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321
제 321화
100장. 흑막의 단서들 – 3화
“너희들은 나스 대륙의 악령들이 아니야. 무척 이질적이고도 추악한 개체들이야. 대체 너희의 정체는 뭐지?”
[호호호! 악령에게도 출신을 묻는 거야? 피차 한 번은 죽었던 마당에 출신이 뭐가 그리 중요해?]“설마…….”
[왜? 악령은 다른 세계를 넘어오면 안 되는 거야? 어찌 보면 육신보다 더 자유로워서 넘나들기 쉬운 존재이기도 한데!]“동방 대륙에서 넘어온 악령이라는 건가…….”
[정답! 꼴에 악령이라고 우리끼리는 통역이 필요 없는 것 같네. 그렇지?]“빌어먹을.”
이자벨의 양미간이 찌푸려졌다.
혹시나는 역시나가 됐다.
자레드가 없는 동안에 베르하드로부터 동방 대륙에 대한 얘기를 꽤 많이 들었고.
당연한 얘기지만, 이자벨은 그 말을 결코 무시할 수가 없었다.
새로운 위험 요소의 등장은 곧 크리비아 제국과 나스 대륙의 위험을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성마 대전은 전쟁의 끝이 아니다.’
이것이 베르하드가 모두에게 당부처럼 남겼던 말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
이자벨은 좀 더 수준 높은 주술을 연마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즉, 욕심을 냈다.
지금보다 훨씬 더 강력한 주술을 보유하고 있어야 어떤 상황에서든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대륙에 흔치 않은 주술사로서 반드시 9성의 극의를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수많은 주술을 새로이 연성하는 과정 내내, 악령과의 대화나 시험은 수시로 있었다.
이를테면 강령술이라든가 섭혼술 같은 것은 직간접적으로 악령의 힘을 끌어다 써야 하기에 필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이런 연성 방식이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9성의 주술 중 하나인 ‘잿빛 재앙의 술’을 연마하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심마에 걸려 버린 것이다.
그것은 사실 예측하지 못했던 새로운 악령들의 등장과 독특한 암흑 기의 파형으로 인해 이자벨이 당황했던 탓이 컸다.
‘나갈 방법을 내 스스로 찾을 수가 없어.’
문제는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에 빠진 것처럼 출구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악령 세 자매의 금제는 점점 더 강력해져 가고 있었다.
자신을 옥죄는 강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이자벨의 정신세계도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호호, 우리가 저 몸을 갖자!] [꽤 탐스러운 몸이야. 얼마든지 우리의 흑마술에 응용하여 사용할 수 있겠어!] [색정에 푹 빠진 남자들을 잡아먹는 용도로 쓰면 어떨까?]듣는 것만으로도 기분 나빠지는 그들의 대화가 들렸다.
하지만 지금은 속수무책이었다.
* * *
같은 시각.
“도대체 무슨 문제지……?”
집무실에 있던 주술사들을 모두 밖으로 물린 나와 헤이즈는 이자벨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심안을 통해 보이는 이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육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질병도 없었고, 체력도 양호했다.
“체력에는 문제가 없어요, 폐하. 어떻게 보면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건강한 몸이에요.”
헤이즈의 판단도 같았다.
그녀가 우선 이자벨에게 치유술의 기운을 주입하며 상태의 변화를 살폈다.
하지만 제법 오랜 시간을 고강도로 치유술과 각성술을 전개했음에도 이자벨의 상태는 오히려 점점 더 나빠져 갔다.
“주술 연성 과정에서 분명히 심마에 걸린 거야. 그게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 돼.”
내 눈에는 어느 정도 이유가 보이는 듯했다.
처음에는 과하게 고난도의 주술을 연성하며, 일종의 쇼크가 왔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갑자기 격렬한 운동을 한 사람이 어지러움을 느껴 픽 쓰러지는 것과 같은.
하지만 대륙 최고의 치유사라고 불리는 헤이즈의 치유를 5분 넘게 받았음에도 변화가 없다는 건.
