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283
제 283화
90장. 나는 나를 넘어선다 – 1화
원(One).
그저 한 글자의 이름으로 명명된 보스 몬스터만이 홀로 층계를 지키고 있다는 것만 알 뿐이다.
마왕의 분신 혹은 마왕의 예행연습이라고도 불리는 존재가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사실이자 전부였다.
“갑시다. 미궁 공략의 끝을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합시다. 오롯이 성마 대전을 대비할 수 있도록.”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전투 준비는 끝났다.
이제…….
나스 대미궁의 끝을 볼 때가 왔다.
* * *
100층에 들어선 순간.
“아…….”
라키스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사실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미궁의 최상층.
그곳에는 당연히 지옥이 펼쳐져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간 상대했던 수많은 몬스터는 물론이거니와, 자레드가 줄곧 강조해 왔던 보스 몬스터가 당당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라키스를 위시한 동료들을 반긴 것은 끝없이 펼쳐진 지상낙원과도 같은 광경의 연속이었다.
대지로 내리쬐는 햇빛은 따사로웠고, 지면에서 피어오르는 맑은 기운은 몸의 기운을 북돋워 주었다.
몬스터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자연의 풍요로움을 만끽하고 있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와 동물의 사뿐한 발걸음만 있었을 뿐.
“폐하가 격리됐다.”
딱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 자리에 일행과 응당 함께 있어야 할 자레드가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었다.
“……폐하!”
그때, 하늘을 올려다본 헤이즈가 무언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것은 상공에 수평으로 펼쳐진 거대한 화면이었다.
현재 대륙 전역에 보급되어 있는 영상 장치를 통해 영화를 보듯, 자레드의 모습이 보였다.
그 안에서 자레드는 미소를 지으며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원(One). 네 녀석의 선택지는 대장만 따로 뽑아내서 처리를 하는 거였군. 효율적이네.
“폐하!”
자레드의 목소리를 들은 동료들이 다급히 소리쳤지만, 그곳까지는 목소리가 닿지 않는 듯했다.
그 대신.
지켜보는 모두의 눈앞에 똑같은 화면이 생겨났다. 난생처음 보는 상태창이었다.
[동기화가 가능합니다.] [동기화를 진행하면 이면 세계로 소환된 자레드의 모든 경험, 고통, 느낌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단, 자레드가 죽을 경우 동기화를 진행한 대상도 함께 사망하게 됩니다.]상태창을 채운 언어는 다름 아닌 나스 언어였다.
자레드에게 직접 상태창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었지만, 다들 이것이 거짓으로 구현된 환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동기화해 주세요!”
그때, 헤이즈가 더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외쳤다.
함께하지도 못하는 마당에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또한, 자레드가 느끼고, 깨닫고, 보는 모든 것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상대는 나스 대미궁의 최종 보스다. 그에게 뭔가를 얻을 수 있다면, 엄청난 깨달음이 될 듯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어떻게 폐하를 효과적으로 지원할지만 계속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슈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자레드의 앞에서 전공을 세우고 싶었는데, 이래서는 들러리 역할밖에 못 하게 됐다.
“분명 우리가 전투에 참여할 수 없도록 만들고, 또 이런 방식을 취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헤이즈가 침착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간 자레드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몇 마디를 덧붙였다.
“폐하께서 나스 대미궁의 모든 것에는 ‘신의 안배’가 있다고 하셨었어요. 오늘의 이것도 분명히 신의 의도가 있을 거예요!”
힘주어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간 수많은 버그와 꼼수로 층계를 공략할 때마다, 동료들에게 자레드가 했던 말이기도 했다.
신의 안배가 있다.
신이 알려 준 꼼수가 있다.
다들 그 신이 주신 ‘라디우스’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그랬다.
바로 그때.
“아앗!”
동기화가 막 끝난 헤이즈가 전신을 휘감는 싸늘한 한기를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레드가 이면 세계에서 느끼고 있는 한기를 그대로 전달받은 것이다.
따스한 봄날처럼 안락한 이곳과 달리, 자레드가 있는 이면 세계는 대륙 북부에 위치한 악몽의 숲보다도 훨씬 추웠다.
-이거였군. 헤이즈, 나와 연결한 거야?
그때, 자레드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헤이즈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네, 폐하!”
-멍청한 녀석, 왜 연결해? 잘못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폐하 홀로 외로운 전투를 하시게 할 수는 없어요! 제가 도움이 될 수는 없더라도…….”
-나도 이건 판단이 잘 서지 않네. 경험을 얻으려면 나와 동기화해야 하지만, 그러면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어.
“알고 있어요, 폐하.”
-모두에게 말해 줘. 선택은 자신의 몫이라고. 그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라고.
“네, 폐하. 꼭 그리 전할게요!”
짧은 교신이 끝났다.
그리고.
“폐하께 연락이 왔어요!”
헤이즈가 거침없이 자레드에 대한 소식을 전달했다.
* * *
5분 후.
“원, 도대체 네 목적이 뭐야?”
나는 정처 없이 얕은 호숫가 위를 걷고 있었다.
내가 원해서 온 곳이 아닌, 시작점이 애초부터 이곳이었다.
즉, 녀석이 이곳으로 나를 불러들인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자신의 모습은커녕, 기척조차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라키스’ 님이 동기화를 진행하였습니다.] [‘엘라’ 님이 동기화를 진행하였습니다.]“미치겠군. 이걸 좋아해야 해, 말아야 해?”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했다.
나에 대한 신뢰라고 생각하면 더할 나위 없이 기분 좋은 일이다.
