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255
제 255화
81장. 창궐(猖獗) – 7화
“후우, 하아. 후우, 하아.”
분노는 이성을 마비시켰고,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로 불리는 남자를 폭주하게 만들었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나탈리의 옆을 지키고 있던 이룡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흩어져 버렸고, 황제는 백치가 됐다.
이카젤라는 디그론 4세의 머리를 움켜쥔 채로 암흑 기를 거침없이 밀어 넣었다.
이는 기억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황제의 머릿속에 든 모든 것을 날려 버리겠다는 의지였다.
“케헤…….”
그렇게 황제는 바보가 됐다.
손쓸 틈도 없이 당해 버린 탓에 본인 스스로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기사들과 마법사 일부가 죽었다.
이카젤라는 살아남은 자들이 끝까지 황제를 위해 저항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채앵! 채앵!
포기는 생각보다 빨랐다.
이곳이 마탑의 본거지라고도 할 수 있는 제단인 데다가, 이미 몰려든 단원의 수가 제법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권력은 황제에게 있을지언정 제국의 진정한 강자는 이카젤라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오늘의 일을 밖으로 발설하는 자가 있다면, 이유를 막론하고 지옥의 파멸을 맛보게 해 주겠다.”
이카젤라가 뜨거운 숨을 토해 내며, 생존자의 두려움을 자극했다.
“함구하겠습니다.”
“이카젤라 님의 명을 받듭니다.”
이것이 친위대의 충성인가 싶을 정도로 그들은 빠르게 자신들의 주군을 바꿨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자신을 동경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 정도로 친위대의 ‘태세 전환’은 빨랐고, 이카젤라는 손쉽게 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다.
“모두 물러가라. 나탈리 공주는 내가 처리하겠다.”
“예엣.”
이카젤라의 손짓에 모두가 제단에서 빠르게, 그리고 멀리 흩어졌다.
다음 순간.
자신과 눈이 마주친 부하 한 명에게 이카젤라가 은근한 눈빛과 신호를 함께 보냈다.
살인멸구.
아무리 생각해도 친위대를 살려 두어 좋을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분명 중요한 전력이기는 하지만, 수가 썩 많지는 않았다. 이들이 없더라도 충분히 대체할 자원은 많았다.
“가장 빠른 길로 복귀를 안내하겠습니다.”
부하가 친위대를 향해 접근하며, 출구가 아닌 사지(死地)로 그들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아마 적당한 길목으로 유도한 다음, 순식간에 독기에 중독시켜 그들의 목숨을 빼앗을 것이다.
이런 작업에는 이골이 난 전문가들이니, 걱정할 것은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제국의 그늘도 딱히 큰 쓸모는 없게 되었군. 가장 좋은 것은 데스먼드 제국과 크리비아 제국을 함께 동귀어진 하도록 만드는 것인데.”
이카젤라가 가늘게 눈을 떴다.
일단 암흑 원석은 빼앗았다.
즉, 암흑 제단이 다시 예전처럼 100%의 출력으로 가동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암흑 제단은 마왕의 현신을 돕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규모 텔레포트를 가능케 했다.
수십 명 따위가 이동하는 그런 텔레포트가 아니었다.
정해진 반경에 인원을 빼곡하게 채워 넣으면, 많게는 10만 명까지 이동이 가능한 힘을 갖고 있었다.
이 역시 선대의 마왕이 남긴 유산이자, 과거의 용마 대전 이후로 이어져 내려온 선물이었다.
“제국의 최정예 전력, 여기에 우리 교단의 하위 단원들을 합치면…… 10만은 거뜬하지.”
계산은 쉬웠다.
카코 교단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정예 전력을 제외한 모든 인원을 보내면 됐다.
어차피 이카젤라는 데스먼드 제국의 미래나 안위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마왕 레크나트의 현신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미래가 되었다.
지금 당장 자신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예정된 시일에 레크나트의 강림은 진행될 터였다.
데스먼드 제국의 영토는 사라져도 그만이었다.
