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161
제 161화
57장. 케베눔 – 1화
성적인 의미의 유혹이나 뇌쇄적인 탈의가 아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나와 레나는 알고 있었다. 지금의 탈의가 무엇을 보여 주려고 하는지.
이윽고 레나의 맨살이 보였다.
군살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상체. 아무리 뜯어봐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근육만 가득했다.
게다가 훈련 과정에서 얼마나 많이 구르고 다쳤는지, 찢어지거나 터진 상처가 한둘이 아니었다.
제3자가 몸 상태만 놓고 봤다면, 전장을 휘젓고 다닌 참전 용사의 몸이라고 여겨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였다.
“레나…….”
“몸에 상처 하나를 새길 때마다 폐하를 떠올렸습니다. 언젠가 이 상처가 뜻있게, 폐하를 위해 쓰일 때가 있지 않을까 하고요.”
“그간 정말 고생이 많았구나.”
레나에게 다시 상의를 입히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힘껏 격려해 주었다.
노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상처는 가식을 노래하지 않는다.
내 눈에 보인 모든 것이 그녀의 노력이었고, 나를 향한 충성심이었기에 가슴이 뭉클했다.
“다음에는 꼭 제게 기회를 주세요. 왕국을 위해 제 목숨을 뜻있게 쓰고 싶습니다!”
“그래, 알았다. 반드시 그렇게 하마.”
더 이상 레나의 마음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녀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엘라의 밑에서 정말 지옥의 훈련을 해 왔으니, 이제는 실전에 임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레나에게 모이즐의 방패를 만들어 줄 수 있다면 정말 최고의 선물이 될 텐데.’
나는 모이즐을 떠올렸다.
야장 아세로도 네임드지만, 모이즐을 빼놓고 대장장이에 대해서 논할 수는 없다.
우스갯소리로 녹슨 철을 갖다 주어도, 지상 최고의 명검으로 만들어 낸다는 장인이 모이즐이다.
그는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과 신념이 강한 사람이라, 돈 같은 수단으로 절대 데려올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전부터 생각은 했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생각을 접었지. 모이즐의 마음을 돌리려면, 그가 원하는 대륙 최고의 공방이 필요하니까.’
모이즐의 영입 조건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글자로만 적어 놓고 본다면 말이다.
첫째는 모이즐의 밑에 도제(徒弟)로 들어가서 그의 마음을 얻을 때까지 열심히 일한다.
이건 내가 왕위에 올랐고, 현안이 바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일이니 당연히 기각.
둘째는 모이즐이 숙원하는 대륙 최고의 공방을 만들기 위해 투자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비용은 1백만 골드. 전생의 가치로 따진다면 1조 원이 된다.
일반 영주 시절에는 언감생심 떠올릴 수도 없는 돈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온갖 사업을 통해 폭발적으로 금화가 모이고 있음은 물론이고, 인구가 안정적으로 불어나다 보니 그에 걸맞게 세금도 늘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즉시 가용 가능한 자금으로 두고 있는 예산이 100만 골드는 족히 넘었다.
일종의 내탕금(內帑金) 개념이기에 내가 원하는 곳에 마음껏 지출할 수 있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이번에 확실하게 추진하자. 다른 국가에서 모이즐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할 수도 있으니 미리 준비하는 게 좋겠다.’
레나를 보며 결심을 굳혔다.
아세로가 무기 생산의 달인이라면, 모이즐은 아티팩트 제작과 개조의 달인이었다.
내가 초미세 분해 공정으로 깔짝깔짝 아티팩트를 분해하고 융합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충분한 재정적 지원과 재료 – 아티팩트 코어 – 만 준비되어 있으면, 모이즐은 아티팩트도 빠르게 생산할 수 있는 기술자였다.
현재 왕국의 상태는 최고다.
앞으로 1년간, 내정은 변함없이 최대치를 계속 유지할 것이다. 지금보다 더 모이즐을 영입하기 위한 적기는 없을 듯했다.
레나가 내게 다시 영감을 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신하나 동료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고의 폭이 확장될 때가 참 많다.
