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ther's Soccer RAW novel - Chapter (81)
형제의 축구-81화(81/251)
형제의 축구 81화
베푸는 삶
쾰른을 대파하며 6연승을 이어 간 라이프치히의 승점은 어느덧 44점, 하지만 도르트문트 역시 승리를 거뒀기 때문에 한 게임 차이로 승점은 좁혀지지 않았고, 순위 역시 좁혀지지 않았다.
1위부터 3위까지 순위가 유지된 가운데 그 아래에는 프랑크 푸르트가 4위까지 치고 올라왔고, 호펜하임이 5위, 쾰른은 패배했음에도 헤르타 베를린이 프랑크푸르트에게 패배하면서 오히려 순위가 한 계단 상승해 6위가 되었고, 헤르타 베를린이 7위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래도 바로 아래에서 바짝 추격해 오던 경쟁 팀 하나를 8점 차로 따돌렸고, 바로 아래 팀들과 5점의 승점 차이를 유지했으니 팀의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한편 이번 쾰른과 경기의 MOM은 윤석이 차지하게 되었다.
정우와 폴센에게 두 번의 어시스트를 기록하고, 한 번의 득점을 한 데다가 중원에서 쾰른의 선수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으니 그럴 만했다.
물론 이번 경기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정우였기 때문에 정우가 MOM이 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경기였다.
당연히 형제에 대한 RB 라이프치히의 팬들과 분데스리가의 관심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윤석은 5경기를 출전해 2골과 4도움을 기록하고 있었고, 정우는 4경기를 출전해서 3골과 2도움을 기록하면서 이적 초반부터 적응해 매우 준수한 활약을 펼치는 중이었고, 중원을 압도하는 형과 순도 높은 골 결정력을 보여 주는 동생의 활약에 매료된 사람들이 없을 수가 없었다.
14번과 17번이 마킹된 유니폼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아마 다음 경기부터는 형제의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관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보일 것이다.
이번 시즌 분데스리가, 아니, 유럽 전체 리그에서 비록 이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단숨에 유럽파 선수들을 압도하는 공격 포인트를 기록한 형제를 향한 관심은 단연 조국인 한국이 가장 뜨거웠다.
올림픽과 국가 대표에서 멋진 활약을 보여 주고, 팀을 더블로 이끌었던 이 형제가 독일에서 쉽게 적응해 활약하고 있으니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덕분에 바빠진 것은 정우와 윤석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에이전트인 티스였다.
후반기를 막 시작하고, 아직 시즌이 마무리되지 않았음에도 한국에서는 형제를 모델로 삼고자 하는 기업들의 문의가 쏟아졌고, 일찍이 비시즌에 방송을 출연시키기 위한 방송국의 캐스팅 제의도 쇄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인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느새 형제와 편하게 말을 놓게 된 티스의 물음에 윤석은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였고, 정우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티스에게 물었다.
“모델은, 광고 모델 말하는 거죠, 티스?”
“당연하지.”
“그럼 돈은 얼마나 준대요? 한 5백 주려나?”
돈에 대한 욕심은 엄청나게 많지만 정작 현실 감각은 떨어지는 편인 정우의 물음에 티스는 웃었다.
“아직은 단기로 5천 정도를 부르지만, 여기서 더 좋은 활약을 해 준다면 시즌이 끝날 때 즈음에는 억 단위로 제의할 거야.”
“에엑? 그렇게나 많이요?”
“국민 스포츠 영웅 정도 되면 광고 수익만 해도 한해 수십억을 벌어들입니다. 그 정도는 약과지.”
티스의 말에 곰곰이 생각해보던 정우가 말했다.
“그러면 지금 하겠다고 계약하지 않는 게 좋겠네요?”
“그렇지. 아직은 모르는 거니까. 나중에 몸값이 몇 배나 뛸지 모르는데 지금 굳이 선계약을 체결할 필요가 없지. 그래서 오늘 추려 온 것들은 하나같이 선계약금 지급 후에 추후 명성에 따라 추가금을 주겠다는 곳들뿐이야.”
