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301
제 301화
95장. 종막을 향해 – 1화
새벽녘.
저벅. 저벅. 저벅.
“멈춰라! 소속을 밝혀라!”
성곽 밖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유유히 걸어오는 한 사람의 인영에 경비병이 소리쳤다.
성마 대전이 한창 진행 중인 지금, 허가 없이 밖을 나다닐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백성은 물론이고, 군인들도 성문 밖을 함부로 나가는 일이 없었다.
외부 유입이 있을 가능성이라고는 지원군이 도착할 때가 전부인데, 그러기엔 인원이 하나였다.
“…….”
경비병의 제지와 물음에도 불구하고 정체 모를 인영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장대비를 묵묵히 맞으며, 성곽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인데다가, 폭우가 쏟아지는 새벽이라 시야는 매우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누구냐고 묻지 않느냐!”
바로 그때.
우우우웅-.
아무런 주문이나 소리를 내지 않고도 단숨에 상공으로 몸을 띄운 상대는 이내 성곽의 경비병과 눈높이를 맞췄다.
“마법사인가?”
“침입자다! 공격 준비!”
누군지 특정할 수는 없지만, 몇 차례의 물음에 불응한 것만으로도 대응 사격의 이유는 충분했다.
끼리리릭! 피핑! 핑! 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활시위를 당겼고, 코앞의 상대에게 매섭게 화살이 날아갔다.
티잉! 티잉! 티잉!
“아.”
하지만 허사였다.
날카롭게 날아간 화살은 상대의 피부를 꿰뚫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튕겨져 나왔다.
마치 금속에 부딪힌 것처럼 화살이 부러지고 꺾이는 허망한 결과를 낳았다.
반면에 상대는.
어둠 속에 유일하게 선명히 보이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양손을 앞으로 모았다.
위잉! 위잉! 위잉!
동시에 굉음이 일기 시작하며, 앞으로 모은 손에서 자줏빛의 일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뭐지? 도대체 뭐야?”
“으아아아!”
퍼부은 공격이 통하지 않으나, 묵묵히 자신의 공격을 하려는 상대.
아무리 용맹한 병사라고 한들, 공격과 방어가 성립하지 않는 상황에서 태연할 수는 없었다.
뿌우우! 뿌우우!
지원을 요청하는 병사들의 나팔 소리가 들렸고,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출동하는 마법사들의 수도 꽤 있었다.
성마 대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모든 요새와 성에는 무조건 기사와 마법사가 배치됐다.
산골이나 험지에 있는 요새라고 해도, 고급 전력을 누락시키는 일은 없었다.
바로 이런 경우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빠직! 빠지지직!
굉음이 폭음으로, 이어 거대한 왜곡의 파장으로 변한 것은 정말 한순간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이후에 펼쳐진 광경이었다.
과아아아아!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음과 함께 상대의 손끝에서 출발한 자줏빛의 충격파가 정면으로 방출됐다.
다음 순간.
콰직! 콰지지지직! 콰직!
성벽, 망루, 민가, 이동식 방어 요새 등등 크기와 견고함에 상관없이 충격파에 노출된 모든 것이 모조리 박살이 났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단지 누군가에 의한 공격 한 번 받았을 뿐인데, 성벽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뿐만 아니라, 마치 부식이라도 된 것처럼 한 줌의 재가 되어 비바람에 흩날려 사라졌다.
말 그대로 성벽이 ‘삭제’된 것이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아연실색한 병사들이 도망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상공에서 자신을 오시하고 있는 존재를 봤다.
인간이었다.
아니, 인간을 빼닮은 어떤 특별한 존재였다. 분명히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매우 이질적인.
“더럽고 추악한 벌레에게는 명예로운 죽음도 아깝지.”
이윽고 그가 검지 끝을 이용해 마치 총을 쏘듯, 방아쇠를 당기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퍼석!
“으아아아!”
병사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그를 정면으로 지켜보고 있던 병사 하나가 산산조각이 나 없어졌다.
