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310
제 310화
97장. 종언(終焉) – 2화
정말 푹 잤다.
고르자스의 목걸이의 유무와 관계없이 잠이 든 것이다.
꿈도 꾸지 않았고, 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채로 나는 게을러터진 백수처럼 내리 잠을 잤다.
그리고 상쾌해진 기분으로 눈을 떴을 때.
나는 죽음의 열기로 가득한 화산이 아닌, 풀과 꽃향기가 물씬 풍기는 산속의 작은 통나무집에 누워 있었다.
“일어났나?”
“예?”
내가 누워 있는 곳은 포근한 침대 위였다.
머리맡에는 창문이 하나 있었는데,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선을 올려보니 나를 지켜보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주신 라디우스였다.
그는 세상 누구보다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라디우스 님, 여기는…….”
“네가 격리된 세계야.”
“하지만 분명 화산이었지 않습니까?”
“그랬지. 한데 네 무의식에 따라 주변 환경이 바뀌는 곳이더군. 즉, 엄밀히 말하자면 이 공간은 네가 만든 것이지.”
“그렇습니까. 무의식이 평안을 찾은 모양이네요. 이리 평화로운 것을 보면.”
“그런 거겠지. 이 공간이 안정을 찾았기에 나 역시 네 앞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고.”
“고생하셨습니다. 신들의 가호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아마 가호가 없었다면, 저는 진즉에 죽고 말았을 겁니다.”
“감사는 무슨. 수없이 많은 가호를 내려도 머저리처럼 죽는 놈도 있기 마련인 것을.”
딱히 누군지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라디우스가 지칭한 존재가 레크나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어쨌든 내가 이겼다.
레크나트와 악신은 모조리 소멸되었고, 나의 전쟁도, 신들의 전쟁도 그렇게 끝이 났다.
“돌아갈 방법이 사라졌지?”
“예. 반지를 잃었습니다.”
나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던 왼손 손가락의 ‘흔적’을 바라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금의환향이 안 되는 승리라니.
사람 욕심이라는 게 이런 걸까.
반지를 쓸 때만 해도 그저 레크나트를 격리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놈을 이기고 나니,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역시, 나도 인간이다.
라키스를 위시한 동료들은 내게 반(半)신이나 다름없는 존재라고 했지만, 다 헛소리다.
나도 욕망과 욕심, 원초적 본능과 욕구에 충실한 남자 사람일 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여기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나스 대륙이 안정되었기 때문이야.”
“그 말씀은…….”
“마왕군이 몰살되고, 모든 차원문이 닫혔어. 즉, 차원의 질서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는 중이라는 얘기야.”
“그건 정말 행복하고 기쁜 소식이네요.”
진심이었다.
내가 없는 전장에서도 모두가 합심하고 분전하여 기어이 승리를 쟁취한 모양이었다.
5년의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니, 뿌듯하고 행복했다.
“다만.”
대화의 전환점을 찍는 라디우스의 말에 나는 그가 이어서 할 말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떤 말을 제게 하실지 알 것 같네요.”
“나스 대륙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어졌어. 하지만 지금 여기의 공간적 특이성은 변수를 하나 만들었지.”
“무엇입니까?”
“나스 대륙으로 가게 되면 재구축된 차원의 질서가 급격하게 무너질 수 있어. 하지만 다른 차원이라면 가능하지.”
“다른 차원이라고 하시면…….”
“지구, 라고 하던가?”
생각지도 않았던 이름이 라디우스의 입에서 나왔다.
지구, 나, 아니 전생의 신태풍의 고향이다.
“늦지 않게 차원을 넘어가도록 만들면, 네가 지구라는 곳에서 이 세계로 오기 직전으로 이동할 수 있다.”
“제가 죽기 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겠지.”
과로사하기 전.
그전의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쇼크로 쓰러질 시점을 즈음해서 미리 응급실이나 병원에 가 있으면 될 것이다.
실로 엄청난 제안이었다.