“오오, 어딘데요?”
여전히 생각이 많은 윤석과 달리 흥미를 보이는 정우에게 티스는 핸드폰으로 확인을 해 보고는 말했다.
“의류 브랜드랑 건강식품 같은 게 있네. 특히 정우는 의류에다가 화장품에서도 모델로 사용하고 싶다는 제의가 왔군.”
“이야, 이래서 사람은 생기고 봐야 한다니까.”
확실히 정우는 요즘 여성들이 좋아할 타입의 곱상한 외모를 타고났다. 생긴 이미지와 성격이 전혀 다르기는 하지만 광고는 실제 성격이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래, 아무튼 잘 생각해 봐. 사실 오늘은 광고 제의를 수락하라는 게 아니라, 이런 것들이 있을 거니 생각해 보라고 이야기를 꺼낸 거니까.”
“에이, 좋다 말았네. 하긴, 아직 시즌도 안 끝났는데 그런 거 찍을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지. 아무튼, 그래…… 다들 식사는 했나?”
“안 그래도 할머니가 점심 준비하고 있다고 하네요. 이제 차 타고 집에만 가면 됩니다. 밥 먹으러.”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숟가락 하나 더 얹어도 되겠지?”
티스의 말에 정우가 혀를 내둘렀다.
“그런 표현은 어디서 배운 거예요? 가끔 보면 티스가 나보다 한국말을 잘한다니까.”
“책을 읽으면 표현력도 늘어나는 법이지. 개인적으로 정우는 책 좀 더 읽었으면 한다.”
“책을 보기만 해도 졸음이 쏟아져서요. 그건 사양할게요. 대신 세상 돌아가는 게 어떤지 뉴스는 챙겨 봐요.”
그런 정우의 말에 윤석이 한마디 던졌다.
“그래, 인터넷에서 연예부 기사만 죽어라 읽지.”
“우씨, 아니거든, 형!”
“하하하, 아무튼, 얼른 가자. 할머니가 해 주시는 밥이 먹고 싶네.”
티스의 말에 정우와 윤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올리버 버크가 가방을 메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서 형제의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헤이, 버크!”
정우가 반가운 마음에 외치자 음악 속에서도 정우의 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버크가 이어폰을 빼면서 옆을 바라봤다.
[아, 너네들 있었구나. 집에 안 가?]버크의 말 중에서 집에 안 가냐는 말은 알아들은 정우가 이제 간다는 시늉을 해 보이자, 버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음…… 나도 집 간다. 잘 가라.]버크는 그리 말하고 부랴부랴 걸음을 옮겼다.
“저 자식 뭐가 저리 바빠?”
“뭐 일이 있나 보지. 아니면 어디 세일 행사라도 하던가.”
“세일 행사?”
“보니까, 옷에 관심이 많아서 세일만 하면 가서 한가득 사더만.”
윤석의 말에 정우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도 옷 필요하지 않아?”
“어차피 훈련장 아니면 집인데 무슨 옷?”
형의 말에 정우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이런, 이제는 필요하지. 잊었어, 형? 나도 이제 성인이야.”
“어른이 된 거랑 옷이랑 무슨 상관인데?’
“흐흐흐, 이제 클럽도 갈 수 있고 펍에서 맥주를 마실 수도 있다 이 말이지.”
윤석의 얼굴이 험상궂게 변했다.
“그래서 지금 당장에라도 술 마시고 클럽 가서 여자랑 논다는 거냐?”
“아니, 뭐, 그런 거 가지고 그래, 나도 어른인데 궁금할 수도 있지! 내가 뭐 죽순이라도 된다고 했어, 아니면, 매일 혼술이라도 한다고 했어?”
“음, 그건 아니긴 하지만.”
“형은 나를 너무 애 취급한다니까? 형이랑 나랑 기껏해야 1년 차이라고. 형은 97년! 나는 98년. 오키?”
