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123
제 123화
46장. 나오미 그레이스 – 2화
코앞에서 서로의 마법을 교환하는 순간, 나오미는 실감했다.
‘졌어.’
자레드에게 마법 공격을 당해서가 아니었다.
회심의 일격으로 시전한 체인 라이트닝이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분명 실수는 아니었다.
자레드의 설계에 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아티팩트 중에 회피 능력을 가진 신묘한 것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저 구전(口傳)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본 적도, 착용한 경험도 없기에 상상 속의 아티팩트 같은 것은 아닐까 했는데.
두 눈으로 직접 실재를 확인한 느낌이었다.
그것으로밖에 설명이 안 될 정도로, 체인 라이트닝은 아예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비장의 노림수는 불발로 끝났다. 반면에 자레드가 펼친 마법은 직격으로 나오미를 강타했다.
“끄윽…….”
그녀는 신음을 토해 내며 속절없이 추락했다.
처음에는 자레드의 손길이 닿는 순간, 몸 전체가 굳어 버리는 느낌이 나서 빙결 마법인가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패럴라이즈였다.
평소의 자신이었다면 패럴라이즈쯤은 진즉에 대응했을 것이다.
하지만 살을 주고 뼈를 취할 생각으로 그만큼 약점을 내준 것이었기에 후폭풍이 엄청났다.
게다가 자레드가 시전한 패럴라이즈는 마법의 격이 달랐다.
그녀는 6클래스의 마법사다.
그만큼 부단히 수련을 해 온 만큼, 패럴라이즈 마법이 그녀를 묶어 둘 수 있는 시간은 5초 남짓이 고작이었다.
항마력이 부족한 일반인이면 몇 시간을 마비 상태로 있을 수도 있겠지만, 자신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10초…….’
이미 10초가 넘는 시간 동안, 손가락 하나 제대로 까딱이지 못하고 추락하고 있었다.
미칠 듯이 쏟아지는 빗줄기와 거센 비바람은 자신을 더욱 처량하게 만들었다.
‘패럴라이즈를 뛰어넘는 패럴라이즈? 어떻게 이런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걸까.’
머릿속에 진하게 찍힌 물음표는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방금 전의 윈드 커터도 그랬다.
자레드의 마법은 뭔가 이중, 삼중으로 강화된 느낌이었다.
마법에는 분명 정형화된 어떤 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레드에게서는 그런 틀에서 벗어난 파격이 느껴졌던 것이다.
비유를 해 보자면 자레드의 마법은 인간의 마법이라기보다, 한계가 없기로 알려진 드래곤의 용언 마법을 좀 더 닮아 있었다.
‘하, 어차피 죽을 마당에.’
나오미가 자조 섞인 생각을 했다.
뭘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패럴라이즈 마법은 점점 더 그녀의 전신을 옥죄어 왔고, 이제는 불가항력이었다.
‘멍청해 빠진 국왕은 자기 나라의 앞마당에서 호랑이가 자라고 있는 것도 모르고…….’
나오미의 비난은 말루스 왕국의 국왕 말자리스 8세에게로 향했다.
역대급 무능한 왕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국왕 하나 때문에 말루스 왕국은 전략적 요충지를 잃었다.
아울러 이렇게 6클래스 마법사 하나도 잃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바보같이.
“…….”
모든 것을 체념한 나오미가 바람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힘을 쭉 빼 버렸다.
한데 바로 그때.
처억!
갑자기 자신의 등과 허리를 감싸는, 조금은 따뜻한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졌다.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눈을 떠 보니, 바로 코앞에 자레드가 있었다.
“우리, 잠시 얘기 좀 할까요?”
자레드가 부드럽게 운을 뗐다.
목숨을 건 일격을 주고받은 것이 방금 전의 일인데, 뜬금없이 ‘달달하게’ 느껴지는 대화 요청이라니.
하지만 대답하고 싶어도, 마비가 되어 버린 입은 오물거리는 것 이상의 대응은 하지 못했다.
스으으으윽!