그러니 황제를 백치로 만들고, 그의 원석을 빼앗은 것이다.
“인신 공양을 가속화하면서 제국군으로 하여금 시간을 더욱 지연하게 하면…….”
모든 계획이 완벽해진다.
어림잡아 한 달.
한 달만 암흑 제단이 타격 받지 않도록 시간을 벌어 준다면, 대업(大業)을 완성할 수 있을 듯했다.
그렇게 되면, 마왕 레크나트의 현신은 비약적으로 빨라지게 된다.
아울러 현세에 강림할 마족과 마수도 오롯이 자신의 힘을 가진 채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떠한 불이익도 없이.
“나탈리 정도면 좋은 전략 자원이지. 이젠 피를 부르는 죽음의 사냥꾼이 될 테니까. 클클.”
이카젤라는 변화가 끝나 가는 나탈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음험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나탈리의 모습은 방금 전과 달리 거칠어졌고 사악한 ‘마녀’처럼 변해 있었다.
초점이 사라진 두 눈.
그것은 그녀가 더 이상 인간적인 이성과 감성에 구애받지 않는 살인마가 되었음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었다.
“디그론, 네 눈으로 똑똑히 봐라. 네놈의 딸과 네게 충성을 바치던 제국의 병사들이 자레드를 죽이러 떠날 것이다. 너도 원하던 바가 아니냐? 네 소원대로 해 주마.”
“크흐흐흐…….”
정신 나간 디그론 4세는 그저 고개만 열심히 끄덕일 뿐이었다.
꼭두각시가 됐으니, 무엇을 지시하더라도 시키는 대로만 할 것이다. 죽으라면 죽겠지.
“30일.”
이카젤라가 카운트를 정했다.
30일이 지나면, 모든 제단의 의식은 완벽하게 끝난다.
그렇게 되면 인간계는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게 될 것이다.
마왕 레크나트의 현신 이후.
그를 추종하는 일등 국민과 그렇지 않은 열등 국민으로 나뉠 삶도 생겨날 테니까.
“여명이 밝아오는구나.”
이카젤라의 흡족한 시선이 이글거리는 제단의 불꽃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 * *
사흘 후.
나는 칸트라 제국에서 온 사절단을 만났다.
비공식적으로 사절단 일행에 합류한 황제가 동행한 자리였다.
조심성 높기로 소문난 황제답게 만전을 기하는 모습이었다.
칸트라 제국의 황제, 알카디우스 11세.
그를 만난 것은 크리비아 제국의 남동쪽에 위치한 오래된 별장에서였다.
나는 국빈 대접을 하며 알카디우스를 성대하게 맞이하고 싶었지만, 그가 오히려 반대했다.
게다가 만날 장소도 알카디우스가 먼저 장소를 물색한 다음, 그곳으로 해 줄 것을 요청했다.
몰락한 귀족의 별장이라 건물은 온통 거미줄이 가득했지만, 알카디우스는 개의치 않았다.
철통같은 경계 속에 삐걱거리는 별장의 정문 앞에서 만난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처음 이렇게 인사를 드리게 되는군요. 대왕.”
“반갑습니다. 저와 동갑이시라고 들었습니다만…….”
“하하, 그런가요?”
“실례가 안 된다면 서로 격식을 차리지 않고 편한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알카디우스라고 불러 주십시오. 황제라고 해서 이름을 뭐, 신성하게 취급할 필요는 없으니 말입니다.”
“자레드입니다. 저 역시 격의 없는 대화는 늘 환영이지요. 자레드라고 불러 주십시오.”
통성명을 나눴다.
과도한 높임이나 격식이 불편한 것은 전생에 현대인으로 살았던 내게는 당연한 것이었지만, 알카디우스는 의외였다.
좀처럼 보기 힘든 성향의 황제라서 어색하기는 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참 반가웠다.
따각따각. 따각.
이윽고 우리는 별장 외곽의 정원을 따라 만들어진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조명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우리는 오로지 대화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이번 언데드 사태는 유감입니다. 소식을 전해 듣고 지원군 파병을 준비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후더군요.”
