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276
제 276화
87장. 심해의 왕 – 5화
[영혼 격리의 반지] [분류 등급 : 초월급] [옵션 1 : 단 한 번의 기회에 한정하여 어떤 상대든 내부에 구현된 이세계로 자신과 함께 격리시킬 수 있습니다.아티팩트의 소유자가 죽게 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으며, 소유자의 의지가 있다면 복귀가 가능합니다.]
나는 무르테스에게 받은 반지의 옵션을 살폈다.
초월급이라는 판정을 받은 아티팩트치고 옵션은 정말 단순했다.
하지만 ‘어떤 상대든’ 상관없다는 그 멘트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스탯을 올려 주는 옵션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고 만능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마왕 레크나트에 대한 확실한 보험을 가입한 셈이다.
“전투…… 참 재밌었소.”
“결례가 되지 않았길 바랍니다.”
나는 어전의 한가운데에 대자로 누워 있는 무르테스를 보며,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혹시나 그를 보살필 다른 부하들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싫다고 했다.
나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거절하지 않았고, 그래서 이렇게 대화 중이었다.
“나를 마치 온실 속의 화초처럼 생각해 누구도, 정말 실수로라도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더군.”
“그것이 편하기도 하지만, 때때로 외로움의 근원이 되기도 하지요.”
“맞소. 어느 순간부터인가 외롭더군. 땀 흘려 뛰고, 서로 부대끼면서 경쟁하는 것이 내게는 전혀 허락되지 않았소.”
“대왕의 열정을 전투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역시 인간의 마법은 신묘하고 대단하군. 전투 내내, 당신이 아닌 나와 싸우는 느낌이었소.”
“하하하, 노림수였다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디멘션 도어를 집요하게 쓴 것은 완벽한 내 설계였다.
물속이라는 핸디캡을 갖고 있는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수단이기도 했다.
“자레드 황제.”
“예, 대왕.”
“성마 대전……. 인간들은 과연 이길 자신이 있는 것이오? 용마 대전도 엄청난 상처만을 서로에게 남기고 끝났다고 들었는데.”
무르테스가 운을 뗐다.
그와는 관계없는 일이라 별생각이 없는 줄 알았는데, 무르테스의 표정에는 제법 걱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반반입니다. 이길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닐 것 같기도 합니다.”
나는 가감 없이 답을 해 주었다.
동료나 백성들 앞에서라면 모르겠지만, 제3자나 다름없는 무르테스이기에 편하게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내 생각은 그랬다.
성마 대전을 우리 인간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내가 레크나트를 얼마나 막아 낼 수 있고.
내 동료들과 인간계의 유능한 마법사, 치유사, 기사들이 마족들을 얼마나 처치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한 명의 마왕.
백 명의 마족.
이들을 효과적으로 무찌를 수 있느냐, 없느냐에 승패가 갈린다고 봤다.
마물은 어떻게든 막으려면 막을 수 있지만, 마족과 마왕은 얘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패배한다면 나스 대륙은 마왕의 거점이 되겠군?”
“그렇겠지요. 천 년 전 용마 대전도 그럴 생각으로 벌인 전쟁이었고, 드래곤의 숭고한 희생으로 막아 냈던 전쟁이 아닙니까.”
“흠…….”
생각 이상으로 뭔가 깊은 고민에 빠진 듯한 무르테스의 표정은 평범하진 않았다.
뭐랄까, 그렇게 고민을 해 주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지금까지 서로에 대해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사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서로를 걱정해 주는 느낌이랄까.
“이제부턴 제가 잘 준비해야 할 몫이지요. 대왕에게서 얻은 이 반지도 요긴하게 쓰일 겁니다.”
“자레드 황제.”
“예?”
“필요하다면 언제든 내게 연락하시오. 미력하나마 물의 정령의 힘을 보태도록 하지.”
무르테스가 품속에서 주섬주섬 꺼낸 무언가를 내밀었다.
손바닥 크기만 한 조개껍질 같은 것이었는데, 영롱하게 푸른빛을 발했다.
