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295
제 295화
93장. 황도의 대혈투 – 2화
“야단났군.”
불길한 예감은 왜 틀리지 않는 걸까.
급히 황도로 돌아온 자레드와 헤이즈를 반긴 것은 끝없이 늘어선 마왕군과 마족이었다.
[마족 무라스카 / 서열 2위] [마족 아카로프트 / 서열 3위] [마족 제터 / 서열 5위]특히 마왕군의 선봉에서 모든 것을 오시하듯 내려다보고 있는 존재의 정체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게다가 이 셋이 전부가 아니었다.
우선적으로 서열 한 자릿수 안에 들어오는 마족 셋만 골라서 보았을 뿐이었다.
그 외에도 서열 10위부터 30위까지의 마족이 열 명도 넘게 분포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의도는 뻔했다.
황도를 아예 초토화, 그러니까 지도에서 지워 버리겠다는 뜻이다.
나스 대륙의 중심이자 신성 제국 연합의 상징을 없애 버리겠다는 강력한 의지였다.
마족 한둘이라면 자레드가 얼마든지 전담해서 막을 수 있겠지만, 지금의 상황은 얘기가 다르다.
놈들이 바보처럼 기다렸다가 하나하나 나서서 각개격파를 당하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희생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터였다.
“레나, 라키스, 엘라, 나오미, 미아, 아슈르, 이자벨. 휘하 부대를 데리고 전부 황도로.”
“클로이, 마이라는 현장에 남는다. 지원 올 필요 없음.”
자레드가 마스터 스톤을 이용해 빠르게 명령을 전달했다.
그레이 엘프 군단을 이끌어야 하는 클로이와, 아직은 마족을 상대하기에 벅찰 마이라는 제외시켰다.
미아는 최후방에서 보조만 한다는 가정하의 조건부 소환이었다.
“차라리 이런 구도가 낫다.”
자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걱정이 됐지만, 생각해 보니 껄끄러운 마족들을 한곳에 몰아 놓은 셈이었다.
서열이 높다고 해서 무조건 상대하기 까다롭거나 강하지는 않다.
이를테면 나이가 든 원로 격의 마족이라면, 서열은 높지만 실제 전투 능력은 현저하게 떨어질 것이다.
그래서인지 자레드가 익히 알고 있는 마족의 원로, 서열 4위 사일러스와 6위 클리안은 이곳에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젊고 힘 있기로 유명한 무라스카, 아카로프트, 그리고 제터가 현장에 나타났다.
“폐하, 왜 마왕군이 언덕 위에 자리만 잡아 놓고 황도로 곧바로 진군하지 않는 걸까요?”
그때, 마치 정지 화면처럼 멈춰 선 채로 기다리고 있는 마왕군을 바라보며 헤이즈가 말했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 몇 걸음만 내디뎌도 언덕의 내리막을 따라 질주할 수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가장 선봉에 선 무라스카는 조용히 팔짱만 낀 채, 정면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박멸(撲滅).”
자레드가 한 단어로 무라스크의 속마음을 읽었다.
고결한 마족이라 스스로를 지칭하는 저들에게 인간은 하찮은 미물이자 벌레 같은 족속들이다.
인간이 해충이나 해로운 동물을 뿌리 뽑을 때, 녀석들의 동굴이나 군락을 찾아 쓸어버리지 않던가?
자레드는 알아챌 수 있었다.
무라스카는 더 많은 인간의 군세가 모이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 여러 번 수고하지 않고도, 더 많은 인간들을 단 한 번의 전투로 격멸할 수 있으니까.
“만만히 봐도 정도가 있지…….”
자레드가 까득, 이를 갈았다.
한편으로는 자존심도 상했다.
얼마나 만만하게 보면 이럴까 싶어서.
하지만 앞서의 대전투에서 추풍낙엽처럼 쓰러진 칸트라 제국군을 생각하면, 저들의 자신감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무승부는 안 돼. 여기서 우리가 죽거나, 아니면 놈들을 완전히 몰살시키거나 둘 중에 하나다.”
“승패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을게요, 폐하. 그저 저를 필요한 곳에 폐하 마음껏 써 주세요.”
“냉정한 얘기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헤이즈.”
“네, 폐하.”
“전투가 시작되면 나와 동료들, 그러니까 마족 사냥꾼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가급적 치유를 아껴 줘.”