“서신은 잘 받았습니다. 귀국이 보여 주신 마음만으로도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연일 황궁 앞에서는 데스먼드 제국의 악행을 성토하는 규탄 시위가 한창이지요. 황군(皇軍)에 자원하겠다는 젊은이들도 상당수 됩니다.”
“과연 뿌리 깊은 반감이 느껴지네요.”
“데스먼드 제국과 암흑 교단에 대한 반감은 크리비아 제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겁니다.”
힘주어 말하는 알카디우스의 목소리엔 강한 신념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단지 충동적으로 내뱉는 그런 말이 아니라 오래된, 묵은 원한이 짙게 밴 일침이었다.
“우리 제국은 데스먼드 제국과 일전을 치를 준비가 끝났습니다. 복구가 끝나는 대로 기치창검의 끝을 그들에게 향할 겁니다.”
나 역시 알카디우스처럼 힘주어 자신 있게 말했다.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제국의 여론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누가 봐도 데스먼드 제국의 소행이 틀림없는 대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배후가 너무 뻔해서.
지나가는 어린 아기도 누가 ‘악당’인지 손가락으로 짚을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돌 정도니까.
물론 지금의 분위기가 호재라거나 잘된 일이라고 생각진 않았다.
애꿎은 인명이 희생됐다.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나를 비롯한 모든 전력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피해가 0이 될 수는 없었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자식을, 부모를, 친구를, 그리고 연인을 잃었다.
그들의 슬픔을 아무리 달래 준다 한들, 죽은 사람이 살아서 돌아오지는 못한다.
간발의 차로 내 앞에서 죽은 백성을 보았을 때.
나는 환희의 찬미가 죽은 자는 절대 살릴 수 없다는 사실에 얼마나 절규했는지 모른다.
숨이 조금이라도 붙어 있는 것과 끊어진 것의 차이는 너무나도 명백했던 것이다.
수많은 신의 가호도 죽은 자를 살릴 수는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슬펐는지.
이것은 직접 현장을 경험하고, 애도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면 절대 모를 것이다. 절대로.
“그간 저희가 조사한 모든 자료를 귀국에 제공하고자 합니다. 괜찮으시다면, 귀국에서도 본국에 정보를 공유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당연한 말씀을요.”
“저희는 순수하게 악의 축이 궤멸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만약 그 염원이 닿아, 훗날 데스먼드 제국이 무너지게 된다면…….”
말끝을 흐리는 알카디우스에게서 나도, 그도 함께 걱정하고 있는 미래를 엿볼 수 있었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고생한 사냥개를 잡아먹는다지 않던가?
알카디우스는 그 이후를 걱정하고 있는 듯했다. 바로 우리 제국과의 전면전 가능성을 말이다.
한데 그것은 나 역시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간 인지하지 못하는 영역 밖에서 착실하게 힘을 키워 온 칸트라 제국은 꽤 까다로운 상대였다.
그들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당장 치유사단이라고 불리는 존재도 어느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는지 알려진 게 없다.
우리는 서로를 잘 모른다.
그래서 각자 검 끝을 서로에게 겨누었을 때, 더 치명적인 상처를 낼 수 있는 관계이기도 했다.
“황제의 명예와 제국의 이름을 걸고, 본 크리비아 제국은 칸트라 제국을 절대 공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하하, 구두 약속이라든가 불가침조약이 필요해서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리 말씀해 주시니, 기분은 정말 좋네요.”
알카디우스가 어린아이 같은 순진한 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되레 자신감으로 보이기도 했다.
나와 대척점의 위치에 서게 됐을 때, 결사항전을 할 자신도 있다는 그런 모습처럼 말이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들과 있을, 미래에 대한 불확실한 추측은 성마 대전 이후로 미뤄 두기로 했다.
그때까지!
우리 제국과 칸트라 제국이 상잔(相殘)의 비극을 벌이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