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254
제 254화
81장. 창궐(猖獗) – 6화
“그리하시지요. 모든 암흑 기를 나탈리 님에게 몰아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리하시오. 이미 경은 9클래스의 대마법사. 굳이 더 큰 힘이 필요하진 않겠지.”
덤덤하게 말하는 디그론 4세의 모습이 이카젤라는 더욱 아니꼬웠다.
혹시나 말발이 안 먹힐까 싶어 다수의 친위대를 데려온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주마마.”
“네, 이카젤라 경.”
“중앙에 보이는 검은 흑요석에 손을 가져다 대시면 됩니다. 그간 부단히 어둠의 힘을 수련해 오셨으니, 부작용은 없을 것입니다.”
이카젤라가 웃으며 말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작용이 없지는 않다. 그저 신체의 상처 따위만 입지 않을 뿐이다.
나탈리는 흑요석에 손을 대는 순간, 모든 기억이 끊길 것이다. 다시 되돌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디그론 4세도, 나탈리도, 이룡도 전혀 그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카젤라가 알려 준 적이 없었으니까. 어차피 자신의 힘이 될 것이었기에 굳이 알려 줄 필요도 못 느꼈던 것이다.
다음 순간.
성큼성큼 흑요석 앞으로 다가간 나탈리가 힘껏 그것을 꽉 움켜쥐었다. 거침없는 움직임이었다.
“오오오……!”
디그론 4세의 탄성을 시작으로 주변인들의 탄성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흑요석을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암흑의 기운이 빠르게 나탈리에게 흡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카젤라는 씁쓸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충전되어 있던 암흑 기가 아쉬워서가 아니라, 이제는 결단을 내릴 때가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작업, 얼마나 걸리오?”
“10분은 걸릴 겁니다. 공주마마의 집중이 깨지면 안 되니 절대 건드리지 마십시오.”
이카젤라의 말에 디그론 4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약속했던 말을 뒤집은 셈이었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데스먼드 제국은 엄연히 자신의 국가였고, 나탈리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간 부단히 수련해 온 힘과 암흑 기가 결합한다면…….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서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크리비아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힘의 균형을 맞출 수 있을뿐더러, 이카젤라를 견제할 수도 있겠다는 계산이 섰다.
분명 이카젤라는 제국의 주요 전력이지만, 그의 힘을 견제할 세력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 견제자의 역할을 나탈리가 해 준다면, 자연스럽게 마탑의 힘도 억누를 수 있을 터였다.
좀 더 균형 잡힌 제국의 운영이 가능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결국 이카젤라도 나의 충직한 신하가 아닌가.’
디그론 4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 번도 그의 속마음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수십 년을 사소한 불평불만이나 갈등 없이, 일방적 충성만을 바쳐 왔던 이카젤라였기 때문이다.
“…….”
한편 나탈리는 암흑 기를 받아들이는 내내, 가벼운 탄성은커녕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주변의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흑요석을 붙잡은 나탈리는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흑요석에 잠재되어 있던 악마가 빠르게 자신의 머릿속을 잠식하고, 정신과 육체의 통제권을 ‘빼앗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내색할 방법도, 그럴 수 있는 수단도 없었다.
눈을 깜빡이는 것부터 숨을 쉬는 모든 것까지 이미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분명 이 몸은 자신의 것이 맞는데, 무엇 하나 자기 마음대로 손을 쓸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설마 이카젤라 경이……?’
나탈리의 뒤늦은 의심의 눈초리가 이카젤라에게로 향하는 듯했지만, 거기서 모든 기억이 끊겼다.
완벽한 잠식.
나탈리는 아무도 모르게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순수한 악으로만 가득 차오른, 내면의 악마였다.
한편, 디그론 4세와 이카젤라의 얘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나탈리의 내면과 달리, 외부의 모습은 평온하기 그지없었기에 아무도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번 두 번째 계획이 다소 기대에 못 미친 부분은 있으나, 분명 크리비아 제국은 혼란에 빠졌을 것이오.”
“사회적인 혼란은 확실하게 유발되었을 것입니다.”
“선수필승이라 했소. 결전을 기다리기보다 오히려 공격적으로 놈들을 공격하는 것이 어떻소?”
“예……?”
이카젤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디그론 4세는 그간 선제공격을 줄곧 피해 왔던 인물이었다.
크리비아 제국을 공격하려면 대륙 남부에서부터 차례대로 쭉 밀고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크리비아 제국은 요충지에 철통같은 경계망과 겹겹의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다.
때문에 전면전을 치르려면, 초반에 요새 점령전에서 상당한 희생을 치를 각오가 필요했다.
물론 이카젤라는 그 피해를 무릅쓰고라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경론자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땅덩어리가 훨씬 넓은 크리비아 제국이 유리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그론 4세의 반대로 매번 그의 의견이 무시됐었는데, 갑자기 동조하는 의견이 나온 것이다.
“문제 있소?”
“폐하, 전에 폐하께서 직접 신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남부부터 순차적인 전투를 치르는 것은 무리라고.”
“그랬었지.”
“달리 심경의 변화를 일으킬 만한 계기가 있으셨던 겁니까?”
“사실 기습적으로 크리비아 제국의 황도를 공격할 수단이 내게 있소. 그간 비밀로 하였소만…….”
순간, 이카젤라는 싸늘한 느낌이 들었다. 왠지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듣게 될 것 같은 느낌.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느낌이랄까?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조심스레 귀를 기울였다.
“사실 우리 황가에서는 꽤 오랫동안 이것을 보관해 오고 있었지. 유서가 깊은 것이오.”
