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285
제 285화
90장. 나는 나를 넘어선다 – 3화
그로부터 얼마 후.
‘예측이…… 엇나가고 있다.’
파라디소는 자레드와의 전투에서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하는 균열에 당황하고 있었다.
자레드와의 전투는 손쉬웠다.
마치 열어 둔 길만을 따라서 열심히 기어가는 개미와 개미굴을 보는 것처럼 모든 것이 훤했다.
애초에 자레드가 나스 대미궁 100층에 진입하는 순간, 그의 모든 정보가 주입됐기 때문이다.
신들의 세계를 지키는 수문장.
파라디소는 자신을 그런 존재로 인식했고, 그만큼 자신에게 전능한 힘이 주어졌다고 믿었다.
시작부터 얼마 전까지 줄곧 우위를 점했던 파라디소는 무난한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자레드는 점점 지쳐 가고 있었고, 마력의 농도도 계속 옅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즉, 더 이상 마력을 폭발적으로 끌어올 수단이 사라졌으며, 원천 자원이 고갈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반면에 파라디소는 자신을 위해 설계된 대미궁 100층의 기운을 오롯이 취하며, 무한 동력을 이끌어 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조건.
지고 싶어도 질 수 없는 상태.
파라디소는 그렇게 압도적인 우월감을 느끼며 자레드를 서서히 말라 죽여 가고 있었다.
적어도 얼마 전까지의 생각은 그러했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났다.
훤히 들여다보이던 자레드의 수가 전혀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자레드가 스스로 자신의 눈을 가린 시점부터 모든 것이 예상과 엇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자레드도 그만큼의 대가를 치렀다.
상처 입은 몸 여기저기서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고, 기침을 할 때마다 피를 토해 냈다.
하지만.
“크윽…….”
파라디소의 상태도 썩 좋지 못했다.
자레드에게 당한 일격으로 대퇴부에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파라디소에게 약점이 있다면 자레드의 마법을 똑같이 흉내 낼 수는 있어도, 아티팩트까지 똑같이 할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즉, 파라디소에게는 ‘대회복’이나 ‘흡혈’ 같은 회복 수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자레드도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것을 인지했는지, 집요하게 소모전을 유도하는 모습이었다.
‘보이지 않기에 보이고, 생각하지 않기에 더 그림이 또렷해져.’
전생에서 본 소설이나 영화 따위에서 등장인물이 뭔가 역설적인 대사를 읊을 때면, 참 오글거린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본인이 깨달음의 끝에서 직접 경험해 보니, 그 말에 틀린 것이 없었다.
무언가를 가지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니,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오롯이 가질 수 있었다.
처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게 너무나도 불편하고 힘들었다.
그래서 파라디소에게 몇 차례의 일격을 허용했고, 마법으로 인한 부상을 제법 크게 입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그 불편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이 또렷이 보였다.
아울러 상대가 아닌 내 자신만을 생각하며 본능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자.
유의미한 전황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파라디소의 부상이었다.
‘이 깨달음을 위해서 100층이 존재했던 거야. 완전무결하다고 믿었던 나의 완벽한 민낯을 직시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자레드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희열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9클래스의 대마법사.
이미 마법사로서의 끝, 극의에 다다른 자신이었지만 여전히 허전한 느낌이 들었던 숨은 조각!
끝내 찾을 수 없었던 ‘히든 피스’를 마침내 발견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누군가 자신에게 꼭꼭 숨겨 놓고 보여 주지 않았던 마지막 퍼즐을 기어이 찾아낸 느낌이었다.
“하아…….”
만감이 교차했다.
나 자신을 내려놓는다는 간단한 이 한 문장을 실천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가 싶었다.
현생에서 자레드로 환생하며 이 세계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식과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깨달음,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진리의 끝.
그것을 이제야 느꼈다.
갈라딘을 죽였을 때도, 이카젤라를 처치했을 때도 알아차릴 수 없었던 진정한 진리였다.