그가 바로 설명을 덧붙였다.
“인간 마법사들이 쓰는 통신석 같은 것이오. 이것을 사용하면 내게 즉시 연락이 가능할 것이오. 물에서도 전달될 수 있는 통신석이지.”
“대왕.”
“개인적인 약속이오. 우리 일족을 이끌고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 힘을 보태겠다는 것이오.”
“감사합니다.”
애초에 그들의 도움을 요청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럴 이유도, 명분도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무르테스는 나와의 전투에서 뭔가를 느꼈고, 그것이 그의 감정을 기분 좋게 자극한 듯했다.
호의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그에게서 넘겨받은 통신석을 조심스럽게 아공간에 보관했다.
“뭍으로 내가 모셔 드리지. 오늘 건넨 반지가 꼭 효과가 있길 바라오.”
“단언컨대 비장의 한 수가 될 겁니다. 대왕께서 약속을 지켜 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하, 두 번 먹이는군. 이런 식으로 패배를 다시 상기시키다니.”
“앗, 절대로 그런 의도는 없었습니다만…….”
“하하, 아니오. 나는 패배를 마음에 담아 두고, 옹졸한 생각을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오. 덕분에 많이 배웠소.”
“감사합니다.”
“나중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면, 그때는 해수면에서 다시 전력을 다해 싸워 봅시다.”
“그 도전, 기분 좋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좋소! 갑시다!”
그렇게 무르테스의 안내를 받아 나는 아클라니아 문명의 터전을 떠나 다시 뭍으로 향했다.
점점 멀어져 가는 해저 도시의 모습을 보니, 마치 귀국하는 비행기에 올라탄 것처럼 기분이 묘했다.
아주 잠깐 동안, 꿈을 꾸듯 다른 세계에 들렀다가 돌아가는 그런 느낌이었다.
* * *
여전히 나스 대륙의 남부는 쏟아지는 폭우로 앞뒤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악조건.”
자레드가 자신도 모르게 되뇐 것은 바로 ‘악조건’이라는 단어였다.
이번에 무르테스와 심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싸우면서 자레드는 악조건의 위험성을 여실히 느꼈다.
확실히 한두 가지 굵직한 핸디캡을 안고 시작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부담의 연속이었다.
전투에 100% 정신을 집중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실로 컸다.
눈앞의 적을 상대해야 하는데, 그 전에 내 자신을 무너뜨릴 수 있는 조건과도 싸워야 했으니까.
이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무척 지치게 만들었고, 실제로 지금 느끼는 피로감도 상당했다.
“악조건에서 내가 느끼는 피로감이 이럴진대…… 반대의 경우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겠지.”
그래서 자레드가 떠올린 것은 바로 이 ‘악조건의 테이블’을 뒤집어 놓았을 때의 상황이었다.
레크나트와 마왕군의 현신.
그들에게 악조건이 될 만한 상황들을 최대한 많이 구축해 두면, 어떻게 될까?
십중팔구 오늘의 자신처럼 필요 이상의 심력을 소모하고, 늘 긴장할 수밖에 없는 전투가 될 터였다.
“놈들에게 최대한 불편한 전장을 만들어야 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괴롭힐 수 있는.”
지금까지 자레드는 우리가 얼마나 더 강해지고, 위력적인 무기를 쓸 수 있는지만 생각해 왔다.
하지만 뒤집어 보니.
그것도 중요하지만, 상대를 얼마나 괴롭힐 수 있는지도 중요하게 여겨졌다.
마치 무르테스가 자신의 안방인 물속으로 자레드를 불러들여 유리한 위치에서 그를 상대하려 한 것처럼 말이다.
무르테스는 단지 전투의 무대만 바꾸었을 뿐, 자신의 실력을 바꾸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레드는 그것만으로도 큰 부담감을 느꼈고, 실제로 초반의 전투에서는 꽤 고전을 했다.
아마 무르테스가 마법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더라면, 자신이 패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신성력을 활용한 극단적인 항마 세공과 수많은 트랩. 이를 연계해서 놈들을 불편하게 만들어야겠어.”
