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288
제 288화
91장. 그 후, 1년 – 2화
에서 디바인 나인의 경지는 꿈의 경지로 불렸다.
존재는 하지만 닿을 수 없는, 이른바 신의 영역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9클래스 마법사 플레이어나 소드 마스터 검사 플레이어는 있었어도.
디바인 나인의 치유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개발진도 스스로 난이도가 높게 설정되었음을 인정했을 정도로 어려운 직업군이었다.
하지만 그런 개발진 – 혹은 창조주 – 의 안배를 비웃기라도 하듯, 헤이즈는 디바인 나인을 달성했다.
더 무서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이즈는 늘 예전처럼 한결같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쭐해하거나 으스대는 모습도, 혹은 자신의 힘에 만족하는 모습도.
단 한 번도 보이질 않았다.
“폐하아아아!”
내 시선을 느꼈는지, 언덕에서 열심히 치유 삼매경에 빠져 있던 헤이즈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헤이즈는 내게 참 고맙고, 또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불평불만을 말하지 않고, 항상 나보다 더 앞서서 열심히 뛰어다니며 일했다.
아울러 내 영향이 쉬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직접 나가서 백성과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특히 여성들 틈에 섞여, 그들의 두려움을 적극 공감하면서 그 안에서 희망을 심어 주는 역할도 했다.
이는 내가 시킨 적이 없는, 하지만 너무 완벽하게 수행해 낸 마치…… 퍼스트레이디와 같은 역할이었다.
‘놓치고 싶지 않다.’
오래된 생각이지만 내 스스로 입 밖으로나 머릿속으로 구체화하지 않았던 생각이 떠올랐다.
성마 대전을 마무리 짓기 전까지 절대 이 마음을 표현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억제하고 싶은 마음보다, 숨기려 해도 자꾸 틈을 비집고 나오는 마음의 힘이 더 컸다.
나는 정말 복 받은 사람이다.
라키스를 비롯한 충직한 신하들부터 해서, 부족한 나를 무척이나 좋아해 줬던 여인들도 곁에 많았으니까.
물론 눈치 없는 남자인 탓에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들의 마음을 알게 된 경우도 많았다.
이자벨이나 클로이 같은 경우는, 연애 ‘고자’였던 내 전생이 대놓고 활약한 경우이기도 했고.
‘헤이즈가 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이게 사랑인 걸까. 그런 거겠지. 바라만 보고 있어도 행복하고, 늘 함께 있고 싶은.’
헤이즈를 바라보는 내 마음을 여실히 깨닫게 되면서 감정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래서일까?
늘 그랬듯, 반사적으로 나와 거리를 두고 멈춰 선 헤이즈를 향해 나도 모르게 뛰어갔다.
그리고.
꽈악!
“아……?”
헤이즈를 꼭 끌어안았다.
아담한 헤이즈의 몸은 다년간의 전투와 훈련으로 제법 듬직해진 내 품속으로 쏙 들어왔다.
품에 안긴 그녀의 머릿결을 따라 기분 좋은 장미향이 느껴졌다. 그녀가 즐겨 쓰는 샴푸의 향기다.
“안아 보자.”
“폐하…….”
당황한 듯, 어색하게 떨리는 헤이즈의 손길이 조심스럽게 내 허리를 지나 등의 어딘가에 닿았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그녀가 조심스레 허리를 두른 양팔로 나를 꼭 안았다.
포근하고 따뜻했다.
단지 안고만 있을 뿐인데, 마치 온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하고 기뻤다.
나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헤이즈를 내려다본 뒤, 품에 안겨 있는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내 눈빛을 느꼈는지, 헤이즈도 천천히 나를 올려다봤다.
반짝이는 그녀의 눈빛은 하루하루 강행군으로 얼룩진 고된 일과를 잊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젠 숨기고 싶지도, 미루고 싶지도 않아. 헤이즈, 나는 네가 정말 좋다. 네 곁에 있었으면 해. 항상, 언제나, 영원히.”
“폐하…….”
헤이즈가 무어라 말하려다가 머뭇거리기를 몇 차례나 반복했다.
아마도 내 곁에서 학습된 방어기제 같은 것일 터다.
