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308
제 308화
96장. 숭고한 희생 – 4화
헤이즈의 잘못은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레크나트가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더 이상 변수가 없다고 안심한 내 잘못이었다.
분명 레크나트의 본체는 빠르게 산화되고 있었다.
마치 용광로 속에 던져진 로봇을 보는 것처럼 죽음을 향한 급행열차를 타고 있었다.
하지만 레크나트의 체내에는 레크나트의 ‘본신’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제2의 개체가 있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레크나트는 조종당하고 있던 껍데기에 불과했을 뿐이고, 진짜는 이 녀석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갓난아이보다 조금 더 큰, 정말 외계인처럼 생긴 물체가 헤이즈에게 질주했다.
그것의 양손에는 이글거리는 열기가 있었고,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저것에 닿으면 죽는다.’
내가 조금만 망설여도 눈앞에서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 말이다.
“크윽.”
회복된 체력과 무관하게 바닥을 드러낸 마력과 누적된 피로로 내 몸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파앗!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이즈를 구하기 위해 헤이스트를 전개했고.
터업!
나는 가까스로 헤이즈에게 도착하기 전의 ‘레크나트’를 붙잡을 수 있었다.
“이 새끼야, 나를 봐!”
“쿠잇! 쿠잇! 쿠이이이잇!”
방금 전까지 유창하게 말을 지껄이던 레크나트는 알 수 없는 언어를 중얼거렸다.
그리고.
치이이익.
“크아아악!”
놈의 양손이 내 양팔을 붙잡자, 팔뚝의 살점이 급속도로 녹아 버리기 시작했다.
“폐하!”
“물러서! 얼른! 너는 이런 놈을 상대로는 한 치도 버틸 수 없어!”
힘껏 소리쳤다.
살기 어린 목소리로 소리치자, 헤이즈도 크게 놀라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매번 그녀에게 꾸짖거나 화내는 포지션을 취하기는 하지만, 모든 것은 늘 헤이즈를 위해서였다.
그래도 왠지 구박만 하는 포지션인 듯해서 매번 미안하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레크나트를 저지하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처업. 처어업. 처업.
녹으며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레크나트의 ‘껍데기’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였다.
마치 화면을 되감기라도 하는 것처럼 녹아내렸던 레크나트의 육체들이 빠르게 재조합되고 있었다.
“이 X발 X끼. 도대체 각성을 몇 번이나 하는 거냐.”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본질을 꿰뚫어 보려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4차 각성.
뭔 놈의 각성이 이리 많은지. 이제는 죽은 시체를 되살리는 원상 복귀마저 시도하고 있었다.
“나 혼자 죽을 수는 없다. 네놈과 함께 죽겠다. 언젠가 또 다른 마왕이 이 세계를 찾아오기 전에 내가 모든 것을 끝내겠다!”
아울러 방금까지 외계어로 일관하던 레크나트가 기어이 들을 수 있는 말을 토해 냈다.
자폭인 걸까.
나와의 동귀어진으로 끝난다면 다행이겠지만, 애석하게도 자폭이 그리 단순할 것 같지 않았다.
쿠구구구구!
그도 그럴 것이 육신의 재조합과 함께 주변의 마력이 대거 한 점으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이것은 대폭발의 징후였다.
위력이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마치 평원의 한복판에서 핵폭탄과 유사한 폭발을 일으킬.
그 정도 규모의 동귀어진을 시사하는 듯했다.
그렇게 되면 나와 헤이즈는 물론이거니와, 멀지 않은 곳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는 동료들마저 다 죽는다.
크리비아 제국뿐만 아니라, 대륙의 관점으로 봐도 핵심인 전력들이 대부분 이쪽에 있다.
모두 몰살당한다면, 남은 전력만 놓고 볼 때 전투는 여전히 마왕군이 유리해질 가능성이 컸다.
나와 동료들을 제외하면 마족을 상대로 유효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전력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는 9클래스 마법사 베르하드나 클로이 여왕이 고작일 터다.