뒤집어 말하면, 몸이 아닌 정신의 문제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다.
심마는 치유술로는 당연히 다스릴 수 없고, 각성술의 영향 범위도 아니기 때문이다.
둘 다 검은 물에 맑은 물을 쏟는 것과 같아서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 불가능했다.
바로 그때.
“제가 좀 더 깊게 이자벨 언니의 치료를…… 꺄아아악!”
치유술을 깊게 불어넣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이자벨의 손을 붙잡은 헤이즈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순간 식은땀을 흘리며, 악몽을 꾼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떠는 헤이즈의 모습은 예사롭지 않았다.
“헤이즈, 무슨 일이야?”
“악령, 죽음, 어둠, 공포, 잔혹, 참혹. 언니의 손을 붙잡는 순간에 이런 감정들이 순식간에 주입됐어요!”
“뭐가 보여?”
“보인다기보다 위의 단어와 연관되는 기억과 상상들이 제 머리를 가득 채우는 느낌이…….”
“심마가 맞군. 헤이즈, 더 이상 이자벨과 접촉하지 마. 정신적인 면역이 부족하면, 같이 그 감정에 사로잡힐 수 있어.”
“……네, 알겠어요. 그렇다면 이자벨 언니를 어떻게 치료해야 하죠?”
치유사가 아니라 치유의 신이 온다고 해도, 정신적으로 무너진 상태를 치료할 수는 없다.
안타깝지만 여기서 헤이즈가 해 줄 수 있는 역할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이자벨이 심마로 인해 긴 시간을 고통 받게 된다면, 그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할 터.
그러니 끊임없이 치유술로 원기를 북돋워 주고, 체력의 손실을 꾸준히 막아 줘야 한다.
“내가 바로 잡아야겠어.”
“폐하께서, 어떻게?”
“본인이 빠져나올 수 있는 심마였다면 진즉에 해결했을 거야. 그게 안 된다는 건 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폐하께서 그럼 언니의 정신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인가요?”
“정신세계의 어딘가일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악령들의 세계일 수도 있어.”
“아아…….”
탄식을 터뜨리는 헤이즈의 모습에서는 걱정이 짙게 묻어났다.
사실 나는 이런 문제가 언젠가 이자벨에게 닥쳐올 것이라고 늘 걱정하고 있었다.
애초에 이자벨의 ‘뿌리’가 악령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사용하는 주술의 근원은 안 봐도 뻔했다.
다만 별말을 하지 않았던 것은 그녀가 쇠락해 가고 있는 주술사들을 살리기 위해 전력을 다해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큰 문제가 될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그녀의 꿈을 열렬히 지지해 주고 싶었다.
게다가 이후로 몇 년간 이자벨에게 아무 문제도 없었고, 그래서 괜찮겠지 싶었던 것이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운명 자체가 내게 예속되어 있는 이자벨의 수동적 포지션도 문제가 있어.’
입맛이 씁쓸했다.
델루크의 부활 술법서로 그녀를 부활시키면서 생긴 나와 그녀 사이의 연결 고리.
처음에는 이 고리를 어떻게 끊어야 할지 몰랐는데, 이제는 정답을 알게 됐다.
내게 있어서 격리된 차원에서 했던 수많은 연구는 물음표가 가득했던 질문을 느낌표로 바꾼 계기가 되었다.
이번에 이자벨의 문제를 해결한다면, 무조건 그녀의 예속을 풀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라시아의 반지가 있으니 악령들에게 내가 역으로 당할 일은 없을 거야.’
한 가지 확신은 있었다.
내가 이자벨의 심마를 해결하러 들어가도 최소한 나까지 당할 리는 없다는 것.
하지만 나라는 거대한 ‘외력’을 사용했음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이자벨은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심마의 어둡고도 무서운 점이자 과거에 능력 있던 주술사를 비명횡사하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다녀올게. 이자벨의 심마를 해결하려면, 내가 직접 처리할 수밖에 없어.”
