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134
제 134화
50장. 레드 퀸 – 2화
생각지도 못한 만남이었다.
레드 퀸은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몸에 쫙 달라붙는 가죽옷 차림에 가슴골이 깊게 파인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고 있었다.
마치 캣우먼의 실사 버전 같은 느낌이랄까? 캣우먼의 가면을 벗기고, 노출을 더하면 똑같을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지그시 쳐다봤다.
위장용 가면을 쓰지 않고 있었다면 껄끄러운 자리가 됐겠지만, 지금은 자레드가 아닌 다른 이의 얼굴을 흉내 내고 있었으니까.
위장술의 달인인 클로이가 만들어 준 것이라 완성도는 보장된다. 직접 얼굴을 붙잡고 뜯어내는 것이 아니면, 절대 모를 것이다.
내가 빤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자, 레드 퀸이 웃으며 물었다.
“호호, 처음이신가 봐요?”
“네, 여기는 처음입니다.”
“따라오세요. 다른 의도는 없어요. 1층부터 3층은 언제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라, 4층에서 마시는 게 편할 거예요.”
“본의 아니게 실례하게 됐군요.”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요? 어차피 저 혼자서 4층의 VIP 공간을 다 쓸 수도 없는 거니까.”
또각또각.
굽 높은 레드 퀸의 구두가 맑은 소리를 냈다.
그녀가 4층으로 향하자, 뒤에 있던 남자 둘도 함께 따랐다.
‘예전의 그 호위가 아냐.’
두 남자는 일전에 신데르스 왕국의 술집에서 보았던 레드 퀸의 호위가 아니었다.
그때는 그저 그런 실력의 보유자라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뭐야, 이룡(二龍)이잖아?’
순간 크게 당황하여, 억! 하고 소리를 낼 뻔했다.
이룡은 원래 더블 드래곤이니, 투 드래곤이니 하는 괴상한 별칭을 가지고 있던 네임드였다.
두 사람이 이룡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무조건 함께 다니고, 둘 다 용이 그려진 마검을 쓰기 때문이다.
묵직한 기운을 풍기며, 두 사람의 어깨에 얹혀 있는 마검은 두 손으로도 들기 버거울 듯한 대검이었다.
거기에다가 떡하니 금, 은빛으로 그려진 용이 양각(陽刻)으로 새겨져 있으니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룡은…… 나중에 데스먼드 제국에서 여황제로 등극하는 나탈리의 호위기사인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설마?’
그제야 뭔가 이상한 조합, 레드 퀸과 이룡이 함께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듯했다.
‘레드 퀸이 데스먼드 제국 황가의 공주였어! 지금은 그걸 숨기고 있는 게 틀림없고…….’
성마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데스먼드 제국의 황제 나탈리에 대한 정보는 알려진 게 없었다.
의 역사에서 그녀가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시점은 성마 대전이 발발하던 날이었다.
마도 제국의 황제로서 가장 먼저 마왕군에 대해 지지 의사를 밝히고, 이웃한 모든 신성제국 연합에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어떻게 황위를 계승할 준비를 해 왔으며, 어떤 방식으로 후계자가 되었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딱 하나 알려진 사실이 있다면, 선대 황제가 그녀를 매우 아끼고 총애했다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레드 퀸이 나탈리라……. 게다가 양옆으로 소드 프랙티션급의 검사가 둘이라니. 괜히 헤레시스가 줄을 선 게 아니었네.’
가늘게 뜬 눈으로 다시금 이룡의 뒷모습을 살폈다.
오러 블레이드를 다루기 시작한 검사는 보통 다섯 단계의 분류로 실력의 고저가 측정된다.
가장 낮은 순부터 보자면 소드 비기너, 유저, 프랙티션, 익스퍼트, 마스터 순이다.
이룡은 다섯 단계 중 중간 단계로서 결코 실력이 부족하지 않았다.
게다가 레드 퀸, 그러니까 나탈리는 그런 두 사람을 호위 또는 스승으로 두고 있는 만큼, 보통 실력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이룡 중 한 명은 물리 방어 극대화, 나머지는 마법 방어 극대화라서 더 까다로워.’
