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273
제 273화
87장. 심해의 왕 – 2화
“와…….”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환한 조명과 함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도시를 고스란히 갖다 놓은 듯한 광경이었다.
마치 상공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듯 물속에서 해저 위의 도시를 내려다보는 구도.
의심할 여지도 없이 눈에 보이는 도시의 모습은 아클라니아 문명의 것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내 입장에서는 반가운 마음이 들 수도 있지만, 저들에게 나는 엄연히 불청객이니까.
마법을 미리 준비한다거나 공격 자세를 취하는 등 그들을 자극할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높이 솟아 있는 타워 하나의 불빛이 계속 점멸을 반복하더니, 창을 든 두 명의 남자가 빠른 속도로 이쪽으로 향했다.
경비병인 듯했다.
‘빠르다.’
물속에 사는 것이 일상인 그들이라 그런지, 이동 속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아가미가 달린 어인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추진력을 만드는 방법을 아는 듯했다.
이윽고 내 앞에 멈춰 선 두 경비병이 창을 들어 나를 제지했다.
“자르카 제이지.”
“아클라니아 언어입니까?”
애석하게도 나는 아클라니아 언어까지는 알지 못했다.
애초에 에 패치도 안 된 곳의 사전지식이 내게 있을 리 만무했다.
“주나드 가타?”
“록시테르 바스다?”
그러자 경비병이 비슷한 말투의 말을 여러 형태로 바꿔 가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는 데 아는 척을 했다가는 사달이 날 수도 있으니까. 그것은 질색이다.
바로 그때.
“나스 대륙의 사람인가?”
“예! 바로 그렇습니다.”
반가운 나스 대륙어가 들렸다.
경비병이라서 언어 능력은 떨어질 줄 알았는데, 다수의 언어를 구사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크리비아 제국의 황제니 하는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그들에게 어떤 감흥도 줄 수 없을 것이 뻔했기에 이야기해 봤자 남는 게 없어서다.
“나스 대륙의 사람이 이곳에는 어쩐 일이지? 그것보다…… 신기하군. 이렇게 심해까지 내려오는 일이 쉽지 않을 텐데.”
“잔재주가 좀 있습니다.”
나는 나를 여전히 꼭꼭 둘러싸고 있는 퍼펙트 실드의 구체를 가리켰다.
마치 든든한 잠수정에 타고 있는 것처럼 실드는 안정적으로 수압을 버텨 내며, 나를 지켜 주고 있었다.
퉁! 퉁퉁!
“오우, 상당히 강력하군.”
호기심에 실드를 창끝으로 찔러 본 경비병이 탄성을 터뜨렸다.
아무렴, 누가 만든 실드인데.
무시당하면 섭섭할 정도로 우수한 실드다.
“그나저나 용건이 뭐지? 단순한 호기심에 방문한 것이라면, 접근은 여기까지다.”
“대왕을 만나러 왔습니다.”
“대왕을……?”
용건을 확실하게 밝혔다.
무르테스를 만나러 왔다고.
물론 세부적인 목적까지 밝히지는 않았다. 그것은 무르테스를 만난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다.
이왕이면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극단적인 수단도 생각 중이기는 했다.
모양이 좀 빠지지만, 어떻게든 무르테스의 반지를 빼앗아 도망치는 그림도 염두에 두고 있다.
“나스 대륙의 사람으로서 대왕께 아티팩트를 진상하고자 왔습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하하.”
나는 아공간에서 꺼낸 값어치 낮은 아티팩트 두 개를 경비병에게 휙 던져 주었다.
눈치껏 주는 뇌물이었다.
귀찮은 절차를 생략하고, 재깍 무르테스에게 나를 데려다 달라는 확실한 신호이기도 했다.
“으흠…….”
“정말 진상할 물품이 있나?”
스토리도 아예 안 짜 두고 여기에 오지는 않았다.
실제로 이야기가 잘 풀릴 때를 가정해서 무르테스에게 줄 아티팩트를 제법 챙겨 왔다.
