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312
제 312화
98장. 소중한 내 인연들에게 – 1화
기일(忌日).
오늘은 자레드가 죽은 것으로 ‘추정’된 지 1년째 되는 날이었다.
어느 누구도 자레드가 죽었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또한 어느 누구도 헛된 희망을 노래하지는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스 대륙의 미래만을 생각하고, 투혼을 불사르며 마왕과 싸웠던 황제.
사람들은 자레드를 잊지 않았고, 그것은 수많은 신하들과 동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레크나트가 죽은 이후.
급격히 약화되기 시작한 마왕군은 각지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갔다.
그들 특유의 높은 사기와 죽음을 두려워 않는 용기는 마왕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고.
가장 위협적이었던 존재의 죽음을 확신한 신성 연합군은 용기백배하여 싸웠다.
레크나트가 죽은 시점부터 이미 마왕군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었다.
결국 시간의 문제였을 뿐, 각지에서 마왕군이 처절하게 싸우다가 죽어갔다.
사람처럼 위장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사방팔방으로 도망친 잔당들도 결국 소탕됐다.
그나마 몇몇 소규모의 마수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도해하여 무인도로 도망친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역시 바다 전역을 누비고 다니던 크리비아 해군에 의해 몰살당했다.
아낌없이 함포를 퍼부어 무인도 전체를 벌집으로 만드는 화끈한 소탕 작전이었다.
그렇게 나스 대륙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수년에 걸친 악몽을 예상했던 백성들은 그보다 일찍 일상에 복귀했음에 감사해했다.
물론 감사의 대상은 크리비아 제국의 황제 자레드였다.
휘하의 신하들과 수많은 연합군의 공로가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자레드의 큰 공을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레드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래서 모두 슬퍼하고 안타까워할 따름이었다.
다만 자레드가 죽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백성들로 하여금 실낱같은 희망을 만들어 냈고.
그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십시일반하여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른바 ‘자레드 동상 건립 운동’의 시작이었다.
전국적으로 불기 시작한 건립 운동의 바람은 수많은 백성의 참여를 이끌어 냈다.
모인 돈은 천문학적 액수였고, 각지에서 내로라하는 기술자들의 지원이 잇따랐다.
그렇게 해서 크리비아 제국의 황도 한복판에는 자레드를 쏙 빼닮은 거대한 동상이 세워졌다.
실로 당대의 모든 건축과 조각의 정수를 모두 쏟아부은 100m 되는 거대한 동상이었다.
동상은 당연히 모두에게 성지가 다름없는 곳이 됐고, 각지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몰려왔다.
그래서 늘 자레드의 동상 근처에는 백성들이 바치고 간 예쁜 꽃들이 한가득했다.
단 하루도 시든 꽃을 찾아볼 수 없는 생기 넘치는 곳이자 자레드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기도의 장이었다.
그렇게 백성들은 자레드가 언젠가 돌아오리라고 믿었으나, 정작 가까운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항상 빠져나올 구멍을 마련해 두었던, 늘 세컨드 플랜이 있었던 자레드답지 않았던 최후 때문이었다.
* * *
기일 추모 행사가 있는 자리.
공식적으로 자레드의 죽음을 선포하지는 않았기에 오늘의 자리는 비밀리에 진행됐다.
소위 ‘나스 대미궁’ 멤버와 자레드가 아끼던 신하들을 제외하면, 누구도 참석할 수 없는 자리였다.
“폐하…….”
현장에 가장 먼저 와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은 역시나 헤이즈였다.
지난 1년 동안.
그녀도 눈물만 흘리면서 폐인처럼 살지는 않았다.
나스 대륙 전역을 순회하며, 전쟁으로 상처나 부상을 입은 모든 사람을 집중 치료했다.
디바인 나인인 치유사의 방문은 그 자체로 성녀(聖女)의 방문처럼 여겨졌고.
그녀가 치유의 ‘기적’을 일으킬 때마다 사람들은 헤이즈와 자레드의 이름을 연호하며 칭송했다.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다.