둘은 극과 극의 성향과 검술, 그리고 대응 구조를 지니고 있어 상대하기 더욱 까다롭다. 심지어 옷차림도 극단적으로 다르고.
이룡이라 불리는 두 남자, 블라크와 화이테스. 게다가 나탈리까지.
과연 진 주인공 후보에 걸맞은 구성이라 느껴졌다.
물론 내게 있는 능력 있는 가신과 동료를 생각하면, 그들의 구성에 모자람이 있어 보이긴 하지만.
“뭐 해요? 얼른 와요.”
나도 모르는 새에 살짝 거리를 두고 걸었는지, 4층에 도착한 나탈리가 나를 향해 손짓했다.
* * *
나와 나탈리는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4층의 넓은 VIP 공간에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앉았다.
그녀가 내게 합석을 제안하지도 않았고, 나 역시 같이 맥주를 마시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살짝 긴장된 분위기가 4층에 감돌기는 했지만, 그것도 시원한 맥주를 들이켜자 금세 사라졌다.
그렇게 두 번째 잔을 받고 맥주를 마시기 시작할 무렵이었을까?
나탈리가 이룡을 향해 손가락을 튕기며,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 말을 건넸다.
그러자 이룡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술집 밖으로 떠났다.
조용히 술을 마시고 싶으니, 곁을 호위하지 말고 적당히 떨어져 있으라는 지시를 들은 듯했다.
그 바람에 이제 4층에는 나와 나탈리, 둘만이 남았다.
예전에 나를 처음 봤을 때.
나탈리는 술집의 수많은 인파 속에서 나를 또렷이 응시하며 정신 금제를 시도했었다.
그때는 뭔가 사악하면서 말괄량이 같은 기질이 보이는 여자였는데…… 오늘 느낌은 사뭇 달랐다.
내게도 제법 예를 갖췄고, 또한 호의도 베풀었다.
아울러 맥주를 마시면서 술기운에 폭언을 하거나, 튀는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챙겨 온 책을 읽으며, 조용히 독서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쨌든 주인공 후보로 손색이 없는 건 맞아. 데스먼드 제국이면 나스 대륙의 5제국 중 하나. 렌투스 제국만큼 가장 강성한 제국이기도 하고.’
나탈리에게 계속 시선이 갔다.
어쩔 수 없었다.
주인공 후보인 것은 둘째 치고, 그녀의 배경 자체가 나와 적이 될 가능성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마도 제국의 공주이자 악신의 가호를 받고 있으며, 훗날 마왕군의 편에 설 것이 분명한 여자.
그녀를 보고도 마음이 편하면, 그것은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윽고 나와 나탈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가 피식 웃었다.
입꼬리가 스마일처럼 부드럽게 말려 올라가는데, 그 모습은 무척이나 예뻤다.
“저는 세네린이라고 해요. 그쪽은요?”
첫판부터 웃는 얼굴로 거짓말이냐? 확정만 안 했을 뿐이지 정황상 나탈리가 맞는데, 전혀 다른 이름을 댄다.
‘암행(暗行)인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마 대전이 발발하기까지 아직 8년이나 남았다.
나탈리도, 이룡도 지금은 이름이 알려져 있는 시기가 아니다.
정체를 숨기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로하드입니다.”
나도 적당한 이름을 둘러댔다.
“로하드……. 생소한 이름이네요. 여기에 처음 오신 거죠?”
“네, 맞습니다.”
이름만 듣고도 처음 온 것을 알아맞히다니.
그 말인즉, 여기에 얼쩡거릴 만한 헌터의 이름은 다 꿰차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어떤 던전을 공략…….”
바로 그때.
콰아아앙!
나탈리가 내게 질문을 건네고 있는데, 갑자기 1층에서 굉음이 들렸다.
난간으로 달려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미 먼지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뭔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저 자식들, 전부 죽여!”
“우리 구역이다, 빌어먹을 X들아! 보자보자 하니까 누굴 호구로 알고!”
“이참에 쓸어버리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처음에는 단순한 말다툼이나 몸싸움 정도가 아닐까 싶었는데.
채앵! 채앵!
솨아악! 솨악!
“크아악!”
“으아, 내 팔이!”
목숨을 건 결투였다.
방금 전까지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저마다 맥주를 마시던 손님은 온데간데없었다.