영원히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았던 죽음을 역행해서 신태풍의 본체를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세계의 자레드는 모두 소멸해 버리고 말겠지만.
“지금 바로 라디우스 님께 답을 드려야 합니까?”
“하루.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후에는 차원의 모든 연결 고리가 끊어질 테니까.”
라디우스의 통보에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12시간 정도만 제게 시간을 주십시오. 고민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하도록. 고민 없는 선택에는 늘 후회가 남기 마련이니까. 인간은 그것을 두고두고 가슴 아파하지 않나?”
“맞습니다.”
“정확히 12시간 뒤에 네 곁으로 다시 오지.”
파팟.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디우스의 모습이 시야에서 깔끔하게 사라졌다.
나 혼자만 남은 자리.
“…….”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 * *
저벅. 저벅. 저벅.
산길을 따라 느껴지는 향긋한 꽃향기는 전쟁의 끝을 알리듯 그윽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전쟁이 끝났기에 나는 확실한 선택을 해야 하는 운명에 놓였다.
그리고 안젤루스의 가호를 떠올렸다. 기억 제거.
내가 지구로 돌아간다면, 그렇게 된다면…… 나스 대륙의 모든 이들에게서 내 기억을 지우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과연 내가 그들의 기억을 함부로 지울 권리가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기억을 함부로 지워 소중했던 시간과 인연을 마치 없었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정녕 옳은 일일까.
아니라고 생각했다.
삶이라는 것은 혼자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최소 둘, 그 이상의 수많은 인연이 얽히고설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마치 칼로 도려내듯 내가 있는 부분을 베어 낸다면, 남은 모두의 삶에도 상처가 남지 않을까?
날 기억하진 못하겠지만, 그 빈자리가 누군지 알 수 없어서 답답한 고통 말이다.
“내게 그럴 권리는 없어. 그래서도 안 되고.”
나는 단언하듯 되뇌었다.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찌 되었건 전생의 신태풍은 죽었다. 죽었던 것 같은 게 아니고, 확실히 죽었다. 운명의 끝을 봤다.
하지만 현생의 자레드는 살아 있다. 죽은 게 아니라 죽었다고 짐작할 만한 상황에 놓여 있을 뿐이다.
내가 지구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면, 이 살아 있는 자레드는 그 즉시 죽게 된다.
동시에 모든 인연도 강제된 죽음과 함께 끊어지며, 덧없는 흔적들로 남게 된다.
“차라리, 차라리……!”
나는 다른 방법을 생각했다.
비록 지금 이 순간에 나스 대륙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지만.
마법을 좀 더 연구하고 차원에 관련된 마법적 지식을 폭넓게 활용할 수 있다면!
영혼 격리의 반지가 나를 여기로 인도했듯, 거꾸로 돌아가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 세계는 차원과 분리된 나만의 공간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버그의 묘수가 떠오를지도 모를 일이다.
비록 불확실하지만.
사실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아예 없다고는 부정할 수 없는 확률이었다.
“그렇게 하면…… 훗날 차원에 대한 연구가 끝나면 지구에도 다녀올 수 있을지도 모르고.”
혼자 열심히 돌려 보는 행복 회로였지만, 충분히 꿈꿔 봐도 될 법한 행복일 듯싶었다.
“아버지……. 내 동생…….”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을 수 없는 아버지와 여동생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양쪽 모두를 가질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운명.
나는 그래도 마음속에 조금이나마 나를 묻었을 아버지와 여동생을 떠나보내기로 했다.
언젠가 차원의 문을 열어 내고, 두 사람을 찾아가 반갑게 인사할 그날을 기다리며.
“그래, 결심했어.”
생각이 더 복잡해지기 전에 결론을 냈다.
정답이 없는 문제였다.
그렇다면 지금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냉정하고 차가운 가슴이 이끄는 대로 선택하고 싶었다.
“조금 더 걸을까…….”
현생의 삶.
