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257
제 257화
82장. 발악 – 2화
새벽.
밤부터 시작된 아르케네스와 헤이즈의 얘기는 그때가 되어서야 겨우 끝이 났다.
두 사람은 손을 꼭 붙잡은 채, 서로를 마주 보며 환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분명 웃고 있는 것은 맞는데, 두 사람의 눈가에는 온통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덕분에 화장이 번지고 흘러내려 흡사 무서운 악령이 생각날 정도로 꼴이 말이 아니었다.
“언니는 화장이 번져도 예뻐요.”
“아키, 너도 예뻐. 이런 모습도 네 매력인데……. 매번 남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워.”
“어쩌겠어요, 그렇게 시작한 제 운명인 걸요. 언니, 꼭 저와 한 약속은 지키기예요?”
“……알았어.”
“에이! 눈물 이제 흘리지 않기로 했잖아요! 그새 또 못 참고 눈물을 흘려요?”
“그냥……. 너무 미안해서. 꼭 나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이 폐하에 대한 마음을 포기하는 것 같아서 그래.”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다들 각자의 길을 걷기 위해 마음을 내려놓는 것뿐이에요!”
“아키, 정말 미안해.”
“언니, 미안하면…… 꼭 폐하의 곁에, 영원히 있으셔야 해요. 알았죠? 제 마음까지 더해서 언니가 폐하를 더 많이 사랑해 주세요.”
“아키…….”
“저는 이제 상단이 단순히 물건의 판매와 구매만 아니라 일상 속까지 깊게 침투할 수 있도록 많은 시스템을 만들 거예요.”
아르케네스가 힘주어 말했다.
그동안 헤이즈와 나눈 대화는 즉, 오랜 시간 짝사랑해 왔던 자레드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겠다는 것이었다.
헤이즈도 알고 있었다.
사실 모른 척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아르케네스는 항상 자레드에게 호감을 보였으니까.
하지만 헤이즈는 자레드의 마음이 우선이라고 생각했고, 함부로 나서지 않았다.
이자벨도, 클로이도, 아르케네스도 모두 자레드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드러내어 그녀들을 압박한 적은 없었다.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저 선의의 경쟁자라고 생각했다.
‘자레드는 내 거니까, 너희들은 안 돼!’라는 식의 생각을 한 적은 절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가 각자의 사정으로 자레드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
이자벨은 드레자 주술단을 돌보기 위해, 클로이는 그레이 엘프를 위해서.
그리고 아르케네스는 이제 자신의 상단을 위해, 더 크고 넓은 미래를 향해 그에 대한 마음을 접고 떠나겠다는 것이다.
“아키, 그러면 어떤 시스템을 만들 생각이야?”
“일단 황도에서부터 한정적으로 시작하겠지만…… 저희 상단 상점에서 재고를 확보한 물건에 구매 예약 요청을 걸면.”
“응.”
“창고에 보관 중인 물건은 창고에서 바로, 그것이 아니라면 현지에서 물건을 조달한 다음…… 그 물건을 바로 구매자의 자택으로 배달하는 거예요.”
아르케네스도, 헤이즈도 모르고 있었지만, 이는 자레드가 살았던 전생의 ‘현대’에서 택배라는 개념으로 불렸던 것이다.
“인력은 물론이고, 체계적인 시스템이 꼭 필요하겠는걸?”
“맞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최적화를 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려고 해요. 쉽지 않겠지만, 미래 가치가 높은 사업이라고 보거든요!”
아르케네스의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방금까지 헤이즈를 붙잡고 펑펑 울던 아르케네스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가슴 한구석이 아리듯 아파 왔지만, 헤이즈는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의 말처럼 이제는 후회 없이 자레드를 사랑해야만 한다.
그래야 지금껏 한결같은 마음으로 헤이즈를 응원하며 작별을 고했던 그녀들의 바람에 부응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폐하께서도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실 거야. 듣기 좋은 말로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러실 것이란 확신이 들어!”
“그렇죠? 다만 말만 번지르르하게 늘어놓을 수는 없으니, 오늘 아침부터 시범 운영에 들어가려고요!”
