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205
제 205화
70장. 6개월 후 – 1화
[1421년 4월 1일]‘야금야금 앞당겨지고 있는 건가. 기분 나쁘네.’
그라시아의 두루마리 맨 뒤쪽에 적힌 날짜는 조금씩 앞으로 당겨지고 있었다.
마치 세계의 밸런스를 맞추려는 느낌이랄까?
내가 강해질수록, 재앙의 날도 함께 가까워지는 모습이었다.
원래 예정된 성마 대전이 1424년 3월 4일인 것을 생각하면 무려 3년이나 당겨진 셈.
이해는 충분히 갔다.
악신도 바보는 아니니까.
세상의 변화에 맞춰, 그들 나름대로의 자구책을 빠르게 마련하고 있는 것이겠지.
어쨌든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작년 10월만 해도 과연 내년 벚꽃이 언제 필까 했는데…….
휘이이이.
봄바람에 흩날리는 벚꽃 잎이 왕궁 앞까지 하늘하늘 날아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이뤄 놓은 것이 적지 않아 다행이야.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있다고 할까.’
나는 왕궁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깃발을 바라보았다.
봄바람에 힘껏 펄럭이는 게양대의 크리비아 깃발이 아니라, 바닥에 떨어져 짓밟힌 말루스 왕국의 깃발이었다.
그랬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이제는 ‘옛’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말루스 왕국의 왕궁이었다.
* * *
그날 저녁.
서부 해안가에서 마지막으로 부흥 운동을 벌이던 잔당까지 쓸어버린 라키스가 복귀했다.
전쟁의 완벽한 종식이었다.
그렇게 보누스, 말루스 왕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들은 우리와 벌어질 전쟁을 알면서도 현명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첫 번째 실책은 모든 공격이 육로로 이어질 것이라 예상하고, 해안 경계를 가벼이 했다는 점이다.
나는 그 점에 착안해서 육로로는 소수 병력만 보내고, 다수 병력을 해로로 우회해서 공격했다.
이를 위해서 예전부터 수송선 위주로 건조를 해 둔 것이 큰 도움이 됐다.
본대는 물론이거니와, 상륙 이후에도 해로를 통해 꾸준한 해상 보급이 가능했던 것이다.
루크, 게니츠 제독 덕분에 제해권(制海權)을 확실히 장악한 덕분이었다.
두 왕국의 해군 신임 제독은 역량이 턱없이 부족했고, 몇 차례의 교전에서 함선을 모두 잃고 패주하고 말았다.
바닷길을 확실히 얻은 우리에게 육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해안 도시 점령으로 시작한 전쟁은 우리 크리비아 군의 파죽지세로 속도가 붙었고.
우리는 소규모 전투에서 전략적으로 패했을지언정, 대규모 전투에서는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보누스 왕국의 대마법사 이즈만은 출전을 강행하려다가 지병으로 급사했고.
말루스 왕국의 대마법사 베루한은 나와의 일전에서 패배하고 죽었다.
심지어 베루한과의 전투는 수많은 병사들이 지켜보는 상공에서 펼쳐졌기에 파급 효과가 더 컸다.
나를 상대로는 8클래스 마법사도 일대일로는 절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전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왕국의 기둥을 박살 낸 나는 거침없이 공격을 이어 갔고.
3개월에 걸친 치열한 전쟁 끝에 두 왕국의 항복으로 승리를 이끌어 냈다.
전(前) 왕이 되어 버린 그들을 북부 한지로 내쫓아 버렸다.
악몽의 숲이 있는 근처로 말이다. 백성들을 함부로 저버린 그들에게 주는 굴욕적인 추방이었다.
“제국. 나의 제국이 건설됐어.”
나는 펄럭이는 크리비아의 깃발 테두리에 그려 넣어진 금테를 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제국임을 선포했고, 교황 아르모니아 17세의 승인도 받았다.
이제 완벽하고 떳떳한 신성 제국이 된 것이다.
지방의 한미한 소영지의 영주로 시작했던 나의 꿈은, 이제 황제의 자리에 닿아 있었다.
인간의 세계에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얼마 후.
라키스가 복귀했다.
“폐하, 신 라키스. 잔당을 모두 제거하였나이다. 이제 크리비아 제국의 영토 전역은 오롯이 폐하의 발밑에 있사옵니다.”
