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322
제 322화
100장. 흑막의 단서들 – 4화
악령왕…….
없을 것 같은 단어는 아니다.
심해의 왕이니 맹수의 왕이니 하는 수식어가 있는 판국에 악령들의 왕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다만 에서 악령왕에 대한 정보를 접한 기억은 확실히 없었다.
‘미구현 콘텐츠일 수도 있고. 혹은 구현됐으나 아예 공개도 되지 않은 콘텐츠일 수도 있지. 혹은 개발 도중에 폐기됐을 수도.’
내게는 분명 현실이지만, 나스 대륙의 모든 것에는 라는 뿌리가 존재한다.
나는 악령왕의 존재에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단지 어떻게 상대할지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딱한 놈……. 네놈의 그릇된 욕심이 한 여자의 삶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똑똑히 보아라.]그때, 델루크가 허공에 손짓을 하더니 홀로그램 영상과 비슷한 것을 내 앞에 만들어 냈다.
그러자 실체가 아닌 화면 속의 존재로서 이자벨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저리 가, 이 악령들! 내가 그깟 두려움에 주술 연성을 망설일 것 같아?
영상 속의 이자벨은 모두의 관심으로부터 차단된 지하실 안에서 주술을 연성하고 있었다.
한데 세상 그 어느 공간보다도 환히 밝혀져 있는 공간이 이자벨에게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붉게 반짝이는 눈빛들을 향해 소리치며,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크으으윽……! 너희의 그 독기까지 흡수해서라도, 나는 반드시 주술을 연성하고야 말겠어!
이자벨은 몇 번이나 신음을 토하고, 식은땀을 흘리며, 심할 때는 입가에 피를 흘리기도 했다.
정말 극한의 상황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며, 주술의 연성에 열을 올리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매번 내 앞에서 ‘주술 연성, 그거 별로 어렵지 않던데?’ 하며 여유로운 모습으로 일관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
절로 마음이 숙연해졌다.
[한 여자의 희생을 디딤대로 삼아 네놈이 획득한 삶은 즐거웠느냐?]델루크가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조롱하듯 말했다.
나는 녀석이 어떤 말을 지껄이건 신경 쓰지 않았다.
마음의 빚이 있더라도 이자벨에게 있었지, 그것을 말하는 델루크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단지 놈에게서 이자벨의 모습을 좀 더 보고 싶어 살려 둘 뿐이다.
-내게 새 삶을 준 것은 자레드야. 자레드를 위해서라도 너희들의 영혼까지 모조리 가져다가 활용해 주겠어!
-덤벼! 얼마든지 덤비고 괴롭혀 봐! 그 독기까지 모두 암흑 기로 승화해서 주술로 활용할 테니까!
-이깟 대륙의 미래, 난 관심 없어! 하지만 이 대륙이 자레드의 것이라면, 그땐 얘기가 다르지!
이자벨의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는 느낌에 그만 눈시울이 붉어졌다.
다음 순간.
내게 퀘스트창 하나가 생겼다.
[특수 퀘스트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활성화됩니다. 해당 퀘스트를 모두 완료해야 동료의 잠재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퀘스트 대상 : 이자벨, 발데스, 율리안, ……(중략)…… 이그니스, 비에나)] [보상 : 대상의 잠재의식 해방. 또는 진행 상황에 맞게 특수 보상 활성화]‘해결되지 않은 문제라…….’
퀘스트의 이름에 깊은 뜻이 담겨 있는 듯했다.
오늘 이자벨의 일처럼 분명 존재하는 문제지만, 내가 해결하거나 매듭짓지 못한 문제를 일컫는 듯했다. 혹은 좀 더 살갑게 아우르지 못한 인연을 다시 만나거나.
이그니스와 비에나도 그렇다.
이그니스에게는 여전히 반쪽짜리 화염 정령의 가호를 받은 상태가 아니었던가?
퀘스트는 이 역시도 내게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이자벨과 관련된 창을 세부적으로 활성화시켰다.
[대상 : 이자벨] [퀘스트 내용 : 악령왕 모르지나는 주술의 극의를 추구하려던 이자벨의 심계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그녀를 구하고, 극한의 수련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는 반드시 악령왕 모르지나를 처치해야 합니다.