“아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헤이즈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뭐라도 해 보고 싶은 그녀의 투지와 알 수 없는 결과물에 대한 걱정이 동시에 느껴졌다.
헤이즈는 최고의 치유사다.
내가 없는 자리는 어떻게든 동료들이 메울 수 있겠지만.
그녀가 없는 자리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다.
‘내 손으로 끝맺어야 해.’
나는 차분하게 생각하고, 또한 결심했다.
결자해지(結者解之).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면.
시작도 내가 했다면, 끝을 맺는 것도 나여야 한다.
그리고 그 끝에 내가 아닌 다른 소중한 사람들이 휘말릴 이유는 없었다.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내 곁에서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았다는 것, 오직 그것뿐이었다.
어쩌면 내가 이 세계에 전생하지 않았다면, 이런 삶을 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성마 대전의 비극도 어쩌면 시작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의 플레이어인 내게 맞춰진 이 세계의 스토리가 시작되지도 않았을 테니까.
“…….”
1414년 1월 1일 이후.
1419년 3월 9일인 오늘까지.
약 5년의 시간 동안 정말 많은 추억을 쌓았다.
유능한 부하를 얻었고, 소영지였던 크리비아를 대륙의 대제국으로 키웠으며.
과분하게도 수많은 동료들과 백성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게다가 이자벨, 클로이, 아키, 헤이즈와 같은 여인들에게서 분에 넘치는 사랑도 받았다.
‘헤이즈.’
그중에도 가장 눈에 밟히는 건 언제나 내 곁에서 변함없는 동반자가 되어 준 헤이즈였다.
‘사랑한다고 말 한 번 하지 못했네. 멍청한 XX.’
나는 현생에서도 어김없이 발휘했던 모태 솔로의 어리바리함을 떠올리며 자책했다.
전생에 직장 동료들이 내게 매번 ‘연애 고자’라는 말을 술김에 지껄이곤 했었다.
애써 무시하며 살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영락없는 그 꼴이다.
치이이익!
“크으으윽!”
아련한 생각도 잠시.
팔뚝은 어느새 뼈가 보일 정도로 녹아내린 상태였고, 그새 재조합이 완성된 레크나트의 몸에서는 기괴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대폭발 직전의 전조를 보듯이, 주변 공간과 기운이 왜곡되며 광풍이 불고 있었다.
“헤이즈, 뒤를 부탁해.”
“네?”
나는 헤이즈에게 일방적인 작별 인사를 남겼다. 그리고 아공간에서 꺼낸 마스터 스톤에 마지막 말을 남겼다.
“지금 이후로 모든 지휘권은 라키스 경에게 넘긴다. 모두 합심하여 마왕군을 끝까지 막고, 승리하거든 전후 복구에 힘쓰라.”
이는 유언(遺言)에 가까웠다.
레크나트와의 악연을 더는 이곳에서 매듭지을 수 없게 됐으니.
다른 곳에서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함께 끝이 나든, 혹은 어느 한 쪽만 끝이 나든 말이다.
확실한 것은 레크나트는 그 ‘다른 곳’에서 이곳으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
마지막으로 헤이즈의 얼굴을 두 눈에 가득 담았다.
흩날리는 에메랄드빛의 머리카락과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아 낼 듯한 그녀의 눈망울이 각인된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무책임하게 ‘돌아올게’라는 말을 남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꼭, 하고 싶었던 말은 남겼다.
말하기 부끄럽지만, 그래도 내 진심을 억누를 수 없기에 꼭 남겨야 하는 마지막 말이었다.
“헤이즈, 사랑해.”
탁!
다음 순간.
나는 끼고 있던 영혼 격리의 반지의 격리 옵션을 발동시켰다.
[영혼 격리의 반지가 가동됩니다.] [지정 대상의 격리를 위해, 고유 능력의 사용자인 ‘자레드’의 격리가 필요합니다.] [‘레크나트’가 지정되었습니다.] [동시 격리를 시작합니다.]그리고.
