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299
제 299화
94장. 마왕 강림 – 1화
“무, 무, 무라스카 님이……?”
“아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적막이 이내 혼란과 충격, 공포로 바뀌기까지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자레드의 동료들과 혈투를 벌이고 있던 아카로프트와 제터에게는 특히 더 큰 충격이었다.
“한눈을 파는군!”
쇄애액!
“커헉!”
찰나에 나타난 망설임과 당황스러움, 그리고 만감의 교차는 어쩔 수 없는 빈틈을 만들어 냈고.
당연한 얘기지만, 자레드의 밑에서 항상 집요하고 끈덕지게 빈틈을 노리도록 주문받았던 동료들은 그 순간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끄아악!”
시간차를 두고 제터에게도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마족도 별거 없잖아!”
한편, 라키스의 오러 블레이드에 오른손을 잃은 아카로프트가 비틀거리는 사이.
아카로프트의 코앞까지 파고 든 엘라가 미련 없이 검을 수직으로 움켜쥐고, 아래를 향해 내리찍었다.
푸우욱!
“끄아……!”
그녀의 노림수는 바로 아카로프트의 ‘새끼발가락’을 노린 공격이었다.
코어가 유지되는 한 ‘무한 부활’의 능력을 지닌 아카로프트는 계속 공격적으로 싸웠다.
방금도 오른손을 잃기는 했지만 다시 재조합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말끔하게 재생이 된 후였다.
“나이스, 엘라!”
이어서 라키스가 배턴터치를 하듯, 엘라의 뒤에서 신속하게 쇄도했다.
그러자 예상외의 타격으로 크게 당황한 아카로프트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솨아악!
“크악!”
그리고 라키스의 오러 블레이드가 정말, 아주 말끔하게 아카로프트의 오른발을 절단해 버렸다.
바로 그때.
파공음과 함께 아카로프트의 등 뒤에 나타나서는 안 될 존재가 나타났다.
바로 자레드였다.
“믿는 구석이 많다는 건, 역설적으로 믿는 구석이 사라졌을 때 가장 위험하다는 뜻이기도 하지.”
마치 죽음을 속삭이는 듯, 나지막한 자레드의 목소리와 함께.
화르르륵!
데큐플 트랜센던스 블레이즈의 열화와 같은 불길이 힘차게 타올랐다.
“크아아아!”
블레이즈의 특징은 지속 시간이 매우 짧으나, 순간적인 고열을 발생시킨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보통 화염의 용도보다는 특정한 뭔가를 ‘녹이려고’ 할 때, 많이 사용됐다.
자레드가 이 마법을 무려 10단계의 초월 마법까지 끌어올렸다는 것은…… 필살의 의지를 천명하는 것이었다.
피핑! 핑! 핑!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아슈르의 매서운 화살 공격이 헤이즈의 신성력과 연계되어 이뤄졌다.
순식간에 달아오른 아카로프트의 외피는 손을 쓸 새도 없이, 마치 허물처럼 픽픽 흘러내렸다.
거기에 아슈르의 화살 공격은 치명적이었다.
흐물거리는 외피의 방어력은 형편없이 낮아져 있었고, 외부 공격에 극단적으로 취약해졌던 것이다.
“윽!”
왼쪽, 심장 위치에 정확히 아슈르의 화살이 명중하는 순간.
늘, 어디를 공격당하더라도 여유롭게 자신의 몸을 재생시키며 상대를 조롱하던 아카로프트가.
“…….”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일격에 절명하고 만 것이다.
[마족 ‘아카로프트’를 제거하여, 마족 사냥꾼의 수치가 1 올랐습니다.] [현재 마족 사냥꾼 : 69 / 99]서열 2위, 3위 마족이 죽었다.
조기에 무라스카를 제압하고, 그 기세로 아카로프트까지 확실하게 제거한 승부수의 성공이었다.
“이제 우리의 시간이다.”
단언하는 자레드의 한마디.
그 말 속에 전장의 모든 과정과 결과, 그리고 미래가 담겨 있었다.
