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125
제 125화
47장. 불평등조약 – 2화
놀란 영지민에게 걱정 말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짧은 조언을 남겨 주고 난 뒤.
나는 바로 영주 성으로 돌아와 두 왕국에서 온 사신을 맞이했다.
보누스 왕국이야 4만의 군대가 전멸을 했으니, 똥줄이 잔뜩 타서 사신을 보낸 것은 이해가 갔다.
다만 말루스 왕국은 의외였다.
궁금해서 그 이유를 알아보려던 차에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에 동석한 라키스가 말을 보탰다.
“신데르스 왕국이 국경 지대 병력을 평소보다 네 배 가까이 늘린 모양입니다. 그래서 본 영토로 진군 중이던 말루스 왕국군이 진격을 멈췄더군요.”
“그러니까 지금 말루스 왕국은 우리와 신데르스 왕국이 협공할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는 얘기요?”
“예, 영주님. 그렇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확실히 겁을 잔뜩 집어먹은 모양이오.”
“아무래도 켈디아 무기가 준 충격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실제로 게니츠, 루크 제독도 같은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후로 진군할 계획이 전혀 없었지만, 나는 계속 영지군을 조금씩 북진시키고 있었다.
이유인즉, 오늘의 상황을 예측하고 두 왕국을 압박하기 위함이었다.
켈디아 무기라는 신무기가 등장한 가운데, 뼈저린 패전을 경험한 그들이 다시금 크리비아와 맞서 싸울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봤다.
카슨이 죽은 것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 틀림없었다.
대외적으로 5클래스로 알려진 내가 쉽게 부단장급의 인사를 제거했으니, 크게 겁내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게다가 6클래스 마법사인 나오미까지 내게 항복한 후였기에 그 충격은 두 배가 되었을 터.
말루스 왕국은 나오미의 항복을 놓고 복수할 수단도 없었다.
그녀는 왕국에 이렇다 할 연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임질 혈연도 자신이 전부였고, 정말 미련 없이 왕국을 버렸다.
다만 열심히 가르치던 학생들에게 자신이 집필한 마법서를 나눠 주며, 나중에 다시 볼 날을 기다리겠다는 말만 남겼다고 했다.
그것이 인연 정리의 전부였다.
“영주님, 보누스 왕국의 사신이 접견을 요청합니다.”
“말루스 왕국의 사신도 접견을 요청합니다.”
이어진 보고에 나는 따로 나눠서 그들을 만날까 하다가, 이내 양손을 앞뒤로 까딱이며 말했다.
“둘 다 같이 들어오라고 해라. 한 번에 얘기를 진행하겠다.”
“옛! 두 왕국의 사신은 함께 안으로 들라십니다!”
말이 들리기가 무섭게 사신이 앞을 다투어 내게로 왔다.
자세히 보니, 예전에 마스터 포션을 구매할 때 왔었던 그 사신이었다.
그 인연이 서로 신기했는지, 사신들끼리도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왕국의 도시를 줄줄이 잃었는데, 세상 밝은 표정을 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사신의 모습이 두 왕국의 현실을 그대로 투영하는 것 같아 입맛이 씁쓸했다.
“자레드 공작님을 뵙습니다!”
“자레드 영주님을 뵙습니다!”
저마다 취사선택한 호칭으로 나를 부르며, 즉시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왕국에서 보낸 사신이고, 나는 영지의 영주로서 맞이한 것이지만 인사는 받지 않았다.
애초에 힘의 무게추가 내 쪽으로 힘껏 기울어져 있는데, 사신의 비유를 맞출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 내게 하고 싶은 말은?”
“…….”
존칭과 예를 모두 생략했다.
팔짱을 끼고, 거만한 표정으로 묻자 사신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명색이 사신이다 보니, 나름의 예절을 기대한 걸까?
정말 정신 나간 놈들이다.
“셋을 세지. 셋.”
“저, 저저! 저!”
갑자기 내가 카운트를 하자, 사신들이 당황했다.
“둘.”
“저기 잠시만요! 영주님!”
“하고 싶은 말을 하라 했다. 하나. 다음을 세면 끝이다.”
“영주님! 국왕 폐하께서 정전협정을 맺길 원하십니다!”
“저희도 그렇습니다! 평화조약을 체결하기를 원하십니다!”
두 사신이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방문의 목적을 드러냈다.
