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224
제 224화
76장. 의외의 전쟁 – 2화
일순간 침묵이 감돌자, 이카젤라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말에 그들이 확실히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카젤라가 둘에게 물었다.
“그렉스 오크, 매드 트롤, 아스 고블린……. 이 단어들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몬스터.”
“그런 광범위한 범주 말고요.”
“……전부 신데르스 왕국과 우리 제국의 경계에 있소.”
“맞습니다, 갈라딘 공작님. 정확히 보셨군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조용히 찌그러져 살고 있는 이종족들이지요.”
이카젤라가 허공에 손을 쓱쓱 긋자, 제법 지도와 비슷한 그림이 순식간에 그려졌다.
그것은 신데르스 왕국의 남부 지대와 그 주변을 상세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이들은 인간을 두려워해서 자신들의 영역 밖으로는 나오지 않지요. 학습된 두려움입니다. 하지만 참 웃긴 것은 녀석들의 세력이 결코 작지 않다는 점입니다.”
루틀러 4세와 갈라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맞는 말이었다.
다만 오랜 인간과의 전투, 견제로 인해 피로감을 느낀 그들이 스스로 문을 걸어 잠갔을 뿐이었다.
“아스 고블린은 무한에 가까운 번식력을 가지고 있고, 매드 트롤은 극한의 상황도 버텨 내는 외피를 가졌습니다. 그렉스 오크는 천생 피를 좋아하는 군인입니다.”
“그들의 협력을 받을 수 있다?”
“아뇨. 협력이 아닙니다. 전방위적인 복종이죠.”
자신 있게 말하는 이카젤라의 손 위에서 검붉은 구체가 피어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것은 흑마법사의 사악하고 악독한 흑마법의 결정체였다.
“복종이라고……?”
“예. 복종 말입니다. 우리 데스먼드 제국의 명령이라면, 지옥 불에도 뛰어들 완벽한 복종이죠.”
“그런 말도 안 되는…….”
“마도(魔道)란 그런 것입니다. 하하하하.”
이카젤라가 허리를 젖혀 가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랬다.
이카젤라는 지금 렌투스 제국에게 ‘무임승차’를 하듯 신데르스 왕국의 남부 국경을 넘을 방법을 알려 주고 있었다.
* * *
한편 나는 사비오의 요청에 따라, 은밀히 마련된 회담의 장에서 귀한 손님을 만나고 있었다.
바로 다크 엘프 로드, 무르베다였다.
오늘의 만남은 사전 조율 없이, 갑작스러우면서도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중간에 사비오가 없었다면, 결코 만들어지지 않았을 자리였다.
덕분에 회담의 장은 황궁이나 특수한 별관 따위가 아닌 사비오의 연구소에서 이뤄졌다.
나야 격식에 딱히 구애받지 않으니 상관없었지만, 걱정되는 것은 무르베다였다.
하지만 그를 만나는 순간, 나는 내 생각이 완벽하게 틀렸음을 인정해야 했다.
무르베다는 내가 도착하기 전까지 연구실에서 사비오의 실험을 돕고 있었는지…….
때가 잔뜩 묻은 실험복을 입고 나를 만나러 나왔다. 얼굴에 묻은 짙은 그을음은 훈장처럼 붙어 있는 덤이었다.
“로드,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용서하십시오, 대왕. 대왕을 빨리 만나 보고 싶은 마음에 모든 외교적 관례를 무시하고, 결례를 범하였습니다.”
“전혀요. 개의치 마십시오. 오히려 진심이 담겨 있는 오늘과 같은 만남이 저는 더 좋습니다.”
“우선 대왕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려야겠군요. 얼마 전에 그레이 엘프에게 벌어진 끔찍한 일을 전해 들었습니다.”
“……유감입니다.”
“동족으로서 그레이 엘프에게 큰 도움을 주신 대왕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모든 엘프들이 대왕의 희생정신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무르베다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내가 그레이 엘프를 도와, 마족 케즈만을 무찌르는 데 앞장선 것은 엘프 사이에서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이로 인해 나에 대한 여론이 정말 많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인간을 믿어도 되는가?’ 하는 여론에서 ‘인간은 몰라도 최소한 자레드는 믿을 만하다!’라는 여론이 대세가 된 것이다.
이 생각은 무르베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울러 크리비아 제국과의 정상 무역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그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 보였고.
우리 크리비아 제국에서 수입하는 다양한 곡물과 최신 문물은 다크 엘프의 삶을 빠르게 바꾸어 놓았다.
대표적인 것은 역시 영상 장치.
이는 솜씨 좋기로 소문난 다크 엘프들도 개발하지 못한 것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과찬이십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 걸요.”
“우리 다크 엘프는 오래전부터 인간계의 일에 절대 개입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만.”
무르베다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이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기도 했다.
지난 수백 년간, 인간들의 세계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들이 수도 없이 많이 일어났다.
그때마다 앞서 나가는 마도 공학의 문물을 보유한 다크 엘프에게 많은 나라가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역대의 모든 로드는 한 번도 그 요청을 받아들인 적이 없다.
‘인간의 일은 인간의 힘으로 해결한다.’라는 대전제 아래에서 쇄국 정책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그레이 엘프가 암흑 교단이 설계한 거대한 마수에 당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정확히는 다크 엘프 전체의 여론이 바뀌었다.
수수방관만 하다가는 동족인 그레이 엘프처럼 크게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그 결과.
수많은 내부 회의를 거쳐 선택한 파트너가 바로 우리, 크리비아 제국이었다.
그레이 엘프의 여왕 클로이와 가깝고 막역한 사이이며, 그들의 일이라면 발 벗고 돕는 우리를 신뢰하기로 한 것이다.
