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152
제 152화
54장. 5대 성유물 – 4화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베니우스의 은밀한 제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내가 동의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뿅 하고 시국이 옮겨 올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시국은 영토 안에 위치하고 있는 하나의 독립된 종교 국가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이 머물 수 있는 장소부터 시작해 투자해서 지어야 할 것이 많았다.
이러한 모든 작업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받아들일 준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은밀한 대화가 오간 뒤, 베니우스는 나와 함께 성물을 하나씩 확인했다.
그는 교황 아르모니아 17세가 신뢰하며 권한을 위임한 추기경이기에 가감 없이 성물을 보여 줬다.
반응은 네오드와 비슷했다.
감격스러워하고, 눈물을 흘리다가, 종국에 마지막 성유물을 보고는 뒷목을 잡고 쓰러지기 직전까지 갔다.
그날 오후.
베니우스는 공식적으로 5대 성유물이 모두 사나레 성지에 자리를 잡았음을 선포하고, 주신의 축복이 현신했음을 알렸다.
백성들은 열광했다.
때마침 성지의 대광장에 나타난 나를 향해, 백성들은 정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부복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대왕 폐하, 만세! 만세! 만세!”
“크리비아 왕국 만세!”
“주신의 축복이 우리 왕국에 함께하신다! 살아 있는 영웅이신 대왕 폐하를 찬양하나이다!”
성유물을 구해 온 것이 라디우스 교단의 성직자들이 아닌, ‘나’라는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혔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세계에서 신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이다.
전생의 사람들은 무신론자도 많고, 딱히 종교를 갖지 않거나 신앙심이 그리 깊지 않은 사람도 많았지만,
현생은 달랐다.
라디우스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가 충실한 신앙생활을 했다. 교리 공부도 확실하게 하고.
그러다 보니 성유물이 갖는 의미가 남달랐다.
특히 한 번 잃어버렸던 것이라 대신관이나 추기경처럼 되찾고자 하는 열망이 컸던 것이다.
그런데 역대 교황도 이뤄 내지 못한 기적을 내가 만들어 냈으니!
내가 그야말로 살아 있는 ‘기적’이 된 것은 이상할 것도 없었다.
아예 시간을 내서, 사나레 성지 전역을 시찰(視察)하며 다녔다.
확실히 황금기가 즉시 도래하면서 내정이 최대치로 오른 효과는 가시적이었다.
백성들은 평소보다 더 열심히 일했고, 의욕도 넘쳤다.
비유하자면 마치 ‘약이라도 빤 듯’이 열정적으로 일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터전에 5대 성유물이 모두 모인 축복이 내려졌으니 감격스러울 수밖에.
[성지의 백성들이 한 명의 이견도 없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국왕의 은덕을 칭송합니다!] [퀘스트 ‘영원한 자부심’을 완료했습니다. 성지 백성들의 충성도가 향후 2년간, 절대 90% 이하의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신앙과 충성으로 무장한 성지의 모든 백성들은 왕국의 열렬한 추종자이자 지지자가 됩니다.]‘좋아. 정말 좋아!’
반가운 연쇄효과가 일어났다.
이제 성지의 백성은 다른 백성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나의 모든 것을 지지해 줄 것이다.
아울러 성지에서 추진하는 모든 사업에 대한 협조와 효율도 대폭 증가할 터.
그렇다면 시국을 옮길 때, 아주 우수한 부스터 효과를 낼 것이다.
‘신의 축복이구나…….’
나는 성지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창공에서 한참을 만족스럽게 있었다.
뿌듯했다.
라디우스의 ‘편애(偏愛)’라는 이름이 잘 어울릴 만큼, 성지 전체에서 환한 기운이 수시로 반짝이고 있었다.
* * *
다음 날 새벽.
꾸드드득.
보고서의 형식으로 날아온 서신을 확인한 남자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읽던 서신을 구겨 버렸다.
그의 이름은 제스.
많은 사람의 기억에서 이제 제법 잊힌 이름이지만,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바로 그때.