“고생했소, 라키스 경.”
“폐하, 그간 수합한 정보를 바탕으로 나스 대륙의 전반적인 판도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경의 심도 있는 브리핑을 기다리고 있었소. 가장 즐거운 시간이지. 하하하.”
나는 선생님의 수업을 기다리는 학생처럼, 의자에 앉아 라키스의 브리핑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라키스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미리 준비해 온 대륙 전도를 펼쳐 보였다.
“시작하겠습니다, 폐하.”
“말해 보시오.”
“나스 대륙은 크게 3분할이 가능합니다. 북부, 중부, 남부. 이렇게 볼 수 있겠지요.”
“그렇소. 보통 신데르스 왕국의 수도가 있는 위치를 중부와 북부의 경계로들 생각하지.”
“맞습니다, 폐하. 그 기준으로 보았을 때, 현재 본 크리비아 제국은 북부를 완벽하게 장악하였습니다. 물론 레드 고블린의 터전이나 북동쪽에 있는 아스파스 산맥은 제외하였습니다.”
“지도로 보니 확실히 실감이 나는군.”
과연 라키스의 말대로 우리 크리비아 제국을 상징하는 푸른색은 북부 전역에 칠해져 있었다.
타타르 아일랜드의 다크 엘프와 이바니바의 레드 고블린, 그리고 너무 험준하여 사람이 제대로 살 수조차 없는 아스파스 산맥만 색이 칠해져 있지 않을 뿐이었다.
“다음으로 보실 것은 중부입니다. 신데르스 왕국이 다음과 같이 본국에 둘러싸인 형태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우산 쓴 어린아이의 형상이군.”
“예, 그렇습니다. 일각에서 신데르스 왕국에 종속(從屬)을 권유하라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그 부분은 짐이 판단하기로 한 문제이니 넘어가시오. 충분히 고민을 할 것이니.”
“예, 폐하. 그럼 중부의 신데르스 왕국을 제외하면 이티마 제국과 렌투스 제국이 위치합니다.”
이티마, 렌투스.
예전에는 멀게만 느껴졌던 이름이 더 이상은 그렇지 않게 되었다.
이제 두 제국은 우리 제국과 국경이 맞닿은 이웃 국가가 됐다.
내가 말루스, 보누스 왕국을 복속시켰기 때문이다.
“계속 말하시오.”
“이티마 제국은 리스티스 왕국과 세잔틴 왕국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피의 숙청이었다고 하더군요. 일찌감치 항복을 했음에도 왕족을 구족까지 모두 잡아들여 참수했습니다.”
“애초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왕국과의 전쟁이라 쌓인 앙금이 많았을 거요.”
“렌투스 제국은 울롱 왕국과 쿠스카스 왕국을 장악했습니다. 갈라딘 공작과 렌-세븐의 실력은 역시 대단하더군요.”
“두 왕국은 렌투스 제국과 관계가 좋았기에 일찍 항복한 케이스지. 왕과 왕족들도 제법 후한 미래를 약속 받았다지?”
“예, 봉토를 하사받고 그곳에서 여생을 편히 지낼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전쟁광 황제와 공작답지 않은 결정이로군.”
“항복한 자에게 보이는 가식적인 자애로움이겠지요. 언제 누명을 씌워 숙청할지 모를 일입니다.”
“하긴. 놈들이 모략, 모함에 능하다는 것을 짐이 잊고 있었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정말 많은 질서 재편이 이뤄졌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열여섯 개에 달했던 왕국의 숫자는 이제 둘로 줄었다.
남은 왕국은 중북부의 신데르스 왕국과 남동부의 발렌시아 왕국뿐이었다.
특히 발렌시아 왕국은 ‘절대 중립’을 표방하는 나라로, 나도 알고 있는 바가 별로 없는 국가였다.
“남부에서 유일하게 변동이 없는 곳은 트란실리아 제국입니다.”
“최근에 기근이 장기화되면서 고생을 하고 있다지? 외부에 시선을 돌릴 여력이 없겠지.”
“예, 폐하. 그리고 아시다시피 마도국 아르테니아는 데스먼드 제국에 완전 복속되었습니다. 사전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행정적 공백과 혼란 없이, 바로 제국에 편입된 것 같더군요.”
