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271
제 271화
86장. 전후 수습 – 3화
크고 작은 혼란이 완벽하게 수습되기까지는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살아남은 단원들과 끝까지 신성 제국에 항복하지 않겠다는 잔당들을 토벌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제국 전체의 안정화를 위해 묵묵하게 백방으로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라도 빨리 성마 대전을 위한 준비 과정에 돌입하고 싶었지만.
절대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부를 단단하게 다져 두지 않으면, 나중에 성마 대전이 발발했을 때 문제가 될 수 있어서다.
이를테면 마왕과 마왕군의 등장을 보고, 후방에서 등에 비수를 꽂는 자들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
그런 이유로 사로잡히거나 죽음을 당한 잔당들로부터 ‘탈수기’라는 악명을 들을 정도로 나는 집요하게 그들을 쫓아 뿌리째 뽑아 없앴다.
말살(抹殺)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그런 후속 조치였다.
내게는 신념이 있었다.
마왕 레크나트와 그의 군대는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악의 존재이며, 그 추종자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래서 많은 목숨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차가운 감옥에 갇혔지만……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이따금 달빛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길 즈음이면, 손에 묻은 피의 무게를 생각해 보기는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결론은 같았다.
그것은 바로 내가 망설이면 망설일수록, 훗날 더 많은 죄 없는 목숨들이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사실.
완벽하게 준비하고 싶었다.
이왕이면 더 적은 수의 희생으로 이 세계를 마왕으로부터 구하고 싶은 것이다.
한편 나탈리는 백치가 된 황제를 대신해서 공식적인 항복 문서에 서명을 했다.
그래도 백성들이 디그론 4세만큼 애정을 갖고 있던 인물이 나탈리여서 그 과정은 원만히 진행됐다.
그리고.
나탈리는 항복 문서에 서명하자마자 아버지인 디그론 4세를 데리고 옛 데스먼드 제국의 남부로 향했다.
예전에 디그론 4세가 기분전환을 하고 싶을 때마다 찾아갔다던 남부의 작은 별장이었다.
나는 그것까진 막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혹시나 부흥 세력의 구심점이 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이동 사실을 대외비에 부쳤다.
아울러 그녀의 별장과 정원, 그 일대의 산책로를 제외한 외곽의 공간은 모두 통제했다.
즉, 연금(軟禁)시킨 것이다.
나탈리는 그런 나의 결정을 수긍했고, 아버지를 보살피며 나름대로 죗값을 치르겠다고 했다.
원만한 마무리였다.
한편, 나의 적극적인 주도 아래 칸트라 제국, 발렌시아 왕국과 우리 크리비아 제국의 통합 회의가 열렸다.
각국의 왕과 황제가 참석한 고위급 회담으로 밀실에서 진행된 은밀한 대화였다.
에서 칸트라 제국만큼이나 정보가 전무했던 것이 발렌시아 왕국이었는데.
다행히도 절대 중립을 표방하던 과거에서 이탈, 칸트라 제국과 가까워 지면서, 최근 들어 부쩍 많은 공감대가 생겼다는 점이 내게는 호재가 됐다.
그래서 생각보다 얘기가 쉽게 풀렸다.
세 국가는 공식적인 ‘신성 제국 연합’으로 뭉치기로 결의하였고, 공통된 목표에 대응하기로 했다.
당연히 우리 공동의 적은 마왕 레크나트로, 다가올 성마 대전의 주역이 될 존재였다.
나는 1419년 3월 4일로 확정된 심판의 날을 그들에게도 알려 주었다.
칸트라 제국의 황제 알카디우스 11세와 발렌시아 왕국의 국왕 알론은 처음에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그날을 정확히 알고 있는지, 그 정보의 출처를 궁금해했다.
그래서 숨기지 않고 그들에게 그라시아의 두루마리를 보여 줬다.
특히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심판의 날이 그동안 계속 앞당겨져 왔으며, 이제 드디어 확정되었음을 알렸다.
그들은 여전히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성마 대전은 닥쳐올 미래가 되었다는 것.
이는 이카젤라가 죽은 이후, 교단 단원을 체포하고 심문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사실이기도 했다.
특히 간부급 단원들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제단에 대해서도 자세히 실토했다.
“어쨌든 지금부터 우리 칸트라 제국은 신성 제국 연합의 일원으로서 연합군의 훈련에 동참하겠습니다.”
“우리 발렌시아 왕국은 남부 지대에 풍부한 건축 자재들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것이며, 요새 건축 등 토목 작업에 최우선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크리비아 제국은 두 국가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전방위적인 준비를 하겠습니다.”
우리 셋은 저마다 확실한 목표를 두고, 미래에 대비한 의견을 교환했다.
이견은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성마 대전의 그 날까지 남은 시간들을 알차게 보내는 것뿐이었다.
* * *
한편.
데스먼드 제국의 옛 영토에서 벌어진 소요를 진압하고 크리비아 제국의 황도로 돌아온 나는 바로 발데스를 만났다.
선전장관인 그를 만난 것은 이제 제국의 모든 백성들에게도 성마 대전에 대한 사실을 알릴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라키스는 모두가 일치단결해서 마왕을 대비할 수 있도록 반드시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엘라와 나오미는 생각 이상의 공포를 야기할 수 있다며, 계속 비밀에 부쳐야 한다고 말했다.
고심 끝에 내가 내린 결정은 확실한 공개였다.
백성들에게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닥쳐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 권리가 있고.
어느 날 갑자기 이유도 모른 채 희생되지 않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울러 유사시에 빠르게 대피하거나 전투 준비를 갖추는 등 제각각 만반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연설 준비는?”