“그럼 저는…… 폐하와 언니에게 계속 치유술을 사용하면 될까요?”
“응. 지켜보기가 조금 힘들 수 있겠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힘을 불어넣어 줘.”
“알겠어요.”
헤이즈는 나를 말리거나 구구절절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다.
이미 내 결심이 섰다는 것을 알기에 내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해 준 것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더욱 미안했다.
매번 크고 작은 위험에 직면할 때마다, 마치 선봉장이 된 것처럼 내가 전면에 나서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에 하나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운 감정.
이는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일분일초가 피를 말리는 걱정의 연속일 것이다.
“다녀올게.”
“네, 폐하.”
나는 이자벨과 접촉할 준비를 마쳤다. 그녀의 손을 붙잡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샤아아아. 샤아. 샤아아!
그사이, 헤이즈는 분주하게 내게 있는 대로 모든 버프를 때려넣어 주었다.
자잘한 치유와 재생의 기운부터 해서, 정신적인 안정을 끊임없이 유도하는 세부적인 각성술까지.
순식간에 버프 알림에 10개 이상의 아이콘이 생겨날 만큼 든든하고 풍부한 버프였다.
“기다려 줘. 꼭 돌아올 테니까.”
쪽.
헤이즈와 짧은 입맞춤을 한 뒤.
꽈악!
바로 이자벨의 손을 붙잡았다.
그 순간.
-끼야하하하하하!
나는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6년 전에 내가 심안을 얻기 위해 처음으로 소환했었던 악령.
바로 ‘이자벨라’의 옛 모습을.
* * *
“꿈속의 꿈 같은 개념인가. 애초에 심마라는 개념 자체가 어떤 특정한 단어나 현상으로 표현할 수 없긴 하겠지.”
내게 펼쳐진 공간은 헤이즈와 함께 있던 이자벨의 집무실이 아닌,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득한 세계였다.
과거 격리됐던 것처럼 다른 차원으로 온 것인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크흐흐. 흐흐흐.] [먹잇감이 또 나타났다.]하늘을 유영하던 검은 형체들이 일제히 나를 응시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검은 형체는 각기 외형을 가진 새로운 형태로 변했다.
“클루제……. 오랜만이군.”
수많은 악령들 속에는 예전에 내 손에 죽은 녀석들도 제법 있었다.
잊고 있었던 이름, 클루제.
녀석의 움브라 교단 때문에 초반에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가?
[도망치자. 놈은 강하다.]하지만 클루제는 내게서 느껴진 기운에 흠칫하더니, 황망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내게서 강한 영적 기운을 느끼기라도 한 것일까. 클루제와 함께 있던 악령도 그렇게 사라졌다.
한데 바로 그때.
[이 델루크가 다시 네놈을 만나게 될 줄이야…….]등 뒤의 어딘가에서 익숙하고도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치 델루크.
예전에 기상천외한 기습을 통해 아티팩트를 대거 쓸어 담고, 한 방에 골로 보냈던 녀석.
그가 나타난 것이다.
“델루크.”
나타난 델루크의 모습은 리치였을 때의 모습이 아닌, 인간이었을 때의 모습이었다.
하얀 눈썹과 백발, 그리고 다크서클이 가득한 눈.
내가 델루크의 옛 모습을 기억하는 것은 에서의 델루크 모델링이 두 가지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 모델링, 리치 모델링.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인간 시절의 델루크였다.
사실 리치였을 때가 두렵고 공포스럽게 생겼을 뿐.
인간 델루크의 모습은 노욕으로 가득 찬 색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참으로 주제넘게 다른 이의 고통을 분담하기 위해서 나타났군.]“이자벨은 어디에 있지?”
[이자벨라가 아니었던가.]“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잖아, 델루크.”
“걱정 마. 너부터 쳐 죽이고, 나머지도 다 쓸어버릴 테니까.”
[악령의 왕, ‘모르지나’ 님을 과연 네놈이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녀는 영계의 왕이시니라.]“모르지나?”
델루크의 입에서 내가 모르는 새로운 이름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