서신을 움켜쥐고 양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제스의 뒤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새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에 핏기를 완전히 잃어버린 입술. 그리고 완벽에 가까운 백발(白髮).
사람들은 그를 아그라트라고 불렀다. 상인 아그라트.
그는 사람들 앞에 나설 때면 항상 진한 흑발로 만들어진 가발에 생기가 잔뜩 넘치는 화장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주변의 시야에서 해방된 자리에서는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이 지금이었다.
“제스.”
“네, 교주님.”
제스는 아그라트를 교주라고 불렀다. 그랬다.
그가 바로 암흑 교단의 종파 중 하나인 카코(Kako) 교단의 교주였던 것이다.
움브라 교단의 교주 린크스나와 더불어 완벽히 본모습을 숨기고, 주류의 세계에 자리를 잡은 어둠의 씨앗이기도 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네가 원하면 언제든 숙원을 풀 수 있다.”
“정말입니까?”
“지금보다 더 자레드가 날뛰기 전에 놈의 목숨을 끊어야 한다.”
“자레드, 이 망할 X…….”
제스가 이를 갈았다.
자레드는 자신의 인생을 천국에서 지옥의 끝으로 처박은 장본인이었다.
죽이고 싶었다.
제4 왕자였던 이즈엘도 제스에게는 죽이고 싶은 존재였지만, 그보다 자레드가 10배는 더했다.
자레드가 개입하는 바람에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움브라 스캔들이 확산되기 전에 무리를 해서 프탈린과 교전을 벌였고, 그 결과 대패한 것이다.
‘녀석이 장치를 이용해서 영상을 퍼뜨리지만 않았어도, 내가 프탈린을 제압하고 왕위에 올랐을 텐데…….’
그 생각이 두고두고 한이 됐다.
그래서 암흑 교단에 의탁하면서도 항상 복수의 칼날을 벼르고 있었는데,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가겠습니다.”
“좋아. 네게 우리 교단의 정예 부대 중 하나인 카코스(Kakos)를 붙여 주겠다. 자레드는 아직 별궁에 있으니, 경계를 아무리 강화했다고 한들 빈틈이 있을 것이다.”
“예. 맡겨 주십시오.”
“네게 내가 줄 수 있는 어둠의 기운 일부를 나눠 주겠다. 반드시 자레드를 죽이고, 교단의 대업을 완수하도록 해라.”
“예, 교주님.”
화는 복 속에 숨어서 들어온다고 했던가?
자레드가 전혀 알지 못하는 곳에서, 그가 걱정했던 일이 하나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괴물이 되어 버린 신데르스 왕국의 옛 왕자, 제스의 복수였다.
* * *
“대왕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크리비아 왕국을 위하여!”
“왕국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적들에게 죽음을!”
“모두 고생이 많군. 그대들이 있어 참으로 든든하다. 앞으로도 훈련을 게을리 하지 말고, 필요한 지원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
“예, 폐하!”
그 시각.
나는 드레자 주술단의 주술사들을 하나씩 격려하고 있었다.
처음 이자벨이 주술단을 만들었을 때만 해도, 많은 것이 혼란스러웠었다.
애초에 이자벨도 이런 단체를 이끄는 것이 처음인데다가 합류한 주술사들이 정말 각양각색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관리 체계가 확실히 잡혔다.
주술단의 기강은 아그레시오 기사단이나 디미오스 마법사단에 비해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엄했다.
그리고 얼마 전, 이자벨은 5성의 주술사가 되었다.
초입에 해당하는 5성이지만, 마법사로 비유해도 5클래스이기에 결코 낮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자벨은 훈련 내내, 단체 주술에 엄청 많은 공을 들였다.
이는 전쟁에 대비한 것으로 일전에 카슨을 처치했던 것처럼, 적의 요인을 골라내어 집중 화력을 퍼붓기 위함이었다.
라키스가 ‘실험 대상’으로 몇 차례 단체 주술 시연에 참여했는데, 80%의 확률로 걸려들었다.