무르테스와의 만남과 전투가 준 깨달음은 생각보다 꽤 유용했다.
발상의 전환.
성마 대전을 준비하는 자레드의 계획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가할 때가 된 듯했다.
* * *
그날 밤.
스스슥. 스슥. 슥.
나는 열심히 양피지 위에 글을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사흘 뒤에 있을 연설에서 말할 내용은 머릿속에 일찌감치 다시 한번 정리해 두었다.
오로지 진실만을 전달하면 되는 것이기에 의도적으로 붙일 미사여구나 거짓말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폐하, 드세요.”
글을 적느라 골몰하고 있어서 인기척도 느끼지 못한 사이.
황궁의 별채에 따로 둔 집무실로 들어온 헤이즈가 내게 조심스럽게 차 한 잔을 건넸다.
내가 문을 걸어 잠글 때를 제외하면 언제든 편하게 들어와도 된다고 허락했기에 그녀가 따뜻한 차 한 잔을 준비해 온 것이다.
“고마워. 잘 마실게.”
“제가 도울 일은…… 없을까요?”
“있지.”
“앗! 뭐예요? 제게 어서 말씀해 주세요!”
심심했는지, 아니면 나를 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지.
도울 일이 생겼다는 말에 헤이즈가 두 손을 모으고는 기쁜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
“디바인 에이트. 디바인 나인.”
“아흐…….”
하지만 나의 간결하고도 확실한 목표 설정을 들은 헤이즈의 표정은 이내 어두워졌다.
안 되는 것을 되라고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헤이즈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 있다.
사실 나의 고속 성장에 가려져서 그렇지, 헤이즈도 나와 같은 기간 동안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
치유사로서 디바인 세븐의 경지나, 마법사로서 7클래스의 경지나 똑같기 때문이다.
그녀 역시, 나처럼 3년 만에 비약적인 성장을 경험한 것이다.
영지의 ‘일개’ 하녀였던 그녀의 과거를 생각하면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변화였다.
디바인 나인의 치유사는 어떤 일이 가능할까?
진짜 게임에서 최종 보스 정도는 되어야 볼 수 있을 법한 광역 치유술을 전개할 수 있게 된다.
정해진 범위 안에 있기만 한다면…… 수만의 병사를 일시에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른바 광역 힐링.
이것은 나는 물론이거니와 세상의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놀라운 경지이기도 했다.
“할 수 있어, 헤이즈.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전혀 감이 잡히지 않을 때는…….”
내가 말을 살짝 멈추자, 헤이즈의 눈빛이 더 깊어졌다.
“초심으로 돌아가서 가장 기초적인 것부터 다시 확인해 보는 게 좋아. 마법사들도 그러거든. 마법의 기초, 그 이론부터 살피기 시작해.”
“아…….”
“그간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달리 또 드는 생각이 있을 수도 있고. 깨달음은 정말 불현듯, 소리 소문 없이 찾아오니까.”
“예, 폐하. 알겠어요.”
“할 수 있어. 네 스스로의 한계를 어느 선에 가둬 두지 마. 절대로.”
“네!”
헤이즈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의지를 밝히고는 빠르게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호로로록.
스슥. 슥. 슥.
나는 그녀가 건넨 차를 기분 좋게 들이켜며, 양피지에 빼곡하게 글자를 채워 갔다.
던전 공략서였다.
그간 내가 공략했던 모든 던전들에 대해서 꼼수는 물론, 알려진 정공법까지 모두 정리했다.
성마 대전을 대비해서 유능한 인재들이 던전을 통해 성장을 도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일이 그들 모두를 이끌 수는 없으니 공략서를 통해서 빠른 지름길을 제시할 생각이었다.
지금부터는 명분보다는 극단적인 실리를 추구할 필요가 있었다.
“레크나트를 잡기 위해 무슨 짓인들 못 할까. 버그, 꼼수. 이젠 나만의 전유물이 아냐!”
내 생각은 확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