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309
제 309화
97장. 종언(終焉) – 1화
자레드는 모든 것을 초월한 것처럼, 전부 내려놓고 레크나트와 싸웠다.
다른 세계로 격리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숨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스 대륙을 레크나트로부터 확실하게 분리시켰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까짓것, 이제 죽어도 상관없어.’
왜 죽음을 쉽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세상을 구했다는 행복감이 커서 그런 듯했다.
그래서 자레드는 무아지경으로 레크나트와 난타전을 주고받았다.
앞서 헤이즈와의 연계 공격으로 반쯤 넝마가 되어 있다시피 했던 레크나트의 몸은 빠르게 걸레짝이 되어 갔다.
물론 자레드의 몸도 어디 한 곳 성한 데가 없었다.
어차피 죽을 몸.
자레드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저 레크나트를 향한 맹공에 모든 것을 퍼부었다.
역설적으로 목숨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자, 모든 공격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 이상 리스크를 고려할 필요도, 그럴 생각도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쿠웅!
이윽고 자레드와 레크나트가 긴 암흑의 통로를 빠져나와, 어딘지 알 수 없는 지면에 부딪혔다.
주변을 둘러보니 화산 한가운데였다.
여기저기서 마그마가 솟아오르고, 열수가 분출되고 있었다.
마치 태초의 지구를 보는 느낌이랄까? 저 멀리 하늘에서는 길게 불꼬리를 단 운석도 제법 떨어지고 있었다.
우우우우웅!
지진에 가까운 땅울림이 있었다.
자레드는 주변 환경에 대한 관심을 끊고, 즉시 레크나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크어어어…….”
약간의 마력 방출을 이용해 반작용을 일으키며 그나마 충격을 최소화한 자레드와 달리.
대비할 새도 없이 뒤통수부터 떨어진 레크나트는 연신 고개를 저으며 신음을 토해 냈다.
하지만 레크나트는 아직 죽지 않은 상태였다.
자레드는 그 이후로도 얼마든지 레크나트가 또 한 번의 각성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긋지긋한 전투, 끝내자. 설령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놈이 죽는 꼴은 꼭 보고 싶다.’
까득, 이가 갈렸다.
이놈 하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가.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레크나트의 명령에 죽은 마족과 마수의 수도 수십, 아니 수백만은 족히 넘을 터였다.
단 한 명의 그릇된 판단과 욕심으로 인해 정말 수천만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힘없이 스러져 갔던 것이다.
이런 악의 원흉은 죽이고 시체까지 짓밟아 놔야 조금이라도 분이 풀릴 듯했다.
파스스스!
자레드가 헤이스트를 전개하며, 비틀거리는 레크나트에게로 향했다.
본인의 마력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상태라 활용 가능한 마법의 개수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여기저기 입은 부상이 많아, 마력 회복도 너무 더뎠다.
다 합쳐도 1천이 될까 말까 한 마력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나는…… 나는!”
“하, 진짜 말 많네.”
터업!
자레드가 레크나트의 멱살을 붙잡고, 지면에 냅다 꽂은 채로 질질 끌었다.
“크윽! 으으으윽! 나는 죽지 않는다!”
파앗!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마치 심연 속 깊숙한 곳에서 악으로, 깡으로 끌어올리듯이 또다시 암흑 기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
자레드는 응용할 수 있는 수단을 살폈다.
그러자 바로 앞에서 거친 열기를 토해 내며, 뜨거운 용암을 분출 중인 구멍이 하나 보였다.
단지 몸을 찢거나, 넝마를 만드는 것 정도로는 레크나트가 쉬이 죽을 것 같지 않았다.
존재, 그 자체를 소멸시켜야 했다. 완벽한 폐기 처분! 그렇게 해야만 살점 하나도 남지 않는 완벽한 죽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뒈져 버려, 레크나트!”
그래서 레크나트의 멱살을 움켜쥔 채 산길을 따라 흐르는 용암 속에 미련 없이 레크나트의 얼굴을 처박아 버렸다.
“크윽!”
엄청난 열기가 순식간에 손을 감쌌고, 피부가 녹아내릴 듯한 느낌에 자레드는 신음을 토했다.