늘 내게 자신의 깊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헤이즈였다.
나를 배려해서일 것이다.
성마 대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나를 흔들고 싶지 않았던 그녀의 의지일 테지.
“정말 많이 좋아해. 항상 내 곁에 있어 줘.”
나는 다시금 그녀를 꼭 끌어안았고, 헤이즈는 어느새 스르르 풀린 두 눈으로 내 품에 다시 안겼다.
잠시 시간이 멈춘 것처럼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깊은 포옹에 빠져 있었다.
나는 내 자신을 탓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마음을 표현할 것을, 하고.
헤이즈가 그동안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지, 반대의 입장이 되어 보니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폐하.”
“응?”
“저도…… 항상 폐하의 곁에 있고 싶어요. 폐하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폐하를 좋아해요.”
기뻤다. 정말 기뻤다.
물론 오래전부터 헤이즈의 마음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그녀의 입으로 직접 확인을 받으니 이리 행복할 수가 없었다.
이래서 남녀가 서로에게 고백이라는 것을 하는 걸까?
자신의 마음이 상대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듯했다.
“헤이즈, 더 많이 너와 함께하는 시간을 만들고 싶고, 감정을 키워 나가고 싶지만…….”
“알고 있어요, 폐하. 저희에게 반드시 나스 대륙을 지켜 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요.”
결연한 표정으로 답하는 헤이즈의 목소리에는 굳건한 의지가 잔뜩 들어가 있었다.
“성마 대전이 끝나면…….”
“네.”
“네게 정식으로 내 마음을 고백하고 싶어. 더 뜨겁고, 더 깊어진 마음으로.”
“영원히 폐하의 곁에서 폐하를 모시고 싶어요. 제 바람은 예전에도, 지금도 똑같아요.”
“이제야 네 마음에 보답을 하는 것 같아 미안할 따름이야.”
“아니에요! 폐하께서는 항상 저를 아껴 주셨는걸요? 폐하의 마음은 늘 느끼고 있었답니다!”
이내 생기발랄한 헤이즈 모드로 돌아와 귀엽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다시 품에 그녀를 꼭 끌어안고는 도망칠 공간조차 만들어 주지 않은 채.
쪽. 쪽쪽. 쪽.
체리향이 물씬 느껴지는 그녀의 입술에 연신 입을 맞췄다.
가볍지만, 그래서 더 로맨틱하게 느껴지는 그런 입맞춤이었다.
* * *
나와 헤이즈는 잠시 휴식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간 단 하루, 단 한 시간도 쉬지 않고 달려온 강행군에 대한 잠깐의 보상이었다.
마침 둘러볼 곳도 다 둘러봤고, 지시를 내릴 부분들도 모두 전달이 끝난 터라 하루의 여유가 있었다.
꿀맛 같은 하루 휴식이 끝나고 나면,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 미래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성마 대전의 대비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고, 준비할 것은 아직도 많으니까.
“오랜만이지, 여긴?”
“네, 폐하! 옛 크리비아 영지의 땅! 제게는 많은 추억이 있는 곳이에요!”
내가 헤이즈를 데리고 온 곳은 나스 대륙 북쪽에 있는 옛 크리비아 영지였다.
지금은 ‘크리비아 특구’로 지정되어 번영의 길을 걷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눈을 떴을 때만 해도 크리비아 ‘소영지’는 그야말로 생존의 장이었다.
북쪽과 동쪽은 마수와 개간되지 않은 황무지가 가득한 곳이었고.
남쪽으로는 로넬라나 마요르카 영지 같은 경쟁 세력들이 득시글거렸던 곳이기 때문이다.
“황도의 풍경이 익숙해져서인지 정말 오래전에 살았던 곳처럼 느껴지네. 그래 봤자 불과 몇 년 전인데.”
“시간이 참 빠른 것 같아요.”
나는 헤이즈의 손을 꼭 잡고, 작은 산길을 따라 걸었다.
영주 저택 바로 뒤에 있는 산길이라, 예전에 내가 살았던 저택이 그대로 내려다보였다.
지금은 내 생가(生家)로 관리되고 있다. 한사코 그럴 필요 없다고 했는데, 신하들이 추진한 사업이었다.