“네 하는 짓이 한 살 차이로 보여야 말이지, 이 녀석아.”
윤석의 말을 듣고 정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형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내가 어린 게 아니라 형이 너무 세상을 늙게 살아가는 거라고. 좀 젊게 살자, 형. 그러다가 연애도 못 해 보고 죽겠다!”
“으으음…….”
가뜩이나 요즘 너무 나이 들게 행동하는 거 아니냐는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은 바 있던 윤석은 찔끔해서 침음만 흘렸다. 그런 형을 바라보며 정우는 또다시 한숨 쉬며 말했다.
“형 장가가는 거 기다리다간 나도 평생 솔로겠다. 안 되겠어. 내가 얼른 여자를 구해서 형보다 먼저 결혼해서 할머니한테 증손주라도 보여 줘야지. 이러다가 우리 할머니 증손주도 못 보겄어. 아주.”
“말 참 이쁘게 한다, 시끄럽고 얼른 가기나 해.”
투닥거리는 형제를 바라보며 티스가 웃으면서 형제의 뒤를 따랐다.
형제는 출퇴근을 현재까지는 티스의 에이전시에서 사용하는 렌터카를 매니저인 게르트를 통해서 얻어 타고 있었다.
그게 벌써 2개월이 넘어서고 있었는데, 이는 RB 라이프치히의 훈련장인 코타베그에서는 이색적인 일로 손꼽히고 있었다.
수천만 원의 주급, 수십억의 연봉을 받고 있는 선수가 차 한 대 없이 에이전시의 별 볼 일 없는 차를 얻어 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형제는 아직 면허조차 없었다.
한국에서, 그리고 이곳에서도 면허를 딸 시간이 없을뿐더러 아직까지 차를 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파는 대중적인 차만 해도 형제의 주급이면 충분히 살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형제는 큰돈을 벌고 있는 주제에 아직 그 큰돈을 쓸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이를 우연히 보게 된 랄프 랑닉 단장은 우스갯소리로 계약금 일부로 차를 사 주는 조건을 달 걸 그랬다고 할 정도였다.
하긴 그럴 만했다.
지금 유유히 훈련장을 빠져나가는 차 중에서 선수들의 차는 하나같이 누구나 꿈꾸는 드림 카였으니 말이다.
차를 타고 코타베그를 슬슬 빠져나가는 사이, 정우가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형, 우리 돈 제법 쌓였는데?”
정우의 말에 윤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주급이 착실히 들어왔다면 당연히 돈이 쌓였겠지.”
그런 두 사람의 대화에 티스가 끼어들었다.
“앞으로도 돈은 착실히 쌓일 거야. 계약금까지 억대의 돈이 있을 텐데…… 혹시 그냥 통장에 둔 건가?”
티스의 말에 새삼스럽다는 얼굴을 한 형제, 그리고 윤석이 말했다.
“돈을 집에 쌓아 둘 수는 없잖아요. 금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형제의 말에 티스는 이런, 하고 혀를 찼다. 형제는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 모양인 듯싶다.
“그 돈을 굴려야지. 그냥 통장에만 두면 쓰나.”
그의 말에 정우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형은 그냥 썩혀 두지만, 저는 적금 들었어요. 잘했죠?”
“……아, 그래.”
티스는 건성으로 답했다.
아무래도 이 형제에게 재무관리사를 구해다 줘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온다. 생각난 김에 형제에게 묻자, 형제는 부정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그런 사람은 좀…….”
“잘 생각해 봐. 단순히 돈을 저축만 하는 게 아니라 여러 곳에 투자하거나 은행의 상품들을 이용해서 돈을 불려 줄 사람들이니까. 물론 돈이야 들겠지만 아무리 돈이 들어도 그 사람들이 자네들 주급만큼의 월급을 요구하지 않으니까.”
“글쎄요, 그건 생각해 볼게요.”
“부동산이나 좀 알아봐 주심 안 돼요? 전 부동산이 좋은데.”