이를테면 정화 마법진이 세공되어 있는 아티팩트라든가, 향을 발산하는 아티팩트라든가.
전투적인 면에서의 활용도는 떨어지지만, 왕으로서의 품위 유지에 필요한 물품들이 많았다.
“몇 개만 일단 보여 드리지요.”
아공간에서 꺼낸 열 개 정도의 아티팩트를 쭉 늘어놓자, 경비병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티팩트 자체가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티팩트라는 이름이 붙는 것이기도 하고.
“험……. 험험.”
“일단 다른 경비대 쪽에도 알린 다음에 절차를…….”
“수고가 정말 많으십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은근슬쩍 돌리는 경비병 둘에게 금화 몇 개를 더 던져 주었다.
그러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두 사람의 입가에 피어오르며,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왕의 궁전까지 자네를 안내하도록 하지. 허튼수작 부릴 생각은 말아. 조금이라도 헛짓거리를 했다가는 황궁의 모든 시설들이 자네의 목숨을 노릴 테니 말이야.”
경비병이 확실한 경고를 했다.
당연한 얘기라고 생각했기에 딱히 놀라지도 않았다.
한 문명, 한 나라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는 군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기에.
경비병들도 그 시스템을 믿기에 나를 거침없이 무르테스의 앞으로 인도하는 듯했다.
바로 그때.
우우웅!
“오!”
경비병 둘이 내 뒤쪽에서 실드 위에 손을 얹더니, 이내 폭발적인 추진력으로 나를 밀기 시작했다.
보통 실드가 다른 존재의 손에 닿으면 뜨거운 화상을 입는 것처럼 통증을 주기도 하는데.
경비병들은 전혀 그런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자세히 보니 손끝을 보호하고 있는 특유의 기운이 실드와의 충돌을 없애고 있었다.
‘정령술도 쓰는 건가?’
일종의 정령술이 포함된 것 같았다.
그게 이상할 것은 없었다.
물을 터전으로 삼은 이들에게 물의 정령은 어쩌면 필수 불가결한 요소일지도 모르니까.
나는 그들의 안내를 따라 빠르게 수중 궁전으로 향하면서 주변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여기저기 살폈다.
물살을 시원하게 가르며 돌아다니는 아클라니아인들의 모습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특히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길쭉하게 뻗은 신장이었다.
나스 대륙의 문명에서 장신으로 소문난 그레이 엘프조차도 명함을 내밀 수 없을 만큼 컸다.
마치 돌아다니는 모든 아클라니아인들이 모델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딱 그랬다.
어느덧 경비병들의 인도를 따라 궁전 앞에 도착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바로 무르테스를 만날 수는 없었다.
경비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와서 나를 멈춰 세웠고, 그와 방문 목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별도의 인원을 대동하지 않고 혼자 왔기에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 눈치였다.
한 사람 정도야 그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금세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듯했다.
어쨌든 무난하게 통과 절차를 밟았고, 나는 손님을 모시는 응접실로 안내를 받았다.
이제부터는 기다림만 남았다.
* * *
한나절 후.
“나스 대륙의 인간이라……. 도대체 무슨 일이지?”
이미 어전에 들어선 지는 오래되었으나, 무르테스는 아직 자레드를 부르지 않고 있었다.
뜬금없이 나스 대륙의 사람이 찾아와서 아티팩트를 진상하겠다는 게 영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하들을 시켜, 빠르게 자레드에 대한 정보 수집을 지시했다.
그에 대한 정보 파악을 확실히 마치기 전까지는 만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자레드에 대한 조사를 마친 부하의 보고가 이어졌다.
“대왕, 방문자 자레드 폰 유칼레스에 대한 정보 입수에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빨리?”
“해안가의 나스 대륙인 누구를 붙들고 물어봐도 바로 알 만큼 유명한 인물이더군요.”
“……대체 누구란 말이냐?”