“죄 없는 불쌍한 백성들을 폭도 취급하면서 남의 영지에 버릴 때는 언제고……. 가증스러운 놈들.”
옆에 있던 라키스가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그가 대신해 준 것이기에 나는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툭툭 쳐 주었을 뿐이다.
“그래. 정전이든 평화든 너무 좋지. 전쟁이 좋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 안 그래?”
나는 의자 위의 꼭대기에 걸터앉아서는 거의 아래로 깔보듯이 사신들을 내려다봤다.
의도적으로 그들을 굴욕스럽게 만든 각도였다.
그리고 지금의 광경은 미리 설치해 둔 영상 장치를 통해, 남김없이 녹화되고 있었다.
“이것이 국왕 폐하께옵서 직접 보내신 서신이며, 이 안에 체결할 협약에 대한 기본안이 작성되어 있습니다.”
“말루스 왕국도 같습니다!”
사신이 차례대로 서신을 라키스에게 건넸고, 그다음에 내가 전달받았다.
내용을 쓱 읽어 보았다.
부우욱!
나는 그즈음에서 보누스 왕국의 서신을 찢어 버렸다.
첫 줄부터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으로 보아, 더 읽을 가치를 못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말루스 왕국의 서신은 좀 다를까 해서, 기대를 갖고 열어 보았다.
“뚫린 입이라고 정말 같잖은 소리 하고 있네.”
부욱! 부욱! 부우욱!
보누스 왕국보다 더 황당한 서신을 적어 보냈기에, 그만큼 서신도 더 경쾌하게 찢어 버렸다.
그리고 조각이 되어 버린 서신을 두 사신의 면전에 그대로 던져 버렸다.
터업! 터어업!
“크억.”
“커헉.”
졸지에 서신 쪼가리를 뒤집어쓴 사신들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변했다.
의자에서 내려온 나는 군화를 신은 발 그대로, 사신들에게 걸어갔다.
내가 가까이 다가오자, 지레 겁을 먹은 사신이 고개를 조아렸다.
심안으로 상태를 살피자, 온통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한 그네들의 일반 성향이 한눈에 보였다.
“잘 들어. 우리 크리비아 영지는 신데르스 왕국과 그 어느 국가보다도 각별한 사이야. 알지?”
신데르스 왕국은 서쪽 접경지대를 두고 보누스, 말루스 왕국과 맞닿아 있다.
“게다가 얼마 전에 렌투스 제국에서 갈라딘 공작을 우리 영지에 사신으로 보냈던 것은 알고 있지? 주변 국가에서의 첩보 활동은 모든 국가의 기본이니까 말이야?”
렌투스 제국은 그들을 기준으로 북쪽 접경지대를 두고, 역시 두 왕국과 맞닿아 있다.
나는 이렇게 두 나라의 이름을 전략적으로 가져다 썼다.
핵심 내용을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단지 두 왕국이 우리 영지 말고도 어떤 나라와 맞닿아 있는지, 주의를 한 번 환기해 주었을 뿐.
여기서 구구절절 왜 렌투스 제국과 신데르스 왕국의 이름을 언급했는지를 설명하면 하수다.
그들과의 함께 협력하기로 결의했다며 겁을 준다면, 그건 중수고.
그렇다면 고수는?
여기서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으면 된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소설을 쓰고 망상에 빠지는 것은 상대의 몫이다.
사리 분별이 잘되는 냉정한 지도자라면 이런 수작이 먹히지 않겠지만, 글쎄…… 난 성공률 95%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좀 더 세게 나가기로 했다.
무례하고, 거만하고, 오만해도 괜찮다.
내가 선을 한참 넘어도, 두 왕국은 절대 우리 영지와 전면전을 벌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엔 후방과 동쪽으로 신경 쓸 것이 너무 많다.
두 왕국의 단점은 국가의 규모에 비해 다른 나라와의 국경의 접촉 비율이 넓다는 점이다.
우리 영지의 경우 북쪽과 동쪽은 전부 바다다. 남쪽은 신데르스 왕국과 닿아 있고.
그래서 서쪽 접경지만 신경 쓰면 된다.
하지만 두 왕국은 서쪽을 제외한 삼면 전체를 빠짐없이 두루 살펴봐야 했다.
많은 군대를 보유하고 있어도, 분산 배치하게 되면 군의 밀도가 크게 낮아지는 것이다.
나는 엎드려 있는 두 사신의 손가락을 차례대로, 지그시 군화로 밟았다.