정우의 말에 티스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부동산?”
“네, 한국에 건물을 사고 싶어요. 건물주를 갓물주라 부르는 세상이잖아요. 그리고 땅도요.”
“건물은 그렇다고 치고, 땅은 왜?”
“땅은…… 제 꿈이긴 한데 나중에 유소년 축구팀을 차리고 싶어요.”
“축구팀?”
티스가 의외라는 듯 백미러로 정우를 바라봤다. 정우는 티스가 호기심을 보이자 흥분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그래요, 축구팀! 나 같이, 아니, 우리 형제같이 축구는 진짜 잘하는데 돈이 없어서 축구를 못 하는 그런 애들이 뛸 수 있는 축구팀을 만드는 거죠.”
정우의 말에 윤석이 대견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건 정말 괜찮은 생각인 것 같다. 형이랑 같이 하자.”
“그럼 나야 좋지. 나는 남을 가르칠 머리는 안 되거든. 우리 은퇴하면 우리 둘이 공동 구단주하고 형이 감독하고 내가 코치하면 되겠다. 그지?”
“그것도 괜찮은 말년이긴 하네.”
흥분한 형제의 말에 티스는 찬물을 끼얹었다.
“공짜로 그런 애들을 가르치려면 돈이 만만치 않게 들 텐데? 수익 구조가 없으면 축구팀을 운영하기 힘들 거야.”
“음…….”
“에이, 뭐, 그거야 나중에 어떻게 되겠죠. 지금 당장은 꿈이니까 체계적이지 못할 뿐이라고요.”
“그것도 그렇네. 그럼 지금은 돈을 그저 저축할 생각뿐인가?”
윤석이 입을 열었다.
“다른 건 모르겠고…… 이 돈으로 기부를 하고 싶어요.”
“기부?”
“네, 정우랑 이야기가 된 건데. 계약금의 10%를 저희 같은 결손가정이나 독거노인, 그리고 고아들을 위해서 기부하려고요.”
“10%면…… 둘이 합쳐 2억이나 되는 돈을 기부하겠다고?”
“그 정도야 뭐…….”
“1억이면 3주면 벌고도 남잖아요. 뭐 그 정도 가지고 그래요. 할머니도 허락했어요.”
“그래, 그렇다면 한국에서 한번 알아보도록 하마.”
“아, 그리고 이건 언론에 공개되면 안 돼요.”
“공개하지 않겠다고? 왜?”
정우가 쑥스러운 듯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부끄럽잖아요. 뭐 대단한 일이라고.”
“허.”
티스는 아직은 소년 같은 느낌의 이 어린 형제가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대견하다기보다는 존경스러웠다. 누가 시키지도 않고 강요하지도 않는 일이지만, 스스로 남들을 돕기는 쉽지 않다. 아니, 실천하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누구나들이 쉽게 마음을 먹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한인회를 통해서 파독 간호사랑 파독 광부분이랑 독일에 사는 결손 한인 가정에도 주급의 10%를 매주 기부하기로 했어요.”
“뭐?”
“들어 보니 우리 할머니처럼 독일을 넘어와서 고생하시고 지금도 힘들게 사시는 분들도 있고, 한국에 가서도 어렵게 사시는 분들이 있더군요.”
“맞아요. 그때 번 돈으로 잘사는 분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었어요.”
“허허.”
자기 돈은 쓸 엄두도 내지 못하고 벌벌 떨면서 이런 것에는 서슴없는 형제를 보며 티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속으로 자신도 형제를 따라 뭔가를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을 할 뿐.
도대체 어떻게 살아오면 이리도 착할 수 있을까?
너무 착해서 가끔은 피곤하기도 했다.
형제는 부탁을 마다할 줄을 몰랐다.
뺀질이에다가 돈 타령을 입에 달고 사는 동생마저도 말이다.
