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113
제 113화
42장. 이이제이, 토사구팽 – 2화
순간 갈라딘이 정신을 놨나, 하고 생각했다.
내 앞에서 신데르스 왕국을 침공하겠다고 공개 선언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바로 갈라딘의 속뜻을 간파할 수 있었다.
‘알아도 상관없다 이거지. 자신감인 거야. 생각 없이 말한 게 아니라, 오히려 고도의 술수를 쓰고 있는 거다.’
갈라딘의 노림수가 보이자, 오히려 긴장감이 한층 더 올랐다.
외부 정세에 정통한 갈라딘이 나와 이즈엘의 관계를 모를 리 없다.
신데르스 왕국의 가신은 되지 않았어도, 그들과 꽤 가까운 유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알고 있을 터다.
‘솔직히 갈라딘의 제안이 솔깃한 것은 사실이야.’
냉정하게 말하면, 서로 힘을 합치면 신데르스 왕국을 무너뜨리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라는 갈라딘의 말은 정답이었다.
내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작년 말까지 수해 복구로 인해 국력의 대부분을 소진한 후였다.
여전히 신데르스 왕국의 북부는 어수선하다. 게다가 지형 구조상, 왕국 북부는 개활지가 많아 방어하기가 어려운 구조였다.
렌투스 제국이 남쪽에서 치고, 우리가 북쪽에서 내려온다면……. 이즈엘은 반드시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
국가의 명운이 걸린 문제니 아마 전략적으로 북부를 포기할 것이고, 그럼 내가 무주공산이 될 왕국의 북부를 차지할 수 있다.
여기까진 그럴듯한 시나리오다.
갈라딘이 이후에 덧붙일 내용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 생각됐다.
‘문제는 제안을 건넨 상대가 렌투스 제국과 갈라딘이라는 거지. 신데르스 왕국을 점령하고 나면, 다음 타깃은 무조건 나야. 놈들은 항상 그래 왔고, 끝까지 바뀌지 않았으니까.’
확신할 수 있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나스 대륙의 모든 것을 알기에 나만이 홀로 누릴 수 있는 확실한 특전일 것이다.
‘괜히 렌투스 제국이 뒤투스 제국이라는 악명을 가진 게 아니지.’
얼마나 플레이어들의 뒤통수를 쳤으면, 모두가 렌투스 제국을 뒤투스 제국이라 불렀다.
메인 퀘스트 중에도 도움을 줄 것처럼 위장하다가, 배신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연합 전선을 구축해서 한 국가를 몰락시킨 뒤, 동맹국을 공격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선전포고 따위는 개나 줘 버렸고, 공식 문서로 약속한 것도 그들에게는 아무 구속력이 없었다.
“이해합니다. 바로 답변이 들렸다면, 오히려 의아했을 수도 있겠군요.”
내 대답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갈라딘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눈빛은 부드러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참혹한 살기가 감돈다.
그의 검에는 자비가 없다.
에서 갈라딘의 군국주의가 성공을 거둔 것도, 그의 무자비함 때문이었다.
적국의 존재라면 그것이 황족이든, 귀족이든, 평범한 백성이든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였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항복해 온 사람들에 대해서만 관용을 베풀었다.
그러다 보니 전운이 감돌면, 애국심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항복하는 사람이 엄청 많았다.
‘무조건 토사구팽이야. 뜻이 맞아서 정복에 성공한다고 해도, 다음 타깃은 우리다. 이건 진리야.’
대전제는 확실했다.
이건 변하지 않는다.
‘갈라딘, 너는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너희가 어떤 방식으로 영토를 넓혀 왔는지 잘 알아. 내게는 안 통해. 절대로.’
저들보다 한 수, 아니 두 수를 내다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분명 내게 큰 강점이다.
지금 여기서 갈라딘의 제안에 응해 버리면, 수 싸움에서 지는 것이다.
렌투스 제국은 쉽게 신데르스 왕국을 점령할 것이고, 어떤 명분이든 붙여서 우릴 공격할 터다.
그래서 나는 대답을 돌렸다.
“일단 생각해 보지요.”
“흐음, 이게 생각하고 고민할 문제가 됩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요.”
‘이 자식 봐라. 슬슬 성격 나오네?’
나는 헛웃음이 나오려던 것을 참고, 갈라딘을 노려보았다.
갈라딘이 뱉은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자신들이 소속된 곳은 제국이고 나는 일개 영주에 불과하니, 입 닥치고 협력이나 하라는 뜻이다.
협력하지 않으면, 신데르스 왕국 다음 차례는 너희가 될 텐데!