“유유상종. 마도국끼리 뭉치는 것은 사실 예상된 일이었소.”
“예, 폐하. 그리고 가장 놀라운 것은…….”
“칸트라 제국이겠지?”
“예, 주변의 소왕국 여섯 개를 통합한 칸트라 제국입니다.”
“흠…….”
나의 침음성이 깊어졌다.
우리 크리비아 제국 다음으로 영토를 크게 불린 것이 칸트라 제국이었다.
물론 주변의 왕국 중에 세 곳은 왕국이라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규모이긴 했지만…….
어쨌든 다수의 왕국을 동시에 복속시킨 것은 사실이었다.
문제는 칸트라 제국에 대해서는 의 고인물 백과사전인 나도 아는 바가 적다는 것.
에서 언급이 제대로 되지 않은 국가였기 때문이다.
어떤 느낌이냐 하면 개발진들이 필드와 던전, 주요 도시들은 만들어 놨는데…… 스토리가 업데이트 되지 않은 느낌이랄까?
관련 콘텐츠 및 스토리의 업데이트는 ‘Coming Soon!’이라는 표시만 몇 개월이 걸려 있었고.
나는 그 업데이트를 기다리며 지내던 와중에 죽었다. 그래서 정보의 단절이 생겨 버렸다.
더 큰 문제는 칸트라 제국이 실제로 쇄국(鎖國)을 하고 있어 정보 단절이 매우 심하다는 것.
하다못해 그들이 신성을 추종하는 신성 제국인지, 악신을 추종하는 마도국인지에 대한 판단조차 전혀 할 수 없었다.
“이제 6제국, 2왕국의 시대입니다. 실상 두 왕국은 주변국을 위협할 만큼의 국력을 갖지는 못했으니, 이제 6파전이 된 셈입니다.”
라키스의 간결한 요약은 곧 내 생각과 같았다.
북부의 우리 크리비아 제국.
중부의 이티마, 렌투스 제국.
남부의 데스먼드, 칸트라, 트란실리아 제국.
이제 이 여섯 국가의 치열한 눈치싸움이 시작될 시점인 듯했다.
‘이제는 숨고르기를 해야 해.’
단시간에 모든 힘을 총동원해서 치른 전쟁이었기 때문에 국력의 소모가 컸다.
그것은 경쟁적으로 전쟁을 벌였던 다른 제국이라 해서 크게 다를 것은 없을 터.
나는 적어도 앞으로 반년은 내치에 집중하며, 다시 국력을 모을 생각이었다.
아울러 대대적인 교단 소탕 작업과 함께 자취를 꽁꽁 감추어 버린 움브라 교단의 간부들의 뒤도 쫓을 생각이었다.
지난 반년 동안, 마기 감지의 돌이 대량으로 보급되면서 여기저기서 교단의 단원들이 체포됐다.
그 파급 효과는 생각보다 커서, 잡힌 암흑 교단 단원의 수만 2만이 넘을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일반 감옥으로는 부족해서, 그들을 수용할 대형 수용소까지 만들어야 했을 정도니까.
바로 그때.
라키스가 화제를 돌렸다.
“폐하, 내일이면 교황님을 포함한 시국의 모든 구성원들이 넘어오는 날입니다.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오. 그 중요한 날을 내가 모를 리 있겠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조용히 진행되어 왔던 라디우스 시국의 이전이 내일 이루어진다.
이미 사나레 성지에는 라디우스 시국이 들어설 공간이 일찌감치 확보된 상태였다.
다만 교황이 머물 성전(聖殿)을 비롯한 기타 시설의 공사 때문에 일정이 다소 미뤄졌던 것일 뿐.
시국을 이전하는 건에 대해서, 트란실리아 제국에서는 이상하게도 예상과 달리 반발이 없었다고 한다.
전해 들은 말에 따르면, 교황의 통보를 듣고 트란실리아 제국의 황제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는 것이다.
외교적인 마찰 혹은 대립도 예상했었지만,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렸다.
너무 쉽게 풀린 나머지 괜한 의심이 들기는 했지만!
어쨌든 라디우스 시국을 꼭 우리 제국에 들일 생각이었다.
시국과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특전이 많고, 아울러 나도 기대할 수 있는 성장 포인트가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