“거의 진행 작업이 다 끝마쳐 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폐하께서 직접 작성하신 원고의 검토도 끝났고, 참여할 백성들의 수에 맞게 특설 연단도 제작했습니다.”
“반응은?”
“사실……. 음, 사실대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살짝 다른 방향으로 운을 떼는 발데스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일까?
“말해 보시오.”
“이미 데스먼드 제국 쪽에서 흘러나온 소문들이 꽤 많이 퍼진 모양입니다. 어떤 경로로 알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마왕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많이들 두려워하겠군.”
“저도 그런 반응이 아닐까 생각했었습니다만.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처음 폐하께 그 말씀을 들었을 때, 폐하께서 신에게 농을 하신 줄 알았었지요.”
“그랬었지.”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백성들 중에 걱정하는 사람은 있어도 동요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하더군요.”
“좀 더 자세히 말해 보시오.”
“그간 폐하께서 수많은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번의 난관도 지혜롭게 타개할 확실한 계획이 있으시리라고 믿는 것 같았습니다.”
“오호, 최근에 들었던 말 중 가장 반가운 소식이로군.”
진심이었다.
동료나 신하의 신뢰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지도자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이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그동안 제국 안팎에서 발생했던 변수를 최대한 신속하게 대처했던 나를 믿는 듯했다.
컨트롤 타워가 흔들리지 않고, 확실한 신념으로 과감하게 추진하는 모습에 신뢰를 보이는 듯했다.
모름지기 지도자라면 그래야 한다고 늘 생각은 했었는데.
내가 제법 그 신념을 잘 지킨 모양이었다. 그러니 백성들도 내게 좋은 점수를 준 것이다.
“그래서 이미 폐하께서 하실 연설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알음알음 짐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폐하를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일치단결하여 극복하면 된다는 것이 백성의 공통된 반응이었습니다.”
왠지 숙연해졌다.
전생에서는 평범한 회사원의 삶을 살다가 죽은 나였는데.
현생에서는 수많은 백성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멋진 황제가 되어 있었다.
한편으로는 내 어깨, 내 양손에 쥐어진 수많은 생명의 무게감을 다시금 절실하게 느꼈다.
내가 실수하면.
나를 믿고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목숨을 잃는다. 그런 일은 절대 없어야겠지.
“알겠소. 그럼 예정대로 사흘 후에 특설 연단에서 연설을 진행하도록 합시다.”
“예, 폐하. 모자란 부분이 없는지 다시 점검해 보고, 음성 증폭 장치 등을 더 설치하겠습니다.”
“부탁하오.”
“예엣.”
그렇게 대화를 마쳤다.
황도에서 있을 나의 연설은 수많은 영상 장치로 촬영되어 각지의 영화관에서 마치 기록영화처럼 상영될 것이다.
그래서 연설에서 나는 자세하게 앞으로의 계획과 준비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할 생각이었다.
하나로 단결하는 것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기에.
단 하나도 거짓된 내용을 넣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원고에는 그런 내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 * *
휘이이이!
나스 대륙력 1417년, 그리고 한파의 계절인 12월이 도래했음을 알리기라도 하려는지.
자정을 넘기는 순간부터 밀어닥친 한파와 강풍이 침실의 창문을 거칠게 후려쳤다.
“…….”
나는 왼손 중지에 착용한 케베눔 링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본격적인 미래 준비에 앞서, 꼭 챙겨야 할 아티팩트 하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옵션 8 : 천리안 – 아티팩트 1개의 위치를 즉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단, 1회 사용 가능한 옵션입니다.]내가 활용하려는 것은 케베눔 링의 8번 옵션으로 있는 ‘천리안’이었다.
1회성이기는 하지만, 내가 얻고자 하는 아티팩트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 주는 옵션이었다.
의 경험에 비추어 말하자면, 천리안을 쓰는 순간 아티팩트가 있는 위치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좌표로 찍힌다.
마치 얼마 전에 다녀온 적이 있는 선명한 기억처럼 말이다.
“격리.”
내가 얻고자 하는 아티팩트의 핵심 능력은 바로 ‘격리’였다.
일전에 나탈리가 나와의 전투에서 사용했던 지정 격리가 이와 유사한 능력이었다.
문제는 고유 능력 형태의 ‘격리’는 마왕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에게는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서는 그것을 두고 ‘고유 저항’이라고 불렀는데, 말 그대로 네임드들의 특수한 면역 기제였다.
그래서 마왕을 격리하려면, 그 정도의 존재를 위력적으로 품을 수 있는 아티팩트가 필요했다.
내가 찾으려는 것은 바로 그런 아티팩트였다.
“만약 내가 레크나트를 제압하지 못한다면.”
일종의 보험이었다.
동료들에게조차 단 한 번도 말한 적 없는 나만의 계획이기도 했다.
만약 레크나트를 죽이지 못했을 경우, 녀석과 같이 동귀어진이라도 할 방법을 고민했다.
격리 아티팩트가 있으면 설령 내가 격리된 공간에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레크나트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다.
내가 죽게 되면, 죽기 전에 아티팩트를 파괴해서 영원히 돌아올 수 없게 만들 작정이다.
그러면 최소한 레크나트의 손에 우수수 인명이 죽어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을 때.
그래도 마왕을 상대하는 것보다야 휘하의 마족을 상대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이 생각은 영원히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
누군가에게 운만 떼도 모두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말릴 것이다.
어쩌면 괜한 생각에 나를 위해 희생을 하려 들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만은 막고 싶었다.
“보험은 빨리 드는 게 좋지.”
그래서 이제부터 천리안을 이용해 격리용 아티팩트를 신속하게 찾을 생각이다.
내가 알기로 이 녀석은 초월급의 분류 등급이 붙은 아티팩트다. 즉, 얻기 쉽지 않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