“……선택과 집중인가요?”
“마족이 일분일초라도 목숨을 더 부지하고 있으면, 그리고 이곳의 전투를 오래 끌면 끌수록 다른 전선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갈 거다.”
“네, 폐하. 명심할게요.”
헤이즈가 결연한 의지를 내보이며 힘주어 말했다.
뜻하지 않게 마련된 황도의 대전장. 자레드는 여기서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승리를 거둔다면 전장 전반의 분위기를 크게 바꿀 수 있을 듯했다.
물론 정반대의 경우라면…….
마왕 레크나트를 만나 보기도 전에 균형의 추가 마왕군 쪽으로 급격히 기울고 말 것이다.
자레드는 다시 마스터 스톤을 통해 추가적인 명령을 전달했다.
“방위 사령관, 들리는가?”
루드멜.
라키스의 오른팔이자 크리비아 소영지 시절부터 그를 수행해 온 군인이다.
지금은 전장에 투입된 라키스를 대신해, 황도 방위 사령관을 맡은 인물이기도 했다.
-예, 폐하! 신, 루드멜. 폐하의 하명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카실로스 언덕 위에 자리를 잡은 마왕군이 보이는가?”
-예, 폐하! 선명히 보입니다!
“대피소부터 시작해서 사거리가 닿는 황도의 모든 방어 체계를 언덕과 그 일대로 겨누라.”
-그렇게 되면 황도의 북쪽을 제외한 서쪽과 동쪽의 경계가 허술해지게 되옵니다!
“괜찮다. 어차피 자신감에 가득 찬 놈들이라 어설픈 우회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것이다. 혹 그럴 것 같으면, 내가 놈들을 직접 유인하겠다.”
-폐하! 그것은…….
“명령을 수행하라. 그대의 의견을 들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니.”
-분부 받들겠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황도 전역에서 다수의 수성 병기 방향이 재조정되는 것이 보였다.
“헤이즈, 가자. 이제 우리가 전면에 나서서 싸울 때야.”
“네, 폐하.”
서로 꽉 맞잡은 두 손과 함께, 자레드와 헤이즈가 이내 황도의 북쪽으로 향했다.
최전선이 될 장소이자, 대혈투의 장이 펼쳐질 곳이었다.
* * *
같은 시각.
“무라스카 님, 이제 가시죠? 아함……. 심심해 죽겠네.”
무라스카의 옆에 서 있던 아카로프트가 따분한 듯, 하품을 해 대며 말했다.
“아직 그놈이 보이지 않는다.”
“그놈이라 하시면?”
“레크나트 님의 심기를 크게 어지럽힌 인간, 자레드 말이다.”
“뭐, 지난번 전투처럼 쓸어버리다 보면, 언젠가는 고개를 내밀지 않겠습니까?”
“아카로프트.”
“예?”
퍼어어억!
“크어억!”
껄렁껄렁하게 대답하던 아카로프트가 무라스카의 주먹 한 대를 복부에 얻어맞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우리가 이겼다고만 생각하느냐?”
“크윽……. 죄송합니다.”
“우리가 승승장구할 때, 다른 전선에서 동족들이 우르르 죽어 나갔다. 바다에서 수장된 마족의 수만 여덟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놈들도 반격을 했다는…….”
“작정하고 무덤을 팠다는 거다. 우리가 어디에 나타날지도 이미 알고 있었고, 어디가 묏자리로 좋을지도 미리 봐뒀다는 거다. 분하고 자존심 상하지 않느냔 말이다.”
“죄송합니다!”
아카로프트가 무어라 말을 잇기도 전에 제터를 비롯한 다른 마족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레크나트가 없는 현장에서는 무라스카가 그의 대리인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여기가 바로 나스 대륙을 호령하는 크리비아 대제국의 수도라고 했다. 그게 무슨 뜻일까? 여기에 우리가 있으면, 황제는 물론이고 어지간한 놈들은 다 집합할 것이라는 얘기다.”
“……그렇습니다.”
이내 몸을 일으킨 아카로프트가 입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 내며 답했다.
“레크나트 님의 현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전에 모든 것을 끝내 놔야 하지 않겠느냐.”
“역시 무라스카 님……!”
제터가 한껏 아부를 떨었다.
레크나트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무라스카로서는.