끊임없이 교류를 하고, 모두와 격의 없이 지내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내게 자극을 주니까.
“레나.”
“네?”
“레나가 꾸고 있는 가장 큰 꿈은 뭐야?”
꼭 듣고 싶었다.
나는 이 세계를 구할 주인공의 위치에서, 성마 대전을 멋지게 승리하는 미래를 꿈꾼다.
그 뒤의 꿈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이후의 미래를 생각하기에는 성마 대전부터 생각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 메인 스토리가 성마 대전을 승리하기까지의 긴 여정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뒤에 대한 생각이 부족한 것도 있다.
바로 그 이후의 내용이 ‘동방 대륙’ 업데이트였는데…….
하필 그 시점에 과로사로 생을 마감해 버렸으니 그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엘라 스승님을 보면서 꾸게 된 꿈이 있어요.”
“뭔데?”
“나중에 두고두고 자랑할 수 있을 검술 명가를 만드는 것입니다. 제 성이 영원히 대를 이어 내려갈 명가를 만들고 싶어요.”
“검술 명가라! 그것 한번 멋진 꿈이다.”
진심으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자신의 성씨를 영원히 물려받으며 역사를 만들어 가는 명가를 만든다는 것.
얼마나 짜릿한 일일까?
그 말을 듣고 나니, 문득 나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유칼레스라는 성을 이어 내려갈 마법 명가가 만들어지면 어떨까 하고.
“네, 폐하. 그 가문의 후손들이 저를 본받아, 대대로 폐하에게 충성할 수 있는…… 멋진 가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멋진 꿈이야. 그리고 내게 큰 감동을 주는구나.”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레나의 굳건한 충심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폐하는 제게 영웅이세요.”
레나가 나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며 인사를 올렸다.
영웅이라는 말, 한 마디.
그것이 참고 있던 내 마음의 빗장을 와르르 허물어 버렸다.
주르륵.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동안 수도 없이 내 스스로에게 했던 질문.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
그 질문에 레나가 현명한 답을 내려 주고 있었다.
잘하고 있다고.
정말 멋지게, 아주 잘 살아가고 있다고 말이다!
* * *
다음 날 저녁.
우리 일행은 몇 개의 구간을 안정적으로 돌파한 끝에, 보스 몬스터가 있는 최종 구역에 도착했다.
보스 몬스터의 이름은 케베눔.
3m에 달하는 신장에 근육질로 된 몸을 가지고 있고, 육탄 공격을 즐기는 녀석이었다.
케베눔의 외형을 동물에 비유한다면, 딱 이족 보행을 하는 두꺼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얇은 피막을 가진 두꺼비와 달리, 케베눔은 전신이 단단한 외피로 이중 보호되고 있었다.
케베눔은 우리와 1k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제법 멋들어지게 만들어 놓은 자신의 옥좌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보면, 우리가 보스 방 안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는 못한 듯했다.
“폐하, 케베눔도 예전에 가파지스를 공략했을 때처럼 정수리 공략으로 가나요? 그땐 정말 기상천외한 공략이었어요!”
“크큭, 매번 공짜는 없지.”
나는 내심 ‘공짜 승리’를 기대하는 듯한 헤이즈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가파지스 공략이 참 기발한 방법으로 이뤄지긴 했다.
아마 대륙 전체에서도 유일무이한 죽음일 것이다.
자다가 정수리를 뚫려서 즉사했으니까.
저승에서 가파지스가 날 보고 있다면, 무척 원망하고 있겠지.
“공격 패턴이나 특수 변화는 미리 말씀해 주셨지만 가장 핵심이 될 공략법은…….”
“아직은 말 안 했지. 사실 너무 단순한 방법이라 나도 설명이 좀 부족했네. 너만 새겨들으면 돼.”
“네? 다른 아이들은 괜찮고 저만요?”
“응. 케베눔 공략은 데스 힐, 바로 죽음의 치유술이야.”
데스 힐.
보통 편의상 그렇게 부르지만, 정식 명칭은 죽음의 치유술이다.
마법사에게는 없고, 치유사만이 가질 수 있는 기술이기도 하다.