‘나는 나를 넘어섰고, 너는 나를 넘어설 수 없다.’
그 순간, 확신이 들었다.
반대의 입장이 됐다.
자레드 자신에게 파라디소는 이제 예측 가능한 움직임만을 구사하는 꼭두각시가 됐다.
반면에 자신은 파라디소의 뜻대로 절대 움직여 주지 않는, 한 수 앞을 내다보는 존재가 됐다.
과거보다 현재, 현재보다 미래를 사는 자신. 그런 자신을 예전의 ‘나’는 결코 이길 수 없다.
“파라디소, 이젠 내 차례야.”
“……XX.”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자레드.
그리고 잔뜩 어두워진 표정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파라디소의 표정이 극명하게 엇갈렸다.
분위기가 반전됐다.
* * *
지옥을 보았다.
마치 신이 된 것처럼 지금까지 자레드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파라디소는 어느 순간부터 일방적으로 얻어맞기 시작했다.
자레드의 레퍼토리를 알기에 앞서 나갈 수 있었던 수 싸움은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됐다.
믿는 구석이 없어지자, 파라디소는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악에 받친 분노로 펼친 몇 차례의 마법 공격이 분명 자레드에게 큰 상처를 입혔지만.
자레드는 그런 상처는 통과의례에 불과하다는 듯, 전혀 개의치 않고 맹공을 퍼부었다.
하나를 주면, 열을 받는 식의 불공정한 대미지 교환이 오갔다.
그야말로 최악의 교환 비율.
파라디소는 그렇게 자신을 쏙 빼닮은, 자신이 흉내 내고자 했던 존재에게 완벽하게 제압당했다.
틀에 박힌 고정관념에서 빠르게 벗어난 자레드의 혜안이 모든 것을 뒤바꾸어 버렸다.
한편 같은 시각.
“아아…….”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다.”
“저도요.”
자레드의 전투를 지켜보던 동료들이 하나같이 탄성을 터뜨리고 있었다.
자레드의 생각, 판단, 근거, 사고의 과정 하나하나가 가감 없이 모두에게 공유됐기 때문이다.
시각과 축적된 경험에만 의존하는 전투 방식에서 탈피한 자레드의 모습은 많은 영감을 줬다.
그리고 그것은 전투를 지켜보던 모두에게 내면에서 크고 작은 변화를 순식간에 일으켰다.
‘아!’ 하는 한 글자의 감탄사로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을 만큼, 깨달음의 불씨가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내심 짚이는 것이 있는지, 라키스가 바로 검을 움켜쥐고는 앞으로 나와 섰다.
그리고 두 눈을 감고는 기존의 오러 블레이드 전개 위주의 고정된 생각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도 모르는, 그래서 규칙성조차 특정할 수 없는 마음가짐으로 검술을 펼쳐 나갔다.
그렇게 맑은 하늘을 유려하게 수놓던 라키스의 검이 갑자기 잠시 멈추더니 작은 점을 찍었다.
바로 그때.
쇄애애액!
“아아!”
펼쳐 낸 오러 블레이드가 말끔하게 공간을 가르며, 창공으로 뻗어 나갔다.
그것은 지금까지 라키스가 펼쳤던 그 어떤 오러 블레이드보다 강하고 날카로우며, 마나의 정수가 완벽하게 담긴 일격이었다.
“이건…….”
굳이 누가 말하지 않아도.
홀로 판단하려 애쓰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검술의 극의, 오러 블레이드의 정점에 이른 존재인 소드 마스터의 검술이라는 것을 말이다.
“……!”
마치 그것이 도화선이 된 것처럼, 여기저기서 동료들이 벌떡 일어나기 시작했다.
가슴과 머릿속을 가득 채운 무언가가 있어서, 직접 몸으로 풀어내지 않으면 답답할 것 같은.