하지만 참아 냈다.
이 정도의 고통은 레크나트와의 전투를 끝맺을 수 있다면 아주 하찮은 고통이라고 여겼기에.
“끄어! 끄어! 끄어어어!”
한편, 얼굴 옆쪽부터 그대로 용암에 처박힌 레크나트는 발광을 하며 아등바등하기 시작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신의 얼굴 반쪽이 통째로 녹아내리고 있는데, 초탈해 있을 수는 없을 터.
찌익! 찌익! 찌이이익!
“윽.”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레크나트의 손길이 자레드의 팔을 미친 듯이 할퀴었고.
투둑.
그 바람에 손에서 빠져나간 영혼 격리의 반지가 하필이면 용암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이내 반지는 엄청난 고열을 견뎌내지 못하고 그대로 녹아 버렸다.
“하, 이 개XX.”
절로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눈앞에서 유일한 귀환 수단이 졸지에 사라진 셈이었지만, 자레드는 개의치 않았다.
놈만 죽일 수 있으면 됐다.
“뒈져라, 좀!”
자레드가 남은 손으로 레크나트의 반대쪽 머리칼을 움켜쥔 뒤.
푸우우욱!
그야말로 레크나트의 얼굴 전체를 담가 버렸다.
순간 남은 마력을 끌어내서 아이언 스킨 마법으로 손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자레드의 손마저 함께 녹아 없어졌을 것이 분명할 만큼 깊숙하게 담갔다.
“……!”
그것으로 끝이었다.
레크나트도 결국 하나의 육신을 가진 피조물(被造物)에 불과했고, 대자연의 분노를 이겨 낼 순 없었다.
이내 머리부터 목젖까지 깨끗하게 녹아 버린 레크나트의 나머지 몸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마왕, 레크나트.
녀석을 자레드의 손으로 기어이 끝장 본 순간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지난 5년을 착실하게 준비해 왔던 성마 대전의 종언이었다.
-자레드! 이 하찮은 인간이 우리를! 우리를 소멸시키려는 것이냐!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저놈의 몸을 빼앗자!
-확률 100%의 도박이 이렇게 실패하는가?
동시에 레크나트의 몸에서 빠져나온 수많은 악신의 형상들이 자레드를 휘감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 하나하나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누구도 패배를 예상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인간 마법사가 만들어 낼 거대한 변수보다 차원의 최강자인 마왕의 절대적 우위를 믿었던 것일까?
[옵션 11 : 악신 사냥꾼 – 악신의 가호를 받는 적을 제거할 경우, 악신까지 함께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어쨌든 그것은 완벽한 패착이었고, 안젤루스 링이 가진 고유 능력으로 악신의 소멸이 시작됐다.
일부 악신들은 자레드에게로의 전이(轉移)를 시도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남은 신성력을 모두 힘껏 뿜어내며, 온몸을 휘감은 자레드의 보호막을 뚫지 못했기 때문이다.
-크아아아아아!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다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절규하듯 외치는 악신의 목소리가 자레드의 귓가에 제법 깊게 꽂힐 무렵.
휘이이이…….
이미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린 수많은 악신의 흔적이 사방에 흩날리고 있었다.
아울러 생기를 잃은 레크나트의 몸도 빠르게 쪼그라들더니, 이내 거죽만 덩그러니 남은 흉물스러운 꼴이 되었다.
[마왕, 레크나트 프라우드의 최종적인 사망이 확인되었습니다.] [레크나트 프라우드에게 가호를 내린 모든 악신이 소멸했습니다.] [신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수많은 신들은 기나긴 전쟁이 끝났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그들은 최종장의 승자인 자레드 폰 유칼레스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냅니다.] [일부 신들은 자신의 고유 능력을 활용한 후원을 제안합니다.] [주신 라디우스가 그 제안 일부를 수용합니다.]“햐……. 정신없네.”
상태창을 순식간에 가득 메운 메시지들의 향연에 자레드는 미소를 지었다.
웃고 있었지만, 몸은 당장에라도 무너져 내릴 듯했다. 아니,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주르르륵. 주르르륵.
쏟아져 내리는 피의 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지만, 이를 치유할 마력은 없었다.