“이어 말씀하시지요, 로드.”
“이제는 생각을 바꿀까 합니다. 크리비아 제국을 도와 암흑 교단과의 일전에 앞장서겠습니다.”
“최근 들은 소식 중에서 진심으로 가장 든든하고, 참으로 큰 힘이 되는 말씀이십니다!”
“필요하다면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정령술의 가르침도 공유하겠습니다. 신성한 마음을 품지 않은 자는 학습조차 할 수 없겠습니다만…….”
“정령술을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어둠의 자식을 상대함에 있어, 신성력과 정령의 힘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지요.”
무르베다가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양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자 빛의 정령이 그의 몸을 빠르게 휘감으며, 현란한 빛깔을 아름답게 만들어 냈다.
“로드의 협력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본국도 암흑 교단에 관한 모든 정보를 공유하겠습니다. 상호 정보 교류를 긴밀히 진행할 수 있도록 전담 부서를 마련하도록 하지요.”
“옳으신 선택이십니다.”
“하나 더.”
“음?”
“현재 사비오가 개발 중인 타트라 넥스의 대량생산에 전방위적인 예산 지원을 앞당기겠습니다. 사실 내년으로 예정된 예산 집행이지만, 사심을 가득 담은 내탕금(內帑金)을 활용하도록 하지요.”
그간 아슈르와 던전을 공략하면서 얻은 전리품이 상당했다.
그중에서 나나 동료, 신하들에게 나눠 주지 않는 번외의 아티팩트를 모두 처분하면!
족히 5만 골드 정도의 재원은 마련할 수 있다. 전생의 가치로 따지면 500억 원쯤 되는 돈.
그 돈으로 대량생산 체제를 전부 갖추지는 못하더라도, 일차적으로 기반을 마련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다.
그때, 옆에 있던 사비오가 자연스럽게 의견을 보탰다.
“그간 대왕이 다방면으로 타넥스를 활용하면서, 정말 많은 데이터가 쌓였습니다. 아마 대왕이 아니었더라면! 이 정도의 전투 및 기동 데이터를 확보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네가 내게 많은 이야기를 전해 줬지, 사비오.”
“사실 지금 타넥스의 최신 개발 버전에 대왕의 기여도가 얼마냐고 묻는다면, 99%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는 제 모자란 지식 쪼가리일 뿐이지요.”
“사비오, 그건 좀…….”
“진심입니다, 폐하. 폐하만큼 타넥스의 사용법을 확실하게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단언컨대 말입니다.”
진심 어린 사비오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공적인 자리라서 녀석의 존대까지 덧붙여지니, 더욱 존경과 존중을 받는 느낌이었다.
“다시 공언하지요. 타넥스의 대량생산화를 위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성마 대전에는 신성력 무장도 중요하지만, 타넥스와 같은 마도 공학 병기도 매우 중요하다.
반드시 필요했다.
“수많은 전투 지식, 특히 마족에 대한 분석 자료도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아울러 기밀에 부친 그들의 약점까지…….”
사비오가 눈빛을 밝혔다.
그는 최근 어보미네이션의 장액에 대한 성분을 연구 중이었다.
이 장액을 어보미네이션에게서 직접 얻는 현지 조달이 아니라, 조합식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면?
향후 성마 대전에서 모든 마수들의 확실한 ‘약점’을 잡고 전쟁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미래를 대비한 안배도 꼼꼼하게, 놓치지 않고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비공식 동맹을 은밀히 제안합니다, 대왕.”
드디어.
다크 엘프 로드, 무르베다는 가장 중요한 안건을 꺼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이루어진, 무겁고도 진지한 제안이었다.
* * *
일주일 후.
아르케네스 상단의 사무실.
자레드의 ‘강요’에 따라 최소 여섯 시간의 강제 수면을 마치고 부스스 눈을 뜬 아르케네스는 서류를 읽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상단 설립 초창기부터 그녀를 수행해 온 보좌관 알렉스가 있었다.
올해 스물여섯이 된 아르케네스보다 한 살 어린 남성이었다.
“단주님, 말씀하신 서류입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말해 봐. 괜찮아.”
“정보의 중요성은 백번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기는 합니다. 하지만 최하급 정보로 취급되는 이종족들의 동향까지 신경 쓰실 필요가 있을까요?”
알렉스는 최근 들어 외부의 정보라면, 무조건 확인하고 훑어보는 아르케네스가 이상했다.
상단 운영에 최근 트렌드나 라이벌 상단의 동향이 중요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남부에 위치한 매드 트롤이나 그렉스 오크의 움직임 같은 정보는 아니었다.
그것은 주변 경계지에 사는 주민이나 주둔군이 아니면 관심을 가질 필요조차 없는 소식이었다.
“넌 신경 쓸 것 없어. 필요한 정보만 계속 전달해 주면 돼.”
“알겠습니다, 단주님. 그리고 한 가지 더…….”
“뭔데?”
“자잘한 업무까지 모두 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제 선에서 충분히 처리할 수 있습니다. 항상 단주님의 휴식이 우선입니다.”
“걱정은 고마워. 고맙지만…….”
“…….”
“적당히 놀고먹을 생각이면 상단 일을 시작도 안 했을 거야. 내 몸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냐. 상단 모두의 것이고, 제국과 폐하의 것이거든!”
“단주님, 정말 폐하를 향한 충성심이 한결같으시군요.”
“응, 나라는 존재를 빛나게 만들어 주신 분이시니까. 폐하 없는 나는 존재할 수 없어!”
힘주어 말하는 아르케네스의 입가에는 미소가 잔뜩 걸려 있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힘이 솟아나게 만드는 존재.
그것이 바로 크리비아 제국의 황제, 자레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