포박 주술과 이동 주술에 걸려든 라키스는 허공에서 버둥거리면서 붕 떠올랐고, 약 7초간 대응 불가 상태가 이어졌다.
전장이었다면 목숨이 사라져도 진즉에 사라졌을 시간이었다.
‘이제 주술단의 위용을 드러낼 때도 됐어.’
주술단의 규모는 어느덧 100명을 돌파한 상태.
이 정도의 규모라면, 순수 주술사 전력만으로만 3천에 가까운 일반 병사를 상대할 수 있다.
주술은 마법과 달리 시각적인 효과는 매우 떨어지지만, 살상 위력은 훨씬 뛰어나기 때문이다.
과거에 주술사들이 트란실리아 신성제국 황제의 대학살 타깃이 된 것도, 유사시에 가장 껄끄러운 암살 전력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렇게 주술단 전원의 점고와 격려, 그리고 개별적으로 준비해 온 선물을 통한 노고 치하를 마친 뒤.
또각. 또각. 저벅. 저벅.
나는 이자벨과 함께, 현재 주술단의 주둔 거점으로 쓰이고 있는 드레자 타워(Dreza Tower)의 주변 길을 따라 걸었다.
아직 동트기까지는 2시간 정도가 남은 새벽.
그래서 하늘은 깜깜하고 어두웠지만, 타워 주변에 촘촘히 설치된 마정석 조명등 덕분에 우리가 걷는 길은 한없이 밝았다.
“……폐하.”
“역시 이자벨, 너도 호칭을 참 어려워하는구나. 괜찮아. 자레드라고 불러도 좋아. 적어도 사석에서는 편하게 불러.”
“……그게.”
“왕의 명령이야. 편하게 불러.”
“자레드.”
“그래. 듣기 좋네.”
가신 중 누군가가 들었다면 경악했을 상황이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요즘 들어서 이런 표현이 더욱 간절했다.
모두 대왕이나 폐하 같은 존칭을 쓰고 있다 보니, 가끔은 내 이름도 기억이 안 날 정도였다.
자레드 대왕, 자레드 폐하 같은 표현은 쓰지 않으니까 말이다.
“요즘은 좀 어때?”
“드레자 주술단의 주술사들을 하나하나 관리하다 보니, 정말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야.”
“당연히 그렇겠지. 솔직히 많이 놀랐어. 이렇게 짧은 시간에 주술단을 왕국의 최정예 전력 중 하나로 탈바꿈시킬 줄이야.”
“나도…… 솔직히 놀랐어.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과연 내가 누군가를 보듬어 줄 능력이 될까, 하고 생각했었거든.”
이자벨의 말은 진지했고, 목소리는 차분했다.
평소에 유쾌한 착각으로 날 괴롭히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내던 이자벨이 아니었다.
사람이 단번에 수십 년을 성숙한 느낌이랄까?
예전의 이자벨이 통통 튀는 악동 같았다면, 지금의 이자벨은 차분한 숙녀 같았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주술단의 단장 자리가 그녀를 변하게 만든 듯했다.
“고생했다. 이 정도로 주술단의 위상을 끌어올려 준 네게 정말 고마울 따름이야.”
“고맙기는. 내가 원해서 한 건데. 착각하지 마. 딱히 널 위해서 하려던 건 아니었으니까.”
“후후, 딱 그 말투. 너답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자벨을 보고 있으니, 악령과 ‘뚱보’로 마주했던 첫날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도 방금 전에 벌어진 일처럼 생생한 기억. 그렇게 이자벨이 내 입술을 가져갔었지.
나도 모르게 과거의 추억에 잠시 잠기려던 그때.
“자레드.”
이자벨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뭔가 중요한 말을 하려는 것 같았기에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살짝 고였다. 마치 만감이 교차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고.
“널 좋아했지만……. 이제는 놓아줄까 해. 사실 나 혼자 좋아했고, 나 혼자 놓아주는 거지만.”
이자벨이 지금껏 내게 한 번도 말한 적 없던, 수많은 고민을 했었을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