그녀의 치유술은 단지 육체적 상처뿐 아니라 정신적 상처까지 보듬어 주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헤이즈는 그렇게 바쁜 시간을 보냈고, 최대한 자레드에 대해서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자레드와 마지막으로 이별했던 자리에 다시 찾아오게 되자,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날의 기억이 너무 선명해 마치 방금 있었던 일처럼 단 하나도 잊히지 않은 탓이었다.
“왜 돌아오지 않으시는 거예요? 폐하, 이제 더 이상 짓궂게 장난치지 마시고 얼른 돌아와 주세요. 폐하.”
헤이즈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우뚝 솟아 있는 기념비를 어루만졌다.
성마 대전 전승 기념비.
레크나트가 죽어 없어진 자리에 세워진 화려한 기념비였다.
모두에게 기념비는 승리와 영광의 증거였지만, 헤이즈에게는 ‘행방불명된 자레드의 묘비’ 같았다.
그래서 기념비를 하염없이 어루만지면서 슬퍼하고 슬퍼할 뿐이었다.
“헤이즈.”
“……라키스 님, 죄송해요. 제가 너무 주책 맞게…….”
“언니이!”
“헤이즈, 오랜만이에요.”
“미아! 어서 오렴! 메리 요리장님, 잘 지내셨어요?”
이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라키스와 미아, 그리고 메리였다.
헤이즈가 황급히 눈물을 닦아 내며 최대한 태연한 척 애썼지만, 퉁퉁 부은 두 눈을 숨길 순 없었다.
“언니, 너무 울지 마!”
“미아야, 미안해. 그래서 몰래 일찍 온 건데, 세 분이 이렇게 일찍 오실 줄은…….”
“제가 빨리 가자고 졸랐어요. 헤이즈 씨가 먼저 와서 울고 있을 것 같아서.”
“주책 맞았네요, 제가.”
“아녜요. 그만큼 폐하에 대한 마음이 누구보다도 각별한 사람이니까.”
메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생각과 라키스, 미아의 생각도 같았다.
평생을 곁에서 함께한 헤이즈에게 자레드의 부재가 얼마나 큰 슬픔인지 아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았으니까.
한편 라키스는 전국적인 봉사를 다니고 있는 헤이즈와 달리, 지난 1년간 제국의 국무를 처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자레드가 유언으로 남겼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각에서는 라키스가 자레드를 대신해서 황제의 자리에 즉위해야 한다는 말도 나돌고 있었지만.
라키스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 모두를 맹비난했고, 황제에 대한 반역이라고 욕했다.
라키스의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자레드는 죽지 않았으며, 잠시 긴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현실 부정이 아니라, 자레드에 대한 굳건한 믿음에서였다.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는, 이 세계의 수많은 신보다 더 유능한 신이라고 믿는 자레드.
그에게는 분명 다시 돌아올 방법이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키스는 항간에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는 자들을 일거에 잡아들였다.
이어 국정에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모든 신하들을 소집하여 비상 회의를 개최했다.
그리고 몇 날 며칠에 거친 마라톤 회의 끝에 ‘국가 운영 협의체’를 출범시켰다.
자레드가 복귀하기 전까지 임시적으로 국가 정무를 소화할 수 있는 단체를 만든 것이다.
즉, 임시로 라키스가 ‘황제 권한 대행’을 맡게 된 셈이었다.
황제였던 자레드의 확실한 유언 – 혹은 당부 – 이 있었던 만큼, 결정은 만장일치로 이뤄졌다.
이처럼 라키스가 신속하게 대응한 덕분에 지난 1년간 대륙 전역의 운영에는 별다른 공백이 없었다.
물론 아주 순탄치는 않았다.
발렌시아 왕국, 칸트라 제국이 사실상 몰락하면서 대규모 난민이 발생했고.
그들 모두 크리비아 제국에 편입하는 과정에서 다소 시끌시끌했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안정화가 되어 더 이상 신경 쓸 부분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곳보다 열띤 전후 복구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곳이 새로 제국에 편입된 두 곳이었다.
어쨌든 잠을 반납해 가면서 라키스가 정무에 매달린 덕분에 국정 운영의 공백은 거의 없었다.
다만.
내색은 안 했지만, 라키스도 헤이즈처럼 슬픔을 잊고자 더 극단적으로 일에 매달린 케이스였다.