이래도 합류하지 않고 배기겠냐는 뉘앙스를 담은 반문이었다.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돼, 뭐 이런 뜻인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냉정하게 생각해 봅시다. 신데르스 왕국이 과연 우리 제국군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힘들겠죠.”
나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힘의 격차는 확실하다.
지금 전쟁이 나면, 십중팔구 신데르스 왕국은 대패를 면치 못할 것이다.
영토 전체는 잃지 않더라도, 남부의 알짜배기 땅들은 모조리 빼앗길 가능성이 크다.
“우리 제국의 군대가 이길 확률이 100%인 전투. 거기에 단지 숟가락만 얹으면 되는 문제를 고민한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전혀 되지 않아서 말입니다.”
갈라딘의 목소리는 꽤 위압적이었다. 나를 깔보는 느낌도 있었고, 알게 모르게 자신의 힘을 뽐내는 것도 있었다.
확실히 마스터급의 기사답게 그에게서는 특유의 기운이 느껴졌고, 그 기운은 꾸준히 나를 짓눌렀다.
이럴 때 가만히 있으면 이 기운에 압도되거나, 때로는 공포를 느껴 겁을 먹게 되기도 한다. 서서히 잠식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블 트랜센던스로 한껏 끌어올린 리지스트 피어 마법으로 두려움을 모두 떨쳐 냈다.
리지스트 피어 마법은 2클래스 마법으로 공포 극복에 요긴하게 쓰이는 녀석이다.
마법 덕분에!
지금만큼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거미가 팔뚝을 따라 기어올라 와도, 전혀 두려울 것 같지 않았다.
“하나만 질문해 보죠.”
“얼마든지.”
“우리 영지군이 신데르스 왕국의 편에 서면 어찌 됩니까? 그래도 승률이 100%라고 보십니까?”
“뭐라고요?”
갈라딘의 양미간에 주름이 굵게 잡혔다.
기분이 나쁜 정도가 아니라, 아주 불쾌하게 생각하는 수준의 썩은 표정이었다.
“우리는 아직 입장을 표명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찾아와서 당연히 연합을 할 것처럼 생각하고 김칫국을 마시고 계시니, 듣는 입장에서 황당해서 말입니다.”
나는 내친김에 갈라딘의 속을 더 긁기로 했다.
이놈들에게 협력해 봤자, 맞이하게 될 미래는 똑같다.
나는 아니겠지, 나는 달리 특별하게 취급해 주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있다가 에서 많은 나라가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그들의 전철을 똑같이 밟고 싶지는 않았다.
“호오, 보기 드문 호연지기군요. 그 패기는 인정하죠. 하지만 자레드 공작, 우리 제국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때는 우리를 돕겠다고 나서도 속내의 진위를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글쎄요.”
“그때 가서 숟가락 얹을 생각 말고, 지금 정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조금 전의 말은 청년의 패기 정도로 넘기도록 하지요.”
“죄송합니다만……. 아직은 밥 생각이 안 나서요. 나중에 배가 고프면 그때 말씀드리죠. 지금은 숟가락을 들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에둘러, 그리고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렌투스 제국의 제안은 분명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으나,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 틀렸다.
렌투스 제국과 협력을 하느니, 차라리 마왕군과 손을 잡는 게 낫다! 그리 말해도 무방할 정도다.
“공식 답변은 거절, 이렇게 받아들여도 되겠지요?”
“그렇게 느끼셨다면, 그게 답이 되겠지요. 아니라고 해도 안 믿으실 테니까.”
좀 더 갈라딘의 정곡을 찔렀다.
그의 표정은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오기 전부터 이미 나와의 협상이 무조건 성사될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나도 군침을 흘릴 만한 제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 차려 준 밥상을 발로 차고, 그 위에 재까지 뿌렸으니 기분이 무척 더러울 것이다.
‘렌투스 제국은 협력의 대상이 아니라, 언젠가 무너뜨려야 할 악의 축이다. 마왕군보다 더 악랄한 족속들이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내게 다가올 미래가 의 스토리와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다.
하지만 단언컨대 렌투스 제국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황제와 갈라딘, 그리고 휘하의 렌-세븐까지 모두 단번에 잡아 족치지 않는 이상.
악마와도 같은 그들의 근성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에서도 그랬으니까.
스토리에서 제국과 그들의 이름이 완전히 지워지기까지, 그들은 한결같이 쓰레기였고 뼛속까지 나쁜 놈들이었다.
“다음은 없습니다. 자레드 공작, 명심하십시오.”
“같은 대답을 두 번 하고 싶지 않군요. 즐거운 만남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재고할…….”
“살펴 가십시오.”