그때, 디그론 4세가 품속에서 검은 돌 하나를 꺼냈다. 바로 암흑 원석이었다!
일전에 아슈르의 아버지인 루갈이 훔쳐 가는 바람에, 암흑 제단의 출력을 2할이나 사라지게 한 그 동력원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암흑 제단에는 총 5개의 암흑 원석이 각각 20%의 출력을 담당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꽤 오랜 시간 동안 제단은 20%의 누수라는 페널티를 안은 채,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수단만 있다면 영혼과 목숨을 팔아서라도 꼭 확보하고 싶었던 암흑 원석!
그것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도 아닌, 가장 가까운 사람인 황제가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진즉에 암흑 원석을 도난당했을 때, 이것을 주었다면!
진즉에 마왕 레크나트가 현신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데스먼드 제국과 암흑 교단도 지금처럼 핀치에 몰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철저하게 자신에게 비밀로 해 왔던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황제의 독단적인 판단 하나 때문에!
한참 먼 길을 빙 둘러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 덕분에 자레드는 지금과 같은 괴물이 됐다.
멍청한, 이 빌어먹을, 엿 같은 황제의 대응 때문에 말이다.
다음 순간.
“빌어먹을 새끼…….”
이카젤라는 그간 인내하고 참아 온 이성이 와르르 무너지고, 사악하고 추악한 본성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이용가치는커녕, 아군의 발목을 잡아 버린 황제.
이카젤라는 더 이상 그를 살려 두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황제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쓰레기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빠직! 빠지지직! 빠지직!
제단 전역에서 일진광풍과 함께, 거센 번개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대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 * *
한편 그 시각.
투타타타! 투타타!
막바지로 접어든 언데드 군단 소탕 작전의 끝자락에서 타넥스 기체가 열심히 마력탄을 쏘아 대고 있었다.
기체의 수는 어느덧 20기에 달했다.
모든 기체가 전에 운용하던 타넥스와 성능이 같았는데, 확실히 전력상의 큰 상승 요인이 됐다.
사비오의 말에 따르면.
공정과 재료 공급에 차질만 빚지 않으면, 한 달에 최소 15기의 생산이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즉, 일 년이면 무려 180기의 생산이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그간 부단히 연구해 온 사비오의 노력이 드디어 빛을 보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렇게 동족을 짓밟고 죽여서 얻은 마왕의 신임과 애정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두 눈을 부릅뜨고 죽은 병사 하나의 눈을 감겨 주었다.
현장에 다소 늦게 도착한 바람에 앞서 언데드 군단과 용맹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젊은 병사였다.
바로 그때.
다그닥. 다그닥.
멀지 않은 곳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데스 나이트 하나가 말을 탄 채 맹렬히 내게 돌진해 왔다.
과거 용마 대전이 남긴 잔재들.
이제는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는 마왕과 마족의 흔적들이었다.
빠직. 빠지지직.
나는 트랜센던스 라이트닝 스트라이크를 캐스팅한 상태로 제자리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러자 데스 나이트가 말을 채찍질하며, 내게 검 끝을 겨눈 채로 달려들었다.
난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데스 나이트 따위는 크게 손을 쓰지 않아도 확실히 제거할 방법을 알고 있었으니까.
후웅! 후웅!
데스 나이트의 검이 거친 풍압을 일으키며 내 머리를 흩날리게 했지만, 난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리고 3m 거리까지 좁혀지는 바로 그 순간!
파아아앗!
힘껏 손을 뻗으며, 데스 나이트의 머리를 노린 일격을 가했다.
그사이에 잔뜩 응축한 마력까지 한 번에 방출하는 충격파도 곁들였다.
“……!”
다음 순간.
퍼서석!
데스 나이트의 목 위쪽이 흔적도 없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목이 날아간 데스 나이트의 검은 허망하게 허공을 갈랐고, 이내 말에서 고꾸라지며 절명했다.
[십만인 베기] [99812 / 100000]“188마리 남은 건가?”
카운팅이 많이 올랐다.
정말 제국 전역을 누비고 다니며, 닥치는 대로 구울들을 쓸어 담은 효과가 있는 듯했다.
광견과 같은 ‘짐승’도 십만인 베기 집계에 포함이 된 덕도 컸다.
“이것도 버그겠지? 버그도 때로는 콘텐츠가 될 수 있다고 말하던 개발진 생각이 나네.”
나는 피식 웃었다.
확실한 것은 지금껏 무조건 사람만을 대상으로 한정했던 카운트가 이제는 구울과 짐승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었다.
명백한 버그다.
다만 전생의 내가 이 버그를 인지하지 못했던 것은, 이런 식으로 대륙 전역에서 언데드가 발호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업데이트 예정에 ‘창궐’이라는 스토리가 있기는 했지만,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었다.
이유는 뭐…… 알다시피 과로사로 패치 전에 세상을 떠나서다.
“후.”
짧게 내쉰 가벼운 한숨. 하지만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졌다.
백성을 아우르고 보살피는 지도자로서 이번처럼 수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잃어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간 숱한 전투를 치러 오긴 했지만, 생각보다 그렇게 사상자가 많지는 않았다.
내가 앞장서서 전장 전반을 휩쓸며, 적의 사기를 미리 찍어 눌러 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대비할 새도 없이 벌어진 사건이었고, 내가 손을 쓰기 전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카젤라……. 네놈은 영원히 고통 받으며 죽도록 만들겠다. 반드시.”
나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결연한 다짐이자, 결의였다.
더 이상 악연이 깊어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더 깊어지기 전에 단지…… 빨리 끊어 내고 싶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