“75. 환생했을 때의 마력인가.”
75, 남은 마력의 수치였다.
5년 전에 이 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 상태창으로 처음 보았던 자신의 마력 수치와 똑같았다.
평범한 4클래스 마법도 연속 2번은 시전할 수 없는, 정말 비루하기 짝이 없었던 마력 수치였다.
“어쨌든…… 이겼어.”
그거면 됐다.
자레드는 물 먹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는 몸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철퍼덕 누워 버렸다.
불과 몇 m 거리 옆에서 뜨거운 용암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옆으로 피할 기운조차 없었다.
마력 회복은 아예 0에서 멈췄다. 지금 이 상태로 뭔가를 할 수도, 할 방법도 없었다.
“헤이즈, 라키스, 이자벨, 레나, 클로이, 엘라, 아키, 미아, 아슈르, 마이라, 메리, 사비오, 나오미, 발데스, 율리안, 오브렌, 아빌라, 마룬, 마리…….”
수많은 이름들이 머릿속에 깊게 아로새겨지며, 자레드가 가진 기억의 파편들을 하나하나 떠올리게 만들었다.
모두 소중한 인연이었다.
어느 누구 하나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인연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바로 자신, ‘자레드 폰 유칼레스’를 위해 최선을 다해 주었다.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자신을 항상 응원하며, 늘 희생을 아끼지 않았으니까.
전생에 가족을 제외한 그 누구의 관심이나 응원도 없이, 외로운 삶을 살았던 자레드에게는.
현생에서의 경험과 기억들은 너무나도 소중했다.
어느 것 하나 함부로 버리거나 잊을 수 없는 그만의 특별한 무거움으로 존재했다.
“망할 레크나트 새끼, 그 발악을 해서 반지를 녹여 버렸군.”
허전한 왼손에 보이는 반지의 빈자리. 덕분에 돌아갈 수단은 완벽하게 사라져 버렸다.
격리된 이 세계는 지평선 너머까지 온통 화산의 연속이었다.
애초에 그냥 뜨겁게 펄펄 끓어오르는 태초의 행성 어딘가에 던져진 느낌이었다.
어딘가의 문명이라든가, 어떤 생명체가 존재할 것 같다는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좀 쉴까.”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헤이즈……. 라키스 경……. 부디 뒤를.”
점점 아련해져 가는 동료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자레드는 두 눈을 감았다.
긴 휴식이 필요했다.
* * *
한편, 같은 시각.
“약해졌어?”
“독기가 두 단계는 가라앉은 느낌이에요!”
“마왕! 마왕 레크나트가 죽은 거야! 폐하께서 그러셨어! 수많은 마수와 마족들은 마왕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는다고!”
“악신의 가호가 유발하는 효과라고 하셨죠?”
“맞아! 바로 그거지!”
라키스와 레나, 엘라는 갑자기 눈에 띄게 약해진 적들의 모습에 크게 놀라고 있었다.
자레드의 지원을 갔다가 합류한 헤이즈는 여전히 부상병들을 치료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헤이즈, 괜찮아?”
이자벨은 눈물을 펑펑 쏟아 내면서도 묵묵히 치료에 임하고 있는 헤이즈를 걱정하고 있었다.
자레드를 도우러 갔다가 혼자 돌아온 것도 그렇고,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스터 스톤을 통해 자레드가 이후를 라키스에게 맡긴다는 얘기를 하긴 했지만.
그건 비상사태를 대비한 안배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혹시 폐하가…….”
“흐흑!”
이자벨이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헤이즈가 그녀의 품에 안겨 결국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다.
눈앞에서 사라진 자레드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이별로 생각하기에는 레크나트와 자레드가 격리되기 전의 상태가 너무 나빴다.
그때의 그대로라면 레크나트가 죽었다고 하더라도, 자레드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하염없이 우는 헤이즈를 보며, 덩달아 이자벨의 머릿속도 새하얘지는 느낌이었다.
비록 언제부터인가 마음의 거리를 두기는 했어도, 늘 유쾌하게 자신들의 곁을 지켜 주었던 사람.
그런 자레드가 만약에라도 죽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냉정한 성격의 이자벨도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