다한 질문은 그만두고 덤비게.”
중년 사제가 권법의 자세를 잡으며 한 말에 나는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곧 나는 중년 사제의 눈을 바라보며 그 진의를 이해했다.
“…….”
육체의 증명이라더니만…….
설마 그 증명이 이 증명일 줄이야.
“첫 번째 관문의 시작일세.”
흡사 내게 덤빌 용기가 있으면 와 보라는 거 같은 말투였지만…….
정작 그 말을 들은 나는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레스의 기사랑도 싸우고 무림의 대원로와도 싸우며 거의 죽기 직전까지 싸움만을 반복했다.
그런데 육체의 증명이랍시고 내놓은 게 사제와의 싸움이라니?
“그럼 가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려움 난이도가 아니라 쉬움 난이도랑 다를 바가 없었다.
***
의외로 중년의 사제는 약하지 않았고 상당히 강했다.
지구 차원에서도 어려움 난이도에서 선구자의 자격을 획득한 도전자들과 비견된다고 해야 할까?
신을 섬기는 사제가 설마 이렇게까지 강력한 권법의 고수일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놀라운 것이고 시련은 시련이었다.
쾅!
중년 사제의 권법을 구경하듯 피하다가 나는 바로 발차기를 날려서 그를 벽에 꽂았다.
“컥!”
벽에 부딪히며 중년 사제가 피를 토하더니 이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간헐적으로 꿈틀거리는 것을 보니 아직은 의식을 유지하는 모양인데…….
이제 사실상 전투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설명은 감사했습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중년 사제에게 감사를 전하며 검을 그의 몸에 내리꽂았다.
「사제 ‘요한’의 사령을 흡수했습니다.」
「숙련도가 5.8% 상승합니다.」
생각보다 강한 상대여서 그런지 꽤 숙련도가 짭짤했다.
‘이대로 두 번 정도 더 숙련도가 오르면 네크로맨시의 등급도 오르겠네.’
그에 내가 내심 만족스러움을 느끼고 있는 찰나였다.
「관리자 ‘일곱 신의 사제’가 우연히 지켜보게 된 당신의 충격적인 행보에 경악합니다.」
그런 메시지가 떠오르며 누군가의 경악스러운 감정이 내게 전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관리자 ‘신을 죽이는 검객’이 당신의 피도 눈물도 없는 행동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관리자 ‘멸망한 세계의 용사’가 당신을 보며 꽤 재밌는 놈이라며 칭찬합니다.」
「관리자 ‘신성의 구도자’가 당신이 제대로 증명을 진행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뜬금없이 관리자 몇 명이 내게 메시지를 날리기까지 하며 감정을 표현했다.
“…….”
공용 구역에서도 이렇게까지 많은 관리자가 한꺼번에 따라붙지는 않았는데.
이렇게까지 많은 관리자가 내게 메시지를 보내는 걸 보니 나름대로 신선했다.
관리자의 명칭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내가 진행하는 시련이 ‘신’이랑 관련이 있어서, 혹은 아레스 차원의 출신자라 관심을 가진 거 같았다.
「관리자 ‘철혈의 군주’가 아무런 전조도 없이 시련을 진행 중인 당신을 보며 당황합니다.」
「관리자 ‘백학검선(白鶴劍仙)’이 아무런 이야기도 없이 시련에 돌입한 당신에게 섭섭함을 느낍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나랑 계약한 두 명의 관리자도 입소문을 타고 왔는지 금방 도착했다.
당황스럽다느니 섭섭하다느니 각각 내가 말도 하지 않고 시련에 진입해서 바로 구경하지 못했다는 게 아쉬운 거 같았지만.
‘사실상 내가 관리자한테 연락할 길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나는 그에 쓴웃음을 지으며 중년의 사제, 요한의 소지품을 탐색했다.
「관리자 ‘일곱 신의 사제’가 당신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봅니다.」
「관리자 ‘멸망한 세계의 용사’가 당신의 탐욕에 감탄합니다.」
「관리자 ‘신을 죽이는 검객’이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게 꽤 탐욕스럽게 느껴졌는지 관리자들의 메시지를 자아냈다.
물론 그러든 말든 나는 상관하지 않고 그대로 요한의 품에서 작은 거울을 꺼냈다.
유일하게 품에 가지고 있었던 작은 거울에서는 알 수 없는 기운까지 느껴졌다.
‘아이템이네.’
그리고―.
「스킬 ‘화룡안’이 활성화됩니다.」
바로 화룡안을 써서 작은 거울이 무슨 아이템인지 감정했다.
「고위 사제의 신성이 담긴 거울」
「등급 : C+」
「고위 사제 ‘요한’이 스스로의 신성력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담은 거울.」
「증명의 신을 향하는 신성을 소비해서 한 번만 신성한 보호막을 펼칠 수 있다.」
「신성한 보호막을 펼칠 시 정신 오염 또한 어느 정도 수복된다.」
그 뒤로 화룡안을 통해서 드러난 문구가 존재했다.
「……어쩌면 거울에 담긴 증명의 신의 신성력이 소지자의 운명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도록 이끌지도 모른다.」
더 볼 것도 없는 그저 일회용 보호막 아이템이었다.
‘운명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도록 이끌지도 모른다는 문구는 또 뭔지 모르겠네.’
확실하게 운명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아니고 잘 모르겠다는 수준이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 해도 상관이 없을 내용이기에 나는 바로 신성이 담긴 거울을 품에 간직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육체의 증명이 많으면 좋겠는데.’