단, 이곳은 그녀가 구축한 영의 세계. 실질 무력이 아닌, 고도로 단련된 정신력을 활용하여 그녀를 무찌르십시오.]
‘오케이, 이해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성마 대전이라는 목표 하나만을 보고 열심히 달려온 내게 시스템이 알려 주는 엄중한 일침이라고 생각했다.
동료들,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들의 채워 주지 못한 부분을 돌아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내가 망각해 버린 지식이나 안배에 대한 ‘자각’을 촉구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퀘스트의 존재가 고마워졌다.
물론 이자벨이 모르지나에게 볼모로 잡혀 있는 지금, 아직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르지나는 어디에 있지? 델루크, 너 같은 잔챙이와는 상대하고 싶지 않아.”
[후후, 나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모르지나 님을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공을 유영하던 델루크의 몸이 붉은 화염으로 뒤덮이기 시작하며.
이내 예전 리치의 모습으로 돌아와 지상에 강림했다.
“이미 예전에 내 손에 뒈진 적도 있는 주제에 감히 넘어서고 말고를 논하네. 배알도 없냐?”
[…….]때아닌 일침에 기세등등하게 말하던 델루크의 입이 순간 꿀 먹은 벙어리처럼 꽉 다물어졌다.
원래 팩트 폭격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지. 델루크 입장에서는 지우고 싶은 과거일 것이다.
다음 순간.
[델루크의 공격에 피격 없이 완벽하게 제거할 경우, 다수의 암흑 기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퀘스트 속의 퀘스트가 활성화됐다.
이것을 보통 ‘특수 조건 퀘스트’라고 부르는데, 에서는 자주 구현되지 않았던 형태의 퀘스트였다.
그런데 왜 이런 퀘스트가 구현됐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지는 않았다.
내게 뭔가를 ‘보상’으로 주어진다면, 비록 똥물을 뒤집어쓰는 것이라고 해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기는 실질 세계가 아닌 심상 세계라는 것을 명심하자. 차분하게, 그리고 냉정하게.’
나는 지금 내가 위치한 이곳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인지하며 공격 자세를 취했다.
피격 없는 완승!
한 줄로 요약된 글만 떠올려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빡빡한 조건의 전투가 될 듯했다.
“예전에 델루크 네놈이 뒈졌을 때는 내 기습에 비명도 제대로 못 지르고 죽었지. 이번에는 특별하게 한 수 양보해 주마. 그때 못 했던 공격, 이번에 어디 해 봐라.”
나는 양팔을 양옆으로 쭉 뻗은 채, 델루크를 도발했다.
녀석의 흑역사를 자극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확실히 욱하는 반응을 이끌어 낸 트리거가 된 듯했다.
[이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X랄 맞은 망할 새X……!]델루크는 귀가 시원하게 뚫리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이내 폭주하기 시작했다.
역시, 지우고 싶은 과거가 가장 부끄러운 법이다.
* * *
비록 마왕의 충직한 수족이 되지 못했지만, 델루크는 악령의 세계에서 제2의 삶을 살았다.
끝없이 몰려드는 악령들의 위에 군림하며, 제법 위세를 떨치며 지냈다.
사실 홀로 외로이 봉인되어 있었던 리치 델루크의 삶보다 훨씬 나은 듯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델루크는 악령의 세계에서 자신이 갖는 위치에 심취해 있었다.
즉, 자신이 꽤 힘 있고 능력 있는 존재라고 여겼고,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확신했다.
하지만 오늘.
그간의 모든 달콤한 기억이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일전에 자신의 목숨을 일거에 앗아 간 원수, 자레드 때문이었다.
‘움직임의 흐름조차 전혀 좇을 수 없다.’
자레드와 전투를 벌인 지 불과 30초도 되지 않아 델루크가 내린 결론이었다.
자레드는 선공권을 양보했지만, 애석하게도 가장 중요한 첫 공격이 덧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코앞까지 델루크의 마법이 도착하길 기다렸다가 너무 쉽게 피해 버렸다.