콰아! 쿠아아! 쿠아아아아!
무미건조한 메시지와 함께.
나 자신과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레크나트의 본체, 그리고 녀석과 연결된 껍데기가 동시에 차원의 폭풍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격리의 시작.
나는 폭풍 속에 휘말려 점점 흩어져 가는 헤이즈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주르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폐하! 도대체 이게 무슨……! 폐하!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폐하! 폐하! 폐하……!”
절규하듯 내게 외치는 헤이즈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부탁해.”
울컥하는 마음을 억누르며, 나는 그녀가 흔들리지 않도록 무심하게 당부를 남겼다.
파앗!
그리고 모든 것이 어두워졌다.
나도, 레크나트도, 내 주변을 감싸고 있던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거대한 심연으로의 질주였다.
아마도…….
이것이 격리인 것이겠지.
나는 요동치는 시공간의 흐름 속에 유유히 몸을 맡겼다.
지금은 모든 것이 불가항력.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둘 시간이었다.
* * *
“폐하, 폐하……?”
스르르륵.
방금 전까지 굉음과 함께 거센 돌풍이 불던 자리에는 지금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쏟아지던 빗줄기마저 어느새 잠잠해진 공간.
그 위에 다만 딱 한 가지만이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를 채우며, 사뿐히 낙하하고 있었다.
“…….”
그것은 헤이즈가 얼마 전, 자레드에게 선물했던 손수건이었다.
손수건 같은 것은 잘 안 쓴다며 투덜거리던 자레드였지만.
그 이후로 수시로 손을 닦든, 땀을 닦든, 혹은 손목에 이유 없이 묶고 있든.
항상 그 손수건을 애지중지하던 자레드였다. 헤이즈는 그런 자레드의 모습에 무척 행복했고 뿌듯했다.
바로 그 손수건이 주인을 잃은 상태로 힘없이 바람에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투욱.
이내 떨어진 손수건.
“흐흐흐흑!”
헤이즈가 오열하기 시작했다.
굳이 자레드가 말하지 않았어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어떤 능력인가를 활용해서 레크나트와 함께 자신의 몸을 이동시켰다고 말이다.
그는 자신에게 ‘돌아오겠다’는 말도 남기지 않았다. 그저 사랑한다는 말만을 유언처럼 남겼다.
바보 같은 기대를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헤이즈 스스로가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
자레드는 늘 자신에게 닥칠 미래에 대한 판단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이길 수 있다면 자신 있게 승리의 가능성을 점쳤고, 특이한 공략법이 있다면 숨기지 않고 그것을 공개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어떤 장밋빛 전망이나 미래에 대해서도 전혀 속삭여 주지 않았다.
“아냐, 아냐, 아냐……. 내가 이래선 안 돼!”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로 눈물을 쏟아 내던 헤이즈는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자레드의 얼굴만 생각해도 오열하고 싶을 정도로 감정이 북받쳐 올랐지만.
자레드가 사라지기 전에 남긴 당부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뒤를 잘 부탁한다는 말.
그 말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수의 병사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가고 있었고.
수많은 기사와 마법사들이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온 힘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줄 수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자신의 치유 능력이었다.
“끝나고…… 다시 올게요, 폐하.”
헤이즈가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으며, 다시 전장으로 향했다.
아직 끝맺지 못한 전투.
확실한 끝을 봐야만 했다.
* * *
이게 격리인지, 아니면 정체불명의 블랙홀로 떨어지는 과정 같은 것인지.
나와 레크나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추락하고 또 추락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끝없는 추락의 연속이었다.
“나는, 나는! 이 레크나트는 불사신이다……!”
그리고 보이지는 않지만 멀지 않은 어딘가에서 레크나트가 열심히 지껄이고 있었다.
X신 X끼.
같이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 마당에 불사신은 무슨 얼어 죽을 불사신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