그사이.
자레드가 플라이 마법의 추진력을 최대치로 높여 추락을 멈췄다.
그러고는 그녀의 입가를 따라, 횡으로 한 줄의 선을 그었다.
패럴라이즈의 해제였다.
전신의 마비를 푼 것이 아니라, 말을 할 수 있도록 입에 한정해서 마법을 해제한 것이다.
“하아.”
꽉 막혀 있던 입이 풀리자,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했다.
자레드가 재차 말했다.
“당신을 죽이려고 온 것이 아니에요. 나오미, 당신과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이게 무슨 볼썽사나운 꼴…….”
나오미는 상공에서 허리가 살짝 꺾인 채로 꽤 로맨틱하게 안겨 있는 자신이 민망하게 느껴졌다.
마치 연극에서나 보던 연인의 포즈를 연출하는 것 같았다.
“볼썽사나운 것은 지금 우리의 모습이 아니에요. 최고의 마법사를 곁에 두고도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채 변방에서 썩히고 있는 말루스 왕국의 모습이죠.”
“……자레드, 내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나오미 그레이스, 당신의 마음을 얻으려고 왔습니다.”
지그시 자신의 풀네임을 부르는 자레드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그녀의 가슴을 요동치게 했다.
이성으로서의 호감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을 마법, 즉 실력으로 찍어 누른 자레드가 자신의 마음을 얻기 위해 왔다는 그 한마디.
그 말에서 묘하게 심금을 뒤흔드는 떨림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일단 들어 보고 싶었다.
어차피 죽은 목숨이었다.
패럴라이즈가 제대로 풀리기 전까지 자신의 생살여탈권은 오로지 자레드에게 있기 때문이다.
“……편할 대로 해.”
나오미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럼, 비를 좀 피하죠.”
위이잉!
자레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멀티 텔레포트가 이뤄지며, 두 사람의 몸이 상공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나타난 곳은 동굴 안이었다.
* * *
“나쁜 짓을 하려고 마비시킨 건 아니에요. 단지 하려는 얘기를 확실히 하려면, 둘 중 하나는 가만히 있어야 할 것 같았거든요.”
투닥투닥. 투닥.
자레드가 구해 온 장작 위로 세상에서 가장 비싼 방법 – 파이어 월 – 으로 불을 붙였다.
제법 화력이 강해지자, 비에 흠뻑 젖어 있던 나오미와 자레드의 옷도 빠르게 마르기 시작했다.
자레드는 불길에 손을 녹이고 있었고, 나오미는 동굴 벽에 기댄 채로 자레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죽일 거면 빨리 죽여. 패자가 무슨 할 말이 있을 것 같아? 승리의 기쁨이라도 누리고 싶은 거야? 마음대로 해. 추악한 손길에 더럽혀지는 것도 각오하고 있으니까.”
나오미의 날 선 반응에 자레드는 대답 대신 특유의 따뜻한 미소를 그녀에게 보냈다.
에서의 나오미도 그랬다.
지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하지만 승부에서 패하면, 그때는 상대의 실력을 인정하고 장점을 배우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그것이 설령 자신보다 어린 상대라고 하더라도, 전혀 구애받지 않고 실력을 인정하고 따랐다.
“나는 앞으로 영지를 지금보다 더 넓게, 더 멀리 확장할 겁니다. 미치광이처럼 전쟁을 원해서가 아니라,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섭니다.”
“이상론은 그럴듯하네.”
“맞아요. 이상론이죠. 하지만 이상론으로 끝날지, 아니면 현실이 될지는…… 직접 실천해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죠.”
“당신은 다르다는 거야?”
“다르죠. 적어도 나오미 당신이 지금 소속되어 주군으로 섬기고 있는 왕보다는 낫겠죠.”
“그건……! 후우.”
반사적으로 아니라고 반박을 하려다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을 깨닫고는 그녀가 한숨을 뱉었다.
“재난을 수습할 재정이 아까워 귀족만 챙기고 백성은 헌신짝처럼 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의도적으로 파벌을 조장하고, 간신들을 곁에 두는 국왕이 좋습니까?”