* * *
무라스카와 아카로프트를 죽이기는 했지만, 마왕군의 군세가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나와 동료들이 오로지 마족만을 지켜보며 마크하는 사이, 황도 북쪽의 외성과 내성은 모두 뚫렸다.
최고의 무장을 갖춘 기사, 마법사, 그리고 병사라고 할지라도 마왕군의 인해전술 앞에서는 무력했다.
결국 우리는 서열 5위 제터까지 잡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북쪽이 뚫리고 말았다.
무너진 성벽을 헤치고 들어온 마수들은 보이는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불태웠다.
그뿐만 아니라, 사방으로 산개한 자폭형 마수는 집요하게 사람의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수많은 동족들의 목숨을 내어주면서도, 기어이 빈틈을 찾아내어 그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그 결과, 황도 전역의 대피소에서도 결국은 희생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나는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크리비아 황궁이 불타고, 대로에 세워진 내 동상들이 무너지고 박살나는 것쯤은 관심도 없었다.
오로지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서 뛰었고, 홀로 분전하며 숭고한 희생을 하려는 병사들을 구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없더라도 마족들을 능히 저지해 낼 수 있는 동료들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어서였다.
북쪽의 성이 뚫린 이후.
더 이상 수성의 의미가 없어진 남쪽, 서쪽, 동쪽의 모든 병사들이 중앙으로 집결했다.
이미 도심이 거대 전쟁터가 된 상황에서 성곽 수비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기에.
그렇게 많은 수가 죽어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왕군의 군세는 10만을 넘었다.
최상위의 마족들을 제거하기는 했으나,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그렇게 재차 점화된 두 번째 전투가 시작됐다.
꼬박 이틀의 시간은 쉴 새 없이 벌어진 난전이자 뚫으려는 창과 막아 내려는 방패의 대혈투였다.
* * *
성마 대전 5일 차.
보통 전쟁에서 5일이라는 시간은 단순 진군에 소모되는 시간일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공격한다는 것은 긴 이동 경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마 대전은 달랐다.
동시다발로 상륙한 마왕군은 바로 눈앞의 전선에서 보이는 적부터 초토화시켰다.
게다가 수를 세는 것이 무의미할 만큼, 대륙 여기저기에 나타난 탓에 사방에서 난전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패배보다 훨씬 많은 승리의 깃발을 곳곳에 꽂아 올리고 있었다.
지난 시간을 오롯이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본 채, 착실하게 준비해 온 보람이 있었다.
분명 마왕군의 군세는 드높고 수적으로도 많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병력이 무한대인 것은 아니었으니까.
인해전술이 더 이상 먹히지 않기 시작했고.
특히 신성력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조직적으로 대응하고, 그동안 지속된 전투로 경험이 꾸준히 쌓이면서.
마수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와 동료들은 멀티 텔레포트를 이용해 신속하게 제보를 받은 전장으로 이동했고.
핀셋으로 골라내듯 마족만을 집요하게 골라 죽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생각대로 순탄하게 풀리지는 않았다.
부상자가 발생했다.
아슈르와 나오미.
두 사람은 헤이즈의 치유술로도 쉽게 회복할 수 없는 심각한 중상을 입었다.
디바인 나인의 치유술.
즉, 최상급 치유술이 거의 전지전능에 가까운 회복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맞았지만, 유독 치유 능력을 활용하기 어려운 부위가 있었다.
바로 심장 근처에 부상을 입었을 경우였다.
헤이즈의 말에 따르면, 치유의 기운을 잘못 주입했다가 오히려 심장에 과부하가 걸릴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이 무엇이냐 하면, 헤이즈가 발현하는 치유의 기운이 너무 강해 심장이 못 버틴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치유술의 단계를 낮추면 단시간에 회복이 불가능하니, 시간을 두고 천천히 치료해야 한다는 논지였다.
그리하여 아슈르와 나오미가 전열에서 이탈하게 됐다.
괜히 근처에서 치료하도록 놔두었다가는 다시 전장으로 나올 가능성이 있었기에 헤이즈와 함께 외곽의 안전지대로 이송시켰다.
레크나트가 현신하기 전까지 헤이즈는 최대한, 그리고 안전한 방법으로 두 사람을 치료할 것이다.