보통 치유사가 데스 힐을 활용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적에게 데스 힐의 기운을 상처를 입히고자 하는 부위에 묻힌다.
그다음, 즉시 치유술을 시전하여 데스 힐의 위치에 덮는다.
그러면 치유의 기운만큼, 죽음의 기운으로 전환되어 적에게 대미지를 입힌다.
이것 덕분에 치유사는 전장에서 꼭 치유가 아니더라도, 서브 딜러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케베눔에게는 어떤 형태로 데스 힐을 활용하느냐?
‘데스 힐 누적 버그.’
바로 케베눔에게만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데스 힐의 누적 버그를 사용하는 방법이다.
케베눔은 체력을 10%씩 잃을 때마다 특수 패턴을 구사하는데, 그것이 바로 대회복이다.
잃어버린 모든 체력을 회복시킨 다음, 육체를 개변시켜 공격의 강도를 더욱 높인다.
물론 무한 패턴은 아니라서, 한번 발동하게 되면 다시 발동하는 일은 없었다.
즉, 90%에서 대회복 패턴으로 체력을 100% 상태로 회복. 그다음에는 80% 구간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100% 상태로 회복.
이런 패턴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래서 케베눔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안정적인 탱킹을 유지하면서, 꾸준히 딜링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그렇다면 데스 힐 버그는 어떻게 쓰냐 하면, 대회복을 계속 유도하여 치유력을 누적하는 것이다.
데스 힐을 묻힌 상태에서 대회복이 들어가면, 2할 정도의 회복력이 대미지로 누적된다.
물론 데스 힐을 발동하기 전까지는 누적된 대미지가 ‘사용 불가능한 마일리지’이지만, 발동하게 되면 일괄 적용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체력을 40% 미만의 구간까지 빼면서 회복력 대미지를 누적하면, 총 42%의 대미지가 쌓인다.
그때, 데스 힐을 전개하면?
케베눔의 체력의 42%에 달하는 대미지가 한 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폭사(爆死).
물론 완벽한 전술은 아니었다.
일단 첫째로 데스 힐이 한번 발동되면, 케베눔 같은 보스 몬스터는 바로 면역이 생긴다.
즉, 헤이즈가 실수로 데스 힐을 발동시키면 다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지옥 같은 회복 패턴을 전부 보면서 공략해야 하는데, 이러면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그래서 헤이즈는 초반에 데스 힐을 한 번 묻힌 뒤, 이후에는 타넥스에 탑승해서 마력탄 공격만 퍼붓게 하는 것이 베스트다.
둘째는 그렇기에 공략 인원 전체가 치유술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쓸 수 있는 1클래스 힐 마법도 무조건 사용 봉인이다. 데스 힐은 당연히 힐 마법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전투 시작과 동시에 데스 힐 넣고, 별도로 지시하기 전까지는 일체 치유술 쓰지 마. 타넥스를 줄 테니까, 녀석에게 탑승해서 마력탄 사용만 계속하면 돼.”
“정말 그게 다예요?”
“그게 널 여기에 데려온 이유야. 주제넘게 그 이상을 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나는 냉랭한 한마디로 확실하게 주의를 주었다.
헤이즈가 또 괜한 희생정신을 발휘한다고 나섰다가 버그를 활용할 계획이 어그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네가 전개할 죽음의 치유술이 케베눔의 체력 42%를 없애는 일등공신이 될 거야. 이 정도면 좋은 요약이 되겠지?”
“……네, 폐하. 알겠어요.”
원리를 이해했는지 헤이즈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섰다.
이제 남은 4인의 호흡이 매우 중요해졌다.
‘케베눔 링. 꼭 얻고 돌아가자.’
다시금 전의를 다졌다.
10성의 아티팩트, 케베눔 링.
확실한 성장을 위한 미래를 내 손에 움켜쥘 때가 왔다.
그리고.
-신도 내다 버린 죽음의 땅에 불청객이 나타났군!
저 멀리 보이는 옥좌에서.
로스트 아일랜드의 패자(霸者).
케베눔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