나와 생사를 함께해도 된다고 여길 만큼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이고, 모든 걸 맡긴단 뜻이니까.
하지만 내가 만에 하나라도 실수를 해서 잘못된다면, 비단 내 목숨 하나로 끝나지 않게 된다.
그 부담감이…… 생각보다 컸다.
연대책임의 부담감이라고 할까.
팟팟. 팟. 팟.
약간의 시간차는 있었지만.
동기화는 순식간에 이뤄져, 모든 동료들과 연결됐다.
라키스, 미아, 레나, 엘라, 마이라, 이자벨, 헤이즈, 클로이, 나오미, 아슈르.
모두의 이름이 별도로 활성화된 특수 상태창인 ‘동기화 상태창’에 표시됐다.
-…….
들리는 목소리는 없었다.
분명 대화가 가능한 시스템이지만, 내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침묵을 지키는 듯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오.”
나는 짧은 말로 결의를 다졌다.
아직 전투는 시작도 안 했다.
그저 호숫가의 거센 찬바람을 열심히 맞고 있을 뿐이다.
한데 바로 그때.
첨벙. 첨벙. 첨벙.
분명 방금까지 아무것도 없던 호숫가 한가운데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건…….”
내 눈앞에 나타난 상대방의 모습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인간형이든 파충류든 벌레든 무엇이든 몬스터를 상징하는 무언가가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정면에서 나를 반긴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
돌아가신 선대 영주이자 내 아버지인 바렛 자작이었다.
내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는 살아생전 가장 멋졌던 그 모습을 하고 계셨다.
아주 잠깐.
이곳이 사후 세계와 같은 곳은 아닐까 생각했다.
나스 대미궁의 가장 맨 끝자락에서 이승에서는 만날 수 없을 인연을 만나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감성과 감상이 통하는 세상이 아니지.’
나는 냉철하게 본질을 꿰뚫어 봤다. 죽은 사람은 되살아날 수 없고, 산 사람은 죽기 전까지만 살아 있을 뿐이다.
스릉!
푸욱!
나는 미련 없이 멸살의 단검을 아공간에서 꺼내, 아버지의 왼쪽 심장을 찔렀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의 행세를 하고 정체를 숨기고 있는 ‘그놈’을 노린 것이다.
-아!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아마도 아버지의 모습을 또렷하게 기억하는 헤이즈와 라키스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꼼수 부리지 마, 이 새끼야.”
나는 원색적인 욕설로 아버지의 모습을 흉내 내고 있는 그놈을 불렀다.
“태풍아, 나다! 왜 나를 이토록 슬프게 만드는 것이냐!”
하지만 그놈은 더욱 장난의 수위를 높였다.
이제는 전생의 내 아버지의 모습을 제법 흉내 내기 시작했다.
애쓰고 있는 ‘그놈’에게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말투가 흡사 국어책을 읽는 느낌이었다.
더빙을 하려면 제대로 하던가.
“디스인티그레이트.”
나는 더 볼 것도 없이 분해 마법을 아버지의 가슴 언저리에 그대로 직사(直射)해 버렸다.
저건 아버지가 아니다.
그저 아버지를 닮은 환영일 뿐이지.
지금 내 아버지는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 여동생과 함께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실 것이다.
하지만 분명 살아 계실 것이고, 이런 말도 안 되는 곳으로 끌려오셨을 리는 만무하다.
“후후, 꽤 골치 아픈 놈이군…….”
그때.
드디어 아버지의 모습을 열심히 흉내 내던 녀석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아른거리던 아버지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연기처럼 검게 이글거리는 형체가 공중에 모습을 드러냈다.
[초월적 존재] [파라디소 라스가르트]“네놈의 이름이 파라디소였군.”
이거였나.
별것 아닌 연결 고리지만.
최종 보스의 가칭으로 알던 ‘원’의 이름이 내가 즐기던 게임의 이름과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되자 기분이 묘했다.
파라디소.
낙원을 상징하는 이탈리아어.
어둡고 음침한 태생과 완벽하게 상극인 이름을 가진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기다림에 지쳤다. 나약한 인간은 짐이 머물고 있는 안식처에 발끝도 닿지 못하더군.”
“짐? 1인 국가야? 혼자 사는 주제에 황제라고 하게?”
“무의식이 항상 말하더군. 언젠가 짐의 옥좌를 함부로 빼앗으려 하는 간악한 무리를 쳐부수라고.”
“그게 나다, 이 얘기인가 보네.”
“네놈을 죽이고, 무의식에 숨겨진 내 예전의 기억을 찾겠다.”
파라디소의 말은 냉랭하고, 차가웠으며, 무뚝뚝했다.
의 개발진에 의해 인위적으로 창조된 존재.
지금까지 공략해 온 수많은 던전의 보스 몬스터가 그랬듯, 파라디소에게도 과거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혹은 개발진에 의해 강제로 주입된 왜곡된 스토리가 자신의 운명처럼 입력되어 있겠지.
어쨌든 최종 보스를 만났다.
한 가지 불쾌한 점이 있다면, 이미 내 아버지를 알고 있을 만큼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것이고 할까.
그 점이 왠지 불안했다.
어느 시점부터 나에 대한 일종의 ‘스캔’이 이뤄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느끼게 해 주마.”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은 파라디소의 몸이 순식간에 변하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한 줄기 연기와도 같았던 파라디소의 모습은 어느새 인간의 형체를 갖췄다.
그리고.
“후후후.”
내 앞에서 파라디소가 육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바로 나를 하나부터 열까지 남김없이 쏙 빼닮은, 또 다른 자레드의 모습이었다.
“……빌어먹을.”
내 앞에 내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