난생처음 느껴 보는 특이하고도 오묘한 감정이었다.
여기저기서 검술과 마법, 궁술과 주술, 치유술과 비도술의 향연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자레드가 스스로 장벽을 허물어 버렸듯, 같은 경험을 동료 모두가 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어……. 영원히 느낄 수 없을 것 같았던 주술의 정점이 보이기 시작했어.”
이자벨도 감탄했다.
평생을 투자해도 다가갈 수 없을 마의 장벽처럼 느껴졌던 8성의 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주술의 틀, 주술의 정석, 교과서처럼 학습된 연계 주술 공격의 고정관념에서 탈피하자.
비로소 새로운 길이 보였던 것이다.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았을 때, 그제야 또 다른 길이 열렸다.
지금껏 욕심에, 조급함에, 다급함에 붙잡고 있었던 미련을 털어 낼 수 있도록 만든 자레드의 영감 덕분이었다.
-이거였어. 우리 모두의 약점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냉정하게 볼 수 없었던 약점……!
자레드의 의미심장한 말이 동기화 상태를 통해, 모두에게로 또렷하게 전달됐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바로 그때.
-크윽.
“아앗, 폐하……!”
화면을 지켜보던 헤이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영상 속에서 자레드와 파라디소가 거의 동시에 앞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복부에 거대한 구멍이 뚫려 버린 누군가는 즉사(卽死)가 확실해 보였다.
부릅뜬 눈과 분노에 찬 눈빛.
그것은 자레드의 모습을 똑같이 닮아 있어 보는 이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단, 죽음과 함께 파라디소는 원래의 검은 형체로 돌아왔고, 모두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자레드 역시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찰나의 순간에 수십, 아니 수백 차례 이상을 오간 마법의 난타전은 자레드의 온몸을 그야말로 넝마로 만들었다.
스윽.
이윽고 자레드와 동료들 사이를 구분 짓고 있던 결계가 허물어지며, 자레드가 허공에서 낙하했다.
“제가 받을게요!”
미아가 바람으로 추락하는 자레드의 몸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며, 그를 무사히 지면에 안착시켰다.
화면 속에서 보았던 대로, 자레드의 상태는 썩 좋지 못했다.
파라디소라는 큰 적을 무너뜨리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폐하의 부상이…….”
“아아, 이런.”
지켜보는 이들 모두의 안타까움을 자아낼 만큼 자레드의 상태가 좋지 못했다.
죽지만 않았을 뿐이지 사실상 죽기 직전의 몸 상태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스스로를 넘어서기 위한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폐하! 폐하!”
헤이즈가 힘껏 자레드를 흔들어 보았지만, 자레드는 아무런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앞뒤를 잴 겨를이 없었다.
헤이즈는 바로 있는 힘껏 자신의 신성력을 끌어올려, 자레드에게 폭발적으로 퍼붓기 시작했다.
“폐하, 이제부터 시작인데 여기서 쓰러지시면 안 돼요! 제발요! 장난은 여기까지만 하셔야 해요!”
헤이즈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치유사로서 수많은 경험을 쌓다 보니 처음 치유의 기운이 주입될 때 대상의 몸 상태를 알게 됐다.
치유의 가능성이 높으면, 기운을 받아들이는 속도도 빠르다.
하지만 이미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거나, 살 가망이 낮은 사람의 경우에는 그 속도가 느렸다.
지금 자레드는 후자 쪽이었다.
끝까지 발악하며 자레드를 죽이려 했던 파라디소의 공격이 남긴 부상 때문인지.
몸 상태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지나친 혹사였다.
자신을 한 단계 뛰어넘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그리고 이를 지켜보고 있을 동료들에게도 그 깨달음을 나눠 주기 위해.
자레드는 자신의 몸을 망설임 없이 희생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모두가 유의미한, 정말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지만!
정작 본인은 깨어날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 없는 심연 속으로 빠르게 침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