나오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레드는 그것으로도 그녀의 속마음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에서 나오미는 항상 대의를 추구하는 한편, 백성들을 그 누구보다도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이었다.
박애(博愛).
그것은 뼛속까지 골수 귀족인 사람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열린 생각이기도 했다.
자레드는 그녀의 강인한 외면에 가려져 있는, 부드럽고 자애로운 내면을 공략할 생각이었다.
“이대로 가면 말루스 왕국은 내가 나서지 않아도 안에서부터 무너질 거예요. 당신들이 끝없이 뒷걸음질칠 때, 렌투스 제국과 신데르스 왕국은 몇 발자국을 앞서 나갈 테니까.”
“틀린 말은 아냐.”
나오미가 수긍했다.
“상식을 한참은 벗어난 비상식의 거지 같은 차별 대우. 그리고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 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국왕의 폭주. 난 이것을 막고 싶어요.”
“…….”
“말루스 왕국의 국왕과 간신들이 어떤 미래를 맞이할지는 관심 없어요. 하지만 죄 없는 백성들까지 휘말리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다르다고 할 수 있어?”
나오미가 반문했다.
자레드는 그녀의 질문에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백성들을 내쫓거나, 꿈을 짓밟거나, 폭정과 무능한 정치를 일삼는다면 그땐 당신이 직접 내 목을 가져가도 좋아요. 내가 꿈꾸는 것은 민본(民本)입니다. 백성이 뿌리가 되는 세상. 너무 당연한 얘기라서, 구구절절 설명하는 게 민망한 그런 세상 말입니다.”
“…….”
담백하게, 차분한 목소리로 이어진 자레드의 말이었지만.
나오미의 마음에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말루스 왕국에는 이런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이 없었다.
모두가 현실에 안주하고, 기득권을 절대로 잃지 않기 위해 목을 매고 있을 뿐이다.
국왕부터 신하들까지.
누구 하나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크리비아 영지의 사나레 성지 건설 이후.
말루스 왕국에서 수많은 백성이 국경을 넘어 크리비아 영지로 향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일반 민중들에게 말루스 왕국은 더 이상 답이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나오미가 뜨거워지려는 마음을 누르고, 차분하게 자레드의 말을 받았다.
“말로는 부족해.”
“무엇을 원하죠?”
“내게 당신의 진가를 한 번 더 증명해 봐. 분명 당신은 7클래스에 준하는 파괴적인 마법의 힘을 가졌어. 하지만 그건 마법사로서 능력일 뿐이야.”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증명해 봐라, 그런 뜻이겠군요.”
“맞아. 어차피 세상에 이상론자나 달변가는 수레에 실어도 차고 넘칠 만큼 많아. 이상을 현실로 만들 수 없다면, 그 사람이 하는 말은 그저 개소리일 뿐이야.”
“곧, 왕국의 군대가 우리를 공격할 겁니다. 규모도 우리보다 훨씬 많죠.”
“썩어도 준치라고, 왕국은 왕국이야. 그 군대를 만만하게 보지 마.”
“좋아요. 그럼 내가 이 전쟁에서 이기면 되는 겁니까?”
“네 힘을 스스로 증명하고, 항복한 모든 백성을 아우를 능력이 있는지 보고 싶어. 어차피 왕국에 등을 돌릴 거라면, 내게도 가치 있는 사람에게 마음을 줘야 의미가 있겠지.”
“현명한 대답이네요.”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겠어.”
“그렇게 합시다. 내 가치를 직접 증명할 테니, 그때까지 당신의 대답은 보류하기로.”
자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로도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한 7부 능선은 충분히 넘은 것 같았다.
‘당신의 마음을 꼭 붙잡겠어, 나오미.’
자레드는 자신 있었다.
행운의 반지에 담긴 4번 옵션을 걸고, 나오미를 얻기 위해서 힘껏 던진 승부수!
그 승패의 끝이 보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