“못난 나라는 놈 때문에 헤이즈가 참 고생이 많았네.”
“그런 말씀 마세요. 저는 한 번도 폐하를 원망해 본 적도, 곁에 있는 것을 고생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답니다.”
헤이즈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개를 격하게 저으며 답했다.
많은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 바렛 자작이 돌아가신 이후,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폭주했던 내 모습이.
물론 전생의 신태풍이었던 내가 현생에 환생하기 전, 원래의 자레드가 벌인 일이었지만.
어쨌든 기억은 생생했다.
나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폭주했고, 미친 듯이 술과 고기만 탐닉했으며, 글라가스 같은 간신을 곁에 뒀다.
망나니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을 때도 헤이즈는 늘 내 곁에 있었다.
내게 모진 욕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항상 그녀는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내가 환생을 하고, 새로운 자레드로 살아가기로 마음을 먹고 달라지기 시작했을 때.
헤이즈가 곁에서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여전히 그 기억이 선명하다. 정말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이 저택은 우리의 추억이 참 많은 곳인 듯해. 헤이즈가 처음 영주 성에 하녀로 왔을 때의 기억도 새록새록 나고.”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 있다면, 그것은 폐하가 계신 이 영주 성에 왔던 거예요!”
“고마워.”
“진심이에요! 호호호!”
힘주어 내 손을 꼭 잡는 헤이즈의 손끝을 따라, 기분 좋은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한 손으로 휘감았다.
개미허리처럼 얇디얇은 그녀의 허리가 한 손에 쏙 들어왔다.
그렇게 우리는 황제와 하녀가 아닌 서로를 좋아하고 아끼는 연인으로서 데이트를 즐겼다.
호화로운 만찬이나 왁자지껄한 축제를 즐기는 그런 화려한 데이트는 아니었지만.
단둘이서, 조용히,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오롯이 함께 즐긴 시간이라 의미는 더 깊었다.
헤이즈도 오랜만의 외출에 어린아이처럼 꽃을 꺾어 머리에 꽂아 보기도 하고.
향기가 물씬 풍기는 꽃을 꺾어 와 내게 선물로 주기도 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더 많은 추억을 찾았다.
오늘이 아니면, 성마 대전이 끝나는 그날까지 옛 추억을 하나도 회상할 수 없을 것 같아서다.
우리는 엘라와 클로이를 처음 만났던 펍에서 – 물론 적당히 얼굴은 숨겼다. – 크리비아 맥주를 시원하게 한 잔 마시기도 했고.
아르케네스를 만났던 로넬라 영지 부근의 산길을 둘러보기도 했다.
우연 아닌 우연이 닿아 아르케네스와 만난 인연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 상계(商界)에 대해서는 한 번도 걱정해 본 적이 없었다.
이것도 복이라면 복이겠지.
기억이 닿는 곳에 우리가 있었고, 우리가 있는 곳에 아련한 마음이 있었다.
그렇게 헤이즈와 과거를 추억하는 데이트를 즐기며, 종종 로맨틱하게 키스를 나누기도 했다.
뭐랄까.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곳에 있으니, 서로를 향한 마음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오늘은 제가 폐하를 위한 맛있는, 비장의 특식을 만들어 드리겠어요!”
우리는 악몽의 숲 근처에 있는 작은 별장에서 함께 하룻밤을 보내게 됐다.
그리고 날이 밝는 대로.
텔레포트를 이용해서 바로 황도로 복귀할 생각이었다.
아마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의 일탈이 될 것 같았다.
오래된 건물을 개조한 별장이라 묵은 냄새가 물씬 풍겼지만, 헤이즈는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그저 기뻐했다.
그리고 메리 요리장에게서 전수 받은 요리 솜씨를 뽐내겠다며, 자신 있게 앞치마를 둘렀다.
그렇게 행복한 저녁 식사가 시작됐다.
기분 좋게 헤이즈와 나눈 와인 몇 잔에 분위기는 어느덧 무르익어 갔다.
그래서일까?
그날 밤.
나와 헤이즈는 무척이나 따뜻하고, 때로는 아찔하고 짜릿하기까지 한.
오직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
연인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