마치 다 큰 어른이 꼬마 아이의 주먹질을 보고 피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반대의 입장이 되니 처절하고도 처참한 결과가 도출되기 시작했다.
자레드가 작정하고 공격을 퍼붓자, 델루크의 몸이 여기저기 터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곳은 물질세계가 아닌 심상 세계임에도, 자레드가 펼치는 공격은 파괴적이었다.
그것은 극한까지 정신을 수련하며 갈고 닦지 않았다면 도저히 보일 수 없는 화력이었다.
델루크는 알 리가 없었다.
자레드가 지난 1년의 시간 동안, 격리된 차원에서 얼마나 많은 수련을 해 왔는지 말이다.
육체적인 수련은 기본이었고, 자레드는 자신의 유일한 약점이나 다름없었던 정신세계의 수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라시아의 반지가 있어 정신계를 잠식당하지 않을 확신이 있다고는 해도.
이번 일과 같이 오로지 ‘정신력’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레드는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더욱 견고해졌다.
하지만 과거 풋내기(?)이던 시절의 자레드로 기억이 멈춰 있는 델루크는 알지 못했다.
기억과 현실의 간극.
이런 격차가 만들어 낸 이질감 속에서 델루크는 지옥을 맛보았다.
특히 다수의 신의 가호를 받으며 특유의 ‘신성(神性)’을 띠게 된 자레드의 공격은 실로 위력적이었다.
그 결과.
정말 시원하게 털렸다.
오히려 예전에 자레드에게 당했던 죽음이 차라리 명예롭게 여겨질 정도로.
이번에는 흠씬 두들겨 맞았다.
눈 한 번 깜짝하는 사이.
델루크는 횟수를 셀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마법 찜질을 온몸으로 받아 냈다.
[크허억…….]입으로 토해 낼 수 있는 것은 그저 신음이 전부였다.
초반에 기세등등하게 자레드를 위협했던 것이 민망할 정도로 델루크의 상태는 개판이었다.
“모든 기억이 과거에 멈춰 있는 어리석은 망령이 뭘 하겠다고?”
자레드가 델루크가 토해 낸 검붉은 피로 더럽혀진 손을 찌푸린 표정으로 털어 내며 말했다.
예전에 마주친 델루크야 6클래스의 리치로, 자칫 실수하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막강한 적수였지만.
지금의 자레드에게 6클래스는 아득히 낮은 저 아래 세계의 하찮은 존재였다.
자레드는 혹시나 델루크가 악령의 세계에서 몇 차례 업그레이드를 한 것은 아닐까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델루크는 죽기 전까지 자신이 제법 힘이 있었던 리치였다는 과거의 영광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 듯했다.
델루크가 검은 피를 연신 토해 내고 비틀거리며, 힘겹게 자레드를 응시했다.
[세상이 변했는가…….]“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모른다…….]“네가 그토록 기다리던 마왕 레크나트는 죽었어. 내 손으로 죽였단 말이야.”
[마왕께서…… 돌아가셨다고?]“이 세계는 정보 전달이 한참 늦는 모양이네? 죽어도 진즉에 죽었는데. 소식 안 전해졌어?”
[그런 말도 안 되는…….]“델루크, 네가 기억하는 어둠의 씨앗으로 가득 찬 나스 대륙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그리고 너희 같은 악령이 발을 붙일 공간도 만들지 않을 거다.”
샤아아아!
자레드는 백색 섬광으로 가득한 거대한 구체를 만들어 냈다.
풀썩!
자레드의 난타에 힘이 빠질 대로 빠진 델루크는 무릎을 꿇은 채, 힘없이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다음 순간.
홰액!
델루크의 머리를 움켜쥔 자레드가 벌어진 그의 입 안에 이글거리는 신성력 구체를 쑤셔 넣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자레드에게 단 한 차례의 유효 공격도 성공시키지 못한 델루크는 그렇게 소멸해 버렸다.
이제는 악령의 세계에서조차 발을 붙일 수 없는 영원한 소멸이었다.
그리고.
[세부 조건 달성!] [퀘스트에 따라 다수의 암흑 기를 획득합니다. 스탯창에 암흑 기의 표시가 추가됩니다!]새로운 스탯이 개방됐다.