마치 폭죽처럼 펑 하고 터져 버린, 그야말로 개죽음이었다.
“이곳에 살아 숨 쉬는 모든 인간을 지금부터 깨끗이 청소할 것이다. 용맹한 하수인들은 진격하라.”
키에에엑!
이윽고 명령이 떨어졌다.
무너진 성벽을 향해, 성벽 외곽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마왕군이 맹렬히 돌진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가까운 시간을 소강상태로 있던 성마 대전의 재개였다.
그 선봉에는 바로 마왕 레크나트가 있었다.
* * *
그날, 정오.
“완벽한 섬멸을 생각하는 건가.”
나는 뒤늦게 현장에서 도착한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다.
예상대로 레크나트의 현신은 이뤄졌고, 주변의 모든 땅을 타깃으로 한 절멸(絶滅)이 시작됐다.
연락이 즉각 닿지 못했던 것은 통신석 연락을 극단적으로 방해하는 어보미네이션의 존재 때문이었다.
게다가 어보미네이션이 없어도, 레크나트가 뿜어내는 어떤 기운이 전파 간섭을 일으키는 듯했다.
나는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바로 모든 군세를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나스 대륙 전역에 퍼져 있던 마왕군이 레크나트의 본대가 있는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물론 절대적인 거리가 매우 먼 북부, 서부, 동부의 경우에는 되레 수성에 돌입하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레크나트의 마왕군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영리하게 시간을 벌 속셈인 듯했다.
지극히 호전적이었던 마왕군의 태세 전환은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폐하! 마왕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병사의 몸이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고 합니다. 신을 전장으로 보내 주시옵소서. 폐하의 옥체를 보존하셔야 합니다!”
라키스는 연신 자신을 선봉으로 보내 달라며, 극구 나의 출전을 말리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동료, 신하들의 말도 똑같았는데, 내가 죽으면 다음이 없다는 생각 때문인 듯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망설이는 이 순간에도 수십, 수백 명의 병사와 백성이 정말 거짓말처럼 죽어 갈 것이오. 내가 가지 않으면, 이 전쟁은 끝나지 않아.”
나는 단언하듯 말했다.
아직 레크나트를 제외하더라도, 마족은 많이 살아 있었다.
내가 레크나트를 상대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내가 레크나트의 발을 묶어 놓는 동안, 다른 마족들을 처리할 전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지금 내 곁에 있는 라키스, 레나, 엘라 등을 위시한 동료들이었다.
더군다나 나오미와 아슈르가 부상으로 전열을 이탈한 터라, 한 명의 부재도 허용할 수 없었다.
“폐하, 그렇다면 저를 꼭 데려가 주세요!”
헤이즈가 절실한 목소리로 내게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레크나트의 마왕군은 크게 세 갈래로 이동하고 있다고 했어. 그중에 중앙군을 제외하면, 나머지 좌군과 우군에 마족들이 대거 배치되어 있는 식이야.”
“…….”
“여기 있는 모두는 바로 좌군과 우군의 마족을 상대해야 하오. 레크나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어.”
“하지만, 폐하…….”
“격전지를 제외한 모든 전선의 전력이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어. 레크나트는 무라스카처럼 대규모로 깜짝 이동하는 전술을 쓰지 않았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말씀해 주세요.”
“차례대로 지도에 있는 모든 생명의 흔적을 지우듯, 남쪽부터 밀고 올라오겠다는 얘기야. 절망의 사형 선고인 것은 맞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나스 대륙 남부에서 이 비극을 막을 수 있다는 뜻도 돼.”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알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조국의 평화와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며, 숭고한 희생을 하는 병사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너무 잘 알기에 흔들리지 않고, 최대한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나를 믿는다면, 내가 홀로 전투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줘. 경들에게도 다시 한번 말하겠소. 짐을 믿으시오. 내가 지금까지 그대들을 실망시킨 적이 있었소?”
“없었습니다!”
모두가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이미 생각을 굳혔다.
영혼 격리의 반지를 레크나트에게 쓰기로.