으드드득. 으득.
“크아악! 크악! 내 손가락!”
“아아악!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절규하는 사신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꿋꿋이 그들의 손가락을 밟고 선 채로 말을 이었다.
“초안은 내가 짤 테니, 너희 국왕은 늘 그랬던 대로 시원하게 국새(國璽)나 찍으면 된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크아아악! 아악!”
“알겠냐고 물었다.”
“예! 예에! 알겠습니다! 그렇게 국왕 폐하께 전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이 발을 좀……!”
아파 죽으려고 하는 사신의 표정을 좀 더 음미한 뒤, 나는 천천히 발을 뗐다.
그들의 손가락이 저마다 비정상적으로 부러져 뒤틀린 것을 보니, 메시지는 확실히 남긴 듯했다.
“타협은 없어. 내가 보낸 초안에 국새를 찍느냐, 아니면 선전포고문을 쥐어 보내느냐. 그 차이일 뿐이다.”
나는 자신 있게 도발했다.
그리고 바로 생각해 둔 초안대로 조약의 내용을 작성해 갔다.
사신에게 잔뜩 겁을 주기는 했으나, 정말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요구는 넣지 않았다.
분명 굴욕적이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를 내용이지만, 그 열불이 터지지는 않을 정도로.
딱, 그 수위에 맞춰 작성했다.
불평등조약은 많이 쓰기도 했고, 일방적으로 당해 보기도 했다.
는 영주 플레이어들의 전쟁과 휴전, 모략과 뒤통수, 기습이 난무하던 야생이었으니까.
그 야생에서 그래도 이를 갈고 결국에는 살아남은 내 짬밥이 어디 가지 않았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신데르스 왕국의 공주 마이라는 국왕 이즈엘의 특명에 따라, 특사로서 크리비아 영지를 방문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이라.”
“네, 오라버니.”
“소식 들었느냐? 제독과 군 장성들이 줄줄이 항복하면서, 크리비아 영지는 이제 본격적으로 해군을 양성할 수 있게 됐다. 그뿐만 아니라 다수의 군함과 조선소까지 모두 차지한 모양이다.”
“그쪽의 제독은 무척 강직한 사람들이라 들었는데…… 그만큼 왕국의 실정 탓에 마음을 돌린 것이겠지요?”
“그렇겠지. 게다가 나오미 그레이스도 자레드 공작의 가신이 됐다더군. 자레드가 그녀에게 바로 마법사단을 맡겼다는 후문이다.”
“혹시 자레드 공작이 일방적으로 제안했다는 그 조약도?”
“지레 겁을 집어먹은 국왕이 이것저것 잴 것 없이 도장부터 찍자고 했다더군. 국왕이 의심이 많은 작자 아니냐. 우리 왕국도 그렇고, 후방의 렌투스 제국도 무시할 수 없었겠지.”
“영악하네요, 자레드 공작님은. 우리 왕국은 그렇다 쳐도, 렌투스 제국은 사실상의 적국인데 전략적으로 이용했다는 거잖아요?”
“어차피 사실 여부를 파악할 수 없는 기만이니 말이다. 설령 렌투스 제국에 물어 답을 듣는다고 해도, 의심을 거둘 수는 없겠지. 전쟁을 한다고 하면 당연히 믿어야 하고, 안 한다고 해도 의심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당했네요. 보누스 왕국과 말루스 왕국이.”
“내가 직접 작성한 친서(親書)는 반드시 독대를 청하고 전달해야 한다. 알겠느냐?”
“네, 오라버니.”
“크리비아 영지는 우리의 영원한 동맹군이어야 한다. 그 점을 명심하고, 자레드 공작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신경 쓰거라.”
“예, 알겠어요. 심려 마시고 저를 믿어 주세요, 오라버니.”
“환하게 웃으니까 보기 좋구나.”
“그러게요. 자레드 공작을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니, 괜히 웃음이 나네요.”
“정말 그에게 아직도 마음이 있는 것이냐?”
“훗. 다녀올게요, 오라버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묘한 웃음만을 남긴 채.
마이라는 사신단과 함께 크리비아 영지로 출발했다. 이즈엘이 작성한 친서를 고이 품에 안은 채.
이즈엘이 멀어져 가는 마이라와 사신단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북부에도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겠군. 지금껏 가장 조용했던 나스 대륙의 북부에서…….”
때마침 북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곧 다가올 봄을 알리는 따스한 봄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