“나스 대륙의 8할 이상의 영토를 통치하고 있는 황제라고 합니다. 크리비아 제국의 황제, 자레드 폰 유칼레스라고 하더군요.”
“뭐라고? 그 정도면 천하를 통일한 황제가 아니더냐? 그런 사람이 홀로 여기를 왜 찾아와?”
“의도는 알 수 없습니다.”
“흠…….”
무르테스가 침음성을 냈다.
물론 자레드가 두려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물속에서라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최강자라고 자신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무르테스였다.
아울러 호전적인 무르테스는 전투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강자와의 대련이나 결투를 즐겼다.
그래서 자레드가 누구든, 그가 어떤 실력을 가진 존재이건 상관하지 않았다.
다만.
왜 인간 세계의 왕이 심해 문명의 이곳을 찾아왔는가.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었다.
물과 ‘뭍’은 오래전부터 엄격하게 구분되어 온, 각자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찾아왔다라……. 그런데 황제라는 사실도 숨기고, 아티팩트를 진상하겠다고 말했다? 뭔가 속내를 숨기고 있군.”
무르테스는 확신했다.
자레드에게 뭔가 다른 목적이 있을 거라고. 그런 생각을 하니 되레 호기심이 들었다.
“자레드를 들어오라고 해라. 내가 직접 만나 보겠다.”
무르테스가 자레드를 불렀다.
육지의 황제.
심해의 대왕.
드디어 두 사람이 만나는 순간이었다.
* * *
‘풍채가 대단하군.’
어전으로 들어선 자레드는 족히 2m가 넘는 키, 그야말로 ‘근육남’이 따로 없는 무르테스의 외형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애초에 옷도 청바지와 비슷하게 생긴 하의만 입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상의는 완전 탈의였다.
상체에 보이는 식스팩, 아니 에잇팩의 근육은 제법 운동을 했다는 자레드도 절로 경외감이 들 정도였다.
또한, 물의 색깔과 같은 벽안의 두 눈은 영롱하기 그지없었다.
보고 있는 것으로도 푹 빠질 것만 같은 그런 눈이었다.
자레드는 평범한 백성이 국왕을 알현할 때처럼 무르테스에게 알현의 예를 갖췄다.
일반적인 나스 대륙의 사람이면 생각조차 못 할 파격적인 행동이었지만, 현대에서 온 자레드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 아티팩트를 진상하기 위해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고. 나스 대륙에서 온 자레드 씨?”
“예, 대왕. 그렇습니다.”
“다 필요 없고! 우리 남자답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봅시다!”
다음 순간.
촤아아악!
무르테스가 양손을 거칠게 휘저으며, 어전 전체를 강력한 물길로 뒤덮어 버렸다.
황궁 안팎은 물이 없고, 그 주변을 원형으로 물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되어 있었는데.
무르테스가 어전을 중심으로 소리가 차단된 공간을 만들어 낸 것이다.
“크리비아 제국의 황제, 자레드 폰 유칼레스. 육지의 황제가 심해의 왕인 내게 무슨 일로?”
“…….”
역시 비밀은 없는 걸까.
예상은 했지만, 그들의 정보 수집은 빨라도 엄청 빨랐다.
심해에서만 살고 있는 폐쇄적인 문명인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경비병이 나스 대륙어를 썼던 것을 생각하면, 교류가 어느 정도 있었을 터였다.
어쩌면 나스 대륙 어딘가에 터전을 이루고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유독 키가 좀 큰 것을 제외한다면, 영락없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알고 계셨군요.”
“우리가 육지의 세상사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그쪽 세계를 침범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지 결코 배타적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오.”
“음…….”
뭔가 중간 과정이 대폭 생략된 느낌.
자레드는 이렇게 된 이상,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무르테스가 자신의 입으로 남자답게, 허심탄회하게 말하자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일단 지르고 보는 게 맞았다.
“대왕.”
“음?”
“대왕의 반지가 제게 반드시 필요해서 찾아왔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 자레드의 말에 순간 어전 전체는 적막감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