오늘도 그 덕에 코타베그의 입구에서 차를 세우고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자신의 팀을 응원하기 위해 찾아온 팬들을 위해 형제는 손이 아프도록 사인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물론 훈련장에서 퇴근하는 길에 선수들이 사인이나 사진을 찍어 주는 것은 흔한 일이긴 했지만, 그것도 선심 쓰듯 몇몇에게만, 그리고 차에서 절대 내리지 않고 하거나 피곤하면 그냥 지나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형제는 절대 그러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서 사인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사인을 다 해 주고 사진을 찍고 가면서 오히려 먼저 고맙다고 인사하고 가는 게 형제였다.
연고지와 팬을 중요시하는 유럽은 물론이고 요즘은 한국에서도 없는 일을 형제는 성심을 다했다.
사실 이것은 소수의 골수팬들이 부천을 위해 헌신하고 열심히 경기를 찾아오는 것을 지켜본 형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팬들이 만든 구단에서 선수가 된 형제는 팬의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뭐, 그 덕에 유니폼 판매량은 늘어난다고 하지만.”
구단은 아주 좋아하고 있었다.
형제의 팬 관리가 유니폼을 비롯한 형제와 관련된 상품들의 판매량 증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다녀왔습니다!”
한참 사인과 사진 촬영을 하고 난 뒤 서둘러 집에 도착하자 구수한 밥 냄새가 집 안 가득 퍼져 있었다.
“으음, 오늘은 김치찌개군.”
티스가 씨익 웃음을 흘렸다.
처음 봤을 때는 비주얼과 냄새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새콤하면서도 매콤하고 얼큰한 국물은 한국 생활이 오래된 티스에겐 베스트 한국 요리 중 하나였다.
“티스 씨도 왔수?”
“네, 부인. 편안하게 티스라고 부르세요.”
“아직 입에 안 익은 걸? 온 김에 밥부터 드시우.”
할머니는 그리 말하면서 티스의 밥그릇을 챙겼다.
티스는 냉큼 식탁에 앉았다. 그러자 할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떽! 손 씻구 와야지!”
“아이쿠, 이런, 죄송합니다.”
할머니는 이런 부분에서는 티스에게도 엄했다.
티스는 찔끔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왔다.
그렇게 형제와 티스가 자리에 앉아 보니 어느새 밥그릇에는 현미가 적당히 섞인 밥이 고봉으로 쌓여 있었다. 형제는 밥그릇이 아니라 밥 비벼 먹을 때나 쓸 것 같은 큼지막한 양푼이었다. 형제는 열량 소모가 큰 운동을 하는 축구 선수 중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대식가였다.
“이런, 탄수화물이 갈수록 느는 것 같은데?”
그들의 밥을 본 티스가 걱정스레 물어오자 윤석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한국인은 밥심이죠.”
“하지만 탄수화물을 너무 많이 먹으면 좋지 못해. 고기도 적당히 섭취해야지.”
라고 말하는 순간 어느새 먹기 좋게 구워진 슈바인학센이 자리 잡았다.
“아니, 이건 언제 또 배웠습니까, 부인?”
티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슈바인학센은 독일의 정통 음식이었다.
할머니는 티스의 물음에 기억을 더듬었다.
한국에서는 고기 구경은커녕 쌀밥도 먹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할머니가 독일에서 처음으로 먹은 음식이 이 슈바인학센이었다. 그때 생전 처음 먹은 슈바인학센의 맛을 잊을 수 없어 한인회에서 특이하게 독일 음식점을 하는 아줌마에게 하는 법을 배워 왔다.
요즘 할머니의 몇 안 되는 낙은 한인회로 놀러 가서 이따금 찾아오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었다.
“어찌 독일 본토 사람 입맛에도 맞나 모르겄네. 그냥 먹긴 아쉬워서 한국식으로 만들어 봤는데.”
“그러게, 이거 족발 맛 난다.”
어느새 고기를 한 점 썰어 입으로 가져간 정우의 말에 윤석도 냉큼 고기를 먹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티스도 서둘러 손을 놀렸다. 형제와 식사를 하면 조금만 늦어도 남는 게 없었다.