내가 레크나트를 이길 자신이 없어서 쓰려는 것이 아니라,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함이었다.
황도의 대혈투에서도 조기에 무라스카를 제압했지만, 다른 마족이 살아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게 마왕이라면 차원이 다를 것이다.
정말 손짓 한 번과 분노의 포효 한 번에 파리 목숨처럼 병사와 백성들이 죽어 나갈 수 있다.
“정녕 짐에게 도움 주기를 원한다면, 그대들에게 배정된 전선을 모두 정리하고 오시오. 알겠소?”
“예, 폐하.”
교통정리는 끝났다.
헤이즈는 미련이 잔뜩 남은 눈빛이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녀도 이제 말괄량이에 생기 발랄한 하녀가 아니었다. 나스 대륙의 기둥과 같은 치유사다. 절대 대체 불가능한.
“갑시다.”
나는 짧게 다음 명령을 내렸다.
* * *
쏴아아아. 쏴아아.
구르르릉! 쿠콰콰쾅!
쉬지 않고 기록적인 폭우를 쏟아 낸 하늘은 기어이 사고를 내고 말았다.
레크나트의 움직임이 포착된 서남부 제9 전선 일대에 도착한 자레드는 폭음과 함께 둑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이윽고 거대한 물줄기가 사방으로 흩뿌려져 나가며, 지면의 모든 것을 흙탕물로 적셨다.
아직 마왕군은 도착도 하지 않았지만, 대지 위에는 무시무시한 죽음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마음은 확실히 편하네.”
전장으로 나 홀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 지금처럼 마음 편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오늘까지 정말 착실하고 꼼꼼하게 준비해 온 시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적어도 나스 대륙 전체에 암운을 드리우게 한 장본인인 레크나트를 확실히 차단할 방법이 생겼으니까.
“…….”
샤아아아.
자레드는 여전히 따사롭게 전신을 감싸고 있는 백색의 기운을 뿌듯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헤이즈가 헤어지기 직전까지 전력을 다해 자신에게 시전해 준 치유술과 각성술의 흔적이었다.
순간 어지러워 비틀거렸을 정도로 헤이즈는 모든 신성력을 자신에게 밀어 넣었다.
어차피 이동하면서 다시 회복될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폐하! 꼭 돌아오셔야 해요. 그때까지 이 악물고, 폐하를 위해 열심히 싸우고 있을게요!”
헤어지기 전에 자신의 품에 꼭 안겨 외치던 헤이즈의 말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마 옆에 있던 이자벨이 그녀를 제때 말리지 않았다면, 기어이 눈물까지 쏟아 냈을 터였다.
“네가 유일한 내 벗이구나. 잘해 보자.”
자레드가 옆에서 자신을 지키고 있는 1기의 타트라 넥스, 즉 타넥스를 바라보았다.
대륙 전역에서 운용 중인 타넥스는 수백 기가 넘었지만, 현재는 1할만 남고 모두 완파됐다.
초창기 타넥스의 공중전에 고전하던 마족들이 최우선 제거 목록에 타넥스를 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지금은 수가 극히 줄어들어 있었고, 자레드도 달리 차출하지 않았다.
다만 출발하기 전, 사비오로부터 개량된 타넥스 한 기를 제공받은 것이 전부였다.
“폐하, 모든 저장 공간에 마나를 가득 채웠습니다. 긴급한 상황에서 마나를 공급할 대체재가 될 겁니다.”
그것은 바로 자레드의 ‘마력 연료 통’ 역할을 해 줄 개량형 타넥스였다.
전투 능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안정적인 마력 보급에 특화된 녀석이기도 했다.
“좋아, 이제…….”
파아아앗!
자레드가 거센 빗줄기가 쏟아지는 창공을 가르며, 다시금 빠르게 남하하기 시작했다.
보지 않아도, 만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최후의 숙적이 저쪽에서 오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스륵. 스륵. 스르륵.
자레드가 왼손에 낀 반지를 조심스럽게,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만지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