때문에 1년 전에 비해 라키스의 얼굴에는 피로감이 가득했다.
메리와 미아가 늘 곁에서 그의 건강을 살뜰히 챙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수척해졌다.
이어서 다른 동료들도 속속 도착했다.
이자벨, 아르케네스, 레나, 엘라, 나오미, 마이라, 아슈르, 오브렌, 아빌라, 율리안, 발데스, 모이즐, 아세로, 사비오 등등…….
자레드와 깊은 친분을 맺고, 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던 동료들이 도착했다.
다만 중요한 두 사람이 없었다.
바로 그레이 엘프의 여왕 클로이와 9클래스 대마법사 베르하드였다.
그레이 엘프의 터전은 성마 대전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그래서 클로이는 거기서 생산되는 수많은 식량들을 난민들에게 지원했다.
아울러 대륙 전역을 돌면서, 복구가 절실한 장소에 그레이 엘프 전체의 힘을 보태는 중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스 대륙의 북쪽에서 열심히 구슬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또한 베르하드 같은 경우는 이미 며칠 전에 이곳에 왔다 갔다.
성마 대전이 끝난 이후.
그는 예전에 그랬듯이 대륙 동쪽의 해협에서 발견된 정체불명의 ‘균열’을 연구하고자 홀연히 떠났다. 세력이나 친분에 구애받지 않는 야인의 삶이었다.
-애오오옹.
마지막으로 도착한 손님.
데리가 한달음에 달려와 헤이즈의 품에 안겼다.
유일하게 자레드만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데리.
-울지 마랑, 헤이즈.
그래서 연신 헤이즈를 향해 울지 말라고 토닥이는 데리였지만, 헤이즈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만 좀 울어. 눈 빠지겠어, 이러다가.”
이자벨이 헤이즈를 부축해 일으키며, 손수건으로 그녀의 눈물을 꼼꼼히 닦아 주었다.
참여자 전원의 면면을 모두 확인한 라키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모두 다 모이신 듯하군요. 이 자리에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무슨. 당연한 일이네.”
오브렌이 고개를 저었다.
일 년 사이에 회색 머리에서 아예 백발이 되어 버린 오브렌에게서는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도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라키스처럼 자레드가 사라진 이후 슬픔을 감추기 위해 일에 몰두한 케이스였다.
“오늘은 폐하의 기일입니다. 저는 폐하께서 계셨기에 지금의 평화가 찾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 생각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운을 떼는 라키스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폐하가 계시지 않았다면 성마 대전은 대륙 전체의 대재앙이 되었을 것이고, 저희는 모두 몰살당했겠지요. 마왕의 노예가 되어, 영원히 고통 받았을 겁니다.”
성마 대전을 직접 경험해 본 그들이었기에 라키스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마왕과 마왕군은 잔혹하기 짝이 없는 학살자들이었다.
얼마나 죄 없는 수많은 인명이 그들의 손에 희생되었던가?
1년 전의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끔찍한 일이었다.
“모두 오늘의 자리를 빌려 다시 폐하를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다시 돌아오실 폐하를 기다리며…….”
말끝을 흐리는 라키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온 힘을 다해 슬픔을 참아 냈다.
그간 굳건한 모습을 보여 온 자신마저 흔들리면, 모두의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아서였다.
한데 바로 그때.
쿠웅! 쿠웅! 쿠웅!
갑자기 지축이 뒤흔들리더니 전승 기념비가 있는 자리에서 검붉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
그 순간, 모두가 당황했다.
설마 죽은 줄 알았던 마왕 레크나트가 돌아오는 것일까?
성마 대전이 모두에게 남긴 트라우마는 분명 존재했고, 그것은 여기 있는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제가 앞장설게요!”
스릉! 스릉! 스르릉!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렸다. 레나, 엘라, 라키스가 거의 동시에 검을 뽑았다.
성마 대전이 아직 끝나지 않은 걸까.
그런 불안감의 엄습과 함께 갑작스런 사태에 황급히 대비하려던 바로 그 순간.
“후우! 잘 도착한 건가?”
모두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연기 속에서 홀연히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는…….
“……폐하?”
바로 자레드의 것이었다.
1년 만에 다시 듣는 너무나 반가운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