“이야, 최고입니다!”
슈바인학센과는 또 다른 오묘한 맛을 느끼고 티스가 감탄하며 말했다.
“이건 정말 우리 독일인이 배워야 할 맛이군요. 식당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그런 티스의 말에 할머니는 웃음을 흘렸다.
“맛있다니 다행이구랴. 맛있게 먹으슈. 내 새끼들도 많이 묵어! 그래야 내일도 훈련 잘할 거 아니여.”
“응!”
형제의 대답을 듣고서 할머니는 다시 부엌으로 가서 무언가를 하기 시작했다. 밥을 먹다가 그게 궁금해진 윤석이 물었다.
“할머니, 진지 드셨어요? 어서 와서 식사하세요.”
“나는 먼저 묵었어!”
“아, 그럼 지금 뭐 하고 계세요?”
“잉, 별거 아녀.”
그리 말하지만, 매우 분주한 할머니의 모습에 이번에는 정우가 물었다.
“별거가 아닌 거 같은데? 뭐해, 할무이? 비밀이야?”
“비밀은 무신, 별거 아니여. 그 뭐냐 저짝에 길 건너에 사는 애가 눈에 밟혀서 말이여.”
“응? 아아, 그 꼬맹이?”
할머니는 부엌에서 슈바인학센과 먹을거리를 챙기고 있었다.
“쪼매만 애가 어찌나 인사성이 바른지, 기억나누?”
얼마 전 형제를 보고서 환하게 웃으며 다가온 소년이 있었다.
축구를 좋아하던 그 소년은 형제를 보고선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 어쩔 줄 몰라 했고, 형제는 그 소년이 가지고 있던 해진 공에 사인을 해 주고 사진 촬영을 해 준 적이 있었다.
“그 애가 알고 보니 어미 없이 홀아비 밑에서 컸다지 않누. 그것도 넷이나 말여. 근데 애들 아범이 크게 다친 모양이여. 병원서 있는데 애들은 밥이나 제대로 챙겨 먹었을는지 걱정이 들지 않누?”
할머니의 말에 형제가 저런, 하며 혀를 찼다.
“할머니, 그런 거면 좀 더 챙겨서 보내지그래.”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정우와 고개를 끄덕이는 윤석을 바라보며 티스는 고개를 저었다.
독일에서는 아무리 알고 지내는 사이라도 이런 친절을 베푸는 일이 드물다. 단체나 개인이 봉사를 하는 개념은 있어도 이렇게 세심하게 챙기고 먹을 걸 가져다주는 문화는 예전이면 모를까, 요즘에 와서는 아예 볼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신기합니다, 신기해.”
티스의 말에 할머니가 티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가 말이우?”
“남들을 그리 챙기는 게 신기합니다. 한국서도 그런 사람들이 없는 거로 아는데, 부인이나 형제도 모두 그렇게 사람들을 챙기지 않습니까.”
“받기만 해서 그러우. 남들 도움으로 이리 컸는디, 우리도 남에게 베풀어야 하지 않겠수?”
“그게 말처럼 쉽습니까.”
할머니는 웃었다.
“흘흘, 쉬운 게 이 세상에 어디 있겄소? 그냥 하는 게지. 그래도 모르는 일 아니우? 나중에 우리가 베푼 사람이 대통령이든, 과학자든 잘난 양반이 되어서 또 우리한테 보답할지?”
“맞아, 복권하는 셈 치고 하는 거예요. 터지면 로또지 뭐.”
정우의 말에 윤석이 정우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말이라도 못하면. 말조심해.”
“우 씨, 내가 뭐 틀렸나.”
“하하하.”
투닥거리는 형제를 보며 티스는 유쾌하게 웃었다.
이 형제는, 아니, 이 조손은 너무나도 착하기도 했지만, 서로 간 우애가 너무 깊어 보는 사람마저 가슴이 따듯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할머니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형제와 함께 살기를 티스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