모두 검을 비롯한 다양한 무기를 꺼내 들고, 자신과 다른 견장을 차고 있는 ‘적’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다섯 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뒤통수에 철퇴를 맞고 피를 흩뿌리며 죽거나, 대응하기 전에 머리가 반으로 쪼개져 비명횡사하거나, 일어서기도 전에 가슴을 꿰뚫려 즉사해 버렸다.
데스먼드 제국이 위치한 나스 대륙 남부의 헌터가 북부에 비해 거칠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서로를 적대시하며, 즉각 칼부림을 벌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물론 어쭙잖은 정의감으로 나설 생각은 없었다.
그럴 만한 힘은 분명 있지만, 굳이 낭비할 필요는 없다고 봤다.
그때,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 함께 서 있던 레드 퀸이 말을 덧붙였다.
“원래 이 빌어먹을 동네가 다툼이 좀 잦아요. 애초에 영주도 손을 놓고, 아예 ‘자유 구역’이라고 선포한 곳이거든요. 여기선 살인이 나도 아무도 벌을 받지 않죠.”
“자유 구역?”
어감이 좋지 않았다.
말이 좋아 자유 구역이지, 사실 무법 지대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신경 쓰지 말고 맥주나 마저 마시죠. 시원할 때 마셔야지, 미지근해지면 맛없어요.”
그녀의 말에 나도 일단 자리로 돌아왔다.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1층부터 3층까지고, VIP 구역으로 나뉜 이곳은 안전했으니까.
그렇게 맥주 두 모금 정도를 마셨을까?
쾅! 쾅쾅! 쾅!
1층에서 시작된 시끌벅적한 발소리가 순식간에 2층과 3층을 지나, 4층까지 올라왔다.
고개를 돌리자, 눈이 시뻘개진 헌터 다섯이 씩씩거리며 VIP 구역 앞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용건도 없는데 적의는 왜?’
나는 조용히 맥주를 마시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물론 체내의 마력 회전율을 끌어올리면서 언제든 전투에 돌입할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다.
그때, 민머리 남자 하나가 앞으로 나서더니, 내게 위압적인 말투로 포문을 열었다.
“우린 슬라바 길드의 헌터다. 이 술집은 우리 구역이다. 좋은 말로 경고할 때, 외부인이면 잔말 말고 썩 물러가라. 카푸르 길드에서 온 스파이 새끼면 꺼지고.”
나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머릿속에서 딱 떠오른 단어는 ‘전세’였다.
아니나 다를까, 뒤에 있던 나탈리가 깔깔 웃으면서 그들의 말에 먼저 답했다.
“당신들, 여기 전세라도 냈어요? VIP룸은 당신들처럼 거지한테는 문 안 열어 주는데?”
“뭐?”
민머리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덩달아 반들반들한 머리와 이마에도 음영이 생겼고, 분위기는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나는 다섯의 헌터를 빠르게 스캔했다.
그러자 제법 특수 성향이며, 여기저기 견실하게 빈틈을 채운 스탯들이 보였다.
‘민머리는 라키스와 동급이고, 나머지는 하위 호환 정도네.’
길게 힘쓸 것도 없어 보인다.
그럴 가치도 없는 놈들.
다만 험악해져 있는 아래층의 분위기를 생각해서, 참회의 기회는 주기로 했다.
“너희와 적이 될 생각도 없고, 다른 곳의 스파이도 아냐. 조용히 맥주나 마시고 싶으니까 그냥 내려가.”
여기서 상황은 끝났어야 했다.
하지만 대답은 전혀 핀트가 어긋난 방향으로 돌아왔다.
“와, 이 자식 봐라? 뒤에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도 있으니, 잘 보여서 수작질 좀 해 보려고 센 척을 다 하네? 그래? 어디 이 검을 대가리에 맞고도 그런 여유를 부리실 수 있는지 한번 볼까!”
쇄애액!
민머리의 싸늘하고도 예리한 검격이 순식간에 내 머리 한가운데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푸우욱!
경쾌하게, 그리고 짧게.
검 끝이 깔끔하게 살점을 꿰뚫고 힘껏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나는 멀쩡했다.
단지…… 머리카락이 없는 한 놈이 죽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