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216
제 216화
73장. 안녕, 클로이 – 2화
어두운 새벽.
그레이 엘프가 마련해 준 숙소에서 우리 일행 모두는 잠을 청했지만, 사실 제대로 잔 사람은 없는 듯했다.
그럴 것이다.
당장에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적들이 마왕이 보낸 마족, 마수라는 것을 알게 됐으니까.
그러고도 태평하게 잘 수 있다면 그게 더 비정상이다.
다들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어지럽게 교차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의도적으로 말을 아꼈다.
일단 동료와 신하들이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것에 대한 정리를 스스로 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제국으로 복귀하는 대로 이 문제를 두고 자세하게 논의할 생각이었다.
더 이상 성마 대전은 숨길 수 없는 비밀이 되었으니까.
적어도 그레이 엘프와 나를 포함한, 이번 방문에 함께한 모두에게는 말이다.
* * *
클로이가 나를 찾아온 시간은 아직까지 해가 뜨려면 1시간 정도는 족히 남은 시간이었다.
그녀는 밤새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지만, 표정은 평소처럼 변화가 없었다.
그녀가 드러내어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슬픔을 초인적인 의지로 참아 내고 있는 것이라고.
너무 슬퍼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픔이 커서! 그래서 역설적으로 참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즉…… 실감나지 않는 슬픔이라는 얘기다. 너무 참담한 일을 겪었을 때 오게 되는 패닉 상태라고 할까.
어쨌든 그녀는 내게 자신의 굳건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 하는 듯했다.
하지만 가족을 잃은 슬픔이 오죽할까.
나도 전생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속이 먹먹해진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던 그 날의 기억은 아마 평생 동안 잊히지 않을 것이다.
“클로이.”
“우선 어제의 일. 대장로께서도 말씀하셨지만…… 다시금 그레이 엘프를 대표해서 감사드려요.”
“미안하다. 트란퀼루스 님을 지켜 주지 못했어.”
“자책하실 것 없어요. 이번 일은 암흑 교단이 벌인 일이고, 책임 여부를 따지면 전적으로 그레이 엘프의 잘못이에요. 오히려 그것 때문에 폐하께서도 위험에 처하실 뻔하셨죠.”
“하지만…….”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클로이는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는 모습이었다.
사실 내 잘못은 없다.
내가 느끼는 죄책감은 사실 도의적인 것에 가까웠다.
“클로이, 네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언제든 돕고 싶다. 그러니 부담 없이 얘기해 주길 바라.”
나는 최대한 덤덤하게 속마음을 표현했다.
클로이를 보내 줄 때가 됐다.
여건이 허락하는 한 오랫동안 그녀를 곁에 두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게 됐다.
그레이 엘프에게는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하고, 대장로 회의의 결정대로 그녀가 적임자였다.
수많은 파티 플레이를 하면서 쌓은 리더십도 있고, 무엇보다 암살자로서 출중한 무위(武威)를 보유하고 있기도 하기에.
‘포르미도 님과도 얘기를 해 봐야겠네.’
나는 이왕이면 그녀가 꾸준히, 지속적인 성장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전히 스승이 필요하다.
“더 이상 함께할 수 없게 되어 죄송해요. 너무 슬퍼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지만…… 오로지 저를 보며 믿고 따르는 엘프들을 위해서라도 힘을 내려고 해요.”
클로이가 두 주먹을 꽉 쥔다.
온 힘을 다해, 눈물을 참으려는 것이 떨리는 손끝에서 보인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눈물을 지금 펑펑 쏟아 내고 있었다. 그것이 내게는 보였다.
“클로이, 비록 이렇게 헤어지게 됐지만…… 함께했던 즐거운 기억들은 결코 잊지 않을게.”
“폐하.”
“응?”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저를 따뜻하게 꼭 안아 주실 수 있나요?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안아 주듯이.”
클로이의 말은 다소 의외였다.
그 말 속에서 나는 클로이가 그간 마음속에 담고 있던 이성이 다른 사람이 아닌 나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간 내 앞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감정을 표현한 적이 없던 클로이였기에 더욱 얼떨떨했다.
헤이즈나 이자벨처럼 드러내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스 대미궁 지하 25층에서 내가 기절했을 때도 아무 일도 없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클로이가 이별에 앞서, 내게 마지막 소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말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클로이를 꼭 안아 주었다.
그간 열정과 도전 정신으로 앞만 보고 달려온 클로이에게 건네는 진심 어린 격려였다.
그녀는 지난 3년간, 엄청난 성장을 경험했다.
앞으로 더욱 노력한다면, 대륙 최고의 어쌔신이 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아울러 인연도 확실한 만큼, 훗날 그레이 엘프의 도움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정말 좋아했어요, 폐하.”
“……네 마음을 전혀 모르고 있었네. 바보같이.”
“괜찮아요. 사랑이 무엇인지, 그 감정의 깊이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
클로이는 더욱 나를 꽉 안았다. 나 역시, 힘껏 그녀를 끌어안아 주었다.
이것이 이별을 뜻하는 마지막 포옹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작은 미련조차 남기고 싶지 않았다.
잠시 모든 것이 멈춘 듯, 우리의 시간은 새벽녘의 어딘가에 한동안 머물러 있었다.
“안녕, 클로이.”
“항상 기억할게요, 폐하를.”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아쉬운 이별을 고했다.
이제 서로 각자의 세계로 돌아가, 여왕과 황제로서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게 될 것이다.
* * *
복귀는 빠르게 이뤄졌다.