* * *
그렇게 성마 대전 5일 차의 밤을 맞이하게 된 날.
“폭풍 전야일까.”
나는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다.
오늘 밤을 기점으로 대륙 전체에서 발생한 특이사항이 크게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모든 마왕군이 인근의 높은 산이나 계곡, 동굴로 거점을 옮기며 본격적인 게릴라 모드에 들어갔다는 사실이었다.
아울러 ‘마족 사냥꾼’을 통해 확인한 생존 마족의 수는 스물다섯. 적지도 많지도 않은 숫자였다.
그들은 분명 싸울 힘이 남아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때를 노리는 듯했다.
또 다른 하나는.
쏴아아아! 쏴아아!
정말 지금까지 경험했던 우기나 폭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엄청난 비가 쏟아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비가 내리는 수준이 아니라, 물 폭탄이 쏟아지는 수준이었다.
마왕군이 빠르게 후방으로 물러선 것은 물론이고, 우리도 병력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몇 걸음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의 시계도 확보되지 않는 상태에서, 전선 수비는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략적으로 평지나 언덕 일대의 진영 등 버릴 곳은 전부 버렸다.
혹여 주변의 둑이나 제방이 터져 홍수라도 일어나면 그 자리에서 전부 수몰(水沒)되기 때문이다.
덕분에 강제적인 평화가 찾아왔다.
5일 밤낮을 오로지 투지와 근성으로 쉼 없이 싸운 병사들은 휴식이 주어지자, 픽픽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리고 잠을 자고 일어난 병사들은 ‘성녀 이프노스의 치유 국자’를 이용해 메리가 만든 주먹밥과 음식들을 배급받았다.
아주 큰 솥이나 냄비에 국자를 잠깐 담그고만 있어도 아티팩트의 능력이 발현되기 때문에.
그런 ‘꼼수’를 이용해 대량으로 생산한 수많은 주먹밥과 건빵들을 주요 전장부터 보급을 했던 것이다.
이 역시 황도 외곽에 한 번에 수만 명분의 음식을 요리할 수 있는 거대한 시설을 갖춰 두고.
일찌감치 관련 인프라와 사람들을 배치해 둔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메리의 집밥’ 특성이 담긴 음식을 먹은 병사들은 빠르게 면역력을 획득했다.
여전히 초봄인 3월.
거기에다 폭우까지 내려서 생긴 심한 일교차에 유행할지 모르는 감기를 막는 선제적 처방이기도 했다.
인간과 마족.
선과 악.
신과 신의 대결.
레크나트의 현신이 상징하는 바는 너무나도 컸다.
최상위 마족의 죽음까지 감내해 가면서도 여전히 레크나트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끝까지 힘을 끌어모으고 있기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가호 2 : 지정한 한 명의 대상에 대해, 세상의 모든 사람의 기억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쓰게…… 될까?”
나는 신 ‘안젤루스’의 가호의 2번 옵션에 있는 내용을 다시금 확인했다.
만약 성마 대전에서 내가 승리한다면.
그리고 만에 하나, 천만 분에 일이라도 예전에 내가 살던 세계, 즉 전생의 대한민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면.
이 가호를 써서 현생의 모든 사람과 함께했던 인연을 끊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자레드 폰 유칼레스로서 치열하게 살아온 나였지만, 늘 전생에 대한 미련은 있었다.
무엇보다 하루아침에 날벼락처럼 사랑하는 아들, 그리고 사랑하는 오빠를 잃었을 아버지와 여동생에 대한 생각이 많이 났다.
비록 어머니는 사춘기 때 돌아가시긴 했지만, 그래도 셋이서 도란도란 잘 살아 왔던 우리였다.
세상 누구보다 착했던 아버지와 여동생을 생각하면, 지금 전생의 시간이 ‘멈춰’ 있었으면 할 정도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현생에서 쌓은 인연의 깊이도 너무나 커서 무시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역으로.
전생의 아버지와 여동생에게서 나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고민을 매듭지으려면, 우선 이겨야겠지.”
미래의 나에게 그 결정을 내리도록 미루기로 했다.
아직 성마 대전은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이 될 최종 전투.
마왕 레크나트와의 조우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