이번이야말로 마왕의 후계 자리를 확실히 굳힐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더 모일 때까지 기다린다. 몇백, 몇천 정도가 모인다고 해서 우리의 군세가 무너지진 않는다.”
무라스카는 자신하고 있었다.
이미 칸트라 제국군도 그렇게 궤멸시키지 않았던가?
그들은 무라스카가 이끄는 마왕군보다 5배 많은 규모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만에 와해됐다.
한데 지금 크리비아 제국의 황도에서 파악되는 군세는 그것의 반의반도 되지 않아 보였다.
“변변찮은 놈들……. 이번 전쟁이 끝나면 목숨을 잃은 놈들은 모두 명부에서 제명될 것이다. 그놈들은 마족이라고 불릴 가치도 없다.”
무라스카가 입술을 깨물었다.
인간의 항전은 격렬했고, 지금도 여기저기서 마족과 최상위 정예 마수들이 죽어 나가는 중이다.
확실한 전환점이 필요했다.
영리한 무라스카는 자잘한 곁가지가 아닌, 확실한 뿌리를 노리고 있었다. 바로 자레드였다.
* * *
반나절 후.
현장으로 소환한 동료들과 함께 정예 전력들이 일제히 황도에 도착했다.
지난 1년 동안 대륙 각지에 구성해 둔 대규모 텔레포트 마법진 덕분에 가능한 빠른 소집이었다.
군세가 크게 불었다.
일반 병사들까지 합치면.
“아카로프트라고 했던가요? 제가 맡겠습니다.”
“혼자서는 부족하오. 라키스 경, 엘라 경과 호흡을 맞추시오.”
“괜찮습니다, 폐하.”
“마족은 오기나 투지로 제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오. 이미 경험해 봤을 텐데.”
나는 혼자 무거운 짐을 짊어지려고 하는 라키스에게 일침을 가하고는 엘라를 붙여 줬다.
그나마 더 인원을 배치하지 않은 것은 아카로프트의 약점을 두 사람이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전에 나스 대미궁에서 끊임없이 부활하는 어보미네이션을 상대했었던 우리였다.
그때, 나는 아카로프트에 대한 운을 떼며, 심장을 잘라 내도 죽지 않는 아카로프트의 ‘코어’가 어디인지 알려 주었다.
그곳은 바로 새끼발가락이었다.
“제가 폐하를 지킬게요!”
레나가 의욕적으로 앞장섰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레나와 미아, 그리고 나오미 경은 제터를 맡으시오. 아카로프트의 오른쪽에 있는 저 녀석.”
“폐하……!”
“레나, 지금 장난으로 역할 분담을 하고 있는 게 아냐. 집중해.”
나는 의욕이 과도하게 앞서는 레나의 기운을 살짝 눌러 주며, 계속 배분을 이어 갔다.
“아슈르.”
“예, 폐하.”
“황도의 병사는 어지간한 마수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의 훈련을 받은 자들이지.”
“맞습니다, 폐하.”
“무라스카, 아카로프트, 제터를 제외한 나머지 마족들은 다소 희생이 있겠지만…… 일단 시간은 지연할 수 있을 터.”
“예, 폐하.”
“아슈르는 상위 앞서 언급한 세 마족을 제외한 다른 마족들을 집요하게 견제하도록. 시간을 벌면 된다.”
“예, 맡겨 주십시오!”
“헤이즈.”
“네, 폐하!”
“나만 볼 필요는 없어. 그저 생각날 때 치유술이든 각성술이든 넣어 줘. 다시 말할게. 나만 보지 말고, 팀 전체를 봐.”
“꼭 명심하겠어요!”
“이자벨, 나를 제외한 모두에게 전방위적인 지원을.”
“예, 폐하.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배분이 끝났다.
즉, 내가 직접 무라스카를 일대일로 상대하는 전략을 짰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전력상 비대칭인 우리의 균형이 크게 무너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른 전선에서 주요 전력을 빼 오기에는 여전히 모든 전장이 격전지였다.
애석하게도 ‘남는’ 자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군세가 단 한 부대, 아니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전군 준비!”
준비는 끝났다.
남은 것은 전투뿐.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 그다음에 레크나트를 만날 수 있겠지만.
진다면 영원히 내일은 없을 것이다.
사생결단(死生決斷)!
최후의 전쟁으로 향하는 웅대한 서곡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