실없는 생각을 하는 동시에 나는 방문을 열어서 두 번째 관문으로 걸어갔다.
사람 한 명이 힘들게 걸어갈 비좁은 복도의 끝에 있는 문을 여니 두 번째 관문이 나타났다.
정사각형 형태의 방인 것은 맞지만 이전 방처럼 아무것도 없는 무미건조함은 존재치 않았다.
두 번째 관문이 존재하는 공간은 깨진 거울이 덕지덕지 벽에 붙은 기괴한 광경의 방이었다.
‘증명의 신이라는 게 뭐길래 이렇게 거울이 많은 건지 모르겠네.’
그 순간이었다.
“……설마 바깥의 이름도 모를 모험가가 여기까지 다다를 줄이야.”
두 번째 관문의 방 중앙에 가만히 앉아 있던 금발의 미녀가 눈을 뜨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요한도 이제 현역처럼 활동하기는 글렀나 보네.”
“당신이 두 번째 관문의 사제입니까?”
“그래, 모험가야. 내가 바로 두 번째 관문의 사제야.”
“…….”
“요한이랑 싸운 것으로는 육체의 증명은 끝나지 않았어.”
“그렇다는 건 이번에도 육체의 증명이겠군요.”
“정답. 그러니 이제 더 이야기할 것도 없겠지.”
그녀는 털털하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수녀복을 나풀거리며 물었다.
“고위 사제 제인이야. 잘 부탁하도록 할게.”
음침했던 요한이랑은 반대로 쾌활한 분위기였다.
“한성윤입니다.”
어차피 시련 속 세상일진대 이름을 말하는 게 무엇이 중요할까 싶었지만.
제인의 이름을 촉구하는 눈빛에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손속에 자비를 둘 생각은 없겠지?”
“없습니다. 죽이고 가겠습니다.”
“요한의 기척이 없어질 때부터 예상하기는 했는데 꽤 과격하네.”
“…….”
과격한 것은 맞는데 시련이니 어쩌니 하는 것을 대충 지나칠 수도 없다.
더 확실하게 해 둘수록 추가 돌파 보상도 있을 텐데 그것을 포기하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웠다.
「관리자 ‘철혈의 군주’가 당신의 냉철함에 만족스러움을 느낍니다.」
「관리자 ‘백학검선’이 그런 점이 당신의 매력이라고 웃으며 말합니다.」
「관리자 ‘멸망한 세계의 용사’가 저 미친년들을 조심하라며 당신에게 충고합니다.」
그리고 죽이지 않고 가기에는 네크로맨시의 숙련도 상승세도 꽤 높기도 하고.
“혹시 나를 취하겠다거나, 뭐, 그런 생각도 있는 거야?”
제인이 피식 웃으며 뱉은 말에 바로 반응한 것은 나를 지켜보던 관리자들이었다.
「관리자 ‘멸망한 세계의 용사’가 당신의 대답을 느긋하게 기다립니다.」
「관리자 ‘철혈의 군주’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당신을 바라봅니다.」
「관리자 ‘백학검선(白鶴劍仙)’이 상상하지 못한 질문에 안절부절 못합니다.」
이런 질문을 던진 제인도 제인이겠지만 관리자들의 반응도 상당했다.
심지어 백학검선은 안절부절 못한다는 메시지까지 띄울 정도로 당황한 모양새였지만.
그건 나도 별반 다를 것 없었기에 나는 당혹감을 머금은 채 이내 물음에 대답했다.
“……그렇게까지 역겨운 취미는 없어서요.”
“아하하, 그거 정말로 다행이네.”
그리고 그 말이 끝나는 동시에 관리자들의 메시지가 홍수처럼 쏟아졌다.
「관리자 ‘철혈의 군주’가 제인의 말에 크게 공감합니다.」
「관리자 ‘백학검선(白鶴劍仙)’이 믿고 있었다며 당신에게 신뢰를 보냅니다.」
「관리자 ‘신성의 구도자’가 당신의 선택을 흥미롭게 지켜봅니다.」
그 메시지를 나는 대충 훑어보고는 이내 관심을 끄고 제인에게 눈을 돌렸다.
“그보다 신전인데 그딴 짓을 하는 놈이 어디에 있다고 그런 걸 묻는 겁니까.”
“있어. 너처럼 간간이 들어오는 놈들이 그러더라고.”
“……아, 예. 그렇군요.”
“모험가치고는 꽤 순수하네. 요한까지 꺾은 걸 보니 실력도 좋고 손속에 자비도 없는 걸 보아하니 전장에서 꽤 구른 모양인데.”
“…….”
“설마 여기까지 온 모험가가 동화에서나 나올 거 같은 사람일 줄은 몰랐네.”
망설이지 않고 사람을 죽이겠다고 하는 게 동화 속에 나올 거 같은 모험가라니.
‘진짜 미친 세계네.’
정말로 지구 차원이 그나마 정상적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확실히 새겨진다.
“잡담은 여기에서 끝내자고.”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허리춤에 찬 검집에서 검을 꺼냈다.
그리고―.
“이제 두 번째 관문의 시작이야.”
그녀의 세검(細劍)에서 순백의 검기가 뿜어지는 순간.
나는 이내 요지부동이었던 입꼬리가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대로 쭉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오랜만에 새로운 형태의 검기 스킬을 익힐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에서 비롯된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