“내가 열심히 응원할게, 아키.”
“헤……. 항상 많이 응원해 줘요, 언니. 고마워요.”
“고마워, 아키.”
“언니, 파이팅이에요!”
주먹을 힘껏 말아 쥐고, 제자리에서 콩콩 뛰는 아르케네스의 모습은 귀엽기 그지없었다.
헤이즈는 그런 아르케네스를 한참 동안 꼭 끌어안은 채,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었다.
깊은 포옹이었다.
* * *
열흘 후.
“폐하! 폐하!”
“라키스 경, 이쪽이오!”
“폐하, 데스먼드 제국에 심어 놓은 눈을 통해 급한 보고가 통신석으로 전달되었습니다!”
나는 황궁의 정원을 따라 조용히 산책을 하고 있었다. 검토용 서류를 손에 든 채로 말이다.
서류의 내용은 지난 사건 이후 복구 현황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었다.
아울러 오브렌 덕에 대량생산에 들어간 카타라를 이용해 ‘만독불침지체’ 세팅에 성공한 기사, 마법사 전력에 대한 정리도 있었다.
부단히 노력한 덕분에 이제 아그레시오 기사단과 디미오스 마법사단 전원은 독에 면역이 됐다.
범위를 일반 병사 전체까지 늘리려면 시간이 다소 필요하겠지만…… 바꿔 말하면 시간만 있으면 이제 준비는 어렵지 않았다.
모든 것이 술술 진행되는 느낌이라 만족스러웠는데, 뭔가 변수가 생긴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오?”
“데스먼드 제국에서 다수의 제국군이 집결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제국의 황도에 말이오?”
“근데 그것이 뭔가 많이 이상합니다. 보통 출정에 앞서 진격로가 될 곳에 진형을 갖추고 기다리는 것이 보통인데 말입니다.”
“다른 움직임이 있나 보군.”
“무장을 마친 군인들이 족족 마탑 근처에서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들어간 병사들은 많은데, 나온 병사들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지하로 사라졌다?”
“예, 그 표현이 가장 정확할 것 같습니다.”
“…….”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일단 확실한 것은 절대 좋은 조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병사들이 집결했다는 것만으로도 좋지 않은 소식이긴 했지만, 지금은 더욱 그러했다.
“지금도 진행 중이고 말이오?”
“예, 폐하. 계속 무장한 제국군의 전력이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다만 점점 인원이 줄어드는 모양새입니다.”
‘악마 대이동인가?’
나는 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악마 대이동.
에서 성마 대전 도중에 벌어지는 돌발 이벤트 중 하나였다.
떠오르는 이벤트 내용을 그대로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마왕은 이 세계의 현신에 앞서 자신의 충직한 부하, 즉 악마(惡魔) 군단을 먼저 내려 보냈습니다.그들은 서쪽에 위치한 이름 없는 무인도에 상륙을 마쳤고, 언제든 전투에 돌입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마왕은 전략적으로 용사들과의 정면 승부를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암흑 제단의 힘을 빌려 대규모 워프가 가능한 공간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들은 용사들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는 후방의 보급 루트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동이 시작됐습니다. 도합 5만에 달하는 악마 군단이 대이동을 시작합니다.]
이를 두고 플레이어들은 ‘악마 대이동’이라고 불렀다.
메커니즘은 단순하다.
암흑 제단이 가진 폭발적인 힘을 이용해 다수의 악마들을 장거리로 텔레포트 시킨 것이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멀티 텔레포트의 ‘대단위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몇십, 몇백 정도가 아니라 몇만을 한 번에 이동시킬 수 있는 위력적인 장치다.
“라키스 경.”
“예, 폐하.”
“잠시.”
나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모든 일은 벌어졌을 때 대비하기 시작하면 늦는다.
무시해도 될 것 같은 전조(前兆)라고 해도, 절대 간과해서 안 될 때가 있다.
이카젤라는 이미 제국 전역에 있던 오래된 장치를 단번에 가동시킨 전례가 있다.