더 이상 그레이 엘프의 터전에 이방인인 우리가 오래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대담하게 그레이 엘프의 본진을 노린 암흑 교단의 행보를 볼 때, 앞으로 제국의 내부에도 신경 쓸 필요도 있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마지막 이별의 자리.
헤어짐의 끝자락에서 클로이는 헤이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함께했던 지난 시간에 대한 얘기가 대부분이었고,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클로이의 응원이었다.
“헤이즈.”
“응?”
“꼭 예쁜 사랑을 해야 해. 알았지?”
“클로이…….”
“미안해. 네가 늘 좋아했던 분을 나도 잠시나마 마음에 품었어.”
“아냐, 미안해할 것 없어. 폐하는 누구의 소유도 아니잖아? 그저 나는 폐하를 바라보는 해바라기일 뿐이야.”
“어쨌든…… 꼭 나중에 폐하의 곁에 헤이즈 네가 있길 바랄게.”
“…….”
“또 보자. 곧 다시 만나게 될 그 날을 기다릴게.”
“힘내, 클로이. 내가 꼭! 돌아가서도 편지 자주 쓸게. 알았지?”
“고마워.”
클로이와 헤이즈는 깊은 포옹을 나눴다. 둘은 서로 동갑내기 친구였기에 더 많은 공감대가 있었다.
비록 성격은 극과 극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달랐지만, 그래서 더 죽이 잘 맞았던 사이이기도 했다.
그렇게 클로이는 자레드 일행과 이별을 했다.
물론 언제든 필요하다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예전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 * *
크리비아 제국으로 돌아온 후.
나는 바로 이번 일과 관련된 대화를 나누기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은 이번에 사절단으로 참석한 동료와 신하들이었다.
물론 일반 병사나 상단의 구성원들은 빠졌다.
모든 이들에게 공개적으로 말하기에는 ‘성마 대전’이라는 키워드가 결코 가벼운 주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두 이번 일로 받았을 충격이 크다고 생각되오. 짐이 해 주어야 할 이야기가 많지만, 그에 앞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주저 말고 물어보시오.”
내가 운을 먼저 뗐지만,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침묵을 지켰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질문해야 할지 난감한 표정들이었다.
그럴 것이다.
그저 우리 크리비아 제국의 번창한 미래,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고 줄곧 달려왔던 그들이 아니던가?
수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했겠지만, 거기에 ‘마왕’이라는 단어가 들어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하겠소. 언젠가 할 이야기였지만, 이제는 때가 된 듯하구려.”
나는 조심스럽게.
그동안 나 홀로 알고 있었던 성마 대전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에 앞서, 가장 중요한 과거의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용마 대전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인간이 있는 중간(中間)계와 마계 사이의 오랜 악연에 대한 이야기였다.
* * *
정말 긴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집중해서 내 얘기를 들었다.
어쩌면 나보다 더 암흑 교단을 증오하는 사람들이기에 공감하는 바가 더 컸다.
헤이즈, 레나, 미아, 나오미, 엘라, 라키스, 이자벨, 아르케네스.
모두가 암흑 교단과 마계, 그리고 성마 대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를 갈았다.
“폐하, 혼자 얼마나…… 힘드셨어요! 제가 진즉에 폐하의 근심과 걱정을 알아봤어야 했는데…….”
헤이즈는 눈물을 흘렸다.
나 혼자 그 무거운 짐을 묵묵히 감당해 왔다고 생각하니, 울컥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나는 현생에 눈을 뜬 시점부터 늘 머릿속에는 ‘성마 대전’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
그냥…… 운명이려니 생각했다.
지방의 평범한 엑스트라 영주 자레드가 아닌, 이 세계의 주인공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시점부터!
성마 대전을 대비할 선봉장이 되는 것은 내게 주어진 숙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과 같은 참담한 일이 벌어졌음에도 아이러니하게 무덤덤한 구석이 있었다.
아마 트란퀼루스가 죽지 않았다면, 마음의 상처는 거의 없었을지도 모른다.
차분하게 라키스가 질문을 던졌다.
“폐하, 저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 주십시오.”
그는 가장 중요한 핵심을 짚었다.
계획은 내 머릿속에 있을 테니, 자신들이 해야 할 바를 알려 달라는 명확한 메시지였다.
그 생각은 다른 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는지, 모두가 무언의 긍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간단하게 답했다.
“마왕이 현신하는 그날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는 것이 최선이오.”
“준비라 하오시면?”
“암흑 교단을 완전히 궤멸시켜야 하고, 나스 대륙은 통일된 제국 혹은 한뜻으로 전쟁에 대비한 준비를 마쳐야 할 것이오.”
목표를 명확하게 했다.
암흑 교단은 없어져야 한다.
대륙이 통일되어도 그들의 지하 제단이 살아 있으면, 마왕의 현신은 재앙이 된다.
그들과의 공존은 불가능하다.
아울러 통일된 대제국의 건설이 최선이나, 차선이 없지는 않았다.
각 나라가 성마 대전에 대비한 준비를 함께할 수 있다면, 꼭 하나의 국가로 통일할 필요는 없었다.
“폐하, 마왕이 현신하는 날이 언제인지 알고 계신가요?”
헤이즈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겠지. 무슨 예언가도 아니고, 재앙의 날을 알고 있다고 하면 신기하게 보일 수밖에.
“대륙력 1421년 2월 14일.”
나는 그라시아의 두루마리를 펼친 뒤, 맨 뒤에 적혀 있는 날짜를 말해 주었다.
전에 보았을 때는 4월 1일이었는데, 그새 한 달하고 며칠이 더 당겨졌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두루마리 앞 장의 내용을 펼치자, 새로운 내용이 나타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