즉, 자레드로서의 길을 선택하게 된 만큼 이제 ‘신태풍’의 길은 완벽하게 사라지게 됐다.
1%라도 남아 있던 가능성을 모두 없애는 단절의 시간으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래서 나는 한참을 산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그 시간 내내, 나는 신태풍으로서 살았던 지난 34년의 모든 기억을 추억하고 되새겼다.
솔직히 눈물이 많이 났다.
자레드로 치열하게 살면서 신태풍의 기억을 모두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저 억지로 마음속 한구석에 밀어놓고 있었을 뿐이었다.
-태풍아, 오늘은 퇴근하고 그 게임인가 뭔가 하지 말고, 일찍 들어와라. 내가 치킨 한 마리 사 오마.
-오빠! 오늘도 야근이야? 아빠가 기다린단 말이야! 지난번처럼 야근이라고 뻥치고, 인지 뭔지 하는 거 아냐?
스마트폰의 톡에 마지막으로 찍혔던 가족 대화 내역도 하나하나 기억이 났다.
-좀 늦어. 기다리지 말고 아버지랑 둘이 먼저 먹어. 진짜 야근이야. 그리고 새벽에는 공대 레이드 있어. 신경 쓸 거 많아.
이게 내 마지막 답이었다.
참…… 죽기 전까지도 그놈의 게임 는 징그럽게 챙겼다.
가족과의 식사를 뒷전으로 미뤄 가면서까지 말이다. 세상에 이런 불효자, 못난 오빠가 없다.
“지금은 아니지만 오빠가 꼭 돌아갈게. 아버지, 꼭 돌아가겠습니다.”
눈물을 훔치며, 나는 혹시라도 남을지 모르는 미련을 정리했다.
그래도 남아야 한다.
그게 내 결론이었다.
그로부터 꽤 시간이 흐른 후.
약속된 12시간을 정확하게 넘기고 기다렸다는 듯이 라디우스가 내 앞에 나타났다.
“결정은 했나?”
“지구로는 가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제가 어떻게든 나스 대륙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을 겁니다.”
“불가능할 텐데.”
“들어갈 수 있는 곳은 당연히 어떻게든 나갈 방법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 방법을 제가 찾을 겁니다.”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는 건가? 결심만 해도 현실이 될 수 있는 편한 길이 있거늘.”
“그건 자레드가 살아야 할 현실이 아닙니다. 신태풍이 살아야 할 현실이죠. 그리고 허락되지 않은, 사라진 운명일 뿐입니다.”
“포기하는 건가.”
“보내 줄 뿐입니다. 지금의 자레드를 놓아줄 수 없기에 미련 없이 보내는 것일 뿐.”
“후회하지 않을 것 같나?”
“하겠지요. 후회는 하겠지만,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열려 있는 차원의 문을 닫도록 하지. 바로 이 문이야.”
라디우스가 내 앞에 하나의 차원문을 보였다. 마치 지구의 색을 쏙 빼닮은 듯한 오색영롱한 차원문이었다.
일렁이는 차원문의 사이로 서울에서 볼 수 있는 63빌딩과 제2롯데타워의 모습이 슬쩍 보인다.
마치 날 유혹하는 듯이.
“네, 닫아 주십시오.”
나는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라디우스가 허공에 손으로 한 줄의 선을 그었고, 이내 그 안에 차원문이 빨려 들어가며 사라졌다.
그리고 한참 동안 라디우스는 팔짱을 낀 채, 나를 신기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라디우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특이한 선택이로군. 지금껏 다들 자신이 사는 세상을 그저 게임, 혹은 없었던 삶으로 치부했는데 말이야.”
“예?”
한데 라디우스가 이어 가는 말의 내용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뻔하지만, 그래서 뻔하지 않을 수 있었던 통과의례를 무사히 마친 것을 축하한다.”
“그게 무슨…….”
“받아라.”
이윽고 라디우스가 내게 뭔가를 내밀었다.
[영원의 큐브]그것은 난생처음 보는, 에서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아티팩트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