나는 여지를 조금이나마 남기려는 갈라딘의 마지막 말까지 끊어 버렸다.
그래, 이 맛이야.
자기들의 힘만 믿고, 상대를 깔보는 놈들은 무시가 제맛이지.
움켜쥔 주먹만 부들부들 떨면서, 분노를 삭이고 있는 갈라딘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물론 그만큼 나에 대한 악감정도 함께 치솟았을 테니, 앞으로의 계획을 잘 짜야겠지만.
‘이제 역으로 신데르스 왕국을 이용해서 렌투스 제국을 견제하면 돼. 그럼 나는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두 나라의 균형을 맞출 수 있지.’
나는 역으로 계획을 짤 생각이었다.
어차피 렌투스 제국에서 우리 영지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해로는 없고, 육로는 무조건 신데르스 왕국을 지나와야 하니까.
우회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보누스, 말루스 왕국의 국경을 지나가야 한다.
렌투스 제국과의 접경(接境)지대만큼은 대비를 철저히 하는 두 왕국이기에 이 일이 성사될 가능성은 매우 적다.
설령 그리 우회해서 오더라도, 신데르스 왕국과 연계하여 그들의 후방 보급선을 끊어 버리면?
도착한 렌투스 제국의 군대는 맛 좋은 먹잇감만 될 뿐이다.
저벅. 저벅. 저벅.
응접실 밖에서 빠르게 멀어져 가는 갈라딘과 렌-세븐의 발자국 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영주님, 괜찮으십니까?”
갈라딘과의 대화가 걱정이 됐는지, 라키스가 황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물론. 당연히 괜찮지. 아무 일도 없었소.”
“분위기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우리 영지에 해가 될 것은 없소. 저들의 머릿속이 오히려 복잡해지겠지. 그뿐이오.”
나는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오늘의 대화를 갈무리했다.
차라리 잘됐다.
혹시나 렌투스 제국이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됐으니까.
* * *
영지를 떠나는 마차 안.
올 때도 그랬듯, 갈 때도 갈라딘의 곁은 렌-세븐이 호위했다.
원스넬이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갈라딘을 보며 말했다.
“공작님, 확 죽여 버리지 그러셨습니까. 저까짓 영주 놈이 뭐가 벼슬이라고……. 목을 쳐 버려도 시원찮은 놈 아닙니까?”
“저래 봬도 신데르스 왕국과 밀월 관계를 유지하며 북부의 군벌로 등장한 녀석이다. 최근에 성지도 건설했지. 아무 이유 없이 놈을 죽이면, 모든 국가가 우리를 적으로 돌릴 거다. 특히 라디우스 시국에서 우리를 파면할 수도 있고.”
“까짓것 교단의 성직자들은 무시하면 그만 아닙니까. 코딱지만 한 시국에 있는 교황이 뭐 그리 대단할까 싶습니다.”
“아직까진 무시할 수 없는 힘이다. 그때까진 겸손해야지. 원스넬, 독기를 좀 더 빼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예, 공작님. 명, 받들겠습니다.”
“공작님, 오늘의 일로 신데르스 왕국에도 정보가 들어가지 않을까요?”
그때, 렌-세븐의 셋째이자 홍일점인 쓰루나가 물었다. 그러자 갈라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들어가겠지. 상관없다. 그렇게 되면 자레드의 영지도 신데르스 왕국으로 간주하고, 나중에 한 번에 쓸어버리면 될 테니.”
“괜히 나중에 발목을 잡지는 않을는지요?”
“그래 봤자 춥고 황량한 북부의 골목대장일 뿐이다. 대륙 중북부의 드넓은 영토와 비옥한 토지를 보유한 우리 제국의 세력에 비교한다면, 발톱의 때도 안 되지.”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자레드 놈을 언젠가 직접 시원하게 손봐 줄 날이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놈에 대한 조사를 좀 더 면밀하게 진행하도록. 알겠느냐?”
“명 받들겠습니다.”
“흐음…….”
갈라딘이 침음성을 냈다.
대화 내내 모든 기운을 발출하여 자레드의 두려움을 자극하고자 했지만, 그의 눈빛은 한 치의 공포도 담겨 있지 않았다.
특유의 담력과 배포는 물론이고, 마법사로서 실력도 알려진 것보다 훨씬 상회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6클래스 마법사도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자신의 기운을 그리 쉽게 버텨 낼 수 없었을 테니까.
‘반드시 네놈은 언젠가 확실하게 손을 봐주지. 그 오만함의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까득.
갈라딘이 이를 갈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불쾌한 감정 속에 자레드의 이름 세 글자가 선명하게 찍혔다. 앞으로 지워지지 않을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