그렇다면…… 악마 대이동과 유사한 일을 벌이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에서는 악마 대이동을 마왕이 직접 한 것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충실하고 충직한 부하라면, 마왕 레크나트가 지식 일부를 나눠 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아, 이 망할 이카젤라 새끼 진짜.”
“예?”
“아니오. 신경 쓰이는 것이 있어서 그만. 미안하군.”
“아닙니다, 폐하. 하하하, 때로는 격한 감정 표현이 도움이 되실 때도 있는 것이지요.”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악마 대이동’ 당시, 악마 군단이 나타난 위치는 플레이어들의 기반 시설이 잔뜩 모여 있던 신데르스 왕국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악마 군단의 등장과 동시에 기반 시설이 초토화되었고, 다수의 NPC가 죽었다.
단기 이벤트였기에 나중에 이 기반 시설은 모두 복구됐지만, 문제는 이곳이 현실이라는 점이다.
애꿎은 백성이 죽고, 실제의 시설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었다.
“라키스 경.”
“예, 폐하.”
“지금 이 순간부터 최대한 신속하게 황도의 모든 백성을 대피시키시오.”
“지하 대피소로 말입니까?”
“그렇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에 대피소를 만드는 작업은 예전부터 꾸준히 해 왔다.
제국 내의 최고급 건축 인재와 인력을 총동원해서 추진한 제국의 ‘5대 사업’ 중 하나였다.
대피라는 것 자체가 생업을 모두 중단해야 하는 것이기에 경제적인 타격이 예상됐지만.
사람이 없으면 경제도, 치안도, 상업 활동도 아무 의미가 없다. 민본(民本)이라는 말이 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대비와 결정은 빠를수록 좋다. 과한 느낌이 들더라도, 차라리 모자란 것보다는 낫다.
“서두르시오!”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이카젤라라면 소집한 모든 정예 병력의 이동 지점으로 정할 곳은 단 한 곳뿐이다.
바로 황도인 여기!
제국의 상징이자 중심이기도 한 이곳을 노릴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각지로 꼼꼼하게 연결된 통신석이 위치해 있는 황궁 지하의 특실로 향했다.
최대한 빨리 황도 안팎의 전력을 집결할 시간인 듯했다.
그리고.
“알카디우스에게 전략적 공격을 요청해야겠군.”
우리 제국의 조력자가 된 칸트라 제국의 황제, 알카디우스를 떠올렸다.
나름 반격의 수단이 떠올랐다.
* * *
24시간 후.
이카젤라는 암흑 제단의 대광장을 가득 메운 데스먼드 제국군과 교단의 단원들을 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 폐하, 만세!”
“데스먼드 제국을 위하여!”
“와아아아!”
대광장에는 무려 십만에 달하는 정예 병력이 집결해 있었다.
그들은 환한 미소로 연신 손만 흔들고 있는 황제를 향해 열렬한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미 백치가 된 황제는 오로지 이카젤라의 명령만을 충실하게 따르는 멍청이가 되어 있었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이카젤라를 제외하면 없었다.
연단에 서 있는 나탈리 역시 악마에게 자아를 잠식당해, 기억을 전혀 하지 못하는 상태고.
현장을 지켜봤던 단원들은 일찌감치 이카젤라의 손에 목숨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
이카젤라가 황제의 손길을 따라 연단 앞으로 나서서는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 들어라! 너희들에게는 위대한 사명이 주어졌다. 그것은 바로 악마적인 위선자의 집합체인 크리비아 제국 놈들을 완벽히 분쇄하는 일이다!”
“와아아아!”
“이제 곧 너희들은 크리비아 제국의 황도 한복판으로 이동을 하게 될 것이다. 모조리 죽이고 베어라! 단 한 놈도 살려 두지 말고, 황도의 모든 것을 절멸시켜라!”
“데스먼드 제국을 위하여!”
“모두 준비!”
이카젤라가 힘껏 손을 들었다.
그 순간.
모든 병사가 숨을 죽이고, 공격에 돌입할 자세를 갖췄다.
개전이 임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